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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2

       *

        “내가 라일라를 태워 죽였다.”

        ​

        “… 뭐?”

        ​

        “그래서 마리아 누나를 태우는 데 별로 저항감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

        “…”

        ​

        “삼촌이라고 다를까.”

        ​

        ​

        ​

        머리에 피가 쏠린다.

        ​

        구태여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머리가 뜨겁고,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뜨겁게 달궈진 머리 안에 울려댔다.

        ​

        마치 뇌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은데, 정작 피로와 빈혈로 몽롱해졌던 정신은 도리어 또렷해진다.

        ​

        아니, 또렷해지는 것을 넘어 오히려 타오르는 불꽃이 찢어져 공중으로 흩어지는 소리까지 구분해 낼 정도로 예민하게 날이 섰다.

        ​

        아, 그렇구나.

        ​

        이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구나.

        ​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지금 내 상태를 진단했다.

        ​

        물론 내가 살면서 화 한번 내보지 않은 수도승 같은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

        라일라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나의 무력함에 화가 났고, 다섯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을 땐 내가 저지른 끔찍한 죄악에 진절머리가 났으며, 녹색의 여인을 만나 흐트러진 운명에 대해 들었을 땐 너무나 가혹한 운명의 뒤틀림에 절망했었다.

        ​

        하지만, 그때 느낀 그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산들바람처럼 느껴질 만큼, 지금 나의 내면엔 지독한 분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

        머리가 터질 것 같다.

        ​

        살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즐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건만, 지금은 맨손으로 눈앞의 저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었다.

        ​

        내 눈에 깃든 저주로 인해 참혹하게 짓이겨진 다섯 구의 시체를 바라보며, 그 누구도 이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건만, 지금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게 해주리라는 지독한 악의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앨리스 누나…”

        ​

        ​

        ​

        그 순간 앨리스 누나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

        누나는 그 기계 심장 때문에 분노의 조절이 잘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

        그렇다면 앨리스 누나는 늘 이런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는 걸까.

        ​

        하, 맙소사.

        ​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

        매일 이런 감정을 느끼면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

        가만히 발더를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내 몸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

        ​

        ​

        “…”

        ​

        ​

        ​

        조금 전 마리아 누나의 마법을 물리적으로 터트릴 때, 어디론가 날아간 앨리스 누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

        마기로 가득 차 있는 이 숲에서 내가 멀쩡하게 서 있다는 것은 마리아 누나의 신성력이 아직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

        당황하거나 놀라서는 안 된다.

        ​

        지금은 내 눈앞의 저 개자식에게서 눈을 떼선 안 된다.

        ​

        ​

        ​

        “큭,”

        ​

        ​

        ​

        발 더는 이를 악물며, 바닥의 흙을 긁어모으듯이 주먹을 모아 쥔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나를 얕보고 있는 것일까.

        ​

        발 더는 또다시 그 가증스러운 혓바닥을 굴리기 시작했다.

        ​

        ​

        ​

        “미친놈, 뭐가 어쩌고저쩌고해?”

        ​

        “…”

        ​

        “건방진 눈매야. 애쉬. 눈동자 색은 변했어도 그 매가리 없는 눈매는 네 아비를 똑 닮았구나.”

        ​

        ​

        ​

        발 더는 진한 마기를 뿜어내며 순식간에 나에게로 뛰어들었다.

        ​

        아무리 앨리스 누나의 신성력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짙은 농도의 마기가 다가온다면 본능적으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다.

        ​

        몸에 직접적으로 이 상을 주진 못해도 눈과 목을 따갑게 만드는 매캐한 연기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짙은 마기이기도 했다.

        ​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하지만, 피아는 아니었다.

        ​

        ​

        ​

        “애쉬에게 다가오지 마.”

        ​

        ​

        ​

        거대한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낸 바람이 발더의 몸을 꿰뚫었다.

        ​

        그와 동시에 나는 주문을 외웠다.

        ​

        불씨를 키우다, 쏘아낸다.

        ​

        작은 불씨만을 만들어 피아가 만들어낸 바람에 실려 보냈다.

        ​

        발더의 상처 부위를 타고 뜨거운 불씨가 그의 몸속에 파고들었다.

        ​

        ​

        ​

        “크악!”

        ​

        ​

        ​

        발더는 발작을 일으키듯 등허리를 배배 꼬았다.

        ​

        나는 그런 발더에게 달려가 그의 가슴팍을 발로 밀어내듯 걷어찼다.

        ​

        ​

        ​

        “인류의 배신자니, 뭐니, 그딴 거창한 말 따위 하지 않을 거다.”

        ​

        “큭, 애쉬… 너 이 자식.”

        ​

        “너만 없었으면, 내 가족들은 그렇게 죽지 않았을 거다. 나한테는 그걸로 충분해!”

        ​

        “얕보지 마라!”

        ​

        ​

        ​

        발더는 소리를 지르며 날쌔게 주먹을 휘둘렀다. 

        ​

        하긴, 오랜 모험가 시절로 단련된 탄탄한 육체는 내 빈약한 발차기 정도는 우습게 받아 낼 테니.

        ​

        황급히 고개를 뒤로 뺐지만, 발더의 주먹은 내 콧등을 묵직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

        ​

        ​

        “윽!”

        ​

        ​

        ​

        얼얼한 콧대를 매만지자 살짝 틀어져 있었고 이내 코피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

        발더는 뻗었던 주먹을 다시 반대로 휘둘렀다.

        ​

        이번에는 제대로 피했지만, 그 순간 발더는 꽉 틀어쥔 주먹을 펼쳤다.

        ​

        흙과 모래가 순식간에 눈으로 끼얹어졌다.

        ​

        ​

        ​

        “경험의 차이다. 애송아!”

        ​

        ​

        ​

        발더는 소리를 지르며 내게 발을 내질렀다.

        ​

        이물질에 의해 눈을 질끈 감아 피할 수 없었다.

        ​

        통나무처럼 두꺼운 그의 다리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

        ​

        ​

        “피아!”

        ​

        ​

        ​

        이번엔 단단한 망치처럼 두텁게 쌓인 공기가 발더의 다리를 내려찍었다.

        ​

        발더가 나를 향해 휘둘렀던 쪽의 무릎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평소의 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

        ​

        ​

        “빌어먹을, 흙이나 던지는 게 경험이냐. 하긴 이게 딱 네 수준인 거지. 가족마저 마왕에게 팔아넘긴 걸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쓰레기의 수준 말이야.”

        ​

        ​

        ​

        나는 팔로 쓱쓱 눈가를 비비며 발더를 노려보았다.

        ​

        발더의 무릎에 새카만 마기가 모여들더니, 이내 곧,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신성력이 그렇듯이 마기 역시 사용자를 보조해 주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

        다만,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들어간 무릎이 그대로인 것을 보아 앨리스 누나의 신성력처럼 상처를 치유해주는 힘은 아니고, 그저 통증을 잊게 해주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리라.

        ​

        발더는 달라진 양 다리의 높이 때문에 엉거주춤 선 채로 소리를 질렀다.

        ​

        ​

        ​

        “크윽, 뭐야, 대체 뭐냔 말이다아!”

        ​

        ​

        ​

        발더는 무척이나 당황해하며 악을 쓰고 있었다.

        ​

        사실 그럴 만도 했다.

        ​

        그의 눈에는 피아가 전혀 보이지 않을 테니까.

        ​

        발더의 입장에선 정체도 모를 기이한 힘으로 보이지도 않는 공격을 여러 차례 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적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피아에게 바람 위주의 공격만을 사용할 것을 지시해두었으니, 사실상 발더가 느끼는 공포는 내가 의도한 그대로였다.

        ​

        그렇기에 내겐 발더에게 정령술에 대해 설명해 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

        ​

        ​

        “닥쳐.”

        ​

        “너는 마법사였는데… 피아? 그런 마법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아까… 그 흙기둥은… 뭐였지? 믿을 거라고 했던가…? 그것도 주문이 아닌데…”

        ​

        ​

        ​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던 발더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흠칫 놀라며 부러진 다리를 황급히 뒤로 빼내었다.

        ​

        어찌나 급하게 디뎠는지, 반대 방향으로 구부러진 그의 무릎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 번 더 툭 구부러질 정도였다.

        ​

        그 바람에 잠깐 휘청거리던 발더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

        ​

        “마왕님과 같은… 너 대체…”

        ​

        “닥치라는 말이 들리지 않나?”

        ​

        ​

        ​

        발더는 식은땀을 흘렸다.

        ​

        무릎이 아파서는 아닐 테고, 아무래도 무언가 짚이는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

        만약 그가 내게서 마왕의 힘과 비슷한 기척을 읽은 것이라면, 역시 현 마왕은 정령 술사 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발더는 계속 악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

        ​

        ​

        “대답해라! 그런 힘을 인간이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어!”

        ​

        “시끄러워.”

        ​

        “나, 나조차도… 인간을 포기하고 나서야, 그 힘의 일부를 갖는 정도로 그쳤는데…!”

        ​

        ​

        ​

        발더는 정령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

        그토록 열렬히 모시는 마왕에게 발더는 그리 신임받는 존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

        하긴, 아무리 기존의 마왕 자리를 찬탈했어도, 새로운 마왕 역시 마족일진대 인간을 그렇게 중한 데 등용할 리는 없겠지.

        ​

        그의 힘을 받았느니 어쩌니 떠들어대지만, 내 눈에 다른 정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사실상 그가 발더에게 내려준 건 마리아 누나의 시체뿐일 것이다.

        ​

        그나저나, 발더의 말 중에 살짝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

        인간을 포기했다?

        ​

        뭐, 그야 그렇겠지.

        ​

        발더가 인간이었다면 이 눈의 저주가 진작에 발휘되었어야 이치에 맞을 테니 말이다.

        ​

        그건 내가 마리아 누나를 불태우는 데 망설임이 없던 판단 근거이기도 했다.

        ​

        마리아 누나를 보았을 때도 이 눈은 나를 미치게 만들지 않았다.

        ​

        그건 즉, 마리아 누나 역시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

        ​

        ​

        “씨발,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네.”

        ​

        ​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 누나를 태우는 일이 즐거웠을 리는 없었다.

        ​

        내 기억과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 덕분에 누나와의 추억이 더럽혀지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지만, 언데드가 되어 꿈틀거리던 라일라를 태웠던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서, 무척이나 착잡하고 괴로웠다.

        ​

        ​

        ​

        “피아.”

        ​

        “응, 알고 있어. 애쉬가 생각하는 것쯤은 다 알아.”

        ​

        ​

        ​

        피아는 천천히 마력을 끌어모았다.

        ​

        ​

        ​

        “애쉬는 쉽게 죽여 줄 생각이 없는 거잖아. 그렇지?”

        ​

        ​

        ​

        늘 그렇듯, 피아는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

        하지만 이번엔 요구가 요구인 만큼, 나는 다시 한번 피아에게 물어보았다.

        ​

        ​

        ​

        “부탁할게. 괜찮지?”

        ​

        ​

        ​

        피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

        훤칠하게 자란 키나, 크고 잘록하게 잘 빠진 몸매만큼이나 시원한 미소였다.

        ​

        ​

        ​

        “그럼, 애쉬가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거니까.”

        ​

        ​

        ​

        ​

        ​

        ​

        ​

        ​

        ​

        ​

        *

        발더는 겁을 먹은 듯,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애쉬를 비웃고 있었다.

        ​

        누가 보더라도 애쉬는 분노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

        아직 그의 능력의 정체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냉정함을 잊은 상대를 속이는 것은 오랜 모험가 생활 동안 흥정과 속임수로 연명하던 발더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

        애쉬는 붉은 그 눈동자가 흰자와 그다지 다르게 보이지 않을 만큼 붉게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

        그리고 그런 애쉬의 등 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아래에서 천천히 마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

        그녀를 조종하기 위한 실은 모조리 끊어졌다.

        ​

        하지만 그렇다고 마리아가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

        조종당하지 않는다면 마리아는 여타 언데드처럼 본능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

        그리고 언데드는 마기로 가득 찬 발더보다는 살아있는 피와 육신을 가진 애쉬를 먼저 노릴 게 분명했다.

        ​

        본능적으로 어마어마한 대형 마법을 난사하는 언데드.

        ​

        그 정도면 애쉬의 정신을 흩트려 놓기엔 충분하리라.

        ​

        발더는 애쉬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며 일부로 다리를 절뚝거렸다.

        ​

        마치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며 맹수를 유혹하는 가녀린 사슴이 된 기분이었다.

        ​

        ​

        ​

        ‘자기가 유리하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나약해지는 순간이지.’

        ​

        ​

        ​

        늘 그랬다.

        ​

        패거리를 이끌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빚쟁이들도 방심하다 발더의 손에 죽었고, 자신만만하게 마왕을 토벌하겠노라 떠들던 용사파티도 결국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앨리스조차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들었다가 눈앞에서 발더를 놓치기도 했다.

        ​

        늘 살아남는 건 방심하지 않는 사람뿐이었다.

        ​

        발더가 마왕에게 고개를 조아린 것도 살아남기 위해 만용을 부리지 않은 결과였다.

        ​

        발더는 몇번이고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경험을 깊게 신뢰했다.

        ​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는 완전히 몸을 일으킨 채 천천히 애쉬를 돌아보고 있었다.

        ​

        발더는 마지막까지 애쉬를 도발하기로 했다.

        ​

        ​

        ​

        “라일라를 태웠다고 했지?”

        ​

        “… 너 그 입 다물어.”

        ​

        “여동생을 불태울 때 나는 냄새는 어떻든? 꼬맹이답게 오줌 지리는 냄새가 나던가?”

        ​

        “닥치라고!”

        ​

        “네 어미는 죽을 때 그랬거든. 지독한 지린내가…”

        ​

        “야 이 개새끼야!”

        ​

        ​

        ​

        애쉬가 달려든다.

        ​

        그리고 그의 등 뒤에, 마리아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

        이겼다.

        ​

        발더는 그렇게 확신했다.

        ​

        그러나 그 순간,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리아의 팔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

        ​

        ​

        “…뭐?”

        ​

        ​

        ​

        발더는 경악했다.

        ​

        애쉬 역시 등 뒤에서 들리는 기이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는 걸 보았다.

        ​

        애쉬가 한 짓이 아니다.

        ​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글거리는 불덩이 같으면서도 타버린 잿가루 같은 탁한 목소리였다.

        ​

        ​

        ​

        “애쉬.”

        ​

        “… 앨리스 누나!”

        ​

        ​

        ​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마리아.

        ​

        그곳엔 성검을 휘둘러 새카만 피를 털어내는 앨리스가 서 있었다.

        ​

        ​

        ​

        “복수는 너에게 맡길게, 애초에 너의 복수였으니까.”

        ​

        “… 응,”

        ​

        ​

        ​

        발더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손끝에 마기를 모아 뿜어냈다.

        ​

        그의 손끝에서 수만가지 실들이 뻗어 나와 주변의 나무들을 붙잡았다.

        ​

        발더는 그대로 실에 몸을 맡겨 빠르게 현장에서 벗어나려 했다.

        ​

        ​

        ​

        “어서 쫒아 가.”

        ​

        “하, 하지만, 누나는…”

        ​

        ​

        ​

        한눈에 보더라도 앨리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

        그 빌어먹을 심장이 드디어 어딘가 망가지기라도 했는지, 그의 몸은 회복되지 않은 상처투성이에 온몸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아니, 자세히 보니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

        상처가 낫기가 무섭게, 몸에 새로운 구멍이 나고 있었다.

        ​

        마치 치즈가 녹아내리는 것과 동시에 굳어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

        앨리스는 애쉬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순식간에 애쉬의 몸 가득히 뜨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

        ​

        ​

        “이 정도면… 내가 없어도 몇시간은 버틸 수 있을 거야.”

        ​

        “… 누나?”

        ​

        “빨리 가.”

        ​

        ​

        ​

        애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지금이 그 순간이라는 것을,

        ​

        이것이 앨리스 골드필드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순간임을 말이다.

        ​

        앨리스는 힘없이 검을 든 팔을 떨어트리고는, 천천히 녹아내리는 뺨을 손등으로 가린 채 망설이는 애쉬를 향해 소리쳤다.

        ​

        ​

        ​

        “빨리 가! 그 개새끼를 놓치면 안 된다고, 알잖아!”

        ​

        “… 알았어.”

        ​

        “나는, 친구를 보내줘야겠어.”

        ​

        ​

        ​

        앨리스는 천천히 다시 한번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애쉬는 그런 앨리스를 뒤로한 채 발더를 쫒아 달리기 시작했다.

        ​

        애쉬가 어둠 속에 묻혀 시야에서 사라지자, 앨리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

        ​

        ​

        “…결국 말하지 못했네.”

        ​

        ​

        ​

        앨리스는 천천히 마리아를 노려보았다.

        ​

        마리아는 사라진 팔을 잠시 멍하니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앨리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

        ​

        ​

        “하…”

        ​

        ​

        ​

        앨리스는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

        그녀의 숨결은 닿는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열기가 배어있었다.

        ​

        실제로, 그녀의 숨결은 그녀의 내장마저 녹이고, 온 장기는 뜨거운 고열에 끓어오르고 있었다.

        ​

        지금까지 심장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몇번이고 오늘이 끝인가, 이번에야말로 끝인가 싶었는데, 진짜로 다가온 끝은 그동안의 경고와는 차원이 달랐다.

        ​

        ​

        ​

       

        “그래도 이런 마지막은 나쁘지 않아.”

        ​

        ​

        ​

        앨리스는 녹아내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치켜올리며 웃었다.

        ​

        그리고는, 무척이나 부드러운,

        ​

        마치 골드필드 시절 그녀의 모습이 연상되는 맑고 고운 목소리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

        ​

        ​

        “이번엔 너 혼자 외롭게 죽지는 않을거야. 마리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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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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