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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1

       로즈마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어, 언니.”

       ​

       그 단어 말고는 머릿속에 떠오르질 않는다.

       ​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파들파들 흔들렸다. 매서운 금빛 안광이 로즈마리의 얼굴을 정면에서 노려보았다.

       ​

       사천(四天).

       ​

       마왕이 봉인된 이후 정립된 ‘구천지대계’와는 달리, 마왕군을 초기부터 보필하던 네 체의 기계가 내뿜는 위압은 그 정도가 다르다.

       ​

       당장 로즈마리가 본 사천은 에테르와 요르문간드가 전부였지만, 이들은 3석 이하의 다른 구천지대계와는 별개의 기운을 내뿜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지금, 그녀는 그 기운에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

       “뭐 하고 있었니?”

       ​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도리어 소름이 돋았다.

       ​

       “그건 언니 작품이잖아. 함부로 손대면 될까, 안 될까?”

       ​

       에테르는 고개를 슬슬 흔들며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휘적거리다가, 어느 순간 아공간으로 쑥 들어갔다.

       ​

       “대답해.”

       ​

       스릉.

       ​

       거무죽죽한 공간에서 2m에 가까운 스태프가 엿가락처럼 뽑혀 나온다.

       ​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마력초 없이 스태프를 꺼냈다.

       ​

       ‘대, 대체 뭐야.’

       ​

       저번에 엘프들과 대련할 때도 그렇고, 도대체 어떤 식으로 스태프를 어떻게 꺼낼 수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

       “알지? 이거에 많은 놈이 나가떨어졌어.”

       ​

       꿀꺽.

       ​

       로즈마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

       ‘조졌다.’

       ​

       뭐라고 변명하지?

       ​

       어떻게 설명하지?

       ​

       무어라 말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

       ​

       잘못을 비는 게 상책일 것이다. 언니 물건을 훔치려던 건 틀림없이 나쁜 짓이었으니까.

       ​

       큰 언니는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어지간한 일에는 웃고 넘어가 주는 대인배였다. 단,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는 가정하에.

       ​

       다른 ‘사천’과는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장 요르문간드만 하더라도, 허락 없이 자기 물건에 손대면 죽여버릴 작정으로 브레스를 내뿜어댄다.

       ​

       참작의 여지는 있었다. 당장 사과부터 해야 한다.

       ​

       그래야 하는데.

       ​

       ‘잠깐만.’

       ​

       허리를 숙이려던 로즈마리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화가 치솟았다.

       ​

       ‘생각해 보니까 억울해….’

       ​

       목울대에서 아릿한 쇠맛이 났다.

       ​

       악에 북받친 로즈마리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

       “어, 언니가 먼저 잘못했잖아요…!”

       “뭐?”

       ​

       퍼억! 캘리퍼스가 바닥에 내려찍혔다. 에테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로즈마리를 노려보았다. 이맘때쯤 로즈마리의 눈동자에는 액화 프로판이 스멀스멀 맺혀있었다. 억울해서였다.

       ​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

       에테르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로즈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땍땍거렸다.

       ​

       “언니가 먼저 잘못한 거 맞잖아요! 왜 시치미 떼는데!”

       ​

       따지고 보면 그랬다.

       ​

       자신은 마왕군을 위해 이리도 헌신하는데,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에테르는 정작 마왕님의 부활에 큰 관심이 없었다.

       ​

       오히려 자신이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고, 마왕님을 보좌해야 할 능력을 사용해서 인간들이나 도와주고 있었다.

       ​

       그 모든 답답함을 애써 참아왔다. 생명의 은인만 아니었더라면 요르문간드에게 했던 것처럼 진작 한 번 대들었을 텐데.

       ​

       지금의 울분은 참다 참다 폭발한 결과다.

       ​

       타악!

       ​

       에테르가 당황한 기색을 조금 흘리는 사이, 로즈마리는 씩씩 화내며 연성진을 그리던 분필을 내팽개쳤다.

       ​

       척.

       ​

       로즈마리의 손가락이 원자폭탄을 가리켰다.

       ​

       “이런 거 개발할 거였으면 마왕성에서 해도 됐었잖아요! 여기서 폭탄을 만들었다는 건 그냥 인간 쪽에 붙겠다는 소리 아닌가요? 네? 제 말 틀려요?!”

       “…허어.”

       “언니 몇 년 전부터 왜 그래요! 여신한테 세뇌라도 당한 거야 뭐야!”

       ​

       에테르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도 의붓동생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은 남아있던 탓이다.

       ​

       한동안 열변을 토해내던 로즈마리는 쌕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확실히, 화를 좀 내니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

       “그래도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되지.”

       “제국 개새끼들이 나한테서 언니 훔쳐 간 건 되고?”

       ​

       발치에서 데구르르 돌아다니던 분필을 주웠다. 탁, 타탁, 탁! 그녀의 손이 원자폭탄 주변을 재빠르게 훑어나갔다.

       ​

       간이 연성진은 거의 다 완성됐다. 엄청난 속도였다.

       ​

       구천지대계 중 스크롤을 가장 잘 다루는 자가 바로 로즈마리였다. 그녀의 연성식 구축 실력은 프레이보다 뛰어났다.

       ​

       치익! 로즈마리가 마력초를 물고 성냥을 그었다.

       ​

       “언니, 솔직히 얘기해 봐요.”

       ​

       로즈마리가 물었다.

       ​

       “마왕군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거지?”

       “…….”

       ​

       에테르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

       틀린 말은 아니었다.

       ​

       그녀는 ‘에테르’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고, 본래 금안족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

       비록 인생의 반절 이상을 사회의 톱니바퀴로 살아오긴 했지만, 어쨌거나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 소속되어 있던 몸.

       ​

       당연히 정신은 마수보다 인간에 가까웠다.

       ​

       로즈마리도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마수가 된 세월에 비하면 찰나의 시간이다. 반면, 빙의한 에테르는 기껏해야 4년 동안 괴물로 살아왔다. 인간으로서 살아온 시절이 훨씬 길었다.

       ​

       애써 ‘대륙 전부를 파괴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라는 비인간적인 선택지를 고르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

       “솔직히 얘기하면,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

       ​

       로즈마리가 입에서 희멀건 연기를 내뿜었다.

       ​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

       생명의 은인이라고 봐준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계속 이러면 마왕님의 부활은커녕 다같이 흑주맞고 뒤질 운명이다.

       ​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불의 로드스톤을 얻고 제국에서 발을 내빼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다른 구천지대계가 알아서 해줄 것이니, 로즈마리의 역할은 그만하면 끝이었다.

       ​

       로즈마리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연성진을 완성했다.

       ​

       에테르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 무렵이었다.

       ​

       “네 말대로 마왕군에 완전히 돌아가지 않을지도 몰라.”

       “…….”

       “하지만 그게 인간 편에 선다는 뜻도 아니다.”

       ​

       로즈마리의 눈이 보름달처럼 떠졌다. 언니가 내뱉은 말이 의외의 답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일순, 분위기가 변했다.

       ​

       “저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본관은 마수냐 인간이냐, 엘프냐 수인족이냐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내리겠다고.”

       ​

       그제야 로즈마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내가, 조금 전까지, 무슨 말을.

       ​

       “대전쟁으로부터 1천 년, 나는 인간과 엘프의 추악한 모습을 구백하고도 아흔아홉 번 보아왔다. 개인이 아닌, 집단 단위로 말이다.”

       ​

       로즈마리는 인간에게 한 번 뒤통수를 맞은 설움으로 괴물이 되었지만, 저 언니는 마왕님에게 거두어지기 훨씬 오래전부터 온갖 진흙탕을 구르다 온 삶의 대선배였다. 그녀가 아는 걸 에테르가 모를 리 없었다.

       ​

       “그렇다는 건…….”

       “제국에게 남은 기회는 이제 한 번뿐이라는 소리지.”

       ​

       에테르는 자신이 친구들과 만든 작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

       “내 진심을 알고 싶으면 그 원자폭탄은 마왕성으로 가져가도 좋다. 여기 작동 스크롤도 줄 테니까.”

       ​

       팔랑. 로즈마리의 머리 위로 격발부가 담긴 마전지 한 장이 떨어졌다. 로즈마리는 저도 모르게 그 종이를 받아 훑었다.

       ​

       “어, 언니?”

       “잘 알아둬. 기회는 인류에게만 준 게 아니니까.”

       ​

       에테르의 말뜻을 깨닫지 못할 로즈마리가 아니었다.

       ​

       “……네.”

       ​

       명석한 머리로 모든 과정을 이해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파앗!

       ​

       폭탄과 함께 로즈마리의 신형이 사라졌다.

       ​

       연성진만 덩그러니 남은 자리를 쳐다보며, 에테르는 스태프를 거두었다.

       ​

       직후, 허공에 양장본을 띄워놓은 채로 페이지를 훅훅 넘겼다.

       ​

       [현재 연결상태 ─ 매우 좋음]

       [비밀번호 여덟 자리를 입력하세요 : ]

       ​

       “잘 적용됐네.”

       ​

       나는 머리를 짚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앉았다.

       ​

       “……어우, 머리 아파.”

       ​

       요즘 들어 의식 컨트롤이 쉽지 않다.

       ​

       ‘내면의 거울’을 본 이후로, 종종 자아가 뒤섞이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

       대부분의 경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조금 전처럼 중요한 순간에 의식이 명멸하듯 끊어지면 일이 복잡해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에테르’가 말하고 싶은 게 튀어나오니까.

       ​

       [현재 ‘자유연성’의 숙련도는 53%입니다.]

       ​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포석을 깔아두고는 있지만, 적어도 지계마도를 다 완성하기 전까지는 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

       계획은 완벽하게, 또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로즈마리가 두고 간 분필을 사용해서 가짜 폭탄을 만들고 뒷자리를 정리했다.

       ​

       “이 다음엔…….”

       ​

       슬슬 로테를 보내주고, 버멜을 도울 차례.

       ​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

       ​

       **

       ​

       ​

       파앗!

       ​

       마왕성으로 돌아온 로즈마리는 주변부터 살폈다.

       ​

       “의외네. 그쪽이 다 돌아오고.”

       ​

       익숙한 목소리. 그러나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울림.

       ​

       로즈마리를 처음 맞이한 건 의외의 존재였다.

       ​

       “말 그대로 좆같은 걸 들고 왔구나.”

       ​

       파충류처럼 가는 세로줄 동공이 로즈마리를 응시했다. 로즈마리는 원자폭탄을 눕혀놓고는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

       “웬일이래? 네가 여기 다 오고.”

       ​

       구천지대계 1석.

       ​

       동시에 사천(四天) 중 ‘가을 하늘(旻天)’이라 불렸던 거물.

       ​

       “…요르문간드.”

       “연장자 이름을 막 부르지 마라, 꼬맹이.”

       “꼬맹이라 불릴 나이는 지났거든?”

       “하는 소리가 요호족의 어느 아이를 똑 빼닮았구나.”

       ​

       요르문간드는 피식 웃으며 원자폭탄을 흘겨보았다.

       ​

       “상천(上天)의 작품이로구나.”

       “어떻게 알았어?”

       “청출어람이라고, 이런 건 마왕조차도 못 만들지.”

       ​

       로즈마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

       “마왕님이 이런 것도 못 만드신다고…?”

       “넌 마왕이 무엇이든 가능한 존재라고 여기는구나.”

       “당연한 거 아냐?”

       “당연하지 않다.”

       ​

       쯧, 하고 로즈마리가 혀를 찼다.

       ​

       요르문간드는 늘 이런 식이었다.

       ​

       ‘기껏해야 마왕님 아래에 있는 주제에.’

       ​

       한때 마왕과 호각으로 싸웠다는 걸 가지고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는 그녀뿐만이 아닌, 마왕군 휘하에 있는 용족 전체가 공유하는 특성이었다.

       ​

       신경이 뻗친 로즈마리가 말했다.

       ​

       “넌 왜 여기 와 있어? 평소처럼 산에 틀어박혀 있지.”

       “여도 뭘 가져오긴 했으니까.”

       “뭔데?”

       “로드스톤.”

       ​

       그 말에 로즈마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

       “정말?”

       “8석이 일리야드 아카데미 해저에서 발견한 걸 옮겨 오느라 꽤나 고생했지.”

       “어쭈, 같은 용이라고 연락받자마자 튀어나간 거야?”

       “그래. 오랜만에 비행하려니까 날갯죽지가 다 아프더군.”

       ​

       요르문간드가 엉덩뼈능선을 쓰다듬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옆트임 사제복 사이로 그녀의 옆구리가 슬쩍 드러났다.

       ​

       “아무튼, 네 언니가 그걸 주면서 뭐라 말하지 않든?”

       “아, 맞다.”

       ​

       로즈마리는 조금 전 에테르와 나누었던 대화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물론 자신이 화낸 부분은 쏙 빼놓았다.

       ​

       “…그래서 언니가 기회를 한 번 더 준다고 하더라고.”

       ​

       그러자 요르문간드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

       “그거 버리고 와!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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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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