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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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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금안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금방 돌아오겠다며 웃어 보이던 리안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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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키고 싶었다. 제 목숨조차도 초개처럼 사용하여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익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은… 지키지 못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너를 붙잡지조차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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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품은 욕망이 정상인지 아닌지 따위의 멍청한 고민을 하는 사이, 너는 겨울이 찾아온 숲처럼 조용히 내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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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민은 너 없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인데, 모든 걸 잃은 뒤에야 깨닫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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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잃은 후부터 혀가 굳은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어떤 음식을 먹어도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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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몸을 잡고 흔드는 릴리의 손길도 제 3자가 되어 바라보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소리 또한 웅웅 울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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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만 사라졌을 뿐인데, 내 세상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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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손들이 내 몸을 잡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아득한 두려움과 함께 자신을 향한 분노가 치밀었다. 마치 지옥의 재판장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몸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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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꿈속을 헤매지 않았다면 현실에서 목을 매고 죽으려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쓸모없는 손목은 베어버렸을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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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주변이 온통 절망과 두려움, 분노로 가득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곧 지옥이었고, 반복되는 달콤한 꿈은 하늘이 내린 천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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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그 죽음을 내가 안고 갔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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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의 눈동자는 어느새 리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과거 리안이 씩 웃으며 불길한 불꽃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그곳에 멈춰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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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죽었어야 했어, 내가… 내가 그곳으로 몸을 던졌어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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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이었다면 딱 여기까지만 생각이 이어졌겠지만, 이곳은 노아의 생각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정신의 깊숙한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묻어두고 있던 날카로운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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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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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감히 인간이 인지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거대한 존재감이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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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내가 리안이 서 있던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몸을 던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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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 없는 물음이라는 걸 알지만 노아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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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 나는, 나는… 못했을 거야. 멍청하게 쓰러져서 누군가 구해주길 기도하고 있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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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노아는 공작 조차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입을 연 사람이었다. 신의 권능을 가진 리안과 달리 쥐뿔도 없는 인간의 몸으로 신에게 대들려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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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영혼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죄악감에 삼켜진 노아에겐 꼬리를 만 개로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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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모든 걸 깎아내리고 깎아내려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길 원했다. 그녀에게 리안이 삶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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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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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악감’이라는 감옥에 갇혀 자신을 끝없이 상처입히던 노아는 갑작스러운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가짜’가 제 팔을 덥석 붙잡았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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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들어진 ‘가짜’들은 그녀가 기억하는 리안의 행동을 반복할 뿐 새로운 행동을 보여주진 않았다. 지금처럼 -… 노아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안아주지도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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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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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을 긁으며 튀어나오던 살벌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힘이 훅 빠진 가녀린 탄성이 리안의 어깨에 흩어졌다.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리안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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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란과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노아는 온몸에 퍼지는 저릿한 감각에 손을 파르르 떨고 나서야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인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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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과 기대감, 눈물이 고일 정도의 안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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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가짜’스럽지 않은 행동을 보인 건만으로도 노아는 멍청하게 ‘희망’을 품고 말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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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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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런 희망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곳이 꿈이라는 걸 한번 자각하고 나면 무서울 정도의 현실감이 그녀의 몸을 지배했다. 마치 높은 고층에서 떨어졌음에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제 몸을 보며 ‘아, 꿈이구나.’라고 자각한 사람처럼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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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그 정도로 반복되었다면 슬슬… 새로운 유형의 꿈이 나올 때도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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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속에 이성적인 말들이 툭툭 뱉어졌지만, 몸은 그러지 못했다. 심장이 배 안쪽에서 쿵쿵 뛰는 것 같았고,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잘못된 자세로 오래 앉아있었던 것처럼 온몸이 저리고 시야가 하얗게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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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가가 붉게 짓무르고 두 팔이 필사적으로 온기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성적인 생각과 달리 몸은 솔직하게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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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 똑바로… 똑바로 차려야 해. 이건 세… 상을 떠난 리안을 모욕하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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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을 꾹 깨물며 풀어진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리안이 제 꿈에서 더 이상 희롱당하지 않도록 단호하게 그를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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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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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뭘 해보기도 전에 귓가에 상상치도 못한 말이 때려 박혔다. 깨물 거리던 입술이 헤 – 벌어지고 귀여울 정도로 표정이 풀어졌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재차 속삭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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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해,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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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설탕을 처음 먹어본 아이처럼 멍하게 풀린 얼굴로 아무런 말도 뱉지 못했다. 가짜다 아니다 따위의 말조차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물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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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겨우 눈동자를 굴리자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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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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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흘리자, 리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떨어뜨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머쓱한 미소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머릿속에 진하게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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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내가 가짜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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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질문을 듣고 나서야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마주할 자신이 없어 흐린 눈으로 흘겨보았던 리안의 눈동자가 평소와 전혀 다르다는 걸 그제야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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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하얀 속눈썹 사이로 마주하게 된 금안은 꿈속에서 몇번이고 마주했던 가짜보다 훨씬 더 깊고 황홀한 색을 품고 있었다. 감히 그녀의 상상으론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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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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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의 얼빠진 대답과 함께 꿈속 세계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꿈에서 깨어나려는 것이다. 화들짝 놀란 노아가 다급히 그를 품에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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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안돼! 안돼! 리안… 리안 날 두고 가지 마! 내가, 내가 전부 잘못했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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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필사적으로 리안의 몸을 끌어안으며 소리치자, 리안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를 깊게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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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쩌저적, 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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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세트장이 해체되는 것처럼 꿈속 오두막도 메마른 산책길도 무너져내려 새하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꿈의 주인인 노아는 서 있는 땅이 전부 무너져내리면 꿈에서 완전히 깨어날 것임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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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돼, 싫어…! 그만 멈춰! 왜… 왜 내 꿈이잖아…! 제발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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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가 절망에 잠길수록 꿈이 무너지는 속도는 더욱 빨랐다. 그녀의 머리맡에 있는 꽃이 노아가 악몽을 꾸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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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은 말없이 그런 노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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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 난 ‘아직’ 안 죽었어.”
    “뭐..?”
    “그 불꽃에 들어간 후 마왕성으로 납치됐거든. 지금은 갇혀있는 신세지만..”
   
    ​
    리안이..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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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실만이 노아의 머릿속에 쿵 하고 낙인처럼 남아 심장을 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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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너희들에게 돌아갈 순 없지만 -… 무사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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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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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회복력 알잖아. 어디 가서 죽을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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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멍한 얼굴의 노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제 볼 위에 얹어주었다. 슬쩍 얼굴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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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방이라고는 약속 못하겠지만… 반드시 돌아갈 테니까.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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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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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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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 아래 남아있던 바닥이 무너져내리며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실명이라도 된 것처럼 눈앞이 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제 몸을 꽉 끌어안는 온기가 화상 흉터처럼 온몸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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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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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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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르륵,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 노아의 얼굴 위로 메말랐다 생각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굴은 눈물로 흥건해져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
    ​
    “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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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시간 잠들어있었던 탓에 잠겨있는 목이 겨우겨우 그의 목소리를 담았다. 언제나 절망만이 담겨있던 목소리엔 전과 달리 연약한 희망이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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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을 기점으로 노아는 침대를 털고 일어나 다시 검을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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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마왕군과 제국군이 본격적으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잔혹한 수호자’라는 이명을 가진 갈색 머리의 영웅이 마왕군을 쓸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음유시인의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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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인(??)의 응원으로 각성한 기사가 미친 듯이 적군을 쓸어버리고 있을 때, 슬라임 상태로 돌아온 리안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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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 말고 다른 말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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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가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절대 자신이 하지 않을 것 같은 말(고백)을 입에 담았다가 부끄러움에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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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 같은 건 좀 더 로맨틱하게 양초 백개 정도 피워두고… 꽃다발도 천송이 정도 준비해서 해야 하는 건데… 하얀 정장 같은 것도 입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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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들었다면 이번 고백이 베스트였다고 손뼉을 칠법한 생각을 하는 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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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들어 왜 이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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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리안을 마왕이 번쩍 안아 들어 애착 인형처럼 품에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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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처음 노아의 이명은 ‘수호자’였지만 손속이 워낙 잔혹하여 ‘잔혹한’이라는 이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리안을 되찾기 위해 눈이 뒤집힌 노아..

리안테라피를 받고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집착 또한 더 강화되었습니다..(흐뭇)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금안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금방 돌아오겠다며 웃어 보이던 리안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키고 싶었다. 제 목숨조차도 초개처럼 사용하여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익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은… 지키지 못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너를 붙잡지조차 못했다.

제가 품은 욕망이 정상인지 아닌지 따위의 멍청한 고민을 하는 사이, 너는 겨울이 찾아온 숲처럼 조용히 내 곁을 떠났다.

내 고민은 너 없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인데, 모든 걸 잃은 뒤에야 깨닫고 만다.

너를 잃은 후부터 혀가 굳은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어떤 음식을 먹어도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 몸을 잡고 흔드는 릴리의 손길도 제 3자가 되어 바라보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소리 또한 웅웅 울릴 뿐이었다.

너만 사라졌을 뿐인데, 내 세상은 끝이 났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내 몸을 잡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아득한 두려움과 함께 자신을 향한 분노가 치밀었다. 마치 지옥의 재판장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몸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만약 꿈속을 헤매지 않았다면 현실에서 목을 매고 죽으려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쓸모없는 손목은 베어버렸을지 몰랐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주변이 온통 절망과 두려움, 분노로 가득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곧 지옥이었고, 반복되는 달콤한 꿈은 하늘이 내린 천벌이었다.

‘차라리 그 죽음을 내가 안고 갔어야 했어.’

노아의 눈동자는 어느새 리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과거 리안이 씩 웃으며 불길한 불꽃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그곳에 멈춰있었다.

‘내가 죽었어야 했어, 내가… 내가 그곳으로 몸을 던졌어야 했다고.’

현실이었다면 딱 여기까지만 생각이 이어졌겠지만, 이곳은 노아의 생각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정신의 깊숙한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묻어두고 있던 날카로운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

노아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감히 인간이 인지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거대한 존재감이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만약 내가 리안이 서 있던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몸을 던질 수 있었을까?’

의미 없는 물음이라는 걸 알지만 노아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아니 -… 나는, 나는… 못했을 거야. 멍청하게 쓰러져서 누군가 구해주길 기도하고 있었을 거야.’

당시 노아는 공작 조차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입을 연 사람이었다. 신의 권능을 가진 리안과 달리 쥐뿔도 없는 인간의 몸으로 신에게 대들려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영혼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죄악감에 삼켜진 노아에겐 꼬리를 만 개로 보일 뿐이었다.

제 모든 걸 깎아내리고 깎아내려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길 원했다. 그녀에게 리안이 삶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슥.

‘죄악감’이라는 감옥에 갇혀 자신을 끝없이 상처입히던 노아는 갑작스러운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가짜’가 제 팔을 덥석 붙잡았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만들어진 ‘가짜’들은 그녀가 기억하는 리안의 행동을 반복할 뿐 새로운 행동을 보여주진 않았다. 지금처럼 -… 노아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안아주지도 않았었다.

“아…”

목을 긁으며 튀어나오던 살벌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힘이 훅 빠진 가녀린 탄성이 리안의 어깨에 흩어졌다.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리안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혼란과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노아는 온몸에 퍼지는 저릿한 감각에 손을 파르르 떨고 나서야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인지할 수 있었다.

희망과 기대감, 눈물이 고일 정도의 안도감.

그저 ‘가짜’스럽지 않은 행동을 보인 건만으로도 노아는 멍청하게 ‘희망’을 품고 말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아니, 아니야.’

하지만 그런 희망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곳이 꿈이라는 걸 한번 자각하고 나면 무서울 정도의 현실감이 그녀의 몸을 지배했다. 마치 높은 고층에서 떨어졌음에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제 몸을 보며 ‘아, 꿈이구나.’라고 자각한 사람처럼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래, 그 정도로 반복되었다면 슬슬… 새로운 유형의 꿈이 나올 때도 되었지.’

머릿속에 이성적인 말들이 툭툭 뱉어졌지만, 몸은 그러지 못했다. 심장이 배 안쪽에서 쿵쿵 뛰는 것 같았고,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잘못된 자세로 오래 앉아있었던 것처럼 온몸이 저리고 시야가 하얗게 부서졌다.

눈가가 붉게 짓무르고 두 팔이 필사적으로 온기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성적인 생각과 달리 몸은 솔직하게 반응했다.

‘정신 똑바로… 똑바로 차려야 해. 이건 세… 상을 떠난 리안을 모욕하는 일이야.’

입술을 꾹 깨물며 풀어진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리안이 제 꿈에서 더 이상 희롱당하지 않도록 단호하게 그를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려 했었다.

“좋아해.”

“…?!”

그녀가 뭘 해보기도 전에 귓가에 상상치도 못한 말이 때려 박혔다. 깨물 거리던 입술이 헤 – 벌어지고 귀여울 정도로 표정이 풀어졌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재차 속삭여왔다.

“좋아해, 노아.”

노아는 설탕을 처음 먹어본 아이처럼 멍하게 풀린 얼굴로 아무런 말도 뱉지 못했다. 가짜다 아니다 따위의 말조차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물들 뿐이었다.

겨우겨우 눈동자를 굴리자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가 보였다.

“어,으…”

그녀가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흘리자, 리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떨어뜨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머쓱한 미소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머릿속에 진하게 새겨졌다.

“아직도 내가 가짜 같아?”

그 질문을 듣고 나서야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마주할 자신이 없어 흐린 눈으로 흘겨보았던 리안의 눈동자가 평소와 전혀 다르다는 걸 그제야 인지했다.

새하얀 속눈썹 사이로 마주하게 된 금안은 꿈속에서 몇번이고 마주했던 가짜보다 훨씬 더 깊고 황홀한 색을 품고 있었다. 감히 그녀의 상상으론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아니..?”

노아의 얼빠진 대답과 함께 꿈속 세계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꿈에서 깨어나려는 것이다. 화들짝 놀란 노아가 다급히 그를 품에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 아, 안돼! 안돼! 리안… 리안 날 두고 가지 마! 내가, 내가 전부 잘못했어… 그러니까..!”

노아는 필사적으로 리안의 몸을 끌어안으며 소리치자, 리안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를 깊게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쩌저적, 쿠궁!

마치 세트장이 해체되는 것처럼 꿈속 오두막도 메마른 산책길도 무너져내려 새하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꿈의 주인인 노아는 서 있는 땅이 전부 무너져내리면 꿈에서 완전히 깨어날 것임을 알아차렸다.

“안돼, 싫어…! 그만 멈춰! 왜… 왜 내 꿈이잖아…! 제발 멈춰..!”

노아가 절망에 잠길수록 꿈이 무너지는 속도는 더욱 빨랐다. 그녀의 머리맡에 있는 꽃이 노아가 악몽을 꾸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리안은 말없이 그런 노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입을 열었다.

“노아 난 ‘아직’ 안 죽었어.”

“뭐..?”

“그 불꽃에 들어간 후 마왕성으로 납치됐거든. 지금은 갇혀있는 신세지만..”

리안이.. 죽지 않았다.

그 사실만이 노아의 머릿속에 쿵 하고 낙인처럼 남아 심장을 뛰게 했다.

“당장 너희들에게 돌아갈 순 없지만 -… 무사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리안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회복력 알잖아. 어디 가서 죽을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리안은 멍한 얼굴의 노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제 볼 위에 얹어주었다. 슬쩍 얼굴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금방이라고는 약속 못하겠지만… 반드시 돌아갈 테니까. 기다려줘.”

노아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쿠르릉.

두 사람 아래 남아있던 바닥이 무너져내리며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실명이라도 된 것처럼 눈앞이 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제 몸을 꽉 끌어안는 온기가 화상 흉터처럼 온몸에 새겨졌다.

***

“아…”

주르륵,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 노아의 얼굴 위로 메말랐다 생각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굴은 눈물로 흥건해져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리..안..”

오랜시간 잠들어있었던 탓에 잠겨있는 목이 겨우겨우 그의 목소리를 담았다. 언제나 절망만이 담겨있던 목소리엔 전과 달리 연약한 희망이 넘실거렸다.

그날을 기점으로 노아는 침대를 털고 일어나 다시 검을 들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마왕군과 제국군이 본격적으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잔혹한 수호자’라는 이명을 가진 갈색 머리의 영웅이 마왕군을 쓸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음유시인의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히로인(??)의 응원으로 각성한 기사가 미친 듯이 적군을 쓸어버리고 있을 때, 슬라임 상태로 돌아온 리안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말 말고 다른 말도 있었는데..!’

자신이 가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절대 자신이 하지 않을 것 같은 말(고백)을 입에 담았다가 부끄러움에 죽어가고 있었다.

‘고백 같은 건 좀 더 로맨틱하게 양초 백개 정도 피워두고… 꽃다발도 천송이 정도 준비해서 해야 하는 건데… 하얀 정장 같은 것도 입어야 하고..’

누군가 들었다면 이번 고백이 베스트였다고 손뼉을 칠법한 생각을 하는 리안이었다.

“요즘 들어 왜 이러지?”

“…!”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리안을 마왕이 번쩍 안아 들어 애착 인형처럼 품에 끌어안았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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