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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2

     

    시간은 금방 흘러 연무회 개막식의 아침이 밝았다.

     

    “출발까지 20분 남았습니다!”

    “황녀 전하 준비까지 5분 남았어요!”

    “시녀장님, 팔그람 백작이 면담을 요청하셨는데요.”

    “그런 여유 없어. 전하께서 바쁘시다고 하고 돌려보내.”

    “전하께서 마법예장 찾으신다!”

     

    시종과 기사진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난리가 났다.

     

    오전 진료를 마친 나는 아셀라가 출발할 때까지 대기 중이다.

     

    ‘1일차는 개막식. 2일차부터 본격적인 연무회가 시작해.’

     

    일자별로 검술, 궁술, 창술, 마법, 치유술, 각종 단체전 등 골고루 종목이 나뉘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할 치유술은 5일 차에 있기에 그때까진 얌전히 아셀라의 곁을 지키면 된다.

     

    “출발하자꾸나.”

     

    방을 나온 아셀라는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적색의 드레스를 입었다.

     

    나는 호위기사, 시녀장 누님과 함께 그녀의 뒤를 따르며 행렬을 이루었다.

     

    마차에 탑승하니 월광궁의 깃발이 멋들어지게 펄럭였다.

     

     

    연무회 경기장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대륙 각지에서 몰린 관중이 이미 수만 개의 객석을 가득 채웠다.

     

    오늘의 주역들을 태운 마차가 경기장으로 들어와 대기석으로 향할 때마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이거 분명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아, 올림픽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왕국은 어지간히 도떼기시장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사방이 소음으로 가득 차 있으니 아셀라가 불만을 표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정치적인 액션도 취하기 힘드니 그럴 만도 했다. 아셀라는 여기 놀러 왔다는 자각은 없으니.

     

    개막식 정도는 즐겨도 될 텐데.

    모처럼 다들 축제 분위기고.

     

    당장 귀빈석 앞자리의 라우가나 게오르크만 해도 간식을 잔뜩 쌓아놓고 개막식을 관람하려는 태도였다.

     

    다만 황제는 조금 걱정되는 모습이었다.

    느린 걸음걸이로 귀빈석까지 들어온 그는 상시로 앰브로시아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간신히 자리에 앉은 황제는 자식들의 인사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멍하니 경기장을 응시했다.

     

    귀빈석은 국가별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바로 옆에는 왕국의 귀빈들이 위치했다.

     

    페르시야나 왕국의 국왕도 보였다.

     

     

    시간이 되니 둥둥,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정문이 열리고 사절단의 입장이 시작했다.

     

    환호가 어느 때보다도 커진다. 불꽃이 피어오르고 각국의 기사와 병사, 마법사, 치유사, 특색을 자랑할 이들이 열을 맞춰 척척 들어온다.

     

    그들의 모습은 녹화 수정구를 통해 실시간으로 대형 스크린에 비춰졌기에, 하늘을 쳐다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짜 올림픽이네.

     

     

    입장이 끝나고 대륙 모든 국가의 깃발이 휘날리자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륙 연합군 연무회에 오신 모든 이를 환영하오!

     

    그의 목소리가 확성 마법으로 수만 명의 귓가에 생생하게 울린다.

     

    마흔여 개의 지역으로 분할된 왕국을 통합 관리하는 우두머리, 국왕.

    그 위치에 있는 이 치고는 상당히 젊은 편이었다.

     

    ―인간계는 또 한 번 미증유의 위기를 맞았소. 마계의 선전포고요! 하지만 역사가 그러했듯, 이번에도 극복할 것이오.

     

    그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우리에겐 위대한 전사들이 있소. 바로 이 자리에서 인간 무예의 경지가 증명되리니! 모든 국가가 연합군으로서 힘을 합치할 것을 이 자리에서 선언하는 바이오!

     

    국왕의 선언을 이어 차례로 다른 국가의 수장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선언한다.

     

    ―드워프 왕국은 연합군에 힘을 보탤 것을 약속한다!

    ―법국은 인류 평화를 위해 싸울 것을 선언합니다.

     

    순서가 돈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리에 있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에라도 잠들 것만 같았던 기운 없는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패기 가득한 눈빛이 이 자리에 모인 수만 명을 단숨에 압도했다.

     

    ―제국은!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먼지 쌓인 귀를 뻥 뚫고 순식간에 머릿속을 울린다.

     

    ―승리하리라!!

     

    황제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동시에, 정문에서 기사들이 제국의 깃발을 휘날리며 입장했다.

     

    선봉을 맡은 것은 소드마스터 지그문트.

     

    그가 몸을 비켜 길을 내자 그녀가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리셰가 만인의 앞에 섰다.

     

     

    “오오! 용사님인가!”

    “저분이 소문으로만 듣던!”

     

    관중의 분위기가 고양된다. 연달아 용사를 외치는 그들에게 화답하며, 리셰가 여유로운 미소를 보냈다.

     

    사절단이 퇴장한다.

     

    북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그에 따라 흥분이 공간을 지배해간다.

     

    ―드르륵!

     

    경기장 외벽에 설치된 철창문이 열렸다.

     

    쿵, 쿵. 커다란 진동과 함께 안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아니, 저건…!”

    “마, 마물이다!”

     

    나타난 건 거인족 마물, 자이언트였다.

     

    전설급. 재해급의 바로 아래 단계로 토벌하려면 A급 모험가 파티가 필요한 수준이다. 그것도 두 마리가 양쪽에서 달려 나온다.

     

    저만한 마물을 통제할 기술이 있는 건 모험가를 잘 다루는 왕국답달까.

     

    “이봐, 괜찮은 건가?”

    “아무리 용사라도 전설급 두 마리는…!”

     

    객석이 술렁인다.

    10미터는 되는 거구의 자이언트가 이성도 잃은 채 리셰에게 달려든다.

     

    다른 이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리셰는 경기장 중앙에 선 채 마물이 접근할 때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그녀가 눈을 번뜩이고, 작은 몸이 춤추듯 공중을 난다.

     

    성검의 새하얀 궤적이 몇 번 지나갔나 싶더니 쿠궁!

     

    거대한 몸집이 땅바닥에 쓰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오오오!!”

    “이게 용사의 실력인가!”

     

    리셰는 군중의 환호가 쑥스럽다는 듯 멋쩍어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방금 하나는 리셰가, 하나는 샤를이 처리했는데.’

     

    짧은 순간이지만 내게는 둘이 협력하며 몸을 바꿔 쓰는 장면이 보였다.

     

    “과연, 용사는 더할 나위 없군.”

    “연합군의 미래가 밝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서민이었다고 하던데.”

    “믿기지 않는군. 벌써 저 수준으로 끌어올렸단 말인가.”

    “과연 제국이군….”

     

    귀빈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오고 갔다.

     

    벌써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게, 각국 관료들이 현 리셰 담당인 게오르크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아셀라가 그 모습을 보고 심기 불편하리라 예상했기에, 표정을 확인하려다 눈이 맞았다.

     

    그녀가 손짓해서 다가갔다.

     

    “의견이 있는 모양이구나. 용사를 게오르크에게 넘긴 게 실수였다고 하고 싶지?”

     

    “그렇게 직설적으로는 말고요.”

     

    “상관없어.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했거든. 내게는 내 무기가 있으니까.”

     

    “마법 말입니까?”

     

    아셀라가 턱을 까딱였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마도국의 탑주들이 있었다.

     

    “어느 국가야 가진 병력의 종류는 비슷해. 기사, 병사, 검사와 궁수, 창병, 기마병. 하지만 실력 좋은 마법사는 숫자가 적지.”

     

    “그렇습니다.”

     

    “연합군에서 마법사 부대를 통솔할 권력은 대체가 불가능해.”

     

    “마도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한 국가가 추후에 연합군을 주도하신다는 의미군요.”

     

    아셀라가 코웃음을 쳤다.

     

    “우호적이라는 말은 살짝 부족하구나. 보렴. 이 연무회가 끝나면 마도국이 내게 마법사를 바치려 제 발로 올 거야.”

     

    이럴 땐 항상 자신감이 넘치시지.

     

     

    경기장에서 개막식이 이어진다.

     

    연합군의 얼굴마담이라 할 수 있는 리셰의 대표 시연이 끝나고, 각국이 하나씩 주특기를 선보였다.

     

    온갖 고급스러운 장인의 무기와 방어구를 자랑하며 행진한 드워프 왕국이나, 날렵한 군무를 보여준 수왕국.

     

    법국은 사제가 잔뜩 나와서 여기저기 축복을 뿌렸는데, 찬송가를 부르는 게 어째 사이비 느낌이 물씬 풍겼다.

     

    “슬슬 준비해야겠어.”

     

    마지막으로 제국의 순서가 될 때 즈음, 아셀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국은 각 궁이 차례로 기사단 행진을 보여주는 정도였는데.

     

    아셀라가 나간다고는 전달받지 못해서 조금 당황했다.

     

     

    나는 시종들과 함께 대기실까지 아셀라를 전송했다.

     

    “지켜보고 있어, 라스.”

     

    마법예장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묶은 그녀는, 지팡이를 들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목휘궁과 토진궁에 이어, 월광궁 기사단의 행진이 끝나간다.

     

    그 절도 있는 시연 끝에, 기사들이 준비된 동작으로 무릎을 꿇으며 길을 만들었다.

     

    말꼬리 같은 황금빛 머리카락을 살랑대며 경기장으로 걸어나가는 아셀라.

     

    군중은 예고도 없이 제국의 황녀가 직접 등장하자 흥미로워하며 시선을 집중한다.

     

    “후우.”

     

    아셀라는 평소 궁 뒤뜰에서 연습하듯,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던 때처럼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지팡이를 들어 신묘한 황금의 진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마법… 인가?”

    “황녀같이 고귀한 분이 직접 마법 시연을?”

    “어디서 좀 배웠나 보지. 3위계 정도 쓰면 칭찬할 만하겠어.”

     

    모험가 출신 마법사도 상당수 관중에 섞여 있다. 그들은 기대 반, 조롱 반 하는 기분으로 아셀라의 주문을 지켜본다.

     

    하나, 둘, 셋.

     

    …넷.

     

    “이봐, 지금 마법진이 벌써 몇 개야?”

    “세상에.”

     

    진의 개수가 늘어갈 때마다 술렁임이 점점 커져간다.

     

    흥미로 관람을 시작했던 마도국의 탑주들도 점점 그 눈에 탐구정신이 깃들어 집중도가 올라갔다.

     

    아셀라가 그려낸 고유의 마법진.

     

    고차원, 이어 초고차원에 연속해 그려낸 형이상학적인 도형은 결코 이 세상의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니.

     

    다섯 개, 아니.

     

    여섯 개일지도 몰랐다.

     

    아셀라는 마지막으로 콕.

     

    지팡이로 자신의 가슴께를 두드리며 시전을 완료했다.

     

    ―화아아악!!

     

    넓디넓은 경기장을 그녀의 황금빛 마나가 덮어버리듯 퍼져나간다.

     

    동시에 청명하고 구름 한 점 없이 태양이 맑았던 하늘에 쩌억.

     

    금이 가듯 공간이 열리고.

     

    ―휘오오오오!!

     

    별안간 공간의 틈새로 새카만 먹구름이 쏟아져 들어오고, 눈보라가 몰아쳐 새하얗게 시야를 멀게 했다.

     

    “맙소사! 하늘에 구멍이 뚫렸어!”

    “기상 조작?!”

    “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법이!”

    “대마법사다! 대마법사가 나타났다!!”

     

    군중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경외.

     

    경지에 다다른 이를 향한 존경이 퍼져나간다.

     

    다만 그들의 어깨가 떨리는 것은 눈보라와 함께 스며든 추위 때문일까, 갑작스레 마주한 인외의 공포 때문일까.

     

    “…하핫.”

     

    충성을 표하는 기사들이 무릎 꿇은 한복판에서, 먹구름을 조종하며 탐스럽게 웃음을 터트린 아셀라.

     

    그녀는 멋들어지게 하늘로 손을 뻗어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몰아친 눈보라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일순간에 화아악!

     

    먹구름이 걷히고 다시 청명한 하늘이 나타났다.

     

    내 코끝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결코 그녀의 마법이 환상이나 가짜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오, 오오오오!!”

    “완전히 미쳤군!!”

    “이게 제국의 마법인가!!”

     

    갈채가 쏟아지는 한복판에서, 아셀라가 마음껏 시선을 즐긴다.

     

    그녀가 대기실쪽으로 몸을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 어땠냐고, 눈웃음으로 대신 질문하는 아셀라.

     

    나는 엄지를 가볍게 치켜들어주었다.

     

    …뭐.

     

    어떻게 봐도 방금 그녀는 내가 알던 황제 아셀라였지만.

     

    그녀의 머리칼 일부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도 아마, 햇빛이 너무 강해서 일어난 착각이지 싶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공개 독자님 후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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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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