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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

       “맞아요. 그런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죠?”

        ​

        “흠, 그걸 굳이 말씀드려야 아시는 겁니까.”

        ​

        마리아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가끔 저 눈빛을 마주할 때면 나도 종종 소름이 돋는데, 중년의 남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맞받아쳤다.

        ​

        아니, 그는 변변한 감정 표출조차 없이 사무적으로 마리아를 쳐다봤다.

        ​

        상대가 누군질 모르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

        “누구야?”

        ​

        “노만 폰 울름 남작이에요.”

        ​

        “남작?”

        ​

        겨우 남작이 저렇게 대담하게 나선다고?

        ​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힐긋 살피니 마리아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

        “울름 남작은 제국에서 내려준 작위가 아니에요.”

        ​

        “그럼?”

        ​

        “에트루리아 제국 시절부터 이어지는 작위에요. 지금은 차관직을 재수하고 있어요. ”

        ​

        세상에.

        ​

        그럼 가문의 역사가 천년을 넘었다는 거잖아. 그럼 납득할 수 있었다. 물론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이 절대적이라고 하지만, 원래 전근대사회가 그렇듯 모든 것에는 융통성이 있는 법이었다.

        ​

        지식인이나 일부 귀족들이 껌뻑 죽는 이상향의 상징, 에트루리아 제국 시절부터 작위가 이어지는 귀족이라면, 작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

        어렵게 생각할 것 없었다. 한국으로 치면 삼국시대에 작위를 받은 귀족(군인)이 통일전쟁과 후삼국, 고려를 넘어 조선에 이르러서까지 탁 트인 평지에 놓인 영지와 작위를 지키고 있다면, 그걸 단순한 토호라고 치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심지어 공작이나 후작, 백작이라는 작위가 아직 성립하지도 않았던 에트루리아 제국 시절의 작위라면, 남작이라고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

        거기에 현 조정의 차관이면, 선제후 본인이 오는 게 아닌 이상에야 쉽게 그를 하대할 수 없었다.

        ​

        “울름 남작을 뵙습니다.”

        ​

        “혹, 소개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

        노만 폰 울름 남작이 내게 물었다.

        ​

        흠.

        ​

        평소라면 좋게 받아들였겠지만, 이번만큼은 좀 달랐다. 그야, 에트루리아 제국 시절부터 살아남은 귀족 가문이다. 심지어 그 가주로 수도에서 거주하는 사람이 과연 브란덴 가를 모를까?

        ​

        물론 우리 가문이 중앙 정계에 연이 아예 없다시피 하긴 하지만, 그건 말단 귀족들에게나 인지도가 적다는 거지 백작급 이상, 혹은 나름 세력 좀 있는 귀족들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

        그야, 선제후 외의 작위로 변경백을 별도로 갖고 있다는 것부터 명확한 이야기였다. 비록 내 가문이긴 했지만, 우리는 유사시 군벌이 되기 제일 좋은 조건을 갖춘 가문이었다.

        ​

        중앙 정계에 연도 없어서 딱히 미련이 없고, 가문의 기반은 동부에 있다. 우리 가문만의 전투력이 제국과 비교하면 미약하긴 하다지만, 동부의 다른 영주들은 사실상 우리와 친인척으로 연결된 우리의 세력이었다.

        ​

        제국 동부는, 브란덴 선제후국이라는 그 얇은 실 외엔 사실상 별도의 나라라고 봐도 무방한 곳이었다.

        ​

        ‘물론 진짜 들고 일어났다간 그대로 싹 밀리겠지만.’

        ​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다고 우리 가문이 정말 제국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렴, 변경백만 군권이 있나. 다른 선제후들은 장식이 아니었다.

        ​

        브란덴 변경백이 유독 특출난 편이긴 해도, 그래봐야 다른 선제후 겸 공작들 둘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울 거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틀림없을 거다.

        ​

        아무튼, 우리 가문의 입지란 이렇다. 대국적인 시야를 가질 필요 없는 사람들에겐 별 볼 일 없지만, 제국을 경영하는 데 일조하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중요한, 그런 곳.

        ​

        그런데, 생존력과 적응력에 있어선 정점에 도달했을 사람이, 며칠 전부터 나름 사교계를 뜨겁게 달군 이벤트를 벌인 날 모른다고?

        ​

        “혹시,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

        “질문은 제가 먼저 한 것 같습니다만.”

        ​

        “황후 폐하와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

        꿈틀.

        ​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걸 놓칠 내가 아니었다.

        ​

        “갑자기 황후 폐하에 대한 것은 왜 묻는지 모르겠군.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

        “음, 아닙니다.”

        ​

        바로 그게 관건이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상황에 뜬금없이 들이밀어진 질문에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그리고 이 반응은, 그게 어떤 방향일진 몰라도 뭔가 있긴 있는 반응이었다.

        ​

        그리고 그게 어떤 방향일지 판단할 근거는 이미 있었다. 어쩐지 마리아가 영 불편해하는 것, 그리고 나를 상대하는 말투와 마리아를 상대할 때의 차이.

        ​

        아까는 분명 사람 속을 박박 긁는 데 최적화된 말투를 하던 것과 달리, 지금의 그는 분명 목소리는 거슬리긴 했지만, 어조는 정중했다. 마치 내게는 적의가 없는 것처럼.

        ​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

        이 사람은, 황후 쪽에 붙은 사람이다. 

        ​

        “그럼 제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

        그렇다면, 괜히 이 사람이 날 알면서도 이러는 게 아닐까 기 싸움을 하며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

        “제 이름은 빌헬름 폰 브란덴입니다.”

        ​

        어차피, 황후의 사람이라는 건 곧 내 적이라는 의미였으니까.

        ​

        -―

        ​

        마리아에겐 아쉽게도, 그리고 내겐 다행히도, 울름 남작 앞에서 반지를 나눠 끼는 일은 없었다.

        ​

        하지만 마리아도, 울름 남작도 둘 다 서로를 불편해하는 와중에 나 혼자 희희낙락하는 일은 없었다.

        ​

        울름 남작이 아니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

        “몇 번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는 사인(私人)이 아니십니다. 제국을 위해 마땅히 더 나은 혼처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적어도 그걸 판단할 사람은 울름 남작은 아닌 것 같은데요.”

        ​

        지극히 무미건조하고 날카로운 태도로 마리아가 울름 남작의 말을 받아쳤다. 하지만 남작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

        “예, 맞습니다.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

        그는 마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하지만 어떤 결정이 제국을 위해 더 유리한 결정일지를 선택할 사람은 많지 않겠습니까.”

        ​

        마리아는 그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

        “그래요?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

        “뭐, 여럿 있겠지요. 예를 들면, 황실의 어른이라던가.”

        ​

        역시, 이놈은 황후의 끄나풀이 맞았다. 제아무리 고대 제국부터 이어지는 남작가라 하더라도 결국 백작가 수준의 대접을 받는 게 한계일 건 자명했다. 물론 백작도 엄청 높은 작위이니만큼 귀족들 사이에서는 고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긴 하겠지만, 그거야 귀족들 사이에서의 이야기고.

        ​

        이 사람이 황제의 측근으로 사사롭게 황제를 알현하기엔 격이 너무 낮았다.

        ​

        그리고 그 모든 걸 넘어, 이쪽에는 그가 황제의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

        “그래요? 이걸 어쩌나요.”

        ​

        마리아 본인이, 황제와 자주 대면하는 사람이었다.

        ​

        “아버지께서도 저와 빌헬름 경의 결합을 지지해주고 계시는데요.”

        ​

        “…폐하께서요?”

        ​

        뭣.

        ​

        그건 나도 처음 들었는데.

        ​

        “아니, 당신은 왜 놀라요?”

        ​

        마리아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

        “아니, 대체 언제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야? 난 들은 적 없는데?!”

        ​

        그녀는 내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한심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날 잠깐 쳐다봤다.

        ​

        “황후와 관련된 일을 당신에게 맡겼잖아요.”

        ​

        “그게 왜…?”

        ​

        마리아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

        “…호엔베른 가는 가문 내부의 일을 해결하는데 다른 집안의 손을 빌리는 전통이라도 있나요?”

        ​

        “아.”

        ​

        생각해보면, 일이 커지긴 했어도 이 일의 근간은 가문 내의 후계 갈등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황제가 황후를 견제하려는 이유 역시 그런 가문 내의 일을 처리하는데 외부 세력의 손을 빌리려는 행동에 대한 징벌의 개념이었고.

        ​

        신하들을 모아 움직이는 일이 왜 외부의 개입이냐는 말은 무의미했다.

        ​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것부터가 아직 이 나라는 호프부르크 가가 온전히 제국을 소유하는 절대왕정국가가 아니라는 의미였으니까.

        ​

        “…그렇단 말이지.”

        ​

        약간 코를 꿰인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었다. 황제가 손을 거들었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약혼식을 진행한 것도 아니고, 결국 마리아가 진행하던 계획에 바퀴를 달아준 것 정도였으니까.

        ​

        황제도 나름 나를 배려해주는 모양이었다. 그쯤 되는 권력자가 내 발을 묶으려 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 자체로 충분한 배려였다.

        ​

        이거, 확실하게 일 처리를 해줘야 할 명분이 하나 늘었는데.

        ​

        “크흠.”

        ​

        나와 마리아가 귓속말을 나누는 동안, 갑자기 튀어나온 ‘황제’라는 두 글자에 잠시 스턴이 걸렸던 울름 남작이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했다.

        ​

        “설령 황제 폐하께서 허락했다 하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어떤 분과 결혼하시는 것이 더 좋은 일인가 정도는 확인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

        “…지금 뭐라고 했어요?”

        ​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의 입장에서 판단하기에는 두 분의 결합이 좋아 보일 수 있어도, 제국의 입장에서는 더 좋은 경우의 수가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

        “제국 동부의 대귀족인 호엔베른 가와의 혼인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에요!”

        ​

        “혹은 폐하께서 마리아 전하를 빌미로 브란덴 선제후와 손을 잡는 것일 수도 있지요.”

        ​

        “…하.”

        ​

        마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

        “전하, 주님께 맹세코 정말 사사로운 욕심 하나 없는 결정이었습니까?”

        ​

        남작은 그걸 마리아가 할 말이 없어 답하지 못한 것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

        핑계야 이렇게 저렇게 댈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일의 근본이 마리아가 나를 붙잡겠다는 일념으로 벌인 일이라는 것도 분명했다.

        ​

        그게 떠올랐는지,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

        남작은 그 사실에 흥이 올랐는지 내게로 화살을 돌렸다.

        ​

        “빌헬름 경이라 했습니까?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브란덴 가는 전통적으로 중앙과 거리를 두기로 유명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황실과 혼담을 나누는 걸 보면, 뭔가 필요한 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흠.”

        ​

        일부러 변변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말해보라는 태도로 일관하자 남작은 더욱 신나게 떠들었다.

        ​

        “이제 와서 당신들이 권력이 부족하다거나 한 건 아닐테지요. 선제후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아마 상대적으로 낙후한 동부에 대한 지원이라든가, 그런 걸 필요로 하는 것 아닙니까?”

        ​

        “요새 동부에 개발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긴 하지요.”

        ​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자 그가 쾌재를 불렀다.

        ​

        “그렇다면, 저희가 마리아 전하보다 그런 방면으로 더욱 유용한 영애를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가문의 부 자체야 황실보다 못하겠지만, 가문의 사적인 재산을 운용하는 것이니 동부에서 끌어다 쓰기에는 훨씬 유용할 테지요.”

        ​

        그가 신나서 떠드는 꼴을 보고 있자니,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

        뭐, 그래. 자기들끼리 이래저래 권력투쟁을 하느라 선을 넘는 건 그럴 수 있다 치자. 물론 그 탓에 황제의 눈 밖에 나긴 했지만, 그건 자기네 자업자득이지.

        ​

        그런데, 남의 인생을 마치 자기들 장기말 다루듯 취급하는 저 꼬라지는 굉장히 내 신경에 거슬렸다.

        ​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

        “일단 묻겠습니다만, 남작께서는, 아니, 남작의 뒤에 계신 분께서는 마리아 전하의 부군으로 누굴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

        “글쎄요. 정해진 건 없습니다만, 궁정백 각하의 아드님이시라거나, 로베르 왕국의 태자라거나, 여러 경우의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

        그 답을 듣고 마리아를 돌아보았다. 마리아는, 내 태도에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망울로 내 허리춤의 옷자락을 붙잡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

        “마리아, 너는 저 제안을 어떻게 생각해?”

        ​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

        “싫어.”

        ​

        “싫다고 하는군요.”

        ​

        남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이는 가문의 일입니다. 사적인 감정이 어찌 나랏일에 앞설 수 있단 말입니까?”

        ​

        그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아니, 일견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래, 나라를 이끄는 사람의 입장에서 정략적 결혼은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장치를 돌리는 톱니바퀴에 기름칠을 해주는 중요한 요소일 수 있었다.

        ​

        “글쎄요.”

        ​

        하지만, 원래 합리라는 건 대부분 자기가 생각했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였다.

        ​

        “애초에 남작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브란덴 선제후령의 입장에서 딱히 매력적이지 않은데,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세상에 모두가 이익을 보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가 이익을 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손해를 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합리성을 논하면서 내가 손해를 보는 경우는 절대 상정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고루 이익을 본다면, 더 적은 수의 누군가가 그만큼의 손해를 떠안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

        그렇기에 정말 합리를 논하려면, 우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전제가 맞는지에 대한 탐구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

        가령, 상대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라던가.

        ​

        “동부는,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돈이 썩어 넘쳐서요.”

        ​

        동부는 낙후됐다.

        ​

        그래, 이건 나도 부정 못할 사실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건, 동부는 돈이 없어 낙후된 게 아니었다.

        ​

        애초에 유목민들이 살던 땅을 개간하며 확장한 탓에, 사람이 부족해 인프라를 깔 이유가 없던 것뿐이었다.

        ​

        그리고, 이제서야 동부에서 개발 사업이 진척되기 시작한 건 그 기반을 깔만한 인구가 모였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었지, 돈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

        마음껏 돈을 빌리고 죄책감 없이 배를 가를 유대인은 없다지만, 대신 돈이 썩어 넘치는 상인 길드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상인 길드가 자신들의 호위를 위해 고용하는 전투원들이 대부분 이 동부 출신 유목민들이었다.

        ​

        마리아를 비롯해 여러 귀족에게 기사단을 소개해주는 그 인맥이 바로 이 과정을 보고 들으며 튀어나온 부산물이었다.

        ​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생면부지의 영애랑 결혼하는 것보다, 이미 서로 잘 알고 나름 황실과도 연을 맺을 수 있는 마리아 전하와 결혼하는 게 훨씬 이익인 것 같은데요.”

        ​

        그는 내 지적에 표정을 잔뜩 구겼다.

        ​

        “지금 겨우 한 가문의 이익을 위해 제국 전체의 이익을-”

        ​

        “아까부터 계속 제국의 이익이 어쩌고 하면서 떠드는데.”

        ​

        그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

        이야기를 하며 깨달았다. 그는 황후의 사람인 건 맞지만, 황후의 측근이라 할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정말 황후의 측근이라면, 내가 얼마 전 그녀와 나눴던 이야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

        그리고 그걸 알고 있다면, 내게 다른 영애를 소개시켜준다는 것과 같은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

        대충 정리해보면, 울름 남작은 적당히 가문의 격도 높고, 인지도도 높고, 명망도 있고, 여러 고관대작과 알고 지내는 사람이며, 황후의 파벌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

        하지만 동시에 황후의 측근도 아니고, 황제와 독대할 만큼의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

        그러니까, 요는 그거다.

        ​

        “그 제국의 이익이란 놈이 동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니까요? 언제부터 제국의 이익을 논할 때, 선제후를 빼고 다른 귀족들부터 논하게 됐습니까?”

        ​

        이 사람이야말로, 직접 황후를 노리지 않고 그녀의 손발을 쳐낼 아주 좋은 건수가 될 법한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

        -―

        ​

        “하! 선제후의 아들이라기에 품위를 기대했건만, 아주 이기적이기 짝이 없소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오. 나는 이 일을 끝까지 기억하고 있을 테니!”

        ​

        남작은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

        두고 보자는 놈치고 진짜 무서운 놈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천박하게 발을 굴러가며 사라졌다.

        ​

        “…저기.”

        ​

        마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매우 작고 소심한, 옛날의 그녀를 보는 것 같은 태도였다.

        ​

        “이렇게 되면, 당신은 정말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텐데 괜찮겠어요?”

        ​

        “응?”

        ​

        “그러니까, 저 사람이 아예 정말로 당신과 제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을 낼 테고, 당신이 머무는 곳과 합해지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모함이 밀어닥칠 텐데.”

        ​

        아, 그런 의미였나.

        ​

        계속 나를 붙들어두려고 하던 그녀가 오히려 내가 여기에 아예 발목이 잡힐 걸 걱정하고 있으니 살짝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갈 필요가 있었다.

        ​

        “딱히, 상관없어.”

        ​

        “…네?”

        ​

        “상관없다고. 그런 거.”

        ​

        그래, 내가 지금껏 수도에서 벗어나려 용을 쓴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나에 대한 유언비어만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것 따위에 발목이 잡힐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

        하지만 그럼에도 수도에서 질질 시간을 끌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

        “너라서 이렇게 고민을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

        상대가 마리아였기에, 그녀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없기에 조심했을 뿐이었다.

        ​

        그리고 그건 그녀가 황녀라서도 아니고, 고귀한 피라서, 귀족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

        그냥, 처음 봤을 때는 언제나 울상이던 사람이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랬을 뿐이었다.

        ​

        거기에 자꾸 이상한 놈들이 끼어들어서 마리아의 얼굴을 다시 울상으로 만들려고 난리를 치고 있는 걸 보자니 좀 꼴받았다.

        ​

        그리고 그놈들이, 내가 마리아에게 휘둘리고 있으니 나를 얕잡아보고 휘두르려 드는 것도 꼴받았다.

        ​

        “너니까 받아주는 건데, 이 새끼들이 진짜 내가 피라미인 줄 알고 덤벼들잖아.”

        ​

        마리아니까, 내가 얌전히 휘둘려 주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었다. 마리아가 내 목줄을 쥔 게 아니란 말이다.

        ​

        그런데, 내가 마리아를 얌전히 따라가고 있으니, 마치 내게 목줄이 채워진 거라고 착각하고 마리아에게서 내 목줄을 뺏으려 달려들고 있었다.

        ​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앞으로 실례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알려줘야지 않겠어?”

        ​

        교육과정이 좀 아프겠지만, 그거야 내 알 바는 아니니까.

        ​

        그렇게 말하며 마리아를 내려다봤다. 아까 전 나와 울름 남작이 나눴던 대화 탓인지, 그녀는 여전히 불안해하며 내게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

        이렇게 있으니, 2년 전에 비해 몸은 컸어도 마리아는 여전히 마리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처럼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슥 빗어 내려주었다.

        ​

        “그렇지?”

        ​

        “응….”

        ​

        마리아는 여전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더는 떨림이 들어있지 않았다.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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