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81

        

         “으힣.”

         

         조금 품위나 예의범절, 절제된 이성과는 거리가 먼… 아주 먼 괴상한 웃음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아, 간지럼을 태워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실성한 건 더욱 아니고.

         내가 공들여 얼굴 근육을 조절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도, 이유 없이 헤실거리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부디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를 신뢰해주길 바란다.

         

         [ 귀하의 가상 계좌로 1,290,000,000 C가 입금되었습니다. ]

         

         “헤헿….”

         

         하지만 몇 달이나 입금 내역 따위는 일절 없이 자잘한 출금 내역만 주루룩 찍히던 주 통장과 달리, 개인 정보를 갱신해야 한다는 말에 대충 급조한 온라인 예금 통장에 약 13억 크레딧에 달하는 돈이 정밀 궤도 폭격 마냥 내리 꽂히면 누구라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 거라고 본다.

         

         돌아다니는 행인이래 봐야 주변 인간들에게 별관심이 없고 자기 할 일하기도 바쁜 블랙 마켓 방문자들, 그들이 방금 막 폭심지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역전의 드로이드와 풀어진 얼굴로 허공을 향해 히죽거리는 여자애한테 할애할 정신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심지어 호텔 로비라 근처엔 투숙객밖에 없는 상황인데. 일부러 행복해하는 상대에게 시비를 걸만큼 비틀린 놈한테 걸린다면 그건 정말 재수가 없는 거지 딱히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

         

         – …그렇게 좋으십니까? –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내 속물 근성에 질렸는지, 아니면 아직 속세의 때가 덜 타서 든든한 지갑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바보가 참으로 당연한 질문을 던져오길래 확신에 찬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기쁨에 대한 확신과는 별개로 다시 한 번 쏟아진 행운… 아니라! 그간의 개고생과 정신 나갈 것 같던 감정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잘못 입금된 건 아니라는 듯,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세부적인 급여 산출 내역을 훑었고.

         

         [ 격리 시설 장기 근속자 전형 위로금 및 퇴직금 : 355,000,000 C ]

         

         “으윽….”

         

         자, 우선은 위조된 경력에 대해 지급된 녀석부터.

         3년 장기 근속에게 주어지는 은퇴 급여-요즘 시대에 3년이 정말 장기로 분류되나 싶었지만 외출이나 연락이 부자유로운 기밀 연구소의 특성상 경력 가중치가 높다고-를 노려보았다.

         

         공짜라고 생각하면 이만한 행운도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실질적으로 따져보면 여기로 넘어오자마자 걸레짝이 된 원래 몸에 대한 생명 수당과 유리관에 담겨 의식불명 상태로 둥둥 떠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는 치환 과정을 거치니까 아주 그냥 속이 끓어오르는 게…….

         

         …좋아, 이만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 비밀 유지 서약 보조금 : 144,000,000 C ]

         

         서늘한 감각.

         이건 좀 심각하게 고민해볼 여지가 있지 않냐는 생각이 피부를 타고 흘러, 무심코 손을 들어서 머리 쪽을 매만졌다.

         

         뇌? 머리? 하여간 현대의 비밀 유지 서약은 목 위 어딘가에다가 일부 ‘고의적인’ 실수를 할 경우 시원하게 터지는 소형 폭탄을 박아 넣는 공정이라고 합숙 생활 도중에 자칭 전문가 마리나가 떠들었던 내용이 뇌리를 스쳤기에.

         

         아무래도 오작동이 일어나면 그냥 꺼지고 마는 게 아니라 무조건 폭☆발하게 설정된 장치인만큼 살면서 끊임없이 임플란트 샵을 방문하여 머리를 열었다 닫았다 관리해야 하는 것에 대한 수술 지원금이라고 했던 것 같다.

         

         어차피 이런 걸 박아서 제어할 수준의 인력이라면 목숨 아까운 줄은 알 것이고 에나마에 꾸준히 환수될 건강 보험금 같은 느낌이라 넉넉하게 쥐어 준다고 했나?

         

         하여간 여기서 이제 문제가 있다면 나는 이런 무시무시한 걸 받기 전에, 반강제로 면담부터 진행한 후 복직 당했을뿐더러.

         

         과연 이걸 24시간 눈을 부라리고 있던 제로까지 속여넘기고, 내가 잠든 사이에 들키지 않게 끝마칠 수가 있었을까? 지금도 능력을 써서 몸 전체를 훑어봐도 걸리는 거라고는 내 통신기밖에 없거늘.

         

         그렇다면 실제로 수술이 이루어졌냐와 상관없이 그저 절차대로 지급한 눈먼 돈이거나 입조심을 부탁하는 겸해서 찔러준 뇌물이라는 건데….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좀 짠 걸 보면 그냥 전자의 의미라 여기고 슥 챙겨도 될 것 같기도 하고.

         

         – 드리기 어려운 말씀이나, 제가 모시기 시작한 이래로 본 적이 없는 굉장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다. –

         

         “어흠흠…! 이건 불로소득에 대한 기쁨이라고 하는 거란다?”

         

         – …그렇습니까. –

         

         차마 나를 향해 ‘얼굴이 이상해요~’라고 직언할 수는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제로에게 세상의 어둠에 대해 약간의 가르침을 내렸다.

         

         아무튼, 이러면 마지막 항목만 남게 된다.

         

         [ 고위직 전문 상담사, 피고용인에 대한 촉박한 정리해고 위로금 : 791,000,000 C ]

         

         “어우.”

         

         …다시 봐도 다행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비록 내가 갑갑한 업무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탈주하기는 했지만 결국 공식적으로는 저쪽에서 먼저 풀어준 거라는 증명서를 발급해준 셈이나 다름없으니까.

         

         앞으로 양지에서 활동을 개시하면 따로 연락이 올 수는 있어도 과거사로 책잡힐 일은… 아마 없겠지? 없어야 한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런 뜻으로 보였어. 나중에 무를 생각하지 마.

         

         하지만 명목 자체는 만족스러워도 뒤에 있는 숫자에 대해서 약간 할 말이 남아있었다.

         

         “연구원 수당의 거의 두 배…!”

         

         미묘한 역차별에 안면 근육이 일그러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한 달도 안 지난 직위 명목으로 지급된 액수가 다른 모든 가중치를 합친 것보다 많은데요? 이거 완전 탈세 아니야? 아니, 최종적으로 세금을 먹는 주체가 기업이니까 이 동네에서는 오히려 합법인가??

         

         ……에이씨, 난 몰라. 최대한 여기저기에 만든 임시 계좌로 쪼개고 합치고 폐쇄해서 탐정이 들여다봐도 알아보기 힘들 수준으로 세탁한 다음 후다닥 다 써버려야지.

         훗날 돌려달라고 말할 건덕지조차 없게, 아예 물리기 불가능하게.

         

         그나저나 13억 크레딧이라… 실상 이 정도면 게이머의 금전 감각으로 봐도, 무엇보다 시스템적 한계에 막혀서 이만한 액수를 단번에 벌어들일 방법이 없던 걸 감안하더라도. ‘와, 한동안 크레딧 파밍 좀 쉬어도 괜찮겠네.’ 하는 판단이 설 정도로 풍족한 자금 환경이었다.

         

         물론 일반인, 혹은 기반이 탄탄한 세이브 기준으로 풍족하다는 거고.

         돈 나갈 곳을 한 번 짚어보라면 무궁무진한 맨몸 방랑자에게는 300으로 키와 아이큐, 그리고 거기… 길이를…… 배분하라는 것 같은. 음, 이 비유는 좀 적절하지 못했네. 이제는.

         

         “…적절하지 못하면 좀 어때! 얼마전에 봤는데 있는 놈들은 다 그렇게 놀더라.”

         

         삐빅…!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변명을 주워섬기고는 호텔 카페테리아의 테이블 패널을 두들겨서 평소에 먹던 것보다 약간 더 비싼 음식을, 그러니까… 여기 계신 Fettine Di Maiale Con Salsa Di Mele처럼 ‘살사’ 단어를 빼고는 알아먹기도 힘든 고기 메뉴를 시켜보았다.

         

         그 외에도 네오 헤이븐 럭셔리 빈티지 골든 프리미엄 어쩌구저쩌구하는 단품 요리도 있긴 했는데 다음 기회로 미뤘고.

         

         매드 사이언티스트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몸이 되어서 좋은 점 중에 하나다. 먹는 식단의 영양소는 따질지언정 칼로리는 일절 무시할 수 있다는 것.

         

         앉은 자리에서 하루치 열량을 전부 태워버릴 수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랴.

         식비에 어마어마한 여유가 생겼으니, 역으로 과소모를 상정하고 위장 크기를 늘리는 훈련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흐흥♪”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뭐부터 차곡차곡 구비해야 세상 현명한 소비를 했다고 소문이 날까~

         마침 바로 옆에 밀수품 경매장도 있겠다 어디 반출된 강화 외골격 갑옷 매물이라도 있나 체크?

         휴대형 고성능 단말기나, 내가 머리에 쓸만한 방어구라도 둘러봐야 하나?

         

         그게 아니면 역시….

         

         “…….”

         

         슬쩍 시선을 고정해, 건너편에 앉은 고지식한 제로를 바라보았다.

         

         보증 기간이 무색하게 구매한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삐걱거린다는 고관절과 구동 기관을 구경해봐도 겉보기에는 처참한 복합 장갑보다 양호해 보였지만… 본인이 꽤 빡빡한 상황이라고 보고해준 만큼 안이 곪은 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 깡통 녀석이 미뤘던 대답을 들어볼 시간이 왔다고 본다.

         자자, 그럼 주저하지 말고 낱낱이 실토해 보시지! 숨겨왔던 너의 성정체성과 의체 취향을!

         

         – 아직은, 정중히 사양해 두겠습니다. 아샤님. –

         

         “……뭐 임마!?”

         

         사람이 기껏 큰마음을 먹고 예산에 대한 심적 저항선(Limit)마저 호쾌하게 풀어버렸거늘.

         다른 때는 추가 개조가 절실하다느니~ 이 부품, 저 외장 파츠, 빈약한 무장. 아주 위시리스트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던 주제에 막상 판을 깔아주니까 사양하는 그를 노려봤는데.

         

         어… 예상보다 더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서 살짝 움찔했다.

         

         –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를 배려해주시는 것에 문자열로 다 표현하기 힘든 벅찬 연산식이 출력되나. 스스로에 대한 최소한의 신변 정리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제 주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게다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홈리스 상태로 지내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켁!? 야! 너, 표현에 너무 포장이 없다? 호텔족이나 장기 투숙객은 홈리스가 아니야…!!”

         

         하다못해 거주지 불분명이라고 해주던가.

         다짜고짜 면전에다가, 저희… 집도 없이 사는 처지에 그건 좀… 이라는 현실적인 지적을 박아버리면 내가 무슨 신난 철부지처럼 보이잖아!

         

         째려봐도, 투덜거려봐도.

         선행되어야 할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양보할 마음은 일절 없다는 듯이 완강한 태도를 굽히지 않는 제로와 밀고 당기기를 몇 분.

         

         말해, 싫습니다.

         그럼 그냥 주문해, 해당 권한을 반납했습니다.

         왜 자꾸 고집 부리는데, 합리적 의사결정에 의거한 충돌은 고집이 아닙니다.

         너 진짜 내가 대충 아무 비싼 몸이나 시켜버린다? 아샤님의 선택이라면 수긍하겠지만 차라리 토스터기에 들어가겠습니다.

         

         – 정 호의를 베풀고 싶으시다면 저는 고성능 CPU와 메모리나 여러 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욕심은 다른 부족한 부분이 모두 충족되고 난 뒤에 여유 예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게 맞습니다. –

         

         “아오…!!”

         

         [ 주문하신 전대 이탈리아식 살사 소스를 곁들인 돼지 등심 가공육 나왔습니다. ]

         

         논쟁이 심화되던 와중 달그락! 테이블에 은은한 지방 향기가 감도는 접시가 올라오고 배달을 끝마친 서빙 로봇이 덜덜거리면서 멀어졌으니.

         억지로 눈싸움을 지속해보려던 나는 없던 주름도 생길 것 같은 찌릿거림에 결국 얌전히 힘을 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버렸다.

         

         ……에휴, 그래. 텄다 텄어.

         

         아무리 봐도 뭔가 다른 꿍꿍이-해결책-가 있는 것처럼 굴어서 인정하면 지는 기분이라 우겨봤는데 일단 논리적으로는 이 바보의 말이 맞다. 얘가 설마 나한테 해가 되는 길을 강요할 리도 없으니 말이다.

         

         오픈월드 장르를 지향하는 게임이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것.

         다양한 커스터마이징과 자유, 안전과 휴식은 물론 재정비를 하는 장소 역할까지 담당해주는 기능.

         

         아지트? 본거지? 하이드아웃? 어떻게 불러도 되나, 네오 헤이븐 유저는 편하게 마이홈(My Home)이라고 표현하곤 했지만.

         

         한참이 걸려서 마침내 얻을 순간이 왔다는 게 중요하지 이제 와서 호칭이 무슨 소용이랴.

         그리고 사실 거주 문제라는 건 대부분의 숙박 시설에서 적당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나보다도 여러 전용 설비가 필요한 케어봇에게 더 절실한 이슈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면 답은 하나다.

         집을 사버리자. 마음 편하게 머물고 앞으로의 평지풍파를 대비할 근거지(base)로 삼을 존나 개쩌는 집을.

         

         

         ………아, 잠깐. 이거 살사 소스가 너무 매운데. 아, …아악!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대충 미국 가정집 폭발하는 짤)

    아아아ㅡ아으ㅏ악진짜더워서죽을것같아요!

    항상 재밌게 읽어주시고! 바쁘신 와중에도 추천 눌러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이 하루의 활력소가 되었다면 좋겠네요.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