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마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 언니.”
그 단어 말고는 머릿속에 떠오르질 않는다.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파들파들 흔들렸다. 매서운 금빛 안광이 로즈마리의 얼굴을 정면에서 노려보았다.
사천(四天).
마왕이 봉인된 이후 정립된 ‘구천지대계’와는 달리, 마왕군을 초기부터 보필하던 네 체의 기계가 내뿜는 위압은 그 정도가 다르다.
당장 로즈마리가 본 사천은 에테르와 요르문간드가 전부였지만, 이들은 3석 이하의 다른 구천지대계와는 별개의 기운을 내뿜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 기운에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뭐 하고 있었니?”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도리어 소름이 돋았다.
“그건 언니 작품이잖아. 함부로 손대면 될까, 안 될까?”
에테르는 고개를 슬슬 흔들며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휘적거리다가, 어느 순간 아공간으로 쑥 들어갔다.
“대답해.”
스릉.
거무죽죽한 공간에서 2m에 가까운 스태프가 엿가락처럼 뽑혀 나온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마력초 없이 스태프를 꺼냈다.
‘대, 대체 뭐야.’
저번에 엘프들과 대련할 때도 그렇고, 도대체 어떤 식으로 스태프를 어떻게 꺼낼 수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알지? 이거에 많은 놈이 나가떨어졌어.”
꿀꺽.
로즈마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조졌다.’
뭐라고 변명하지?
어떻게 설명하지?
무어라 말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
잘못을 비는 게 상책일 것이다. 언니 물건을 훔치려던 건 틀림없이 나쁜 짓이었으니까.
큰 언니는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어지간한 일에는 웃고 넘어가 주는 대인배였다. 단,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는 가정하에.
다른 ‘사천’과는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장 요르문간드만 하더라도, 허락 없이 자기 물건에 손대면 죽여버릴 작정으로 브레스를 내뿜어댄다.
참작의 여지는 있었다. 당장 사과부터 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잠깐만.’
허리를 숙이려던 로즈마리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화가 치솟았다.
‘생각해 보니까 억울해….’
목울대에서 아릿한 쇠맛이 났다.
악에 북받친 로즈마리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어, 언니가 먼저 잘못했잖아요…!”
“뭐?”
퍼억! 캘리퍼스가 바닥에 내려찍혔다. 에테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로즈마리를 노려보았다. 이맘때쯤 로즈마리의 눈동자에는 액화 프로판이 스멀스멀 맺혀있었다. 억울해서였다.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에테르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로즈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땍땍거렸다.
“언니가 먼저 잘못한 거 맞잖아요! 왜 시치미 떼는데!”
따지고 보면 그랬다.
자신은 마왕군을 위해 이리도 헌신하는데,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에테르는 정작 마왕님의 부활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고, 마왕님을 보좌해야 할 능력을 사용해서 인간들이나 도와주고 있었다.
그 모든 답답함을 애써 참아왔다. 생명의 은인만 아니었더라면 요르문간드에게 했던 것처럼 진작 한 번 대들었을 텐데.
지금의 울분은 참다 참다 폭발한 결과다.
타악!
에테르가 당황한 기색을 조금 흘리는 사이, 로즈마리는 씩씩 화내며 연성진을 그리던 분필을 내팽개쳤다.
척.
로즈마리의 손가락이 원자폭탄을 가리켰다.
“이런 거 개발할 거였으면 마왕성에서 해도 됐었잖아요! 여기서 폭탄을 만들었다는 건 그냥 인간 쪽에 붙겠다는 소리 아닌가요? 네? 제 말 틀려요?!”
“…허어.”
“언니 몇 년 전부터 왜 그래요! 여신한테 세뇌라도 당한 거야 뭐야!”
에테르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도 의붓동생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은 남아있던 탓이다.
한동안 열변을 토해내던 로즈마리는 쌕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확실히, 화를 좀 내니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되지.”
“제국 개새끼들이 나한테서 언니 훔쳐 간 건 되고?”
발치에서 데구르르 돌아다니던 분필을 주웠다. 탁, 타탁, 탁! 그녀의 손이 원자폭탄 주변을 재빠르게 훑어나갔다.
간이 연성진은 거의 다 완성됐다. 엄청난 속도였다.
구천지대계 중 스크롤을 가장 잘 다루는 자가 바로 로즈마리였다. 그녀의 연성식 구축 실력은 프레이보다 뛰어났다.
치익! 로즈마리가 마력초를 물고 성냥을 그었다.
“언니, 솔직히 얘기해 봐요.”
로즈마리가 물었다.
“마왕군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거지?”
“…….”
에테르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에테르’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고, 본래 금안족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비록 인생의 반절 이상을 사회의 톱니바퀴로 살아오긴 했지만, 어쨌거나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 소속되어 있던 몸.
당연히 정신은 마수보다 인간에 가까웠다.
로즈마리도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마수가 된 세월에 비하면 찰나의 시간이다. 반면, 빙의한 에테르는 기껏해야 4년 동안 괴물로 살아왔다. 인간으로서 살아온 시절이 훨씬 길었다.
애써 ‘대륙 전부를 파괴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라는 비인간적인 선택지를 고르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
로즈마리가 입에서 희멀건 연기를 내뿜었다.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봐준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계속 이러면 마왕님의 부활은커녕 다같이 흑주맞고 뒤질 운명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불의 로드스톤을 얻고 제국에서 발을 내빼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다른 구천지대계가 알아서 해줄 것이니, 로즈마리의 역할은 그만하면 끝이었다.
로즈마리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연성진을 완성했다.
에테르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 무렵이었다.
“네 말대로 마왕군에 완전히 돌아가지 않을지도 몰라.”
“…….”
“하지만 그게 인간 편에 선다는 뜻도 아니다.”
로즈마리의 눈이 보름달처럼 떠졌다. 언니가 내뱉은 말이 의외의 답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순, 분위기가 변했다.
“저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본관은 마수냐 인간이냐, 엘프냐 수인족이냐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내리겠다고.”
그제야 로즈마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조금 전까지, 무슨 말을.
“대전쟁으로부터 1천 년, 나는 인간과 엘프의 추악한 모습을 구백하고도 아흔아홉 번 보아왔다. 개인이 아닌, 집단 단위로 말이다.”
로즈마리는 인간에게 한 번 뒤통수를 맞은 설움으로 괴물이 되었지만, 저 언니는 마왕님에게 거두어지기 훨씬 오래전부터 온갖 진흙탕을 구르다 온 삶의 대선배였다. 그녀가 아는 걸 에테르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제국에게 남은 기회는 이제 한 번뿐이라는 소리지.”
에테르는 자신이 친구들과 만든 작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 진심을 알고 싶으면 그 원자폭탄은 마왕성으로 가져가도 좋다. 여기 작동 스크롤도 줄 테니까.”
팔랑. 로즈마리의 머리 위로 격발부가 담긴 마전지 한 장이 떨어졌다. 로즈마리는 저도 모르게 그 종이를 받아 훑었다.
“어, 언니?”
“잘 알아둬. 기회는 인류에게만 준 게 아니니까.”
에테르의 말뜻을 깨닫지 못할 로즈마리가 아니었다.
“……네.”
명석한 머리로 모든 과정을 이해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앗!
폭탄과 함께 로즈마리의 신형이 사라졌다.
연성진만 덩그러니 남은 자리를 쳐다보며, 에테르는 스태프를 거두었다.
직후, 허공에 양장본을 띄워놓은 채로 페이지를 훅훅 넘겼다.
[현재 연결상태 ─ 매우 좋음]
[비밀번호 여덟 자리를 입력하세요 : ]
“잘 적용됐네.”
나는 머리를 짚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앉았다.
“……어우, 머리 아파.”
요즘 들어 의식 컨트롤이 쉽지 않다.
‘내면의 거울’을 본 이후로, 종종 자아가 뒤섞이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조금 전처럼 중요한 순간에 의식이 명멸하듯 끊어지면 일이 복잡해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에테르’가 말하고 싶은 게 튀어나오니까.
[현재 ‘자유연성’의 숙련도는 53%입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포석을 깔아두고는 있지만, 적어도 지계마도를 다 완성하기 전까지는 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계획은 완벽하게, 또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로즈마리가 두고 간 분필을 사용해서 가짜 폭탄을 만들고 뒷자리를 정리했다.
“이 다음엔…….”
슬슬 로테를 보내주고, 버멜을 도울 차례.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
파앗!
마왕성으로 돌아온 로즈마리는 주변부터 살폈다.
“의외네. 그쪽이 다 돌아오고.”
익숙한 목소리. 그러나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울림.
로즈마리를 처음 맞이한 건 의외의 존재였다.
“말 그대로 좆같은 걸 들고 왔구나.”
파충류처럼 가는 세로줄 동공이 로즈마리를 응시했다. 로즈마리는 원자폭탄을 눕혀놓고는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웬일이래? 네가 여기 다 오고.”
구천지대계 1석.
동시에 사천(四天) 중 ‘가을 하늘(旻天)’이라 불렸던 거물.
“…요르문간드.”
“연장자 이름을 막 부르지 마라, 꼬맹이.”
“꼬맹이라 불릴 나이는 지났거든?”
“하는 소리가 요호족의 어느 아이를 똑 빼닮았구나.”
요르문간드는 피식 웃으며 원자폭탄을 흘겨보았다.
“상천(上天)의 작품이로구나.”
“어떻게 알았어?”
“청출어람이라고, 이런 건 마왕조차도 못 만들지.”
로즈마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왕님이 이런 것도 못 만드신다고…?”
“넌 마왕이 무엇이든 가능한 존재라고 여기는구나.”
“당연한 거 아냐?”
“당연하지 않다.”
쯧, 하고 로즈마리가 혀를 찼다.
요르문간드는 늘 이런 식이었다.
‘기껏해야 마왕님 아래에 있는 주제에.’
한때 마왕과 호각으로 싸웠다는 걸 가지고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는 그녀뿐만이 아닌, 마왕군 휘하에 있는 용족 전체가 공유하는 특성이었다.
신경이 뻗친 로즈마리가 말했다.
“넌 왜 여기 와 있어? 평소처럼 산에 틀어박혀 있지.”
“여도 뭘 가져오긴 했으니까.”
“뭔데?”
“로드스톤.”
그 말에 로즈마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
“8석이 일리야드 아카데미 해저에서 발견한 걸 옮겨 오느라 꽤나 고생했지.”
“어쭈, 같은 용이라고 연락받자마자 튀어나간 거야?”
“그래. 오랜만에 비행하려니까 날갯죽지가 다 아프더군.”
요르문간드가 엉덩뼈능선을 쓰다듬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옆트임 사제복 사이로 그녀의 옆구리가 슬쩍 드러났다.
“아무튼, 네 언니가 그걸 주면서 뭐라 말하지 않든?”
“아, 맞다.”
로즈마리는 조금 전 에테르와 나누었던 대화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물론 자신이 화낸 부분은 쏙 빼놓았다.
“…그래서 언니가 기회를 한 번 더 준다고 하더라고.”
그러자 요르문간드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거 버리고 와!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