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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0

     

    내쫓듯 왕녀를 돌려보내고 문을 쿵 닫으니 그제야 아셀라가 얼굴을 풀었다.

     

    “모처럼의 시간을 방해받았네.”

     

    아셀라가 나를 향해 입꼬리를 쭈욱 찢었다.

     

    “감사 인사는 됐어.”

     

    “감사요?”

     

    “그럼. 입장 상 너 혼자였다면 왕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었겠지.”

     

    “그야 그렇습니다만.”

     

    아무리 적국 관계라고 해도 일단 신분 차이가 있으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페르시야 1왕녀의 도입부가 관심이 가기도 했다.

     

    예전에 대런 장군이 내 제약공장의 약품이 밀수품처럼 왕국에 나돈다는 뉘앙스를 풍겼었다.

     

    중간에서 상단을 포함한 브로커가 애먼 수익을 올리는 꼴을 보기보단 정식 수출 루트를 뚫어놓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

     

    “황녀님이야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1왕녀면 나름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 텐데요. 첫인상이 최악이잖아요.”

     

    “품격이 있지, 내가 그런 꽃뱀과 연을 쌓을 수준으로 보이니?”

     

    아셀라는 짜증을 내며 테이블 앞에 앉아서는 가지런히 놓인 유리잔 하나를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뭐라도 마시고 싶네.”

     

    아셀라가 잔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훑으며 내게 시선을 보냈다.

     

    “밀크티를 준비할까요.”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더라.”

     

    나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자리에 앉아있는 아셀라와 위에서 시선이 마주친다.

     

    “저에게 혼나고 싶으셔서 일부러 하신 말씀인지요.”

     

    아셀라는 나를 올려다보며 도발하듯 코웃음을 쳤다.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하려고 그러니. 정말 성인이 될 때까지 한 모금도 입에 못 대게 하려고?”

     

    “당연하죠.”

     

    “2년밖에 안 남았어.”

     

    “2년이나 남았는데요.”

     

    “역사책 속 위인들 중에서 성인이 되기 전에 위업을 이루지 않은 자는 없었단다.”

     

    아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밤에 준비해 놔.”

     

    그리 말하고는 피로가 한계에 부딪쳤는지 침대에 풀썩 누워 눈을 감는 아셀라.

     

    어림도 없지.

     

    나는 품속의 가루형 수면제를 언제든 물잔에 탈 수 있게 바깥 주머니로 옮긴 후, 그녀를 위해 커튼을 치고 방을 나왔다.

     

     

     

    ***

     

     

     

    연무회가 시작하기까지는 대략 열흘.

    그동안 아셀라는 여기저기 정치 관계를 관리하려 크고 작은 회담을 다녔기에 나도 스케줄을 바쁘게 소화했다.

     

    “요즘 밤에 왜 이렇게 푹 자지.”

     

    글쎄요, 왜일까요.

     

    “연일 회담으로 바쁘시고, 외지에 나와 다른 환경에 긴장하신 탓도 있겠지요.”

     

    “너랑 거리도 나가보고 싶은데. 짜증 나.”

     

    아셀라의 불평을 지근거리에서 듣는 건 이미 익숙했다.

     

     

     

    사흘 차에 내게도 일이 생겼다.

     

    고트베르크 후작령에서 출발한 네리아가 무사히 왕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업무는 잠시 클로에에게 짬 때리고 버선발로 연무회 경기장 외곽의 성벽까지 네리아를 맞으러 갔다.

     

    “이봐, 대체 저게 뭐지?”

    “공성병기…는 아니겠지.”

    “연무회 덕분에 진귀한 구경을 다 하는군.”

     

    소문이 퍼졌는지 성벽에 몰려든 왕국 경비병과 시민들이 검문을 받는 행렬을 보고 술렁댔다.

     

    ―뿌우우우!

     

    거대한 매머드가 우렁찬 울음을 내며 위협적인 엄니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높은 등 뒤쪽에는 개조를 거쳐 마차처럼 편하게 탈 장소도 마련되어 있었다.

     

    매머드의 양쪽으로는 호위를 위한 곰과 늑대가 멋들어지게 포진했다.

     

    마차가 아니라 저걸 뭐라고 해야 하나.

    상(象)차?

     

    기수에서는 푸른 장발을 휘날리는 그녀가 당당하게 가슴을 쭉 뻗었다.

     

    기슈타다.

     

    “라―――― 스!!”

     

    아직 멀리 있어서 점으로 보일 지경이건만, 시력이 한참 좋은 기슈타는 나를 곧장 알아봤다.

     

    문제는 그 즉시 매머드에서 뛰어오르더니, 마차 행렬 위를 쾅쾅 밟으며 전속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군중이 겁에 질려 혼란에 빠졌다.

    한 마리 야생동물처럼 패기를 내뿜으며 돌진하는 그녀를 처음 보면 뭐, 비슷한 생각이 들지 싶었다.

     

    “하하하하하하하!!”

     

    도플러 효과와 함께 웃음이 점점 커진다.

     

    기슈타는 높은 성벽도 순식간에 기어 올라와서는, 벽을 탄 채로 상체를 내밀어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라스, 보고 싶었다!”

     

    “나도. 근데 검문 없이 여기를 넘으면 불법 침입이 되걸랑.”

     

    “음?”

     

    기슈타는 그제야 나 이외의 주변 시야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왕국 경비대 수십 명이 식겁해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기슈타를 향해 활을 조준하고 있었다.

     

    “그렇군! 우리도 허락 없이 경계를 넘는 놈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이해력이 좋은데.”

     

    “아씨가 곤란해져서야 큰일이지. 잠시 후에 다시 만나자!”

     

    기슈타는 호쾌한 웃음을 남기고 성벽에서 훌쩍 뛰어내려 본대로 돌아갔다.

     

    타냐가 여전히 겁먹은 경비대를 설득하느라 고생했다.

     

     

     

    ***

     

     

     

    무사 입성한 네리아와 만난 후, 그녀를 호텔까지 안내했다.

     

    제국 귀족이라 일반 호텔을 안내해줄 줄 알았는데 귀빈 쪽 명단에 이름이 있었다. 아셀라와 같은 호텔을 쓸 수 있었다.

     

    기슈타와 천둥족이 주차할 마구간이 없어 곤란했기에, 그쪽은 브루노를 시켜 관리하도록 했다.

     

     

     

    수속을 마무리하고, 네리아와 함께 시내의 카페를 하나 찾았다.

     

    “왕국의 과자는 어마어마해요….”

     

    네리아는 디저트 코스로 나온 케이크와 과자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입에서 침을 늘어뜨렸다.

     

    “이쪽도 드셔보시죠.”

     

    타냐가 벌써 메뉴 파악을 끝내고는 잔뜩 주문해서 네리아의 앞에 예술적인 조형으로 그릇을 쌓았다.

     

    뷔페가 따로 없네.

     

    “오라버니랑 만날 때는 항상 입안이 즐거워져요.”

     

    어느새 네리아가 겨울철 다람쥐처럼 생크림으로 볼을 빵빵하게 가득 채우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간식 잘 못 먹어?”

     

    “용돈 범위 안에서 먹어야 하니까요. 일주일에 한 개뿐이에요. 그래서 신중하게 골라야 해요.”

     

    “제약공장 수입은 어쩌고 용돈?”

     

    “저는 아직 미성년자잖아요. 벌써 돈을 마음대로 쓰면 습관이 나빠져요. 공장 기금은 저희 가족의 재산이기도 하구요.”

     

    자기관리가 착실한 네리아였다.

    역시 공장을 맡긴 건 좋은 선택이었다.

     

    “아, 공장 내역이 보고 싶다고 하셨죠. 이 정도에요.”

     

    네리아가 내게 서류철을 하나 넘겨주었다.

     

    내역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순익이 이렇게나 나와?”

     

    “에헤헷.”

     

    한 십 년 운영하면 진짜 작은 나라도 하나 만들겠는데.

     

    내가 기억하는 약품의 평범한 가격 선에서, 서민에게 부담 없을 소비가가 되도록 원가를 설정했었다.

     

    개발비나 원료비가 크게 생략됐고 지금은 세금도 없으니 이 결과도 당연한가.

     

    “외국으로 유통 루트는 안 뚫었지?”

     

    “네. 지금은 월광궁 관리하에 제국 안에서만 판매하고 있어요.”

     

    “그럼 왕국으로 들어오는 건 밀수품이 맞단 소리네.”

     

    이걸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는데 옆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고트베르크 선생님. 여기서 다시 뵙네요?”

     

    찰랑거리는 적발. 다름 아닌 페르시야 1왕녀였다.

     

    가벼운 복장의 그녀는 품격은 있어도 서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존안을 뵙습니다, 왕녀님. 서민 체험이라도 나오셨는지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동생이 맘에 들어 한 가게라 자주 들리고 있어요.”

     

    내게 생글거리는 미소를 보내는 왕녀.

    멀지 않은 테이블에 왕녀의 일행이 보였다.

     

    기사…는 아니고 호위로 보이는 검사가 두 명. 그리고 특이하게 휠체어에 탄 소년이 한 명 있었다.

     

    “왕자님이십니까?”

     

    “네. 저희 막내에요.”

     

    네리아 또래 정도로 보이는 왕자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해왔다.

     

    나는 그에게 목례로 답장하며, 직업병이라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진단]을 사용했다.

     

     

    ―――――――――――

    · 이름 : 고든 A 윌리엄스

    · 체력 : 14 / 14

    · 부상 : 후천성 척수 손상에 의한 하반신 마비

    ―――――――――――

     

     

    “왕국의 3왕자는 들어보신 적 없죠?”

     

    “그렇군요. 승계권이 있는 왕자님은 두 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어릴 때 다리를 다쳤어요. 저렇다 보니 대외적으로는 잘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쪽은… 어머, 혹시 고트베르크 가문의 영애신가요?”

     

    왕녀라는 단어를 듣고 이미 준비를 마친 네리아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귀인과의 일면을 허락한 주후의 우연에 감사를 표하고 싶네요. 네리아 고트베르크랍니다.”

     

    “어머나, 이리도 사랑스러우실 데가.”

     

    페르시야 왕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품 있게 웃었다.

     

    “그런데 영애님의 성함은… 혹시 고트베르크 제약공장의 대표님이신가요?”

     

    “그렇답니다. 알아주셔서 영광이에요.”

     

    “세상에, 약품을 고안하신 선생님뿐만 아니라 양산해주신 대표님까지 만날 수 있다니. 이번 연무회는 정말이지 즐거워요.”

     

    1왕녀는 나와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네리아까지 마침 만났으니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고 여기려나.

     

    하지만 그녀가 먼저 꺼낸 서두는 조금 예상외의 주제였다.

     

    “두 분께는 항상 감사를 표하고 싶었답니다.”

     

    “그래요?”

     

    “네. 고트베르크 선생님께서 만드신 진통제 덕분에 고든… 저희 막내가 편하게 잠들 수 있게 되었거든요. 제국의 신기술에 대해서는 몇 년 전부터 소식을 들었어요. 네리아 대표님의 공장이 아니었다면 왕국까지 약이 전해질 수도 없었겠지요.”

     

    왕녀가 기품 있게 고개를 숙였다.

     

    “진심을 담아 두 분께 감사드려요.”

     

    네리아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 그러지 마셔요. 감사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요. 공장을 세우는 일도 오라버니 아이디어였어요.”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내게 시선을 돌리는 페르시야.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어졌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쁜 일입니다만, 본래 제 약품은 제국 안에서만 유통되도록 판매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경로로 입수하셨는지 여쭤봐도 될지요.”

     

    “슈프레 상단을 통해 구매했어요. 정기적으로 왕국에 수입한답니다.”

     

    “타국으로 수출은 허락 안 했을 텐데.”

     

    페르시야 왕녀가 쿡쿡 웃었다.

     

    “후후. 물품의 대량 관리는 칼로 할 수 없는 법이지요. 특히 선생님의 약품 같은 인기품은요. 슈프레 상단은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니 제국에서 압력을 가한다고 얌전할 이들도 아니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을 관리해야지요. 사람을 관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돈이고요.”

     

    왕녀가 당연한 상식이라는 듯 대답했다.

    자유시장경제가 정착한 왕국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런 점은 왕국이 제국보다 근대화가 되어있다.

     

    “저도 선생님의 약품을 직접 구매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답니다. 이제는 동생에게 꼭 필요한 생필품이거든요. 하지만…”

     

    “제국과 왕국은 적국이지요.”

     

    “네. 독자적으로 무역 루트를 만들어서야, 제국의 미움을 살 테니 선생님의 입장이 곤란해지겠지요.”

     

    왕녀는 꽤 감각이 있었다.

     

    아마 그녀가 원하는 건 상단을 통하지 않은 내 약품의 직수입.

    그 비즈니스 이야기를 꺼내며 자연스럽게 이쪽 입장을 먼저 배려해준다.

     

    일단 내 신뢰를 사려는 노력을 보였기에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고자 했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지요.”

     

    “아, 감사 인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그게 전부인가요?”

     

    “네.”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니 왕녀가 순진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너무 경계했나.

     

    당연히 좀 더 꾸미는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정말 단순한 호의였던 모양이다.

     

    오늘도 동생이랑 단순히 나들이 나온 걸로 보이고.

     

    ‘그간 너무 제국 황궁에서 아셀라에게 물들었을지도 모르겠네.’

     

    나 같아도 네리아를 도와준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먼저 찾아가서 인사를 할 텐데 말이야.

     

    ‘밀수입은 없애고 싶은데.’

     

    페르시야 1왕녀는 꽤 경제 감각은 있다.

    약품 직수입에 대한 이해관계도 일치하고.

     

    내가 알기로는 여성 왕족에게 승계권은 없어, 그녀는 정치권에 크게 관계가 있지는 않다.

     

    내게 접근한 것도 정치적인 의도는 적을 터.

     

    하지만 왕족이니 권력은 있다.

     

    ‘방법이 있겠는데.’

     

    막내 왕자, 고든을 돌아본다.

     

    생각을 마친 후,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왕녀님,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제안이요?”

     

    “적국끼리의 합법적인 무역이 문제죠. 지금은 상단을 통해 서로 밀수입처럼 물건이 오고가는 실정이니까요.”

     

    “그렇지요.”

     

    “마침 연합군의 연무회가 있으니, 저와 왕녀님이 화합의 상징이 되면 어떻겠습니까?”

     

    내 질문에 왕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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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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