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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0

       견학 다음 날인 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레카체프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청강생들은 첫날 조직한 대로 서로 무리를 지어 움직였다.

         

       레이나를 따라다니는 10대 스타들은 극이나 무대 연출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각자가 이미 하나의 현장을 책임지고 있는 프로 곡예사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실력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엘리트들에게 얼마나 통할지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실기 수업 위주로 참여했다.

         

       반면, 엘라를 중심으로 모인 드래프트 출신 아이들은 실기보다는 이론에 대한 욕망이 컸다. 그들은 원래 입학과 입단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입단을 선택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포기한 학업에 대한 미련이 꽤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이론이나 그룹 활동 위주로 참여했다.

         

       엘라는 이미 입학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았기에 실기에는 큰 욕심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네 그룹 아이들을 따라 명문 학교의 교육 과정을 탐방하는 것에 집중했다.

       사부님의 교육방식과 비교하면서 말이다.

         

       세 번째 그룹은 애초에 제각각이었기에 공통점이랄 게 없었다.

       그들은 각자 원하는 시간표를 짜서 수업을 들었다.

         

       카렌은 자신의 시간표를 마야의 것에 맞춰 그녀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나 성실히 수업을 듣는 마야와 달리 그녀는 강의시간 내내 딴짓을 하거나 졸았다.

       

       그나마 나른한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때는 마야가 말을 걸 때였다.

         

       마야는 다른 애들과 달리 서커스랑 인연이 없던 사람이었다.

         

       레카체프 쪽의 수업은 기초 강의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어려운 곡예 시험을 통과한 엘리트들을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기본 상식은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넘어갔다.

         

       덕분에 마야는 수업을 듣다가 종종 난관에 부딪혔다.

       그녀는 그걸 주로 옆에 있는 카렌에게 물었다.

         

       “교수님이 칠판에 적어준 TS, NTR, BL이 무슨 말인지 알아?”

         

       카렌은 교탁이 있는 쪽을 슬쩍 바라보더니 하품을 쩍 하며 답했다.

         

       “으음? 저것들 말이지……. TS는 Tilt Slightly, 조명으로 대상을 조금 기울여 비추는 걸 의미하는 거야. 주로 무대 연출을 지시할 때 쓰지. NTR은 Narration Talk Range, 관객들에게 1인칭으로 해설할 때의 거리감을 나타내는 단위야. 5단계는 독백이나 다름없고, 1단계는 관객과 직접 대화하는 토크쇼지. 참고로 스탠딩 코미디는 보통 3단계야. 그리고 BL은 Bilingual Language. 극에서 2가지 언어가 혼용되는 경우를 말하는 거야. 왜 있잖아. 일부러 극 중에서 이들은 외국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경우…….”

         

       카렌은 잠에서 막 깬 상태에서도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어릴 때부터 오빠가 집에 두고 간 서커스 교과서를 벗 삼았던 그녀였다.

       지옥 같던 시절에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꾸역꾸역 집어넣었던 지식이었는데,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머릿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마야는 그녀의 학식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의외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카렌은 곧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외쳤다.

         

       “뭐야, 마야, 너. 그럼 내가 지금까지 무식해 보였다는 거야?”

       “거기 청강생 조용히 하세요!”

         

       조교의 외침에 카렌은 후다닥 입을 가렸다, 그녀는 마야를 향해 억울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는 얄밉게도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동작을 해 보였다.

         

       이게!

         

       카렌은 욱해서 그녀를 향해 몇 마디 던지려 했다.

       그때, 뒤에서 선배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쟤 되게 시끄럽지 않아?”

       “쉬는 시간부터 저랬어. 목소리도 크고. 말도 거칠고.”

       “정작 수업 시작하니까 졸던데?”

       “왜 강의를 들으러 온 거지? 한심하네.”

         

       그들이 남자였다면, 카렌은 엿이나 먹으라고 욕을 내뱉어줬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여자였다.

         

       카렌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친해지고 싶은 애는 자신을 무시했고, 여자애들은 뒤에서 자신을 씹어댔다.

       갑자기 학교 온 게 후회됐다.

         

       그냥 숙소에서 연습이나 할걸.

         

       그녀는 급격히 우울함을 느끼며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녀는 잠이 들었다.

       마야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

         

       “으응? 마야?”

       “수업 끝났어.”

         

       마야가 차갑게 툭 내뱉었으나, 카렌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그녀가 자신을 챙겨줬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음은 표준 맨손 체조야.”

       “아, 그건 말이지! 몸풀기에 사용되는 건데…….”

         

       카렌은 언제 울적했었냐는 듯 신나서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아까 봤던 선배들이 또 자신을 보고 쑥덕대는 것을 보았지만, 이번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마야는 다른 전공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몸을 단련하지 않은 그녀가 땅재주나 줄타기, 힘자랑을 배운다는 것은 무리였다.

       길들이기의 경우, 애초에 키우고 있는 동물이 없었기에 논외였다.

         

       그녀는 오직 ‘쏴’ 하나에만 모든 시간을 쏟아 붙었다.

         

       쏴에 필요한 ‘공간 지각력’과 ‘적절한 힘의 배분’은 그녀가 환상 마법과 염동력을 익힐 때, 극한으로 단련했던 것이었다.

         

       3차원 공간의 계산은 원래부터 그녀의 특기였으며, 미세한 힘의 조정은 물감을 입자 단위로 분사해 초상화를 찍어냈을 때부터 세상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훌륭하군요. 누구에게 배웠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교수는 완전 초보인 그녀가 투척 실습에서는 시키는 것을 척척 해내는 게 신기했다.

       그의 질문에 마야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희 단장님이요.”

         

       가슴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 순간 그녀는 마침내 파피락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력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완벽하게 손에 넣었다.

         

       원더스타인은 마법사인 그녀의 스승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신분도 수상쩍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한낱 마도사의 제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장차 학계에서 살아갈 그녀의 앞길에 장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마 그분의 배려를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그를 스승이라 부를 만한 다른 방법을 발견했다.

         

       바로 그녀 자신이 곡예사가 되는 것이다.

       비록 마법사로서 그를 스승이라 부르지는 못하지만, 곡예사로서 스승이라 여기는 것은 그분도 상관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시도한 것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교수는 과연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더스타인 서커스단이라고 했죠? 엘라 학생을 키워낸? 단장님이 잘 가르쳐주나 보군요. 제자인 마야 학생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제자.

       그 말에 마야는 좀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마야가 막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그녀는 레이나와 얼굴을 마주쳤다.

         

       레이나 쪽은 마야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며칠이라도 한솥밥을 먹은 동료라는 생각이 들었기 대문이다.

         

       그러나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탓에 그것은 비웃음으로 보이고 말았다.

       그것에는 둘의 키 차이 때문에 그녀의 눈빛이 상대를 깔아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한몫했다.

         

       마야는 울컥했다.

       상대의 속내가 짐작이 갔다.

         

       고작 ‘제자’로 불리는 것에 만족하냐고 묻는 것일 것이다.

       자신은 이미 단장님과 몸을 섞은 사이라고.

         

       마야는 적대감을 담아 그녀를 쏘아봤다.

       나름 반갑게 인사를 건넨 레이나는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 움찔 놀라 시선을 피했다.

         

       쟤가 왜 저러지? 내가 뭘 잘못했나?

         

       그녀는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특유의 싸늘한 표정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야의 작은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몸으로 단장님을 유혹한 천박한 계집 따위가.

         

       둘 다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그러다 둘 다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시선을 떼고 제 갈 길을 갔다.

         

       “너는 유독 쟤를 싫어하는 것 같더라. 너만 그런 건 아니지만.”

         

       카렌이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였다.

         

       레카체프의 아이들은 다들 레이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와 로드 판타스틱이 건 수작도 수작이지만, 그녀가 몰고 다니는 10대 곡예사 그룹이 얄미운 것도 있었다.

         

       레이나에게 지는 것은 워낙 실력 차이가 크기 때문이라고 납득할 수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지는 것은 엘리트인 그들의 자존심상 용납이 되지 않았다.

         

       현장에서 흥행으로 밀리는 건 몰라도, 순수하게 기술로 패하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젠장, 클라라만 있었다면, 저런 애들은 다 발라버렸을 텐데.”

       “하필 몸이 안 좋아서…….”

         

       학생들은 체육관 구석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파란색 머리카락의 이지적인 외모의 여학생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침착한 표정으로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을 그녀가 지금은 호기심을 숨길 수 없는 눈으로 그들의 연습을 바라보며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녀는 며칠간 어딘가 나사 풀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확실히 아프긴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클라라, 다음 수업을 들으러 갈 시간이야.”

       “응? 정말? 그럼 가자!”

         

       클라라가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

       천진난만한 그녀의 태도에 친구들은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말투는 분명 그녀가 맞았다.

         

       하지만 평소의 그녀는 말은 부드럽게 하면서도 묘하게 거리감을 두는 태도와 사람을 평가하는 듯한 눈빛으로 마냥 친근하게 대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그녀의 그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말과 행동이 그대로 일치하는 느낌이었다.

       ‘친절한 클라라’가 ‘친절해 빠진 클라라’로 변했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감정 표현에도 훨씬 솔직해졌다.

         

       음식 하나를 먹으면서 감동에 젖는다거나, 비싼 향수를 맡고는 흥분하여 얼굴을 붉힌다거나, 지나가던 개의 털을 쓰다듬으며 부드럽다고 헤실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 외에도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얼빠진 짓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설마 그녀의 정신이 뒤바뀌었다고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이 시대에는 진통제를 맞은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처럼 행동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곳에서 처방되는 약은 과학이 발전한 세상에서는 향정신성 물질, 즉, 마약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다수 첨가되곤 했다. 종종 감기약 먹고 바보가 됐다는 소리는 여기서 나오는 것이었다.

         

       클라라의 옆에 늘 붙어 다녔던 친구들은 그녀의 변화가 낯선 동시에 반가웠다.

       모범생을 고수하던 친구가 강박적으로 유지하던 가식이 벗겨진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킥킥, 사실 속으로는 이런 애였구나. 그동안은 왜 그랬대?”

       “성격이잖아. 어쩌겠어.”

       “나중에 약에서 깨면 부끄러워하겠지?”

         

       친구들은 그녀가 벤치에서 가방을 챙겨오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항상 완벽하게 통제된 걸음을 걷던 그녀가 허둥지둥 뛰어오는 모습은 웃기기 그지없었다.

         

       “서두르자.”

       “후원으로 가야 해. 길들이기 수업이잖아.”

         

       친구들의 말을 들은 클라라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건 그녀가 제일 무서워하는 시간이었다.

         

       “왜 그래? 아, 맞다. 너 족제비가 아프다고 했지? 이상하게 너한테 공격적이라고.”

       “교수님이 살펴봐 주신다고 했잖아. 심각한 병은 아니래?”

       “으, 응……. 그냥 갑자기 이상해졌어…….”

         

       클라라는 그렇게 우물쭈물 둘러댔다.

       차마 녀석이 주인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을 눈치챘다고 말할 순 없었다.

         

       길들이기 수업은 레카체프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오늘 수업은 ‘이형에 대한 사회화’ 실습으로 다른 생김새를 가진 동물들끼리 서로 익숙해지고 적대감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파이렌은 조교에게 수업의 감독을 맡기고 동물 없이 혼자서 멀뚱히 서 있는 여학생에게 말했다.

         

       “클라라 학생, 잠시 저를 따라오겠어요?”

         

       친절하고 사려 깊은 목소리였지만 클라라에게는 악마의 속삭임으로 들렸다.

       그녀는 긴장한 빛을 숨기려 했지만, ‘표정 관리’는 ‘감각에 대한 반응 억제’만큼이나 그녀에게 어려운 과제였다.

         

       그녀는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교수님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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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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