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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

       

       

       

       

       사내는 다름아닌 도적 길드의 일원이었다.

       

       2장의 무대 상업도시 발터크루아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여러 길드가 모여 연합체를 구성하고 통치하는 곳.

       

       그 연합체 중에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도적 길드였다.

       

       사실 2장 스토리를 제대로 진행하려면 발터크루아 입구에서 모든 NPC에게 말을 걸어서 도적 길드 일원을 찾아내야 했다.

       

       이는 게임사의 불친절한 설계 때문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도시 관문에서 검열하고 있는 경비병에게 가면 줄 서서 차례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힌트라고 해봐야 혼자 수상하게 수풀에 있는 도적 길드 NPC 밖에 없었다.

       

       전생의 이씨 시절에 이걸로 1시간이나 낭비했던 린은 발터크루아에 들어가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능한 다른 방안을 찾아보려 했지만 결국 본인도 단념하고 순응했다.

       

       평소 게임과 비교해 디테일이 다르다고 푸념하던 그였기에 원래대로 진행되는 걸 뭐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미리 말하자면 이미 2장도 디테일은 달라졌다.

       

       아까 린이 사내에게 말했던 암호문은 게임상에서 없었다.

       

       어마어마한 돈을 쥐여주거나 가지고 있는 아이템으로 흥정하여 협력을 얻어내야 했다.

       

       물론, 마지막 파티원을 도적으로 선택하고 DLC 1장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했다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전생자 이씨는 짐꾼으로만 플레이했으니 알 길이 없다.

       

       애초에 도적은 루시가 배신당할 때 대신 죽고 구출시키는 역할이라 여기까지 같이 올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정지정지!”

       

       

       사내를 따라 발터크루아 외곽 지하수로에 들어서자 모험가 차림의 소녀가 그들을 막아섰다.

       

       

       “성녀는?”

       

       “개썅년이다.”

       

       “누구냐?”

       

       “외곽 정보원 지올이다. 얼굴 알면서 굳이 빡빡하게 해야겠어?”

       

       

       소녀가 묻고 사내가 답했다.

       

       루시는 감명받은 목소리로 린에게 속삭였다.

       

       

       “암구호 정말 마음에 든다.”

       

       

       다 이유가 있었지만 린은 그냥 웃기만 했다.

       

       지올이 투덜거리자 소녀는 인상을 쓰며 그를 나무랐다.

       

       

       “도적이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신분 숨기고 얼굴 속이는 게 우리 일상이잖아.”

       

       “예이예이, 훈장이라도 달아드려야겠네 우리 정보관 나으리. 역시 전투 특채 출신은 다르긴 달라.”

       

       “지올!”

       

       “정보관이야말로 내 이름 그만 떠벌려. 저 녀석들이 기억해버리잖냐.”

       

       “저 사람들은?”

       

       

       소녀는 지올의 항의를 가볍게 무시하며 루시와 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지올은 발끈했지만 지하수로 특유의 악취를 더 맡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암호문의 주인공.”

       

       “정말?! 두 명이나 된다고?”

       

       “아니 저쪽 남자만이야.”

       

       “아 하긴, 대장이 양성애자일리는 없지.”

       

       “대장 앞에서는 그런 말하지 마라.”

       

       “뭐 어때, 없을 때는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끝까지 말 한마디 지지를 않는다.

       

       고참인 지올은 특채 출신 신입인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지하수로는 더더욱.

       

       

       “난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저기 정보관 따라가라고.”

       

       

       루시와 린이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지올은 바로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손님맞이가 최악이구만, 그 녀석에게 좀 일러둘까.

       

       그랬다간 괜히 간섭하는 게 되니 참자.

       

       

       “이쪽으로 오세요.”

       

       

       정보관이라고 불린 소녀는 그나마 존댓말을 써줬다.

       

       

       “너 냄새나.”

       

       

       그런데 이번에는 루시가 무례했다.

       

       괜한 트집도 아닌 것이 소녀의 몸 군데군데에는 질척한 검댕이가 묻고 지하수로 악취가 배나 느껴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안내원보다는 청소부 역할이라.”

       

       “청소부?”

       

       

       린이 되묻자 소녀는 한숨을 쉬었다.

       

       

       “지하수로에는 온갖 생물들이 침입하거든요. 그냥 뒀다가는 수로를 타고서 발터크루아 내부까지 들어가서 난리를 피울 거에요. 경비병들은 냄새 난다고 오기도 싫어하니 누군가는 여기 죽치고 앉아서 주기적으로 청소를 해줘야 하죠.”

       

       “힘들겠네.”

       

       “예 뭐….”

       

       

       평소 비아냥만 듣던 소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루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빨리 안내나 해, 냄새가 심해서 머리 아퍼.”

       

       “죄송하지만 이게 최대 속도거든요. 왜냐하면….”

       

       

       소녀가 갑자기 루시를 향해 손을 털었다.

       

       눈깜짝할 새에 날아간 암기가 루시 뒤에 있던 박쥐를 꿰뚫었다.

       

       퍼억-!

       

       마물 박쥐는 터져나가며 그 피를 루시에게 흩뿌렸다.

       

       

       “드러나지 않게 지켜주고 있다보니 이게 한계거든요.”

       

       

       앞장서고 있어서 몰랐는데 소녀의 팔과 손은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무언가가 박히고 찢기는 파육음이 들려왔다.

       

       

       “아 그래?”

       

       

       루시도 지지 않았다.

       

       어느새 잡아서 붙들고 있던 박쥐를 무심하게 소녀에게 던졌다.

       

       

       “윽?!”

       

       

       대충 던진 것 같아 보여도 소녀가 다른 곳의 마물들을 향해 암기를 날려 빈틈이 생긴 때를 정확히 노렸다.

       

       당황한 소녀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했지만 그전에 루시의 손날이 박쥐를 베어버렸다.

       

       스칵!

       

       손날인데 왜 이런 효과음이 나는 걸까.

       

       어찌나 깔끔하게 베었는지 박쥐는 바닥에 추락하고 나서야 양단되어 스멀스멀 피를 흘렸다.

       

       

       “나처럼 했다면 옷이 더러워지는 일도, 냄새가 심하게 배지도 않았을 텐데.”

       

       

       멍하니 박쥐를 바라보던 소녀는 싱긋 웃었다.

       

       

       “그럼 네가 하던가.”

       

       “뭐가 어째?”

       

       “루시 하지 마!”

       

       “지금 저 녀석 편드는 거야?”

       

       “편드는 게 아니라 루시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저게 먼저 나한테 피 튀기게 한 거 봤잖아!”

       

       “루시가 먼저 말로 건드렸잖아.”

       

       

       예전 같으면 그녀에게 이런 소리를 한다는 건 꿈도 못 꿨겠지.

       

       하지만 괜한 분쟁을 일으키는 그녀를 당연히 제지해야만 했다.

       

       

       “왜 저 녀석 편을 드는 건데?”

       

       

       루시는 그게 너무나도 섭섭했다.

       

       

       “린은 나만의 유일한 아군이잖아.”

       

       

       내가 이미 너의 것이라는 걸 알잖아.

       

       

       “내 최고의 동료잖아.”

       

       

       네가 하지 말라면 결국 나는 그 말을 따를 거라는 걸 알잖아.

       

       

       “넌 나의…!”

       

       “죄송합니다.”

       

       

       놀랍게도 고개를 숙인 건 소녀쪽이었다.

       

       그러나 루시는 가슴 한 켠이 싸늘하게 식는 게 느껴졌다.

       

       여자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녀석 일부러 사과한 거라고.

       

       

       “중요한 손님이신데 제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까지는 없어.”

       

       “부디 대장에게는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알았어. 말 안할 테니까 제발 고개 좀 들어주라.”

       

       “정말이죠?”

       

       

       원하는 바를 이루자 방긋 웃으며 허리를 일으켰다.

       

       루시는 그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지올이라는 사내와 말씨름하는 솜씨로 보아 이득 없이 숙이고 올 녀석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저 녀석이 ‘여자’라는 게 최고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린과 나란히 걷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자는 오로지 자신뿐이어야만 했다.

       

       이런 루시의 속마음을 린도 모르지 않았다.

       

       루시가 계속 이러면 앞으로의 여정은 정말 순탄치 않을 터였다.

       

       집착과 의존증이 도를 넘어섰다.

       

       어떻게 풀어나가야할지 고민하는 그에게 정보관이 살짝 귀띔을 해줬다.

       

       

       “너무 밀어내기만 하면 역효과 난다구요?”

       

       

       루시가 뭐라고 하기 전에 알아서 앞장서서 나아간다.

       

       그 뒷모습에 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고보니 DLC 도적 길드에서 저런 캐릭터가 있었나?

       

       기억을 되짚어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당장 루시를 달래야 했다.

       

       

       “루시.”

       

       “…….”

       

       

       틀렸다. 대차게 삐졌다.

       

       

       “손, 잡을래?”

       

       “…….”

       

       “워낙 주위가 어둡다 보니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

       

       

       입을 꼭 다물고 있지만 곁눈질로 손을 힐끔거렸다.

       

       저기 정보관이라는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도적이 한 조언이긴 하지만 최근 린이 너무 거리를 뒀다는 건 맞았다.

       

       회복한 직후부터 전보다 더한 거리감을 줬으니 루시의 집착이 심해질만도 하다고 판단한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잡고 싶어서 그래.”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큰 마음을 먹고 한 행동이었다.

       

       본인이 잡고 싶어서라니 자의식 과잉이다.

       

       스스로 여자한테 손 잡고 싶다 하다니 통할 리가….

       

       꼬옥.

       

       

       통했다.

       

       

       “오늘 씻지 말고 자. 린의 냄새 잔뜩 맡으면서 잘 거니까.”

       

       

       효과는 뛰어났다!

       

       

       “아깐 루시가 너무 흥분해서 내가 한소리했어, 미안해.”

       

       “…린이 사과할 일은 아니야.”

       

       

       모두 저 녀석이 나쁜 거니까.

       

       그래도 린이 먼저 손잡자고 해줬다.

       

       그걸로 루시의 서러움은 눈 녹듯이 씻겼다.

       

       반면 린은 어색하기만 했다.

       

       아무리 집착과 의존증이라고 해도 여자애랑, 그것도 용사 파티의 필두인 용사와 이래도 되는 걸까.

       

       나중에 이 집착과 의존에서 루시가 완벽하게 벗어나게 되면 오히려 이런 행동들을 부끄러워하는 건 아닐까.

       

       늘 그런 생각 때문에 거리를 두고 있던 린이었다.

       

       마왕 토벌을 위한 여정에서 용사 파티는 그와 닿는 걸 대놓고 꺼려했었으니까.

       

       

       “자 도착했습니다!”

       

       

       시커멓게 변색된 문앞에서 소녀는 일정한 패턴으로 문을 두들겼다.

       

       

       “바로 길드 하우스와 연결되어 있어요. 들어가면 바로 대장한테 안내 받을 거에요.”

       

       “고마워.”

       

       “별말씀을.”

       

       

       소녀는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리며 사족을 붙였다.

       

       

       “나중에 후기 꼭 들려주세요?”

       

       “후기?”

       

       “제가 먼저 고개 숙인 대가입니다.”

       

       

       그럼 그렇지.

       

       그 사과조차 다 계산된 거였군.

       

       후기라고 직접 언급까지 한 그녀에게 린은 괘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머, 안쪽에 파수꾼이 없나봐요. 이상하네~? 이렇게 된 이상 제가 바로 입장시켜 드릴게요.”

       

       

       눈치 빠른 소녀는 재빨리 문을 비틀어 열더니 둘을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루시와 린은 소녀에게 눈을 흘기며 문안으로 들어갔다.

       

       

       “편히 머물다 가시길~.”

       

       

       쾅 문이 닫히자마자 루시가 불편한 한숨을 내쉬었다.

       

       린도 꺼림칙함과 함께 동의하려는 찰나,

       

       

       “어이-!”

       

       

       허스키하고 활달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이씨!”

       

       

       린은 움츠러들고, 루시는 굳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우리 더러운 고향이 작살난 이후 처음인가? 얼굴 좀 보자!”

       

       

       루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맞잡고 있던 린은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상대는 거침없이 눌러쓴 후드를 벗겨내며 쾌활하게 어깨를 두들겼다.

       

       시야가 밝아지며 비로소 린은 상대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은빛이지만 어딘가 청색이 감도는 꽁지머리.

       

       린처럼 햇빛에 그을린 다갈색 피부.

       

       슬랜더지만 잘빠진 각선미와 비율적으로 잘 자리잡은 골반넓이를 가진 시원시원한 미녀가 웃고 있었다.

       

       원래는 도착하고 혼자 따로 만날 생각이었는데.

       

       린은 잠긴 목을 풀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래빈.”

       

       “오랜만이야 이씨!”

       

       

       그녀를 소개할 시간이 되었다.

       

       이름은 래빈. 

       

       뒷골목 출신이라 성은 없다.

       

       하지만 별칭은 있었다.

       

       래빈 더 시프.

       

       현존하는 최고의 도둑.

       

       그리고 전생에서 플레이어들에게 짐꾼에 비해 큰 인기와 함께 압도적인 선택을 받았던, 용사 파티의 도적.

       

       린이 파티원으로 들어간 지금, 그녀는 상업도시 발터크루아의 도적 길드 수장이었다.

       

       그리고 발터크루아의 또다른 이명, 무법도시라는 멸칭을 수면 위로 끄집어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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