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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

     

    “휴우, 이놈들은 이 좁은 굴에 얼마나 떼를 지어 살고있는 건지 원.”

     

    보리스가 투박한 투구 사이로 땀을 겨우겨우 닦아내며 불평했다.

     

    벌써 세 번째 고블린 무리를 토벌했다.

    아버지가 활력의 축복을 걸어놨어도 다들 지칠 때가 됐다.

     

    “방금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기사들은 즉시 치유사에게 보고해 치유받을 수 있도록.”

     

    타냐가 명령을 하달했다.

     

    한 기사가 기스에게 찾아가려던 찰나, 보리스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권유했다.

     

    “이봐, 저기 도련님에게 한 번 가 봐.”

     

    “도련님에게?”

     

    “그래. 아까 어깨에 뭘 발라줬는데 이게 아주 효과가 좋아. 엄청 시원해. 바를 때만 좀 따끔하고.”

     

    “그래? 한 번 받아보지 뭐.”

     

    보리스의 추천에 기사가 내게 찾아왔다. 바로 진단을 사용했다.

     

    …발동하지 않는다.

     

    ‘찰과상도 아니고 고블린 피가 좀 묻은 정도잖아, 짜식 엄살은.’

     

    꼭 이렇게 뭐라도 한 척 명예로운 부상을 받으려는 놈들이 있어요.

     

    그래도 돌팔이 의사에게 가짜 환자는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잘 찾아오셨습니다, 고객님.

     

    “거기, 배 까봐.”

     

    “이렇게요?”

     

    엄살 기사의 배때지에 빨간약을 붓으로 치덕치덕 발라줬다. 주황빛이 나며 치료 효과가 발동한다.

     

    최소한의 체력 회복 효과는 있으니까 뭐.

     

    “오, 진짜 시원하네. 감사합니다요.”

     

    “어때, 도련님 실력도 꽤 괜찮지?”

     

    “그러게, 의외구만.”

     

    “의외는 임마, 실례 되게.”

     

    보리스가 기사의 뒤통수를 툭 쳤다. 빨간약을 품에 집어넣고 그에게 물었다.

     

    “보리스, 너도 날 그다지 반기지 않았으면서 웬일로 친근하게 구냐?”

     

    “아이, 제가 도련님하고 단장님이 아침마다 훈련하는 건 다 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이번 주 불침번이라서요.”

     

    보리스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 바람에 어깨가 들썩였다.

     

    “도련님이 이번 시험에 상당히 진심이신 건 잘 알겠더만요. 고트베르크 가의 장남이시니 실력이야 믿어볼 만하죠.”

     

    “너 줄 서는 솜씨가 일품이다?”

     

    보리스, 마음에 들었어.

    이름은 기억해 둘게.

     

    “하하, 무슨 말씀을요. 도련님이 그렇게 진심이 되신 이유는 이제야 잘 알겠더만요.”

     

    “왜?”

     

    보리스가 실실대며 내게 소곤거리듯 대답했다.

     

    “아유, 제가 어제서야 황녀님의 존안을 실제로 뵀지 뭡니까. 벌써 그렇게 기품이 넘치시니 성장하시면 분명 엄청난 미인이 되시겠죠.”

     

    갑자기 아셀라 얘기가 왜 나와?

     

    “저 같아도 그런 아내의 주치의는 가능하면 직접 하고 싶습니다요. 목숨을 걸어서라도 말입죠!”

     

    “원, 목숨 건다느니 함부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여태 내가 목숨을 얼마나 걸었는지 알아?

    한두 개로는 택도 없어.

     

    “아이구,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약혼녀가 있거든요.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인데 얼마나 말괄량이인지, 황녀님같이 품격 있는 분과는 거리가 멉니다요.”

     

    보리스는 신나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실은 오늘 토벌이 끝나고 돌아가면 작게 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캬아, 글쎄 어느새 애가 생겨버렸지 뭡니까?”

     

    어어, 잠깐 스탑.

     

    “아직 모아놓은 돈도 적어서 기사 일을 5년은 더 하고 여유롭게 결혼할 생각이었는데, 참 갑작스러웠죠.”

     

    너 그거 사망 플래그야.

     

    “도련님도 조심하십쇼. 애기는 펜리르와 같습니다. 방심했을 때가 가장 위험합죠. 생각지도 않고 있는데 어디서 번쩍 튀어나온다니까요.”

     

    “타냐 단장, 고트베르크 기사단 군기가 왜 이래?”

     

    내가 불평하자 우리를 지긋이 지켜보던 타냐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제도나 황실도 아니고 일개 지방의 기사단입니다. 실력은 확실하니 이 정도는 양해해 주시길.”

     

    “뭐 임마?”

     

    나 참,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네.

     

    하긴 시골 촌놈들에서 그나마 칼 좀 휘두르는 애들 데려다 만든 기사단이니.

     

    타냐가 점잖아서 잊었지만 대개 기사들은 입이 걸걸한 법이었다.

     

    “하지만 보리스, 작전 중 사담은 자제해라.”

     

    “뭐, 군법으로 처벌받기라도 합니까?”

     

    “아니, 월급은 내 권한으로 깎을 수 있다.”

     

    “조용히 하겠습니다.”

     

    보리스가 입을 꽉 다물고 투구를 고쳐 썼다. 타냐는 단장답게 나름 거친 남자들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 구역으로 진행한다.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타냐의 명령에 따라 분대가 움직였다.

     

     

     

    굴이 더욱 깊어지고 어두워진다.

     

    산소가 부족해져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이런 곳에서 잘도 살고 있군. 빨리 마무리 치고 나가고 싶구만요.”

     

    보리스가 대놓고 투덜댔다. 그가 한 마디 더 뭐라고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정지!”

     

    타냐가 긴박히 외치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콰앙! 머리 위에서 불꽃이 폭발하며 우리를 덮쳤다.

     

    “후퇴! 전 부대 후퇴하라!”

     

    후방의 분대부터 왔던 길로 물러선다.

    하지만 전방에 위치한 우리 분대는 길이 막혀버렸다.

     

    “마법인가. 역시 고블린 샤먼이 있어!”

     

    “가주님, 피하시죠!”

     

    “으음…!”

     

    호위기사들이 아버지를 둘러싸며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태세에 들어갔다.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물이 적에 있다면 후방의 치유사들도 안전권에서 멀어진다.

     

    “당장 샤먼을 토벌해야 합니다!”

     

    “연기 때문에 앞이 안 보여서…!”

     

    기사들이 당황한다.

    아군을 공격할까 봐 함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는 상태다.

     

    “쿨럭, 쿨럭.”

     

    슬슬 산소도 줄어들고, 뜨거운 연기가 흘러들어와서 내 기관지에도 그다지 좋은 영향은 못 주고 있다.

     

    병력이 밀리니 굳이 깊은 굴까지 유도해서 이판사판으로 나왔나.

     

    지능이 낮은 마물다운 발상이다.

     

    “아껴놓은 신성력 좀 써볼까.”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깨문다.

     

    “거지 같은 핑챙여신께 아뢰옵나니.”

     

    대충 입에서 나오는 대로 기도를 올린다.

    문제는 없다. 기도는 신앙심을 유지하고 신성력을 원활하게 윤활하기 위한 용도다.

     

    “타오르는 불길에서 우리를 보호하시옵고.”

     

    다만 목적은 분명히 언급해야 한다.

     

    치유주문이 포함된 신성스킬트리.

     

    이 스킬들은 신앙심을 기반으로, 신성력을 자원으로 사용하게 된다.

     

    신앙심이 높을수록 강력한 주문을 쓸 수 있고, 같은 주문이라도 위력이 좋아진다.

     

    하지만 마나가 없으면 마법을 시전할 수 없듯, 신성력 총량이 적으면 치유주문을 포함한 신성주문도 쓸 수 없다.

     

    ‘내 신성력 22로 이 스킬은 한 번이 한계.’

     

    한 번 쓰면 바닥이다.

     

    반대로 말하면, 한 번이면 충분하다.

     

    마법에 대항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신성력을 아껴놓길 잘했다.

     

    “화염 보호의 축복.”

     

    ―파앗!

     

    내 몸에서 신성력이 퍼져나가며 모든 부대를 감싼다.

     

    은은한 파동이 일며 화염저항 수치가 증가한다.

     

    열이 가라앉고 숨통이 트인다.

     

    “아니, 이건…?!”

    “도련님이 축복을 쓰실 수 있다고!”

     

    연기에 팔로 코와 입을 막던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전투태세를 취했다.

     

    ‘마왕군과 싸울 땐 주로 악 속성 보호 축복이 유효했지.’

     

    치유주문이나 신성주문은 마법과 다르게 진을 그릴 필요는 없다.

     

    쓰고 싶은 주문을 생각하며 기도하면 알아서 진이 그려지는 식이다.

     

    “열기가 줄어들었다!”

    “돌진할 수 있겠어!”

    “당장 고블린 놈의 머리통을 부숴버리자!”

     

    열기는 살갗이 아닌 가슴에 불을 지폈고,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리기 시작했다.

     

    “축복이라니, 대체 어떻게 그런 상급 기술을 쓰실 수 있는 겁니까!”

     

    기스가 내게 기가 찬 목소리로 물었다.

     

    “황실 주치의면 이 정도는 기본기로 써야 하지 않겠어?”

     

    “허, 참…! 저, 저도 안 집니다!”

     

    기스가 혀를 내두르고는 기사들을 쫓아 뛰어갔다. 열심히 치유주문을 시전한다.

     

    지금 내 스킬트리에 축복은 없다.

    하지만 회귀 전에 수도 없이 써본 경험 덕에 머리가 자연스레 기억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페달을 밟듯, 신성력을 휘감으면 주문이 나도 모르게 생각난다.

     

    ‘아이고, 어지러워.’

     

    대신 그만큼 리스크도 있지만.

     

    수준 높은 신성주문을 쓸 만큼 지금 몸의 신성력이 받쳐주지 않는다.

     

    끔찍했던 용사 파티에서의 활동이 생각나서 속도 메스꺼워졌다.

     

    “놈이 보입니다!”

     

    보리스가 외치며 기세 좋게 전방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량의 고블린들 사이에서 지팡이랍시고 만든 깎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유난히 큰 개체가 하나 있다.

     

    “거적대기를 쓰면 마법사라도 될 줄 아는 모양이지, 마물놈이!”

     

    보리스가 작은 고블린들 사이를 헤치며 고블린 샤먼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게 검을 휘둘러 순식간에 동강낼 기세다.

     

    ―크르르!!

     

    슈욱― 쾅!

     

    하지만 샤먼이 팔을 휘두르자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보리스가 나가떨어지며 벽에 부딪쳤다.

     

    “크어억!”

     

    보리스는 꼴사나운 비명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샤먼은 지팡이를 든 반대쪽 손에 흉악한 몽둥이도 들고 붕붕 휘두르는 모습이다.

     

    보리스는 평범한 고블린을 상대하는 감각으로 뛰어들었던 모양이다.

     

    샤먼은 마법을 쓸 줄 알다 뿐이지, 무리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덩치부터 근력이 일반 고블린과는 차원이 다르다.

     

    잘 쳐주면 약한 오거라고 보면 된다.

     

    “보리스!”

     

    타냐가 유려하게 검을 휘두르며 진입한다.

     

    “지팡이를 쳐내!”

     

    내 외침에 타냐가 즉시 반응했다.

     

    샤먼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검등으로 쳐내며 자세를 무너트리고는 낭비 없는 품새로 일격에 뭉툭한 몸을 사선으로 그어버린다.

     

    ―크르르륵!!

     

    이어 다른 기사들도 그녀를 따라 공격을 가한다.

     

    미처 추가 마법을 시전하지 못한 샤먼은 방어할 수단을 잃고 마침내 절명했다.

     

    “토벌했다!”

    “성공이다!”

     

    기사들이 고블린 잔당을 처리한다.

     

    나도 본분을 다할 때였다.

     

    “보리스.”

     

    일격을 강하게 맞은 보리스에게 뛰어간다.

     

    “크윽, 씁…!”

     

    보리스는 고통에 절어 이를 악문 채 겨우 비명을 참아내고 있었다.

     

    진단을 쓸 것도 없었다.

     

    그의 왼쪽 종아리가 부러져, 피부가 불룩해질 정도로 골절됐음을 알 수 있었다.

     

    “도, 도련님… 제가 못 돌아가면 네이에게 꼭 전해주십쇼, 제가 많이 사랑한….”

     

    “엄살은, 임마. 그러게 누가 플래그 깔래?”

     

    보리스의 이마를 때려 입을 막았다.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한 용도다.

     

    그렇게 강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동굴 벽에 부딪친 각도가 안 좋았다.

     

    “제가 치유하겠습니다!”

     

    기스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내 어깨를 비집고 들어왔다.

     

    큰 부상이니 고득점을 획득할 찬스다. 놓칠 리가 없었다.

     

    기스가 치유주문을 시전하니 그래도 효과가 바로 들었다. 보리스의 환부에서 빛 입자가 모여든다.

     

    하지만.

     

    “으억, 어어어억!!”

     

    보리스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치유되는 과정에서 보리스의 부러진 뼈가 반대 방향으로 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쇄된 단면이 내부에서 찌르니 그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없다.

     

    “못 참, 못 참겠! 잠깐 멈추십쇼!!”

     

    참다못한 보리스가 기스의 어깨를 밀치며 넘어졌다. 내가 그의 어깨를 받아주었다.

     

    호흡이 가쁘고 이마가 땀범벅이다.

     

    “여신님의 가호 아닙니까. 치유에는 고통도 따르는 법, 조금만 참으십시오!”

     

    기스가 오히려 보리스를 타박한다.

     

    타악, 내가 기스의 이마에 막대기를 붙였다.

     

    “으응? 이게 뭐지?”

     

    방금까지 빨던 사탕의 남은 막대다.

     

    “여기부턴 내가 맡는다. 환자에게도 치료를 거부할 권리가 있거든.”

     

    “허, 도련님이 한다고 뭐 다를 줄 아십니까? 그 빨간약도 아픈 건 마찬가지….”

     

    “좀 더 귀한 게 있어.”

     

    나는 품속에서 다른 약병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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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히 몇 시간을 들여 제작한 비장의 무통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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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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