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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0

       

        

        

       “어제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속이…어으.”

        

       “많이 먹더라니.”

        

       “유진 씨만 만나면 이상하게 고기만 엄청 먹게 되는 것 같아요.”

        

        

        

        그도 그렇긴 하네.

        

        사전 브리핑 날의 점심과 저녁, 그리고 당장 어제 저녁. 여태까지 다이스를 현실에서 만난 횟수는 세 번이었고, 그 당시 먹었던 건 전부 고기였으니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붉은 살코기에 지방이 눈송이처럼 자잘하게 박힐수록 최고로 치는 한우 특성 상, 많이 먹을수록 혀와 목구멍, 그리고 위장에 직접 기름칠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겠지. 나야 그렇다쳐도 다이스는 힘들 법했다.

        

        게다가 남의 먹방을 보면 음식이 더 잘 들어간다는 이야기처럼, 평소보다도 좀 더 많이 먹었으니…돌아가는 길에 택시에서 토하지는 않았나 모르겠다.

        

        컨디션에 무리 없으라고 모범택시까지 태워줬는데 말이야.

        

        

        

       “그러길래 자고 가라니까요.”

        

       “…지금 생각하니 진짜 그럴 걸 그랬어요.”

        

        

        

        하지만 후회는 늦고 내일 스케줄은 빠른 법.

        

        안타깝게도 30초마다 한 번씩 꾸에엑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는 다이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은 내가 위치한 곳은 현실이 아닌 VR 내부였다. 월요일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한국 1군이 출전해야 하는 화요일이 도래한 것이다.

        

        마치 오케스트라 악기 배치도처럼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뉜 좌석. 사회자의 자리이기도 한 연단을 중심으로 스무 개의 의자가 한 섹션에 밀집, 그런 섹션이 총 다섯 개. 그 뒤로도 좌석은 방사형으로 퍼져나간다.

        

        의자가 스무 개인 이유는 당연하게도 한 국가의 최대 출전 인원수가 20명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다이스를 포함하여 총합 스무 명의 한국 1군 유저들이 아직 시작하지 않은 스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이렇게 편하게 앉는 건 오래간만이네요.”

        

       “…아, 맞다. 꼬리 데이터 껐다고 하셨나.”

        

        

        

        그 말대로였다.

        

        일단 대외적 이유는 형평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물리적 상호작용만 불가능할 뿐이지 데이터는 그대로 남아있어서 시청자들이 볼 수도 있었고, 꼬리를 통한 조향과 무게중심 잡기는 여전히 가능했다.

        

        따라서 이제는 VR에 한하여 뒤가 막혀있는 의자에 착석하는 것도 가능했다. 상당히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마음 편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감각은 현실에서는 쉽사리 느끼기 어려우니까.

        

        

        시간은 금방금방 흐른다. 특히나 경기 전까지 봐야만 하는 게 많다면 더더욱. 기존에 상정했던 여러 전략들을 한 번 더 검토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티밍이 불가능하도록 스무 명의 유저들은 가능한 한 최대한의 간격을 두고 배치되기 때문에 동선이 여러모로 중요했다.

        

        힐끔. 조금만 눈을 옆으로 흘기니 어느샌가 타국의 2군 유저들이 각자의 섹션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시선이 몇 번 마주친다. 나름대로 결연한 표정이다.

        

        저들 역시도 한끗 차이, 그리고 한 발자국 차이로 자국의 국가대표에 소속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말로는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압살해야 한다지만, 세상 일이란 쉬운 게 하나도 없는 법이다.

        

        

        사회자가 터벅터벅 들어온다. 당연하게도 분위기는 이전보다 훨씬 엄숙했다. 지금은 환호성을 터뜨릴 때가 아니었다. 그 점이 여러모로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환청이라 해야 하나. 수백만 명 분량의 환호성이 귓전에 맴돌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 자리까지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지금쯤 많은 분들이 한국을 찾아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일본, 러시아, 중국, 대만…어느덧 아시아의 맹주들과 기량을 겨뤄야만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일주일.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모든 국가의 대표들이 예선전을 펼치는 나라에 입국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지금 서울의 호텔 어딘가에는 러시아, 중국, 일본, 대만의 대표선수들이 머물고 있단 뜻이겠지.

        

        사회자의 말은 그걸 어렴풋이 암시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즉각 이어지리라 예상했던 길고도 장대한 독려 연설 같은 건 따로 없었다.

        

        오히려….

        

        

        

       “자세한 경기 규칙은 저보다도 선수 분들이 더 잘 알겠지요. 더 이상 오래 붙잡아두는 것도 큰 의미가 없을 테니,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을 응원하겠습니다. 가진 모든 여력을 쏟아주시기 바랍니다.”

        

        

        

        소위 말하는 교장선생님 훈화보다 십수 배는 짧은 간략한 말과 함께, 사회자는 그대로 퇴장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간결해도 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에 힐끔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일단 다이스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 원래 이랬구나. 혹여나 하여 조금 더 뒤쪽을 둘러보았음에도 절반 이상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작년에 아시아 예선전에 출전한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단 뜻이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달리 할 필요가 있겠지.

        

        

        

       “이 다음 스케줄은 뭔가요?”

        

       “어…일단 스크림 시작까지는 30분 정도 남았으니, 그동안 간단한 교류라든가. 그 정도?”

        

       “간단한 교류요?”

        

       “네. 1군끼리만 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보통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타국 유저들이랑도 인사를 나누는 법이죠. 유진 씨는 저들을 몰라도, 저기에 있는 타국 2군들은 유진 씨를 알 테니까요.”

        

        

        

        그건 좀 무서운데.

        

        아마도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할 것 같아 물었다.

        

        

        

       “그럼 교류는 언제부터?”

        

       “으음….”

        

        

        

        불길한 정적.

        

        그리고 불길한 소음 – 공간이 완전히 재구성되며 나는 소리였다. 강당이 거대한 홀로 뒤바뀌며 백 명이 넘는 선수들이 제각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다지 별 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다이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바로네요.”

        

        

        

        두두두두.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들려오는…발소리? 지축이 뒤흔들리는 듯한 묵직함. 고작해야 한두 명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 명이 일거에 몰려오는 듯하다. 진동 감지에 특화된 뱀의 감각으로서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목적지는…이제 와서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다름아닌 나였다. 힐끔 시선을 돌려보자 무수히 많은 인파들이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각양각색을 넘어 형형색색의 아바타들이 내게 몰려드니 현기증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VR에서의 여아선호사상은 타국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누가 봐도 남자일 것만 같은 이들의 아바타는 전부 다 알록달록한 여캐들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다들 비주얼까지는 괜찮았단 뜻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미소녀들이 뭘 위해 다가왔냐 하니,

        

        

        

       “유진, 유진 선수는 어딨습니까!”

        

       “한 번쯤 만나고 싶었어요! 꼬리는 진짜인가요!?”

        

       “저기 계신다!”

        

        

        

        …?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하나로 뭉쳐진 거대한 발소리가 점차 멈추더니 내 앞에서 끊겼다. 이 정도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선두에 선 한 명이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무언가 했더니 악수였다.

        

        

        

       “그동안 유진 선수의 플레이를 보면서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혹시 뒤에 계신 분들도 전부?”

        

        

        

        끄덕끄덕.

        

        다들 국적은 다르지만 반응은 비슷했다. 어째서 내가 이렇게나 많은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걸까 하는 느낌에 약간 어안이 벙벙하긴 했다. 그러나 내색할 필요조차 없었다. 중요한 건 이들이 내게 호의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니.

        

        뭐라고 해야 하나, 아시아 예선전이라고 하면 으레 연상할 법한 날선 분위기가 아니다. 어쩌면 이들이 많은 걸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1군 멤버들이 아니라, 조금은 편하게 플레이 가능한 2군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진실은 저 어드메에 있는 법이었고, 그 자체로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축제 같은 분위기였기에 나 역시도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지금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었다.

        

        

        내 앞에 늘어선 이들은 대략 25명 정도.

        

        한국 유저들이야 이미 나와 잘 알고 지낸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번 스크림에 참여하는 반수 가까운 이들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있다는 소리. 이럴 때는 구태여 입을 열기보단 그저 반응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대략 10분 정도를 소모하여 얼굴도장을 찍은 뒤, 그제서야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과 함께 다이스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아시아 예선전 스크림이라고 하면 더 날선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아하하, 처음 겪는다면 그럴 수밖에 없죠. 이 시점에서 한두 번 정도는 꼭 일어나는데, 저는 유진 씨가 그 대상일 것 같았어요.”

        

       “뭔가 알고 계시는 눈치인데….”

        

       “히히.”

        

        

        

        그 후 이어지는 설명.

        

        

        

       “이런 일이 드문 건 아니에요. 알다시피 프로게이머들은 더 잘 하는 유저들의 플레이를 보고 분석을 반복하는 편이라, 그 과정에서 해당 유저의 팬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그래서 저런 거였구나.”

        

       “유진 씨야 요즘 장안의 화제니…되려 여태까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게 전 더 신기하네요. 그것도 정말 유진답긴 한데, 슬슬 조금은 신경써봐요. 인지도적인 면에서 말이에요.”

        

        

        

        끙. 할 말이 없다.

        

        그렇게 슬그머니 의자에 앉자, 다이스는 작게 웃음짓더니 덧붙였다.

        

        

        

       “뭐, 개인마다 입장은 다르긴 하죠. 본선도 아니고, 유진 씨가 다른 분들 어떻게 플레이하나 하고 시간 들여 눈이 빠져라 분석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냥 하던 대로만 하면 다들 좋아할 거고.”

        

       “하던 대로?”

        

       “그냥 마주치는 애들 전부 뚜까패는 거요. 유진 씨가 제일 잘 하는 거.”

        

        

        

       -[알림 : 스크림 3분 전.]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이상한데요.”

        

       “하하, 이제 와서요? 어쨌든 그것만 해도 다들 좋아할 테니, 굳이 이것저것 신경쓰지 마요.”

        

       “…그 말도 맞긴 하네요. 슬슬 준비하죠.”

        

       “그래야 유진 씨죠.”

        

        

        

       -[알림 : 첫 번째 맵은 고가치 연구 시설입니다.]

        

       -[알림 : 이동이 시작됩니다.]

        

        

        

        사전 준비를 위한 2분 가량의 시간.

        

        슬슬 다이스를 포함한 모두와 이별할 시간이다. 눈 앞이 백열했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맵의 전경이 나타난다. 머릿속으로 간단한 예상 동선을 몇 개 그려보았다. 어차피 저거넛의 움직임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체해야 하니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시곗바늘이 째깍거리고 있었다.

        

        전장의 흙먼지가 코 끝에서 아른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이 시간이 도래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을 직접 입으로 내뱉기에는 상당히 쪽팔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지금이야말로 유진의 진짜 실력을 확인해볼 수 있겠어’라든가, 대강 그런 건 어디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이나 할 법한 말이잖아.

        

        그러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지금 스크림에 임하고 있는 이들 중 20명을 제외한 전원이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단 건 상당히 특기할 만했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몇 번이고 말했듯 이들은 실력보다 좀 더 사소한 변수로 20위 아래로 떨어진 2군이었고, 강한 사람에게 압도되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니까.

        

        기대가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번도 겨뤄보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들이 유진의 플레이를 분석하며 얻어낸 데이터는 2군 유저들이 그녀와 직접 몇 번 정도 겨뤄보며 쌓은 정보의 양과 비슷-할 것이라고 추정되는 중이었으니.

        

        다시 말해서, 확신의 영역은 아니었다. 그저 그럴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었으나, 오늘을 기점으로 그 생각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명명백백하게 가려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부를 가려낼 수 있는 영예와 영광은 러시아 2군 22위인 토치카에게 가장 먼저 향했다.

        

        요컨대 가장 운이 좋게도, 그리고 나쁘게도 – 유진을 가장 먼저 조우한 유저라는 뜻이었다.

        

        

        

       ‘…저깄다!’

        

        

        

        흐릿하게 명멸하는 인영.

        

        어디론가로 느릿하게 향하고 있는 뒷모습 뒤에서 유진만의 아이덴티티가 기묘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고가치 연구 시설 특유의 부족한 조명빛 때문인지 꼬리라기보단 어둠이 꾸물렁대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계산이 시작된다. 유진 유저와의 거리. 현재 보유한 총기와 폭발물. 조정간의 상태. 도주로. 주변의 교전 상황. 그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잰다. 아쉽다면 아쉬운 점은 근거리 박투, 그러니까 기껏 배워놓은 CQC 같은 걸 쓰지 못한다는 점일까.

        

        아니, 반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만 한다고 말해야겠지.

        

        계산은 완료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

        

        

        

        스윽.

        

        그 순간 고개를 돌리며 눈동자를 바삐 움직이던 유진과 시선이 닿는다. 착각일까. 시선이 교차한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고요한 물결 같았던 마음이 삽시간이 부글부글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시선이 마주친 게 아니라, 과거 경험을 통해 ‘유사시 공격받을 수 있는 모든 지점을 최대한 빠르게 체크한다’는 유진의 개인적인 습관이라는 걸 그가 알기까지는 앞으로도 한참이 더 걸릴 예정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건 나중이었다.

        

        여전히 그는 자신에게 어드밴티지가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토치카는 신중히 숨을 고르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일단 머리에 한 발 맞춰 실드를 약화시키면 그때부턴 승산이 있을 터였기에.

        

        그렇게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소음기에 의해 억제된 총성과 함께 탄환이 적중했다.

        

        

        

       ───터엉!

        

        

        

        머리에 정확히 꽂힌다.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러나 회복하는 속도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머리에 적중하자마자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엄폐한다. 마치 자신이 연기에 대고 총을 쏜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광경.

        

        초탄은 명중했지만, 그 후의 차탄들 역시 맞아야만 한다는 대전제가 사정없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Блять…!”

        

        

        

        나지막히 러시아식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를 이탈.

        

        그러나 몸을 숨기기 위해 대형 분재의 풀숲 사이에 몸을 숨긴 게 화근이었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풀들이 마구 흔들리고 – 다음 순간 십수 발의 납탄이 그 사이를 거침없이 헤집는다.

        

        잘려 흩어지는 풀들. 무려 세 발이나 몸에 맞았다.

        

        단순한 제압사격 정도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음에도 가능할까 싶은 정확성. 그러나 혼비백산하여 외부의 자극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을 즈음, 유진은 그 간극 사이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즉, 정신이 반쯤 나가 사운드에 신경쓰지 못하는 바로 그 타이밍에 크게 거리를 좁혔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언제 이만큼 가까이 다가온…!’

        

        

        

        70미터 정도 되는 간격. 거기다 복잡한 지형지물까지. 그런 것들까지 있는 와중 도대체 언제 이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왔단 말인가. 숫제 환장할 노릇이었다.

        

        말 그대로의 순간이동.

        

        유진과 교전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로 그것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명색이 22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수많은 경험을 통해 대충이나마 윤곽을 잡았다는 뜻이었다. 실제로도 정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신팔린 틈을 타 빠르게 다가온다는 간단한 명제에서 출발했으니.

        

        근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냐고 묻는다면…그러게.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크윽…!”

        

        

        

       ───투두두두두!

        

        

        

        위치상의 어드밴티지, 그리고 일방적으로 적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어드밴티지가 여름날 밖에 내놓은 아이스크림마냥 사르르 녹아내린다. 그리하여 그 즈음부터 시작된 교전은 말 그대로 힘과 힘이 부딪히는 원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누가 더 총을 잘 쏘고, 누가 더 자리를 잘 잡으며, 누가 이동사격 및 제압사격 정확성이 우수한지를 판가름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승부는 반쯤 결정났을지언정, 토치카는 주어진 운명에 절대로 순응할 생각이 없었고 – 가장 원초적인 교전이 시작된 후 1분 31초라는 긴 시간 동안 유진의 발을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동귀어진도 불가능했지만, 어쨌든 주변에 충분한 어그로를 끈 상황.

        

        스크림임에도 드물게 적과 직접 시선을 마주한 유진이 총구를 겨누며 덧붙였다.

        

        

        

       “역시 아시아 예선전이라 다르긴 하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탕.

        

        눈 앞에서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토치카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이렇게까지 어그로를 끌어줬는데, 그래도 몇 명 정도는 ABC 메타 – 요컨대 A와 B가 싸우고 있을 때 C가 난입해 이득을 챙겨가는 – 를 시도해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중에 한 명 정도는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고.

        

        타 유저들의 얼굴도 모르지만, 토치카는 어쨌든 그들의 성공을 빌며 로비로 사출되었다.

        

        

        

        

        

        

        

        

        

        

        

       “와. 이게 사람이냐….”

        

        

        

        그리고 토치카의 염원은 반만 이뤄졌다.

        

        2분 정도 이어진 교전 동안 피냄새를 맡고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숫자는 서넛 정도였지만, 유진은 그 모두의 뚝배기를 성공적으로 깨부쉈다.

        

        스크림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95~200회 내로 아시아 예선전이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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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Returned, but I Cannot Lay down My Gun

I Have Returned, but I Cannot Lay down My Gun

귀환했지만, 총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Score 4.1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Just the fact that I came back couldn’t be the end of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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