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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2

     인력이 있는 데 안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캐롤라인의 수급이 어려워지기야 하겠지만,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은 그냥 밥만 먹고 지내는 게 아니다.

     누아르를 보좌해야 했을 고아 출신 견습기사들.

     그들이 이제는 나인즈를 대신하여 멘테 경의 휘하에 들어가, 멘테 경과 함께 흡혈귀 사냥을 하며 실전 경험을 쌓고 있다.

     

     …그 안에 에단 세자르가 속해있는 바람에 레타르가 한 때 난리를 피우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잘 다독여서 에단은 흡혈귀 사냥꾼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재단 이사장실.

     “이렇게 모두 함께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군.”

     웬즈데이를 비롯한 화이트들, 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지브롤터로 보냈던 7명의 고아가 이제는 어엿한 레이디가 되어 내 앞에 좌우로 앉아있다.

     “비록 그때 나를 죽이려고 했던 세 명은 지금 이 자리에 없지만.”

     “…….”

     “이제는 이 정도로 긴장하지 않는 건가?”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뭐.”

     웬즈데이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다른 화이트들은 조금 긴장한 것 같았지만, 상대적으로 나와 정기적으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눴던 웬즈데이는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아무리 모르가니아의 지하실에서 ‘갱생’과정을 거쳤다고는 해도, 이사장님을 해치려고 했던 이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제국에서는 그런 걸 두고 ‘전과’라고 하지. 너희는 그때 방조했었고.”

     “지금까지 했던 일을 바탕으로 정상참작 및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을 못 하겠군. 좋아. 그래서 그들은 지금 잘 지내고 있나?”

     “예. 살인미수 전과가 있는 만큼, 지금까지도 바짝 엎드린 채로 보육원 관리 메이드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메를린 보육원장이 아주 꽉 붙잡고 있죠.”

     “그렇군.”

     9, 18, 27번.

     한때는 이들의 리더였던 자들이지만,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리더가 되는 건 아니다.

     그들은 굳이 따지자면 죽은 황제, 그리고 이사벨라 전 황태자비의 사람. 

     합스베르크 황제와 에르윈 황후가 당시 선별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런 인선에서도 당시 황제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연줄이었던 황제는 서거했고, 이사벨라 황태자비는 반역으로 사망했다.

     

     “그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가. 연좌제로 사형당하지 않은 걸 생각하면.”

     “……?”

     “아. 별거 아니다. 그들 모두 합스베르크 황제의 자식이겠지만, 어머니는 다들 반역으로 엮여서 숙청당했을 테니.”

     “함께 목이 잘리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거겠군요. 하지만….”

     “하지만?”

     “죽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다면-”

     “그 즉시, 어머니 뒤를 따라가는 거지.”

     나는 나의 목을 가볍게 긋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은 하지 않을 거야. 자기를 지켜주는 건 결국 자기자신이라고 모르가니아의 지하에서 똑똑히 배워왔을 테니. 오히려 그 불안 요소를 이용하면 되겠군.”

     “불안 요소를 이용…?”

     “주변에 접근하는 이들 중에 제국의 인간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전해. 반역자 무리 중 하나가 그 핏줄을 찾아서 헛바람을 불어넣거나 할 수도 있으니.”

     “충성 테스트를 하는 겁니까?”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고, 진짜로 그렇게 오면 그때 하는 걸 보자고. 지브롤터의 가솔로 살겠다면 그렇게 사는 거고, 아직도 자기가 제국 귀족의 핏줄이라고 생각해서 역심을 품고 있다면 숙청하는 거고.”

     짝.

     “그쪽의 이야기는 웬즈데이가 잘 알아서 하고, 나머지는 이쪽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너희들을 부른 건 누아르의 호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함이다.”

     화이트들이 자세를 바로잡는다.

     “먼데이부터 선데이까지, ‘6명’. 이복 자매인 만큼, 이름에 ‘데이’ 돌림이 들어간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지만, 누가 봐도 수상한 건 사실.”

     OO데이라면서 요일 이름을 각자의 이름으로 붙인 건 화이트들의 편의를 위함이었다.

     “각자 누아르를 맡아야 하는 전담요일이 너희들의 이름이 되었지. 그건 변함이 없다. 대신, 너희들은 스스로 정한 새로운 이름으로 이 자리에 들어왔지.”

     누군가는 발렌타인이라거나.

     누군가는 세라자드라거나.

     유일하게 OO데이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건 웬즈데이뿐이다.

     “웬즈데이. 누아르 전담 호위는 네게 계속 맡기겠다.”

     “예, 도련님.”

     “다른 사람들은 각자 맡은 파트에서 누아르를 암살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첩보가 있으면 확보하고, 그 이외의 다른 일들은 경시하거나 무시해도 좋다.”

     이들을 부른 이유는 오직 누아르를 지키기 위함.

     “그레이 지브롤터를 향한 암살이라거나 국가 반역 행위, 지브롤터 가문을 향한 모독도 전부 무시해라. 오직 누아르 지브롤터의 안위만을 생각하라. 알겠나?”

     화이트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일부 불안한 눈빛을 보인 이들도 있다.

     “물론 너희들이 ‘마스터급’은 아닌 만큼, 상급 기사보다 더 강한 자를 상대하라고 하는 건 조금 버겁겠지.”

     다들 합스베르크 황제의 핏줄이다.

     애초에 이런저런 재능이 없었다면, 당시 보육원으로 올 수도 없었겠지.

     아카데미 제복을 입은 웬즈데이를 제외하면 다들 메이드복을 입고 있지만, 그 메이드복 아래에는 상급기사 수준의 흡혈귀 하나는 1:1로 즉석에서 처리할 수 있든 와이어 달린 단검과 암기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불렀다. 비어있는 ‘새터데이’의 자리를 임시로나마 대신 해줄 사람을.”

     

     스륵.

     내 뒤, 뒤를 향해있던 이사장실 의자가 빙그르르 돌았다.

     “!!”

     다들 놀란 눈이다.

     들어올 때부터 이사장실 내부의 인기척을 훑었겠지만,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왔으니.

     “소개하지. 이번에 아카데미에 새로 입학한 신입생.”

     머리는 트윈테일을 하고 있고, 제복은 몸에 딱 달라붙은 하얀 머리칼의 소녀.

     특이점이 있다면, 입술 옆에 점이 하나 있다는 것.

     “아이페리아 새터데이. 마스터다.”

     “이사장님. 나이를 먼저 말하는 게 우선 아닐까요?”

     “…17살의, 마스터다.”

     놀랍게도 그 누구도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흠흠. 그렇다면.”

     그러나.

     “제가 지금 입학 나이가 18살이니,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언니라고 부르십시오.”

     웬즈데이가 먼저 나서서 말하자, 아이페리아 양은 씩 미소를 지었다.

     “나, 저 친구 마음에 드는구나.”

     “말투.”

     “…아차.”

     “아차, 라고 할 게 아닙니다. 경.”

     나는 아이페리아 세터데이에게 ‘경’이라는 호칭과 함께 존대로 예의를 표했다.

     그리고 그런 말 한 문장은 화이트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레이 지브롤터가 존대를 하며 예우를 갖춘다는 것만으로도 이 하얀머리의 트윈테일 미소녀는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니까.

     “화이트들은 듣도록.”

     무엇보다.

     

     “누아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질 필요는 없다. 이 소녀가 언제든지 누아르의 근처에 있으면서 누아르를 지키려고 할 테니까.”

     “갑작스러운 습격이라거나, 흉기라거나. 오호호.”

     마스터급 암살자의 습격으로부터 대신 나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자신들이 무조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다는 것.

     “대신 너희들이 반드시 대응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아르 지브롤터에게 반감을 가지고 칼을 품고 다가오는 암살자는 아이페리아(☆17세+a)의 몫.

     “너희들이 상대해야 할 건, 누아르 지브롤터를 유혹하려고 하는 불여우들이다.”

     누아르를 향한 습격은 칼날만 있는 게 아니다.

     “충성병자들이 제 딸을 이용하여 누아르를 함락하고 지브롤터를 가지려고 하든, 아니면 매국노들이 누아르까지 제국주의자로 만들려고 하든, 분명 달려들려는 여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

     “허니트랩.”

     웬즈데이의 기세가 어딘가 상당히 가라앉고 날카로워진 것 같지만, 나는 애써 모른척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누아르에게 미인계를 쓰려고 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무조건.”

     이건, 회귀자만 아는 정보지만, 그걸 적당히 버무려서 말하면 추측과 망상-예상으로 변모한다.

     “이번에 신입생 중에 미녀가 너무 많이 들어왔거든.”

     “…….”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300명의 신입생.

     입학처에서 얼굴을 보고 거른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큼 미남미녀들이 늘어났다.

     “왜 늘어났는지, 알고 있겠지?”

     “…신분 세탁을 한 것이로군요.”

     웬즈데이가 바로 답을 찾아냈다.

     “황제는 누아르 지브롤터까지 사위로 들이려고 하는 겁니까?”

     “…그건 소수야.”

     정답이기는 하지만, 복수정답이다.

     “소수라고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온 이들이 여기 다 있는데, 뭐 하러 또 그러겠어. 보험으로 들어온 경우 말고는.”

     “그렇다면…?”

     “순수하게, 잘생기고 예쁜 선남선녀들이 많이 들어왔다는 거지.”

     얼굴과 외모가 능력인 건 아니지만, 노스트럼에서는 그게 곧 개인의 능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입학시험에서 17살…제 나이가 아닌 입학생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알고 있나? 무려 70%야.”

     “……?”

     300명 중 무려 210명이 오로솔 아카데미에 ‘시험’을 쳐서 들어왔다.

     17살의 나이가 아닌, 저마다 다른 목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별거 있겠어.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지.”

     펄럭.

     마침 바깥에 순간적으로 스친 그림자가 있길래, 나는 창밖을 가리켰다.

     “제국의 차기 황제든 노스트럼의 차기 여왕이든, 권력자가 졸업하기 전에 어떻게든 자식을 아카데미에 보내서 선후배 관계라도 만들려고 하는 자들이 발등에 불 떨어졌다는 거야.”

     창밖.

     “앞으로 2년만 있으면 여왕 전하가 되실 분인데, 그분과 어떻게든 엮여야 한다는 거지.”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이 자신의 그리폰을 탄 채, 노스트럼의 국기가 새겨진 망토를 펄럭거리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뭐,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리아의 애국주의적 행보.

     합스베르크 황제 즉위.

     그레이 지브롤터의 가능성.

     “바야흐로, 영웅의 후손들이 집결한 거야.”

     또한.

     “어쩌면, 누아르를 죽일지도 모르는 암살자가 신입생으로 들어올지도 모르고.”

     * * *

     테르시안 제국, 합스베르크 궁.

     “젠장, 또야?”

     합스베르크 황제는 입에 마도 볼펜의 끝을 문 채, 신경질을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300명 중의 270명이 전부 다 영웅의 피가 섞인 자들일 수 있지?”

     “황제 폐하. 그렇게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 빠져요?”

     “존대하든 반말하든 하나로 통일 좀 하지?”

     “뭐래. 내 맘이랍니다, 폐하.”

     맞은 편에 앉아있는 바토리 에르제베트 부총장은 조각 치즈를 베어 물며 와인을 홀짝였고, 합스베르크 황제는 소파에 그대로 몸을 기댄 채 한탄했다.

     “정말이지, 미쳐버리겠군. 이게 노스트럼인가.”

     “노스트럼의 위기에 영웅의 후손들이라거나, 그 영웅의 의지를 이어받은 사람이라거나, 영웅과 같은 마을 출신인 사람들이 모여드는 건 역사적으로 항상 있었잖아요. 이번에는 당신 차례가 된 거지, 뭐.”

     “그렇게 여유롭게 이야기하는 건 본인이 오로솔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건가?”

     “뭐, 인간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작년보다 한 살 더 먹어놓고?”

     “…….”

     바토리 부총장은 조각 치즈를 앞으로 냅다 던졌으나, 합스베르크 황제는 입을 그대로 벌린 채 조각 치즈를 날름 입에 넣었다.

     “후. 당이라도 좀 들어오니 살 것 같군.”

     “괜히 스트레스받지 마. 모든 이들을 통제한다고 생각하니까 머리 아픈 거지. 그냥 나처럼 받아들이시라는 거야.”

     “그런데 순간, 영웅이 나타났다! 뭐 이렇게 받아들이라는 건가?”

     “그런 겁니다, 폐하? 크흐흣.”

     바토리 부총장은 키득거리며 붉은 와인이 든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런데 그 프로필은 아까부터 왜 잡고 있는 거예요? 뭐 엄청 대단한 영웅의 후손이라도 있어요?”

     “아니. 그냥 평범한 후손…은 아니지. 왕국에 퍼진 역병을 잠재운 의사 영웅의 먼 후손이기는 하니까.”

     “직계도 아니고 이 정도면 그냥 핏줄이 끊어졌다고 보는 게?”

     “1/128이라도 피를 이어받았으면 그게 영웅의 핏줄인 거지. 문제는….”

     “문제는?”

     “이거, 왜 그레이 지브롤터가 장학금을 줘서 ‘마킹’을 한 걸까?”

     합스베르크 황제는 입학생 프로필 하나를 흔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이도 20살이 넘은 여자인데. 심지어 24살이야. 24살에 결혼도 하지 않은 신입생일 뿐인데. 왜? 이런 취향이었나?”

     “글쎄요. 음, 아마도…. 예쁘니까?”

     “그레이 지브롤터의 눈에?”

     “아니면 누아르 지브롤터의 짝으로 생각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 다른 건 몰라도….”

     히죽.

     “제 어미의 이름을 닮아서 그런지, 얼굴이랑 몸매는 진짜 예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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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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