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잠깐만.”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나는 소희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돈은?”
“어?”
“양혜인 씨 연봉이 5억이잖아. 너 가불해줄 때 양혜인 씨가 해줬다고 했고. 자기가 모은 돈으로 해줬다는 소리인데, 15억 가까이 되는 돈이면 그때까지 모았던 돈 거의 다 아니야?”
“그, 그렇지?”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는지, 소희는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사실 나도 그 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땐 선배가 일 처리를 했으니까.”
“…….”
나는 다시 한번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우리가 어제와 오늘 먹고 자고 한 할머니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산불 때문에 타버렸다던 집을 새로 지었다고 해도, 너무 깨끗해 보인다. 양혜인의 어린 시절이면 10년도 더 지난 일일 텐데.
아무리 개인적으로 쓰는 돈이 없고, 그저 돈을 모으기만 했더라도……
보통 가족이 있으면 가족 돕는 데 쓰지 않을까……?
설마 할머니께 그 많은 연봉 중에 한 푼도 주지 않았던 건 아닐 거 아니야.
“…….”
아니면……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
하지만 한 번 생긴 의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침부터 손님끼리만 두고 사라져서 미안해. 잠깐 요 앞에 나물 좀 캐러 갔다 왔어.”
“아, 아니에요. 저희도 편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니까요.”
하늘이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대답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그보다 더 가까이 있던 내가 대답했어야 했을 테니까.
“…….”
양혜인은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마 저건 나를 배려한 것이리라. 내가 양혜인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엄청나게 불편해할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아니, 따지고 보면 양혜인도 불편한 걸지 모르지. 지난 몇 년 동안 존댓말을 쓰던 상대에서 반말을 쓰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그게 아무리 하나 남은 가족 앞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요 몇 년 간 양혜인이 여기 내려오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양혜인은 한동안은 할머니보다도 나를 더 자주 보고 살았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이게 전부 사라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만. 괴로운 기억이 있는 이 집에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동시에 여러 가지 사건이 겹쳐서 내려오지 않았을 뿐이겠지만.
그 원인 중 하나가 최나경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
“자, 자, 식사들 해. 아침부터 배고팠지?”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 앞에 펼쳐놓는 밥상은, 어제 봤던 것처럼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
“얘들아, 잠깐만.”
식사가 끝나고, 양혜인과 할머니가 상을 정리하려고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둘을 따라가려던 것을 내가 나서서 말렸다.
물론 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사람이다. 밥을 이렇게 공짜로 얻어먹었으니 도와드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그러니까, 부엌에는 나 혼자 가고 싶었다.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나 혼자 가서 도와드리면 안 될까? 너희들은 어제 도와드렸으니까.”
실제로, 어제 저녁 식사 후에는 하늘이와 수아 두 사람이 도왔었다.
원래는 서로 도우려고 했고, 할머니는 만류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심에 찔렸던지라 우리 쪽에서 밀어붙인 결과였다.
부엌이 꽤 좁았기에 우리 넷이 전부 들어가면 오히려 민폐일 것 같아 제비뽑기를 한 결과 정해진 사람이 그 두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따로 순서를 정하지는 않았어도 따지자면 오늘 아침에는 나와 소희가 들어가는 것이 맞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은 아무래도 좀 개인적인 것이었으니까.
……따지자면 소희와도 관련이 있는 일이긴 했지만, 소희가 굳이 이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생각이 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기라도 했던 걸까.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점심 먹고 나서는 내가 들어갈게.”
소희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소희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앉아있는 거실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부엌이었지만, 마치 다른 방처럼 문이 있어서 문만 닫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면 그 대화 소리가 밖으로 새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한창 설거지 중이라 그 소리에 묻히기도 할 거고.
“할머니!”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휴, 그럴 필요 없는데.”
하지만 다행히도, 할머니는 어제처럼 한사코 거절하지는 않으셨다. 이미 하늘이와 수아가 할머니를 도와드렸으니까.
“아니에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직 접히지 않은 상을 닦을 행주를 집었다. 싱크대에선 할머니와 양혜인이 모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설거지를 도울 방법이 없었으니까.
“…….”
양혜인이 나를 곁눈질로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돌려 설거지에 집중했다.
……음.
여기 양혜인이 있으면 질문하기가 조금 그런데.
“그래, 사라라고 했던가?”
내가 상 위를 반짝반짝하게 닦고 있는데, 할머니가 그렇게 물어왔다. 어색하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대답했다.
“네, 예사라에요.”
“그렇구나. 나이를 먹으면 한 번에 기억해낼 수 있는 게 적어지니까. 미안해~”
말끝을 살짝 늘이면서 말하는 할머니에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희가 말도 없이 찾아온 건데요.”
“그래도 오랜만에 손님이 와서 참 좋아. 이렇게 예쁜 애들이 많으니까 화사하고 보기 좋네. 우리 혜인이도 얼른 결혼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야 할 텐데.”
아뇨, 아무리 그래도 우리를 증손녀에 비유하기에는 나이 차가 너무 안 나는데요.
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겠지만.
“그런데, 얘가 도통 말을 하지 않아서 그러는데, 혹시 우리 혜인이, 남자친구 있니?”
“…….”
“어…….”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남자친구가…… 있나?
아마 거의 100퍼센트의 확률로 없다고는 생각한다. 양혜인이 남자친구를 사귈만한 시간 자체가 없으니까. 24시간을 나의 부름에 올 수 있도록 대기 중인데, 그 와중에 연애한다면 사내 연애 아니면 답도 없다.
그리고 그 사내 연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가 박살 내버린 참이고.
……그거랑은 별개로 양혜인은 연애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건 그저 양혜인의 일면만 본 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없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결국 그런 어색한 말을 하고 말았다.
“언니?”
얼떨결에 그런 호칭까지 써버렸고.
“…….”
아.
방금 양혜인이 잠깐 멈춘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잠깐은 문자 그대로 잠깐이었다.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며, 양혜인은 바로 대답했다.
“……없어.”
양혜인에게선 처음 들어보는 반말이었다.
“그런가요……?”
저 대답을 듣고 안도해야 할지 미안해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만약 원래부터 남자친구가 없었다면 적어도 나 때문에 헤어진 건 아닐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다행이었지만—
만약 양혜인이 연애하지 못하는 이유가 순전히 ‘직장 때문’이었다면 그건 나 때문일 테니까.
아니면 나 때문이겠지.
…….
“우리 혜인이가 이렇게 예쁜데…….”
적어도 예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대학생 때는 남자들이 많이 접근했을 것 같기도 한데.
“좋은 남자 있으면 좀 소개해줘. 사라 부모님이 같은 회사 상사라고 하셨지?”
“할머니.”
할머니는 농담조로 꺼낸 것 같은 말이지만, 양혜인의 반응은 칼 같았다.
“아휴,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할머니였지만, 목소리가 조금은 쓰게 들렸다.
“…….”
양혜인은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았다. 보아하니 설거지도 거의 끝난 모양이었다.
나는 깨끗하다 못해 반짝반짝 광이 날 정도의 상을 얼른 접었다. 두 개의 상 모두 깨끗하게 닦았고, 그 김에 부엌에 있는 식탁까지 닦아버린 참이었으니까.
“할머니, 쓰레기 버리고 올게요.”
“그래.”
양혜인의 말에, 할머니는 조금 당황한 듯 대답했다.
양혜인의 이미지는 평소에도 조금 날카로웠지만, 아무래도 조금 전의 대화 때문에 조금 더 날카로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 때문인가?
아니, 나 때문일 수밖에 없겠지. 여기로 억지로 데리고 온 것도 나였고, 멋대로 들러붙어서 이런저런 싫은 이야기가 나오게 한 것도 나였으니까.
“아휴…….”
할머니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미안해. 쟤가 평소에는 저런 성격이 아닌데…….”
“네, 평소에 어떤지 알고 있으니까요.”
조금은 안절부절못하는 할머니를 보고, 나는 일단 안심시켜드리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상사의 딸이라고 소개했었지.
할머니로선 확실히 걱정될 만도 했다. 양혜인이 나에게 나쁘게 대하면, 내가 부모님께 가서 말할 거라고 생각하고 계실지도.
……정작 사라에게 하나 있는 양어머니는 사라와 별로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아.”
그래도 덕분에, 양혜인이 자리를 떠서 할머니와 나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겼다.
“저, 할머니.”
“응?”
양혜인이 나간 문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에게, 나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혜인 언니가, 할머니께 잘해 드리고 있나요?”
조금은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