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 배가 온다! 놈들이 쳐들어왔다!”
달빛만이 땅을 비추는 어두운 밤.
목책 너머 바다를 바라보던 무인의 시선에 커다란 선박이 잡혔다.
보초는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지르며 적습을 알리는 북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곧이어 봉화에 불이 붙었다.
“전부 화살에 불을 붙여!”
바다를 누비는 배를 멀리서 가라앉히기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대포를 쏴 갈겨 침몰시키는 방법이지만, 군대가 아닌 이상 대포를 쓸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화전(火箭)을 준비하게!”
북쪽 항구를 맡기로 한 해남검문의 장로, 이두승의 외침에 마교와의 전쟁에 자원한 마을 사람들과 해남검문의 무인들이 활을 들었다.
“화살을 쏘되, 적들이 접근하면 마을 주민들은 미리 전해둔 은신처에 숨으시오!”
“알겠으니 걱정 말게. 바닷일로 단련된 근육의 힘을 보여줄 테니 말일세!”
임무에 자원한 촌장이 호기롭게 외치며 가장 먼저 시위를 당겼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 도망치지 않고 싸움에 임하니, 어찌 마을 장정들이 나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학에 대한 재능이 없어도 오랜 어부 생활로 다져진 근력으로 활시위 정도는 당길 수 있을진대. 명중률을 장담할 수 없더라도 숫자로 어떻게든 상쇄할 수 있을 터.
그렇게 수십명의 장정이 활을 들었다.
‘역풍인가. 하지만 바람이 강하진 않다…’
이 장로가 몸을 밀어내는 바람을 느끼며 얼굴을 굳혔다.
배가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바람이었다. 어떤 배도 역풍을 받으면 쉽게 나아가지 못할 터. 하지만 지금은 순풍의 시간이었다.
즉, 화살이 멀리 가지 못하고 바람에 꺾이리라는 것.
항구 주변에 두른 목책은 바닷물을 잔뜩 머금어 불이 붙지는 않겠지만, 목책에 불이 붙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
촌장은 입을 떼지 않고 목책 너머를 응시했다.
조금만 더.
더 가까이…
좀 더…
거리가 줄어든다.
점으로 보이던 배가 엄지 만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이 달렸다.
그때, 이 장로가 외쳤다.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순간 시위를 놓으시오!”
아무도 말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그 말을 알아듣고 숨을 죽였다.
팔이 떨린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시위를 놓지 않았다.
그들이 당기는 시위 한 번에 해남의 운명이 걸려있기에.
이윽고,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시위를 놓으시오!”
이두승 장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늘에 불꽃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바다에 떨어져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일부는 배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대로 가면 도착하기도 전에 배가 타버릴 상황.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할 별동대가 아니었다.
“전부 쳐내!”
“안되면 몸으로라도 막아!”
어떻게든 배를 항구에 박아야 한다. 벽력탄이 제대로 효용을 발휘하려면 어떻게든 배를 해남도에 대야만 했으니까. 별동대의 검이 어지럽게 하늘을 뒤덮은 불의 비를 쳐냈다.
“이런 시…컥…”
“팔호!”
“한눈팔지 말고 막아! 다른 건 몰라도 돛대만은 사수해야 한다!”
배가 불타도 괜찮다. 어떻게든 도착하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돛이 타버리면…그들의 마지막 모험은 허무하게 끝나게 될 터. 별동대는 이를 악물고 돛 하나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분투했다.
천운일까, 아니면 지옥으로 가기 전 신고식일 뿐인가.
한차례 화살비가 끝나고 별동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돛에 불이 붙지 않았으니까.
다만, 갑판에 불이 붙었을 뿐.
“십육호, 불 끌 방법 없냐?”
“그런 거 없으니까…이대로 박아.”
배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북쪽 항구를 수비하고 있는 무인들에게 그리 좋지 않은 신호였다.
“적이 항구에 배를 대려 한다! 해남검문의 무인들이여! 발검하라!”
얄궃게도 바람은 저들의 편.
속력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저 불타는 배가 곧 부두에 부딪히리라.
이두승은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검집에서 검을 뽑고 단전에서 내공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단전을 떠나 혈도를 타고 질주하는 내공이 이윽고 검을 타고 푸른 기로 화했다.
검기(劍氣).
‘속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시선을 끌기 위함인가, 아니면 더 큰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것인가.
이 장로는 이윽고 부두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는 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배에서 튀어나오는 여덟 명의 무사들도.
“천마재림! 만마앙복!”
부두에 뛰어내리자마자 십육호의 팔이 원을 그렸다. 전형적인 투척 자세. 이 장로의 시선이 일순간 십육호와 마주치고, 그도 동시에 뛰어들었다.
경험 많은 무인으로서의 직감이 저 물건이 위험하다 경고를 보냈으니까.
‘저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막아야 한다!’
이 장로의 강맹한 내력이 실린 좌수검이 거침없이 심지에 불이 붙은 채 날아오는 구체를 향해 휘둘러졌다. 이윽고 1척짜리 검기에 베인 벽력탄이, 북쪽 항구를 폭음과 함께 빛으로 뒤덮었다.
“장로님!”
“우리, 높으신 분을 하나 처치한 것 같은데…”
“그럼 뭐하냐. 다 죽게 생겼는데.”
“수영이라도 해보던가.”
“이 몸뚱아리로?”
삼십이호가 킬킬대며 화살이 관통한 팔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직전에 먹은 술 덕분인지, 통증은 옅었다.
‘아니, 그냥 죽어가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피를 잔뜩 흘린 그의 눈이 흐릿해졌다.
‘빌어먹을 인생, 평생 훈련만 받다 가는 구나…’
목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 어지러운 머리.
삼십이호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
폭발?
나는 북쪽 항구에서 일어난 폭발에 불길한 상상을 떠올렸다.
설마 벽력탄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원작 중후반 부터 나오는 벽력탄을?
“북쪽에서 폭발이…!”
당혹스러워하는 무광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하지만 그런걸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벽력탄으로 보이는 폭발이 일어난 상황.
적이 열세를 뒤집을 수 있는 패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기존에 계획해두었던 전술을 재고할 필요성이 있었다.
우리가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더라도 벽력탄 하나에 병력이 쓸려나갈 수 있으니.
전멸하지야 않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터였다.
“장문인, 가능하면 독화살로 저들이 접근하기 전에 끝장내야 합니다.”
“…알겠네.”
장문인도 방금전의 폭발에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혜령아.”
“혜령아, 지금은 널 봐주지 못할 것 같으니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네에…”
혜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곤 다시 돌아들어갔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으니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리라.
나는 주변이 조용해지자 곧바로 장문인에게 물었다.
“조금 전의 폭발, 인위적으로 일어난 폭발로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네. 수십 년 전의 일이 떠오르는군…벽력탄이라니.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
장문인의 탄식이 밤공기에 섞여 흩어졌다.
왠지 폭발을 보고 바로 얼굴을 굳히더라니, 역시 벽력탄을 본 적이 있는 건가.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벽력탄의 위험성을 알고 있냐 모르느냐는 아주 큰 차이니까.
색목인인 내가 벽력탄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니,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저들이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온다면 벽력탄인지 뭔지 하는 걸 쓸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함에 잘 밀봉해서 들어올 가능성도 있으니, 안심은 하면 안될 겁니다.”
잘 밀봉한 함에 담아서 왔다면 잠깐 물에 들어간 정도로는 완전히 젖지 않을 테니까.
“자네가 어떻게 아는가?”
“서역에도 비슷한 게 있습니다.”
나는 장문인의 의아함 섞인 물음을 적당히 얼버무렸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으니까.
그리고…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장문인. 삼대제자들을 시켜 물을 긷어와 나무 위로 올라가게 시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물이 담긴 호리병도 하나 갖고 오라고 해주십시오.”
원작에서도 벽력탄은 귀한 물건이라고 했으니 많이 들고 오지는 않았겠지.
원작 최종 전투에서도 사용한 벽력탄이 열 개 남짓이었으니,
많아도 3개 정도.
하나가 북쪽에서 터졌다고 치면…
“두 번 정도인가.”
최악이어도 두 번만 어떻게 막으면 된다.
“아저씨! 여기 물 담아 왔어요!”
혜령이 물을 직접 떠다 준 건가. 나는 물이 가득 찬 호리병을 혜령에게서 받아들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호리병.
이 정도 물이면 충분하겠지.
“혜령, 잊지 마라. 앞으로 나오면 안 된다.”
“…네!”
내가 무거운 목소리로 경고했기 때문일까. 혜령이 갓 전입한 신병처럼 빠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넌지시 말했다.
“다치지 말도록.”
“아저씨도요. 그리고 장문인…아니 큰아버지도 다치시면 안 돼요.”
“허허, 걱정하지 말거라. 저런 쭉쩡이들에게 내가 당할 것 같더냐?”
장문인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호기롭게 웃으며 혜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정이 진하게 묻어나는 손길에, 혜령의 걱정 섞인 눈빛이 장문인을 스쳐 내게도 닿았다.
“걱정하지 마라. 단 200명으로 1만의 군세를 패퇴시킨 적도 있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이건 그렇게 큰 위기도 아니다.
“장문인! 남쪽에서 봉화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되뇌이며, 산 위에서 남쪽을 내려다본다.
슬슬 시작인가.
나는 흥분으로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고, 흙바닥에 꽂아둔 폴액스를 뽑아 어깨에 얹었다.
“그럼, 살아서 봅시다.”
폭발은!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