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준 걸 왜 버려? 바보야?”
로즈마리는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요르문간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충격받지 말고 잘 들어라. 네 언니는 사실상 인간 편에 붙었다.”
“닥쳐, 네가 뭘 알아.”
“닥치라고? 누가 누구보고?”
요르문간드는 코웃음을 치며 로즈마리를 일갈했다.
“멍청한 년아, 내가 네년보다 네 언니를 더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짧고 강렬한 한 마디에, 로즈마리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요르문간드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네 언니는 우리 중 유일하게 타락하지 않았다. 그 탓에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었지. 정령을 전부 몰아내는 게 맞는 일일까? 여신을 적대하는 것이 정녕 금안족을 위한 일인가? 마왕이 대전쟁을 일으키는 그 순간까지도, 그런 잡생각을 늘어놓았던 녀석이었다.”
로즈마리도 거기까진 알고 있었다.
그간 금안족이 수많은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에테르는 끝까지 마왕군이 계획하고 있는 ‘정령 몰살’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녀가 멍청하기 때문은 아니다.
무식할 정도로 착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녀석의 고뇌는 학식이 지나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성과 감정을 분간할 줄 알았기에 생겨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번뇌는, 여신이 내린 저주나 진배없지.”
“……저주?”
“그렇다, 저주. 네 언니는 우리처럼 검은 피를 흘리기 전까지는 여신의 손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게야. 우리 또한 여신으로부터 탄생한 존재에 불과하니까.”
요르문간드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제 여가 무얼 얘기하려는지 알겠나?”
로즈마리는 쓰읍, 하고 침음을 삼켰다.
그녀의 시선이 원자폭탄을 향했다. 때맞춰 눈을 뜬 요르문간드가 공허한 눈빛으로 확언했다.
“마음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저걸 터뜨릴 수도 있겠지.”
마왕군의 행동이 도리어 금안족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일이라고 판단하기라도 한다면, 에테르는 동족이고 뭐고 상관없이 뇌관을 터뜨릴 작정이다.
적어도 요르문간드의 시선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니, 그러진 않을 거야.”
이번에는 로즈마리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자질구레한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품에서 에테르가 준 스크롤을 꺼내 흔들었다.
“기폭 장치까지 나한테 맡겼거든.”
“…가짜일 가능성은?”
“없어.”
스크롤 전문가인 로즈마리가 보기에, 이건 정제된 마력회로가 연결된 진품이었다. 즉, 일정량 이상의 마력을 불어넣는다면 언제라도 하늘에 표고버섯 농장을 차릴 수 있었다.
“수상한데.”
요르문간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매만졌다. 눈도 안 보이면서 괜히 폼만 잡고 있는 것이라고, 로즈마리는 생각했다.
“수상하긴 뭘 수상해. 너 의심병 있어?”
“연장자한테 ‘너’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나.”
“지금 그게 중요해?”
로즈마리의 입꼬리는 하늘을 찢고 올라갈 기세였다.
“언니와 오래 종군한 건 너겠지만, 언니와 더 가깝게 지낸 건 다름 아닌 나야.”
“……뭐라?”
“그런 내가 언니가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못 알아챌까 봐?”
에테르는 마수를 포함한 모두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준다고 말했다.
즉, 인간이나 마수 중 한쪽이 먼저 뒤통수를 거나하게 치기 전까지는 중립을 유지한다는 의미였다.
이 원자폭탄은 그걸 보증하기 위한 일종의 증표였고.
단순히 터뜨리려는 목적은 아닐 것이다. 언니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리 판단하는 편이 타당했다.
“다 차치하고 간단하게 얘기해 보자. 그냥, 언니를 이쪽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전부 해결되는 일이잖아? 인간에게 완전히 배신감을 느끼게 해서 말이야.”
요르문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그럼, 내가 누구인데.”
지금껏 계획이란 계획은 전부 박살 난 블루베리였다.
하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테니까.”
꽈악. 로즈마리는 양손을 쥐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비릿한 웃음이었다.
**
로즈마리에게 원자폭탄을 주고, 다음 날.
하루 수업을 마치고 동아리방으로 들어오니 로테와 프레이가 나에게 작은 보석함을 건넸다.
“이게 뭔데?”
“예술제 부상이래.”
“너 올 때까지 안 열어보고 있었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버멜, 메릴다, 에리카에 제롯까지.부실에는 로테와 프레이 말고도 몇 명이 더 눌러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너희는 여기 왜 있냐?”
내가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예술제 부상이라잖아요!”
메릴다가 흥분하여 큰 목소리로 조잘댔다.
“제가 알기론 틸레트 예술제에서 주는 부상을 정령들이 만드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당연히 보러 올 수밖에 없죠!”
“그렇게 볼거리는 아닐 텐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틀림없이 인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희귀 아티팩트일 거라고요!”
메릴다의 열변에도, 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잘 안 와닿는다.
아는 정보라고는, 이게 앞으로의 일을 더 편하게 만들어주는 아이템이라는 것뿐. 어쨌거나 열어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덜컥.
“……반지잖아?”
“네 개나 있네.”
각각 빨강, 파랑, 검정, 녹색 보석이 박힌 링이었다.
“뭐지, 버프 아이템인가?”
쌍으로 있지는 않은 걸 보니 우정반지나 결혼반지는 아닌 모양이다.
붉은 반지를 함에서 꺼내 이리저리 돌려보던 중, 에리카가 경탄하며 입을 열었다.
“…와,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져.”
“그런 것도 알아?”
“정령을 지니고 있으니까 알 수 있어. 이 반지들은, 정령왕께서 손수 빚어내신 귀중품이야.”
메릴다와 에리카의 눈빛이 찬연하게 빛났다. 그 모습이 꼭 신내림을 받아 감읍 직전에 이른 신자와도 같았다.
내 시선이 버멜에게로 꽂혔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무슨 성능이 있는지는 알겠어?”
“거기까진 모르지.”
정황상 이걸 아는 건 버멜 정도겠지. 그러나 그가 여기서 처음 보는 반지의 성능을 그가 얘기한다는 건 정황상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혹시 양장본에게 물어볼 수 있나?
그리 생각하던 참이었다.
[네? 아, 알겠어요.]
갑자기 헛소리를 늘어놓던 양장본은 푸욱 한숨을 쉬더니, 투덜거리는 듯한 말투로 내 머릿속에 말을 불어넣었다.
[원래 이런 건 알려주면 안 되는데…. 하는 수 없네요.]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촤르륵! 양장본이 페이지를 벌리며 지식을 토해냈다. 나는 눈앞에 막 적히기 시작한 황금빛 글씨를 읽었다.
[■ 의열의 반지(레전더리)]
[화염의 정령왕, ‘이그니스’의 힘이 깃든 반지. 착용자에게 방대한 의지를 부여하고 절망으로부터 구제한다.]
현재 들고 있는 붉은색 반지였다.
기묘한 일이었다.이전까지 학문과 관련된 지식만을 알려주던 양장본이 이런 ‘쓸데없는’ 정보를 다 알려주다니.
그러나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다음 줄을 읽어나간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스트레스 피해 감소(-50%)]
[스트레스가 160 이상일 때 높은 확률로 ‘극복’ 이벤트 발생]
[착용자가 ‘집착’, ‘폭력’, ‘절망’ 상태의 붕괴에 빠지지 않음]
의열의 반지 성능이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말 그대로 ‘운이 좋군’을 시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
혹시나 몰라 다른 것도 확인했다.
[■ 포말의 반지(레전더리)]
[■ 지류의 반지(레전더리)]
[■ 창공의 반지(레전더리)]
하나같이 ‘의지의 반지’와 동급인 아이템이었다. 특성을 확인해 보니 하나같이 쓸만한 것을 넘어 없으면 아쉬운 생각이 들 정도로 출중했다.
이제야 알겠다. 버멜이 왜 ‘이게 있으면 일이 한층 쉬워진다’라고 말했는지를.
나는 부상을 공평하게 분배할 방법을 떠올렸다.
조원은 나와 로테, 프레이 세 명. 반지는 4개이므로 삼등분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렇다면.
“로테, 프레이.”
일단 그녀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보자.
“너희 하나씩 가져. 로테는 빨강, 프레이는 검정이면 되지?”
“어, 어…….”
두 사람은 침을 꼴깍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팔 떨어지겠다. 빨리 가져가.”
“정말 그래도 돼?”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너잖아. 네가 전부 처분해도….”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필요없어.”
이건 아까운 일이 아니다.
호구 같은 짓은 더더욱 아니다.
친구를 잃지 않으려면, 그리고 이 세계를 해피엔딩으로 끝내고 돌아가려면 포석을 이렇게 두는 게 알맞다.
무엇보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에게도 크나큰 이득이 될 터.
고개를 돌려보니 버멜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역시, 내 선택이 옳은 방향이다. 아니면 같은 빙의자이다 보니 떠올리는 것도 비슷해진 걸 수도 있다.
“그, 그럼 고맙게 받을게!”
“히히, 반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나는 로테와 프레이에게 각각 ‘의열의 반지’와 ‘지류의 반지’를 건넸다. 두 사람은 기뻐하는 얼굴로 반지를 착용했다. 손가락? 왼손 검지였다. 불변할 우정을 뜻하는 자리.
“후우.”
로테가 낀 반지 위치를 보며 내심 안도했다.
붕괴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이었으니까.
로테에게 준 반지에는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프레이에게 준 ‘지류의 반지’에는….
[연성 속도 증대(+200%)]
[연성에 필요한 마력량 감소(-60%)]
[‘삶에의 의지’ : 착용자가 자살하지 않음]
그런 특성이 붙어있었다.
마지막 건 별 상관없는 특성이라 치더라도, 위의 두 개 특성이 완전히 프레이만을 위한 물건이었다. 안 주려고 해도 줄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남은 반지는 두 개인데.
“…….”
“…….”
버멜…. 아니, ‘로멜’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 변장 중인 녀석에게 다짜고짜 이걸 주면 저번처럼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남은 반지들을 외투 속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걸로, 겨울방학 대비책은 대부분 완성되었다.
**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간고사가 막 끝난 시점.
“나, 다녀올게!”
나와 진득한 포옹을 나눈 로테는 일리야드 아카데미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탔다.
이젠 그녀가 내 곁을 떠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