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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0

       무사히 바렌베르크가 해방되고, 나는 지금 하사받은 영지의 관공서에 와 있다.

       

       원래도 바렌베르크의 국민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이지만, 제국의 소유에서 내 영지로 이전되어 일거리가 폭포 쏟아지듯이 몰려와 도저히 쉴 틈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바렌베르크의 관료 출신인 자들이 많아 업무를 도와줄 사람들이 있다는 점일까.

       

       “전하, 그래도 저택은 지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바렌베르크의 관료였던 라그시아가 물었다. 그녀는 내 직속이었던지라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나는 데카르트 공작가에 거주할 예정이니 굳이 저택을 지을 필요는 없다. 차라리 그 돈과 물자로 그대들이 머물 집을 하나 더 짓도록.”

       

       후작저는 나중에 필요할 때 지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곳에 많이 올 일도 없으니.

       

       “하오나 전하께서는……”

       “라그시아.”

       

       나는 라그시아의 말을 끊었다.

       

       “이젠 전하가 아니라 후작님이라 부르도록.”

       “…예, 전…… 후작님.”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일그러트리는 라그시아. 전하라고 부르지 못하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나.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도 잠시. 라그시아의 동기였던 리프레나가 일을 마치고 관공서로 돌아왔다.

       

       “후작님. 영지 관리를 위한 일손을 데려왔다 하옵니다. 다들 왕국의 관청에서 일하던 자들입니다.”

       

       그럼 영지의 잡다한 행정 업무는 괜찮겠고.

       

       “마수가 출현하는 곳이라 영지를 지킬 사람이 필요한데. 병사나 기사 출신이었던 자들은 있나?”

       “있사옵니다. 이곳이 바렌베르크 후작령이 되기 전, 제국군과 같이 안전 관리를 맡고 있었사옵니다.”

       

       내가 없는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잘 살아가고 있었구나.

       

       “다행이군. 인원이 얼마나 되지?”

       “그리 많지는 않사옵니다.”

       “그럼 외부에서 인원을 보충해야겠군.”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자 리프레나는 내게 서류 하나를 건넸다.

       

       “영지 관리에 필수적인 일들을 정리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필요한 직책들도 모집하였고요. 서류에 인적 사항과 모든 것이 적혀 있으니 확인하여주시길 바랍니다.”

       

       말도 안 되게 일을 잘한다. 말하지 않아도 이런 걸 정리해올 줄이야.

       

       “확인해보지.”

       

       팔락. 나는 서류를 넘기며 리프레나가 정리한 자료들을 확인했다.

       

       관리와 운영에 필요한 직책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관련 업무를 했었던 이들의 정보도 들어가 있어 추천 인물까지 적혀 있었다.

       

       “흐음.”

       

       영지를 유지하는 자원 관리와 무역은 괜찮다. 제국과 데카르트의 지원으로 물자가 부족할 일은 없을 테니.

       

       “그래, 리프레나에게 영지의 총 관리장을 맡기도록 하지.”

       

       이 자료를 보니 적합한 인재다. 그녀만큼 영지의 기관을 잘 운영할 사람은 없다고 판단했다.

       

       “제게… 말입니까?”

       

       그러자 리프레나는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그래. 그대는 모든 행정 업무의 최고 결정권자가 될 거다. 영지의 관리를 맡기지.”

       

       영지 운영의 결정은 되도록 내가 하고 싶지만, 나는 공작가에 있어야 할 몸이라 업무 처리도 늦고 정보를 전달받아야 해서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

       

       반면, 여기서 살아갈 리프레나는 일도 잘하고 경험도 많으니 관공서 쪽은 그녀에게 맡기는 게 좋겠지.

       

       “그리고 라그시아.”

       “예, 전… 후작님.”

       “그대에겐 영주 대리인을 맡기지.”

       “영주 대리인 말입니까…?”

       “그래.”

       

       나라가 멸망하는 날까지 내 직속으로서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킨 그녀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나는 공작가에 있어야 하는 몸이라 그대와 리프레나가 바렌베르크 후작령을 대신 운영하고 통치하게 될 거야.”

       

       영주 대리인이라는 직책이 내키지 않는지, 라그시아는 입술을 머금으며 망설였다.

       

       “그저 그대를 신뢰하여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도록.”

       

       원래라면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녀들에게 넘기게 되어 다소 무책임하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따로 있다.

       

       “인력 관리, 영지 안보, 시설 구축과 유지. 이 모든 것들을 그대들에게 맡기지. 세금은 그대들과 영지를 위해 사용하고.”

       

       나는 여기서 한 푼도 가져가지 않을 거다. 필요하지도 않고, 받고 싶지도 않고.

       

       “무역과 자원 쪽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 그리 알고. 영지 내정에만 신경 쓰도록.”

       

       이것으로 통지는 끝났다마는.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리프레나는 그렇다 치고, 라그시아는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무 일을 떠넘겼나?’

       

       나도 양심이란 게 있어 눈치가 보였기에 조심스레 물었다.

       

       “라그시아. 나는 모든 의견을 존중할 테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지금 말하도록.”

       

       그제야 라그시아는 머금었던 입술을 열었다.

       

       “전… 후작님께서 영지에 남아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이제야 다시 만났는데…….”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건 나와 같이 있을 수 없어서 그랬던 건가.

       

       “…미안하지만, 불가능하군.”

       

       아쉽게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들의 곁이 아닌, 프란체의 옆이다.

       

       진 바렌베르크는 더 이상 왕족이 아니니까.

       

       그리 불릴 자격도 없고.

       

       “너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데카르트와 제국의 보조가 들어가서 바렌베르크 영지는 풍요로워질 테니.”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처음만 지나면 업무도 그다지 많지 않을 거야. 라그시아와 리프레나는 남은 바렌베르크의 국민들과 즐거운 여생을 보냈으면 좋겠군.”

       

       편안한 삶을 제공하는 것. 이게 지금의 내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이자 마지막이다.

       

       “…저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시다니요.”

       

       응?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남은 저희를 위해 원수와도 같은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시고, 공작과 혼인을 진행하시다니. 저는 도저히…….”

       

       라그시아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전하… 아니, 후작님. 저 라그시아 린델레프는 후작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바렌베르크 국민들을 통치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전하… 후작님이십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맞습니다! 저도 후작님의 곁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부디 영지에 남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리프레나도 가세했다.

       

       뭐지. 얘네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잠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 그대들이 하고 있는 생각을 말해주겠나?”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묻자 라그시아가 대답했다.

       

       “전하… 후작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사실 바렌베르크에 해방이 온 것도 전… 후작님께서 피와 땀을 흘리며 노력하셨기에… 크흡…!”

       

       이윽고 라그시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거친 호흡. 감정이 과잉되며 과호흡이 온 것이다.

       

       “그런데… 흐끅! 끝까지 저희를 위해 데카르트 공작과, 혼인을… 하시겠다니요…! 저는 도저히 죄송해서, 전… 후작님의 눈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라그시아, 리프레나. 나는 강제로 데카르트 공작님과 혼인을 하는 게 아니야.”

       

       일단 부정은 했다마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끝까지 저희의 죄책감을 없애시려고…!”

       “대체 어디까지 희생하시려는 겁니까, 후작님…!”

       

       아무래도 이들에게 긴 설명이 필요할 거 같다.

       

       나는 그렇게 책임감 있는 왕족이 아니고.

       

       모두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 * *

       

       

       바렌베르크 영지의 기초 업무를 끝내고 오해까지 풀어낸 뒤. 나는 바로 마차를 타고 데카르트로 돌아왔다.

       

       “진!”

       

       공작저의 정문에서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는 프란체. 나는 마차에서 내리곤 그녀를 끌어안았다.

       

       “기다리고 계셨나요?”

       “응. 많이.”

       

       포옹에 이어서 가벼운 입맞춤까지. 나와 프란체의 기본 인사가 되어버렸다.

       

       “내일이면 기다리던 결혼식이네.”

       “그러네요.”

       

       한시라도 빨리 그녀와 정식적으로 맺어지고 싶어서 그런지, 체감상 너무나도 긴 일주일이었다.

       

       “일단 들어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와 함께 공작저로 들어왔다.

       

       식당으로 오니 만찬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모두들.

       

       이번에는 보기 드문 엘반 자작과 안드레아도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바렌베르크 후작님.”

       “호위기사… 아니, 후작님 오랜만입니다!”

       

       반듯하게 인사하는 엘반 자작과 안드레아.

       

       “오랜만입니다. 엘반 자작님. 그리고 안드레아.”

       

       가볍게 인사를 받아주곤 자리에 앉았다.

       

       상석의 프란체. 그 오른쪽에는 나. 그리고 긴 탁자를 꽉 채운 모두.

       

       싸늘하던 공작저의 식당은 그 어느 때보다 북적였다.

       

       아, 참고로 셀다스는 오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다들 모였으니 식사를 시작하자. 오늘이 있을 수 있던 건 이 자리에 모인 모두들 덕분이야.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했으니 많이들 먹으렴!”

       

       프란체가 웃으며 식기를 들자, 결혼식 전의 예비 행사 만찬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벌써 내일이 결혼식이네요?”

       “혹시 결혼식에선 맛있는 술이 나오나?”

       “…결혼식에 술이 나왔나?”

       “보통은 결혼식 이후 열린 연회에 나오죠.”

       

       가볍게 잡담을 나누는 케일과 라데아, 라이아 자매.

       

       “공작님, 저는 내일 어떻게 참여하나요?”

       “음… 위장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제 머리랑 눈을 숨길 수가 있을까요?”

       “힘들 거 같네. 너무 눈에 띄니까.”

       “그러면 로브를 쓰고 있어야 하나…….”

       

       혹시라도 정체를 들킬까 노심초사하며 걱정하는 달리아.

       

       “달리아 씨, 혹시 성별 전환 마법 아세요?”

       “그런 마법도 있나요?”

       “네. 특이하죠? 속성 마법은 쓸 수 없는 대신 위장은 확실하게 가능해요. 어떠세요?”

       “…그냥 이대로 숨어다닐래요.”

       “아쉽네. 달리아 씨가 남자로 변하면 진짜 미남이 될 거 같은데.”

       “저 주치의예요. 신성 마법을 못 쓰면 여기 있을 이유가 사라진다고요.”

       

       그런 그녀에게 이상한 마법을 추천하며 약을 파는 카자르.

       

       마치 바람이 살랑이는 초원에 온 것처럼 느긋하고 평화로워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프란체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행복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와는 정반대인 표정.

       

       언제나 권태로움으로 가득하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싸늘하게 식었던 마음은 따뜻하게 데워졌고, 그녀의 곁에 맴돌던 외로움과 고독함은 다채롭게 채워졌다.

       

       나로 인해서 프란체의 모든 게 달라졌다.

       

       “진?”

       

       대답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마주하는 프란체. 나는 픽 웃었다.

       

       “그냥 꿈을 꾸고 있는 거 같아서요.”

       “꿈?”

       “예. 절대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이네요.”

       

       내 말을 들은 프란체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꿈이 아니야. 다 현실이야.”

       

       이어서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나를 비추었고.

       

       “네가 있어서 나는 이 자리에 있고.”

       

       따스한 손길로 내 뺨을 쓰다듬었으며.

       

       “네 덕분에 행복이란 걸 알게 됐어.”

       

       환한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고맙고 사랑해, 진.”

       

       프란체가 웃으며 사랑을 속삭이자, 마치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의 보상을 받은 기분이라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저도 사랑해요.”

       

       나는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내일이 되면 이 짝사랑은 정식적으로 막을 내리겠지.

       

       길었던 삶이었다.

       

       정말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내일 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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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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