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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2

       *

         

         

         칼리온의 수도, 이드란힐은 정치적인 이유보단 정서적인 의미로 존중 받는 땅이다.

         

         칼리온의 정치체제는 각 도서 지역의 완벽한 자율성을 보장하는, 느슨한 연합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단일 행정력을 기대할 수 없다. 부속 도서들은 차라리 봉건적 군벌에 가까운 형태였으니.

         

         그러므로 수도라는 말이 우습다. 국내에 영향력을 지닌 행정기관이 전무한, 그저 명목 상의 섬이다

         

         만년궁을 제외한다면.

         

         실제 역사가 만년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신화 시대에서부터 따지자면 사천 년 정도. 역사가 남아있는 시절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이천오백 년 정도였으니.

         

         만년궁이 ‘만년’이라 불리는 이유는 달리 있다. 궁의 심처, 가장 엄중히 관리 받는 내원 탓이다.

         

         내원이라 불리우기엔 너무나 거대한 부지. 섬의 중심부를 가득 채운 장엄한 분지. 그 위에 솟은 숲, 실메리안웰. 인간 언어로 ‘별의 숲’.

         

         숲의 나무 하나하나가 고대의 선조들이다. 천년을 넘겨 관목이 되어버린 엘프들이 뿌리 내리는 곳이다. 그 모든 나무들은 지반 아래에서 세월에 따라 얽히고 묶였으니, 숲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라 보아도 무방하리라.

         

         따라서, 실메리안웰의 속칭은 다음과 같았다.

         

         세계수.

         

         이 숲에 있는 나무들이, 이 위대한 선조들이 살아 숨쉬던 시절부터 세월의 연혁을 따지자면 족히 만년이 넘는다. 그러니 만년궁이며, 이 숲에 퇴적된 모든 시간은 이 세계와 동일하다 하여 세계수다.

         

         그러므로, 이드란힐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서적인 이유로 수도로 불리운다.

         

         모든 엘프들의 선조가 잠든 성지였으므로.

         

         그리하여 역사가 시작된 이래, 칼리온이 마주한 첫 번째 겨울이 닥쳤을 때.

         

         

         “저… 선배님…? 이거 좀 익숙한 광경이지 말임다…?”

         

         

         성지의 풍광에서, 절멸부대는 짙은 기시감을 느꼈다.

         

         

        *

         

         

         잠시 시간을 돌려, 만년궁으로 침투할 시점의 일이다.

         

         만년궁의 외성을 타고 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반의 손짓에 따라 요원들이 일제히 갈고리를 던졌다.

         

         탁, 타악, 갈고리들이 만년궁 외성 갤러리의 총안에 정확히 틀어 박혔다. 단 한 사람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 일이다.

         

         이반이 공중에서 주먹을 꾹 쥐자, 요원득ㄹ은 소리 없이 밧줄을 타고 올랐다. 벽을 박차는 작은 발딛음은 폭풍 속에 묻혔다. 어두운 옷을 입은 탓에 요원들의 움직임은 그림자와 같았다.

         

         

         “우와….”

         

         

         이반의 등에 업혀 있던 엘피헤라가 조용히 감탄했다.

         

         바람결에 코트가 나부꼈다. 거칠게 펄럭이는 코트가 깃발과 같았다. 서른 개의 군기가 만년궁을 도모하고 있었다.

         

         마지막 인원이 성벽 위에 올라간 뒤, 손을 뻗어 두 차례 흔들었다.

         

         지점 확보.

         확인.

         

         짧은 수신호가 오가고 이반이 땅을 박찼다. 그는 갈고리를 걸지 않았다. 바싹 세운 손끝을 만년궁 외벽의 미세한 틈에 틀어 박아가며 벽을 기어 올랐다.

        ‘

         후우, 깊은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따랐다. 호흡이 궤적처럼 이어졌다. 더운 숨 한 호흡이 길게 선을 그리며, 이반은 갤러리의 모서리에 발을 디뎠다.

         

         

         “3조.”

         

         

         이반의 손짓에 여섯 명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퇴로확보. 2조, 외성 장악 및 수색. 4조는 3시, 5조는 9시 방면으로. 그리고 드미트리.”

         “예, 선배님.”

         “1조와 함께 따르라. 후원으로 간다. 칼리온 표준시 2100. 작전 제한은 360으로 하겠다. 퇴각 집결지는 칼리온 1항구다.”

         

         

         대답은 없었다. 이 자리에 초인이 아닌 이가 없었으므로.

         

         훈련 받은 요원들은 폭풍 속에서도 나비의 날갯짓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자리의 모든 요원들은, 이반의 기준에서도 충분히 잘 훈련 받은 요원들에 해당했다.

         

         요원들은 이반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소리 없이 흩어졌다.

         

         잠시 그 광경을 꿈뻑거리며 보던 엘피헤라가 작게 속삭였다.

         

         

         “그런 거 안 해요?”

         “음?”

         “무운을. 이런 거 있잖아요. 특수 작전 직전에 요원들한테 경례하면서.”

         “훈련 받은 요원은 운을 믿지 않는다.”

         

         

         운 따위에 좌우될 작전이라면 애초에 수립해선 안 된다. 목적은 확실하고, 목표는 단순하며, 과정은 단호해야만 하니까.

         

         이반의 대답에 엘피헤라는 오, 하고 감탄하며 그의 목덜미를 꾹 끌어안았다.

         

         

         “명상은 끝났나.”

         “지금 대충 가닥은 잡혀요.”

         

         

         엘피헤라는 귓가에 속삭이듯 대답하고는 눈을 감았다.

         

         만년궁에 다가갈수록 가슴에 돌이 얹힌 것처럼 갑갑했다. 숨을 쉬기도 쉽지 않았다. 하물며 마력이라.

         

         대기 중 마력 농도는 이미 전례 없을 정도로 짙다. 차라리 물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

         

         그러나 그녀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력은 한줌도 되지 않았다. 대기의 마력이 그녀를, 아니 엘프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는 작게 눈을 뜨며, 이반의 등 위에서 주위를 훑었다.

         

         엘프의 역사를 위해 건축된 성소가, 이 세계에서 가장 극렬하게 엘프를 거부하고 있었다. 어떤 증오심마저 느껴질 정도로, 편집증적일 정도로 맹렬하게.

         

         그러니, 돛이 찢어진 나룻배와 같이 흔들리며.

         

         이 추운 겨울에 유일한 온기에 매달려 있을 밖에는.

         

         이반의 등은 넓고, 따듯하고, 단단해서. 그녀는 있는 힘껏 끌어 안으며 고개를 묻었다.

         

         

        *

         

         

         내원으로 향하는 길은 텅 비어 있었다. 귀를 기울여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이상한 일이다. 이 넓은 왕성에 시종 하나 없을 리가 없으니까.

         

         이반을 포함은 요원들은 각자 다른 방향을 주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밤, 광원 없는 왕성은 시각을 제한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 우박이 창과 벽을 두드리는 소리는 청각을 제한하며.

         밀도 높은 마력의 흐름이 마력감지를 제한하는 상황이다.

         

         이반은 문득 이런 상황이 다소 낯익다고 느껴져서 인상을 찌푸렸다. 마족령의 심처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전방을 살피던 요원이 주먹 쥔 손을 올리며 권총을 들었다.

         

         손가락 둘을 펼치고 횡으로 그었다. [움직임 감지].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손짓했다. 그의 수신호에 따라 요원들이 전개했다.

         

         

         “사령관님.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방에 돌출해 탐색하던 요원이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이반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어둠에 잠긴 복도로 향했다.

         

         곧 그의 눈에도 꿈틀거리는 실루엣이 보였다. 권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곁에 있던 요원이 빛을 쬐었다. 달각, 하고 군용 마력등이 전방에 조사되었다. 그리고,

         

         

         “으웩—.”

         

         

         이반의 등에 업혀 있던 엘피헤라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입을 틀어 막았다. 다행히 구토를 하지는 않았다.

         

         이반은 바닥에 꿈틀거리는 것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체가 있었다. 복식을 보아하니 시종이고, 종족은 엘프. 여성. 신장은 168cm.

         

         이반은 말 없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꿈틀거리는 것들을 찍어서 밀어내며 간단하게 시신의 몸을 검시했다.

         

         경직도를 보아하니 사망 추정시간은 3시간 가량. 사인은—

         

         

         “익사했군.”

         

         

         폐에 물이 차있다.

         

         

         “심해거머리 아닙니까, 이거?”

         “맞다.”

         “그게 왜….”

         

         

         시신의 몸을 뜯어먹고 있던 검은 것들은 심해 거머리였다. 거의 팔뚝 만한 거머리들이 일제히 꿈틀거리며 게걸스럽게 시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 중 한 개체가 이반의 발등을 향해 입을 돌렸다. 이반은 빠르게 거머리의 머리를 단검으로 내려 찍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모든 거머리들이 일제히 이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가 조종하는 겁니까…?”

         “확신할 수 없다만, 마법을 사용하기 썩 좋은 환경은 아니지.”

         

         

         대기 중의 마력 농도가 적정치를 초과했다. 포화된 마력으로 인해, 오히려 마법 사용이 제한될 지경이었으니.

         

         이반은 마법에 능통하지 않다. 그러나 전술적인 영역에서 마법을 파악하는 것엔 익숙했다.

         

         마법사는 일종의 내연기관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적합한 연료를 넣고 움직여야 하는 섬세한 기계장치다. 대기 중의 마력을 포집하고 체내에서 조작해 출력을 얻는 종류의.

         

         그러니 이 환경은, 사실 엘프만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인간 마법사도 이런 환경 속에선 마법을 제어할 수 없을 테니. 사소한 불씨 하나만 키워도 파이어볼이 터져 나올 정도로 밀도가 높다.

         

         이런 와중에 마물을 사역하는 복잡한 주문을, 그것도 이반과 요원들의 감지범위 밖에서 은밀하게 시전한다는 것은… 글쎄.

         

         해일 위에서 서핑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텐데.

         

         균형이 단 한 번이라도 어긋나면 고스란히 심해에 처박힐 짓이니까.

         

         이반은 자신을 바라보는 거머리들을 빠르게 정리하고 몸을 돌렸다. 그의 손짓에 따라 요원들이 뒤를 따랐다.

         

         

         “괜찮나?”

         “네에… 우윽….”

         “마법을 쓰려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이반은 등에 업혀서 헐떡이는 엘피헤라를 다독였다. 그녀의 쓸모는 마법보단 해석에 있으니.

         

         마법으로 인한 재난이 터진 상황에서, 마법에 해박한 인물이 필요했을 뿐이다. 크라실로프 지하 유적을 탐색할 때, 그가 엘피헤라를 대동했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러나 엘피헤라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나는 그리켄코스니까.”

         “훌륭하군.”

         

         

         이반은 흡족하게 걸음을 옮겼다.

         

         

        *

         

         

         내원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많은 시체들이 보였다. 시체를 덮고 있는 거머리들의 크기와 개체수가 늘어났다.

         

         엘피헤라는 이제 그의 목을 거의 조를 듯 꽉 끌어안고 훌쩍이고 있었다.

         

         이반은 바람 없이, 오직 마력으로만 불어닥치는 폭풍 속에서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드미트리도 펄럭이는 코트를 여미며 긴장한 눈으로 이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좀 익숙한 광경이지 말임다…?”

         

         

         후원으로 나가는 문은 얼음에 갇혀 있었다. 복도 전체가 냉동고에 들어온 것 같았다. 시체들은 후원을 향해 팔을 뻗은 자세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 위로 거머리가 아작, 아작. 얼음째로 시체를 깨물어먹는 소음이 들렸다. 사방에서.

         

         얼어붙은 시체들 사이에서, 요원들이 불안한 눈으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이반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과포화된 마력은, 자신이 허락한 존재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마법을 차단하고.

         

         계절과 기후에 상관 없이 뒤틀려버린 기상현상은, 오직 마력만으로도 재난을 초래하는.

         

         

         “칠용장의 왕거와 같다.”

         “거머리의 신이라도 된답니까?”

         “알아 봐야지.”

         

         

         이반은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힘줄이 뱀처럼 꿈틀거리고, 곧 섬광이 터지듯 도끼가 얼어붙은 문을 스쳤다.

         

         꽈앙—.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충격파가 복도를 따라 울렸다. 동상처럼 선 시체들이 와자작 부서지고 거머리들이 바닥을 굴렀다.

         

         얼음 파편을 쳐내며, 이반은 다시 한 번 도끼를 들었다.

         

         꽈앙—.

         

         

        *

         

         

         “저거—!! 저거 보세요!!”

         

         

         룬디스의 외침에 오스왈드는 쿨럭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간신히 이드란힐 해역을 벗어난 상황이었다.

         

         당장 배를 부술 듯 거대하게 휘몰아치던 파도가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여전히 눈이 흩날리는 폭풍 속에 있었지만, 그래도 바다의 상태는 아까보다 훨씬 쾌적하다 하겠다.

         

         룬디스의 손짓에 따라 오스왈드가 고개를 돌렸다.

         

         

         “저게 뭐—??!”

         

         

         그의 낮은 신음에 일행 전원이 후미로 고개를 돌렸다. 곧 그들은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나온 해로를 따라 저 멀리 이드란힐. 희미하게 깜빡이는 항구의 등대 아래로—

         

         

         “파도가 굳었어…?”

         

         

         항만을 박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치밀어 오르던 거대한 해일이, 정물처럼 멈춰 있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흡혈귀는 밤눈이 밝았다. 이 어둠 속에서도, 작은 불빛으로도 사물을 파악하는 것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그녀는 멍하니 멈춰 있는 파도를 응시하며, 작게 신음했다.

         

         

         “바다가 얼었어요….”

         

         

         한순간에.

         

         

         “이드란힐 해역 전체가. 아, 아니—.”

         

         

         그녀는 재빨리 망루에 올랐다. 눈이 덮인 망루에서 몇 차례 발이 미끄러지고 나서야 그녀는 곡예를 하듯 올라타 자세를 잡았다.

         

         그녀는 반쯤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드란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해수면을 응시했다.

         

         파도의 방향이 편향성을 띄고 있다.

         

         바다가 몰려들고 있다. 이드란힐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치듯이.

         

         차라리 거대한 마법진의 일부로 보일 지경이다. 이드란힐을 중심으로 방사형의 범위가 뚝 떨어진 것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울룩불룩한 파도들이 멈춰 있고, 파랑이 이어져 기이한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

         

         

         “빨리 빠져나가죠. 빨리!!”

         “하, 하지만 저기에 어르신이…!”

         “정신 안 차릴래요?! 우리끼리 가서 뭘 어쩌려고!! 사형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 잊었어요?”

         

         

         추밀원의 병력을 수습해서 이드란힐을 포위해라.

         

         그 말을 떠올린 룬디스가 낯을 굳히며 고개를 내렸다.

         

         

         “다들 빨리 움직여요!! 에블린!!”

         “네, 네?!”

         “러스트피츠 경에게 이걸, 똑바로 보고해야 해요! 얼마나 걸리겠어요?!”

         “바, 바다로 가면 반나절 정도… 그 정도 걸려요!”

         

         

         반나절이라.

         

         병력을 모으고 다시 움직이면 적어도 이틀은 더 걸리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범위를 넓혀가는 거대한 빙하들을 보며, 루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얼어붙은 파도 안, 이드란힐 도심이 아직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태이길 기도하며.

         

         

        *

         

         

         “벌써 배신이라. 빠르기도 하지.”

         

         

         베올그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날 믿었었나, 베올그린 그리켄코스?”

         

         

         배신이란 서로 신뢰하는 사이에서나 쓰일 법한 단어가 아닌가. 그들의 관계는 그보단 더 경제적이어야 마땅했다. 믿음이 아니라, 이용가치에 따라 손을 잡았었으니.

         

         베올그린의 손끝이 얼어붙고 있었다. 마일스톤의 강대한 마력이 한점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자네 덕분이야. 추밀원의 절반은 자네의 이름값에 속았고, 마일스톤을 이용하자는 그 장대한 계획도, 자네가 아니었다면 성공하지 못했겠지.”

         “….”

         “자네의 실책은, 자네의 종족이 얼마나 더 저열할지 몰랐다는 것 뿐일세. 애도를 표하지.”

         

         

         베올그린은 웃는 얼굴 그대로 서리에 뒤덮였다. 대답 없이 굳어버린 그의 앞에서, 알렉산드르는 끌끌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 시대 가장 강력한 마법사의 최후 치고는 썩 초라하군, 하하!!”

         

         

         베올그린은 너무 강력했다. 너무나 강대해서, 동족들마저도 그를 경계해야만 할 정도로.

         

         여왕의 명에 따라 추밀원들을 속였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은밀히 접촉해 마일스톤에 부하를 더해갔다.

         

         그렇게 추밀원의 모든 의원들이 마일스톤을 유용하기 시작했을 때, 알렉산드르는 그저 한 손 거들었을 뿐이었다.

         

         베올그린이 다른 마음을 품으면, 마일스톤을 사유한 죄값을 청구할 수 있으며,

         베올그린이라면 얼마든지 꼬리를 자르듯 그대들을 숙청할 수 있는 사람이므로.

         

         허락해 준다면 내가 직접 베올그린에게 목줄을 메어 두겠다고.

         

         모든 마일스톤은 각각의 학회에서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저들이 수천 년간 쌓아 올린 기술을 아낌없이 활용하며. 종족의 가능성, 그 극한을 시험하며.

         

         그렇게 모인 개념들이 열둘.

         

         마물을 포함한 타종족을 사역하는 방법.

         영혼을 압착해 신성력을 생성하는 방법.

         신경 가속을 강제해 상대 시간을 조작하는 방법.

         원소풍의 파괴를 통해 마력을 환원하는 방법.

         종족 단위의 기억 조작과 정신 지배를 수행하는 방법.

         …그리고.

         

         

         “만년간 유예한 겨울과.”

         

         

         휘몰아치는 폭풍이 점차 더 싸늘해진다. 입김이 고스란히 얼어 갑판 위에 굴렀다.

         

         

         “만년의 세월을 견디며 하나가 된 종족의 영혼들.”

         

         

         이 모든 것이 한 점에 수렴하여 탄생한다. 다섯 번째 신이 지상에 도래한다. 봉인되고 흩어져 불완전한 신이 아니라, 그 밑바닥부터 온전히 창조된 진정한 관념의 신이.

         

         이걸로 저울추가 기울어진다. 균형이 어그러진다. 연합 왕국의 가장 강력한 힘, 그 축이 허물어진다.

         

         

         “그대의 덕일세, 베올그린. 그러니, 지켜보고 계시게나.”

         

         

         영원히 얼어붙은 심해에 유폐된 채로. 제 종족의 종말을 두 눈으로 지켜보시게.

         

         알렉산드르는 얼음에 갇힌 베올그린을 발로 차 밀었다. 얼음기둥은 순식간에 수면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얼어붙은 미소를 띈 채로, 고요하게.

         

         

        *

         

         

        -달각.

         

         어둠 속 손이 퀸을 움직이자.

         

        -달각.

         

         베올그린은 고민 없이 나이트를 옮겼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종족을 창조한 신의 우연한 실수, 수천 수만 년을 이어온 종족 진화의 정수, 세상의 어떤 운명이 창조해낸 최고의 산물.
    한 종족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또한 가장 위대한 개체.
    전쟁 시절, 인간은 그들을 ‘칠용장’이라 불렀다.
    필멸자의 육신으로 신의 이름을 얻은 존재들. 세상에 현현한 관념들. 마족 구성원을 이루는 각 종족의 대표들.
    인간으로 따지자면 용사 정도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 용사조차도 인간 중 가장 강력한 개인은 아니었으니.
    홀로 자신의 종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종족신’이 된 존재들이다.

    Ep13. 상견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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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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