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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1

     이곳은, 백은으로 빚어진 기억.

     

     나는 간혹 회귀 전의 상대와 직접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백은을 통해 꿈 속에서 상대를 불러내고는 했다.

     “직접 보고 싶어할 줄은 몰랐는데.”

     꿈 속의 황제가 나타났다.

     평소에 보던 젊은 합스베르크 황제와 달리, 어딘가 이질적으로 젊은-마법으로 강제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 황제는 황제의 정복이 아닌 셔츠와 바지라는 가벼운 차림으로 내 앞에 차를 내어놓았다.

     “내가 어떻게 말을 해주는 게 좋을까. 진짜 기억 속 황제처럼? 아니면 꿈 속에서의 존재라는 걸 인지한 채로, 말동무를 하는 것처럼?”

     “전자로 부탁하지.”

     “그러려면 일단 존대부터 해야 할 것 같다네. 매국노 그레이는 한 순간을 제외하면 항상 존대를 했으니.”

     “…황제께서는 지금의 노스트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나는 황제의 앞에 마주 앉았다.

     “경룡장에서의 사건 이후 벌써 수 개월이 지났고, 한 해가 지났습니다.”

     “18살이 된 거, 축하하네. 이제 며칠 뒤면 1학기가 새로 시작되는 건가?”

     “노스트럼은 반으로, 아니 셋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래. 그걸 갈라버린 건 자네지. ‘나의 전략’을 참고했든 안 했든.”

     황제가 앞으로 손을 뻗자, 그의 앞에 넓은 치즈케이크가 나타났다.

     “세인트 지오 수호파. 나리아 지오 지지파. 그리고 제국파.”

     케이크 위로 초가 꽂히기 시작했다.

     그 초의 끝에는 심지대신 사람을 형상화한 인형이 묶여있었다.

     “나는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왕국에 내분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네. 자고로 전쟁에서 이기려면 온전한 노스트럼보다는 서로 싸우고 갉아먹은 노스트럼이 더 상대하기 쉽지 않겠는가?”

     처형장에서 총살 직전, 기둥에 묶여 죽는 이들처럼.

     “노스트럼 왕가와 지브롤터 백작가가 서로 분란을 일으키면 최고. 세상이 뒤집히기 전에는 모종의 계기로 인해 그게 맞아떨어져, 붉은 늑대는 끝까지 발톱을 숨기다가 내가 황제에 즉위하는 날 즉시 발톱을 드러냈지.”

     화르륵.

     세인트 지오 진영에 꽂힌 초가 불탄다.

     금발적안의 제복 남자처럼 생긴 인형은 순식간에 불에 타 녹아내리고, 불꽃에 일렁거리는 케이크 윗부분은 그 화형에 열광하듯 흔들리고 있다.

     “과거 이야기는 계속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의 이야기나 계속 해야지.”

     사락.

     황제가 손을 흔들자, 초에 붙은 불꽃이 사라지고 다시 초가 솟아났다.

     “그대가 말하는 충성병자…제로스 바르셀 같은 자들은 한 마디로 ‘물린 자’들이야. 버려야 하는데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넘어가지 못하는 거지.”

     치즈케이크의 윗부분이 흑백으로 물들었다.

     모노톤으로서, 체스판과 같은 형태로 초코 필름이 뒤덮였다.

     “부정. 비리. 범죄. 부패. 무능왕의 옆에 달라붙어 즐긴 사치와 향락. 그게 날아가게 생겼으니.”

     세인트 지오의 녹아내리는 촛불 아래, 그 촛농을 핥아먹으려고 달라붙은 인형군대가 촛농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그것은, 곧 귀족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일부는 나리아의 영토를 바라보고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 고개를 촛농에서 들지 않고 있다.

     “대숙청이 일어날 거야.”

     초의 위에 묶여있는 나리아 인형이 머스킷을 든 채 아래를 겨누고 있다.

     “전대 국왕의 세력 숙청만큼 왕권을 강화하기 쉬운 게 또 없고, 그게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숙청이라면 더더욱 명분이 서지.”

     자신의 영지로 넘어오려는 이들을 선별하며, 일부 인형을 향해 가차없이 머스킷을 쏘아 그 미간을 꿰뚫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거든? 그럼 답은 뭐겠나.”

     그 누구도 보지 못하는 치즈케이크의 판 아래.

     “이게 침몰하는 배라는 걸 일찍 깨닫고 어디든 탈출해야 하지 않겠어?”

     케이크 내부의 생크림이 녹아내리고 있다.

     판 전체가 뜨거워지니 자연스레 생크림이 흘러내리고, 아래에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한 생크림에 세인트 지오가 있는 판 자체가 기울어지고 무너지고 있으나-

     “근데 그런 건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들이나 가능한 거지, 여기 고개 처박고 있는 개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

     무너지든 말든, 촛농에 파묻힌 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모르고 있거나,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무너지기 직전까지 다 빨아먹고 그 뒤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하거나.

     “그런데, 여기는 안 갈 것 같지?”

     황제가 제 3지대를 가리켰다.

     “아무리 세상이 감기기 전과 지금이 크게 다르다고 하더라도, 지브롤터 백작가가 미친 자들의 소굴이라는 건 변하는 게 없거든.”

     “…….”

     “그렇지 않나? 왕도에서 국왕을 상대로 그 난리를 피웠는데….”

     황제는 치즈케이크를 포크로 푹 찍었다.

     “백작은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고, 장남과 차남은 아카데미에서 떠나지 않고 오히려 자리를 잡아버렸지.”

     “…….”

     “왕궁이랑 거리가 얼마 차이난다고 이렇게 대범하게 행동하는 건지 모르겠어. 암살자라도 나온다면 어쩌려고 그러나. 응?”

     “암살자는-”

     “자네 말고, 자네 동생 누아르 말이야.”

     황제는 치즈케이크를 한 입 베어물며 이죽거렸다.

     “여동생이라면 모를까, 자네가 누아르까지 계속 신경을 써주고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같은 건물에서 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야.”

     “마스터급 호위가 없다면, 아무래도 위험한 게 사실이니.”

     나 또한 치즈케이크를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노스트럼은 분열되었고, 이제 지브롤터를 죽이려고 드는 건 제국이 아니라 왕국이 되었습니다. 반역으로서 나리아의 편에 서든, 매국으로서 제국의 편에 서든 어느 쪽이든 세인트 지오의 편은 아니죠.”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적이 되었다.

     이미 예전부터 적이었지만, 그걸 대놓고 공언한 건 분명 이야기가 다르다.

     “학기가 마무리 될 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기숙사 방을 재단 이사장실 아래층으로 옮기고, 불편하더라도 한 건물에서 지냈죠. 로버트 경을 비롯하여 저기 흡혈귀를 사냥하던 ‘나인즈’들을 직원으로 들여와서 누아르의 호위로 세웠고.”

     “마스터급은 아니지 않나. 로버트 경은 예외라고 치고. 지금까지…한 4번 정도 있었나?”

     “5번입니다.”

     누아르 지브롤터를 향한 암살 미수.

     “아카데미에 직접 기사가 들어오지는 못해서 밤에 몰래 암살을 하려고 한다거나 그랬지만,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요.”

     분명히, 존재했다.

     

     “1학년 2학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강의실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상급 기사 수준의 존재가 칼 들고 들어올 일이 없었으니까.”

     오로솔 아카데미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암살의 위협으로부터 충분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건 이후로 외부인 출입이 엄격히 관리되었지. 방학 때야 지브롤터로 내려가면 그만이었고. 하지만….”

     “용기병 기승 수업이 시작되는 2학년 1학기.”

     “그 이외에도 오로솔 아카데미를 벗어나는 현장체험학습 같은 것도 많을 텐데, 그에 대한 대비는 다 되어 있나?”

     “완벽하게.”

     장소가 아닌, 사람으로 나는 누아르를 지킬 생각이다.

     

     “누아르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노스트럼은 지금 셋으로 갈렸지만, 지금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담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건전하고 치열하며, 노스트럼의 발전을 위한 ‘검증과정’이니까요.”

     “매국노 크비슬링스들은 기뻐하겠군. 그냥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는데, 졸지에 지브롤터가 자기들 편이 될 것처럼 보이니.”

     “정확히는 그러한 ‘가능성’이 열렸다는 단계일 뿐, 아직 확신을 하지는 못하죠.”

     “변경백이 왕을 상대로 칼을 겨눴는데?”

     “상식적으로, 그게 제국편으로 넘어가는 거라고 생각합니까?”

     “상식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긴 하군.”

     상식에 따르면, 아버지의 포지션은 매국노와 반역자 사이에 걸쳐져 있다.

     “나리아의 기사로서 누아르가 붙고, 제국 황실과의 연계를 위해 그레이가 붙고. 이거, 상당히 정치적인 움직임이로군.”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상대로는 철저히 배격하는 움직임이지만요.”

     “그런다고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지?”

     “아무것도.”

     세인트 지오는 아버지가 대립각을 세운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버지가 폭로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직접적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무능왕이 어머니를 상대로 뭔가를 했다는 건 분명하게 드러나버렸죠.”

     “…….”

     “어머니의 허락이 없이는 결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을 말입니다.”

     아버지가 변한 것처럼, 어머니도 변했다.

     “어머니는 기꺼이 자신을 통해, 저와 누아르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설령 세간에 악의적인 소문이 퍼진다고 하더라도.”

     “그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는데?”

     “그에 대한 진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싫어하는 이들이 지브롤터로 점차 모이기 시작한다는 건 분명하니까.”

     현재의 상황과 비교하면, 현재의 상황을 만든 계기는.

     “지금부터는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며 달릴 때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첫 번째 한 걸음으로서, 저는 이 패를 꺼내겠습니다.”

     “미쳤나?”

     황제가 내가 꺼낸 패를 보자마자 경악했다.

     “진짜 합스베르크 황제가 봐도 기겁을 하겠군.”

     “꺼내기 정말 힘들었지만, 다행히 허락을 해주시더군요.”

     나의 패.

      “때마침 1학년, 신입생이 들어온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신입생들이 들어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 * *

     

     

     제국력 98년 2월 28일, 학생처 입구.

     “저기….”

     “안녕하세요?”

     학생처장, 헥스 로마나 자작은 아카데미 신입생 제복을 입고 나타난 ‘소녀’를 보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왜 그러시나요?”

     “…상당히 미인이시군요.”

     

     학생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어머, 왜 존대를 하세요? 저한테는 말 놓으셔도 된답니다! 오호호.”

     “…….”

     자신이 가진 입학원서와 그 옆에 놓인 신입생용 학생증을 번갈아보며, 헥스 자작은 상대 학생의 나이를 다시금 확인했다.

     “그러니까….”

     “저는 에페리아라고 합니다! 나이는…17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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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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