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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2

   칼은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루시가 선물해 준 검을 바라봤다.

   

   카리아의 단검을 받아내느라 금이 가버린 검을.

   

   지금 이 순간 칼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력함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충분히 강하다고 여겼다.

   

   아가씨를 향하는 어지간한 위협은 모두 다 떨쳐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정작 아가씨가 목숨이 위험해진 그 순간 나는 무얼 하고 있었지?

   

   난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잡지도 못했다.

   

   그 단검이 휘둘러지는 궤도는커녕 단검을 잡은 손도 보지 못했다.

   

   수호의 브로치가 아니었다면.

   

   아가씨의 곁을 지키던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면.

   

   신의 수호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눈앞에서 아가씨가 쓰러지는 것을 보아야 했을 터.

   

   나는 약해.

   

   너무나도 약해.

   

   분함에 움켜진 탁자에 점차 금이 퍼지던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히 일어난 칼은 바깥으로 나온 사제에게 달려들 듯 다가섰다.

   

   “아가씨께서는?!”

   “멀쩡하십니다. 피로가 쌓여 잠들어 계실 뿐 금방 일어나실 겁니다.”

   

   사제의 단언을 들은 칼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정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

   

   한참 동안 바닥에 주저 앉아 있던 칼을 일으켜 세운 건 알새틴이었다.

   

   끄집어 올리듯 칼을 들어올린 그는 칼을 의자위에 내던진 그는 눈이 벌게진 칼의 얼굴을 보고는 보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맞은편에 앉아서는 무덤덤하게 목소리를 냈다.

   

   “네 무력함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건 알겠지만 알른 영애가 건강하시다면 그걸로 족한 거 아니겠냐.”

   “…그건 그렇지.”

   “무력함은 앞으로 떨쳐내면 될 일이다. 틀렸냐?”

   “아니. 네 말이 옳다.”

   

   이미 일어난 일을 후회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같은 일을 다시 벌이지 않는 것.

   

   그를 위해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정진해야 할 테지.

   

   아가씨께 어울리는 기사가 되기 위해.

   

   그 동안 너무 자만을 하고 있었구나.

   

   꿈에만 그리던 주인을 만났단 사실에 기뻐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어.

   

   알른 가문에 돌아갔을 때 해야 할 일이 많겠군.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칼을 길게 숨을 내뱉고는 다시 고갤 들었다.

   

   “그러는 알새틴 넌 괜찮나?”

   “뭐가.”

   “다 알면서 왜 되물어 보는지 모르겠군.”

   

   칼의 말에 섬세함이 없다며 투덜거리던 알새틴은 한숨 함께 말을 이었다.

   

   “그건 스승님이지만 스승님이 아니었어.”

   

   알새틴은 카리아를 상대하던 때를 떠올렸다.

   

   정보원의 수신호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던.

   

   스스로가 알려준 기본적인 것조차 지키지 못하던.

   

   벌레를 보듯 자신을 바라보던.

   

   그건 스승님이 아니었다.

   

   스승님일 수 없었다.

   

   스승님께서 그런 기초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다.

   

   자그마한 정보조차 캐내야한다 말하던 그녀가 무작정 무기를 휘두를 리 없다.

   

   뒷세계의 사람치고 너무 정이 많아서 헤어지던 날 눈물을 펑펑 흘리던 그 아줌마가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 뿐이야.”

   

   그리 대답을 한 후 알새틴이 침묵을 지켰고 칼도 그 이상 무언가를 묻지 않았다.

   

   식탁 위에 자연스레 무거운 침묵이 자리 잡는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보인 것은 회백색의 천장이었다.

   

   메네스테일 거리에 오고 나서부터 매일 아침 보았던 익숙한 것.

   

   <일어났느냐.>

   ‘할아버지.’

   <오랫동안 잠들어 있기에 걱정했다.>

   ‘저희 던전에서 무사히 탈출한 거죠?’

   <그래.>

   

   할배의 확언을 들은 나는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시야가 가려짐에 따라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카리아의 무표정한 눈동자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메스가키 스킬의 패널티를 작용시켜버린 그 살기어린 눈.

   

   그 후에 이어진 공격.

   

   수호의 브로치가 없었다면, 내 옆에 얼빠 여우가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 단검에 목을 베였으리라.

   

   카리아의 움직임은 나도. 알새틴도. 칼도. 심지어 철벽 스킬조차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빨랐으니까.

   

   그 공포를 되새긴 탓일까.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지금까지 죽을뻔한 위기를 여러 번 거쳤지만 죽음과 삶 사이를 줄타기하는 그 느낌에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이마를 꾹 누르며 몸을 일으킨 나는 이상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루시의 몸에 빙의할 적이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수많은 수련을 거듭한 끝에 피로와는 거리가 먼 몸이 되었다.

   

   하루 종일 죽어라 몸을 움직인 다음 날 아침에도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이다.

   

   그런 내가 몸이 무겁다고 느끼다니.

   

   카리아를 상대할 때 버티기 위해 몸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던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로 이렇게 되진 않을 텐데.

   

   “그건 본녀의 영향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영 사라지질 않아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얼빠 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여우의 형상을 한 채 여느 때처럼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누워 한 쪽 눈만을 떠서 날 바라봤다.

   

   “기억하느냐? 아직 그대의 수준이 부족하여 힘을 낼 수 없다는 말을?”

   

   ‘네.’

   “그래. 네가 스스로 허접하다는 걸 공언했었지.”

   

   “그 제약을 부수기 위해서 이번에 그대의 생기를 가져다 썼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야 당분간 몸이 안 좋은 게 낫지 않겠느냐.”

   

   ‘저어. 생기라는 건…’

   “얼빠 여우. 생기라는 건 수명을 이야기하는 거야?”

   

   “본녀를 무슨 악마로 생각하느냐.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당분간 몸 상태가 안 좋아질 뿐. 이틀 즈음 지나면 회복 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설명을 끝마친 얼빠여우는 피곤하니 건드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눈을 감아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잔뜩 생색을 냈을 녀석이 바로 눈을 감는 걸 보면 저 녀석의 상태도 좋지 못한 모양이다.

   

   저 변태가 내 생명의 은인인가.

   

   처음 가방 안에 들어있던 얼빠여우를 봤을 때만 해도 기분 나쁜 민폐 덩어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세상일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구나.

   

   목숨을 구해 준 거니까 나중에 보답을 해야겠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

   

   아냐. 괜히 쓰잘데기 없는 말을 꺼냈다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 저 녀석의 변태적인 취향은 내 상상력을 뛰어넘으니까.

   

   그냥 선물이나 하나 해주고 말자.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퀘스트 창을 열었다.

   

   메네스테일을 구원하라는 퀘스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야. 아르마디. 너는 저걸 지금의 내가 깰 수 있다고 준 거야?

   

   이게 게임이었다면 가능했겠지. 지금 내가 지닌 스펙이면 어떻게든 파훼해서 카리아를 박살 냈을 거야.

   

   근데 그건 게임일 적의 이야기잖아.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이건 아무리 봐도 나보고 죽으라고 등을 떠민 거잖냐. 이 쓰레기 자식아.

   

   뭔가 할 말 없냐? 내가 아그라랑 비교하면서 존나게 깔 적에는 장난스러운 퀘스트나 지급하더니 왜 지금은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건데.

   

   네 무능 때문에 네 사도가 죽을 뻔 했으면 대가리부터 박는 게 정상이잖아.

   

   열받네 진짜.

   

   짜증이 겉으로 새어 나와 침대를 내리치려다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흐려진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은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에. 현기증이라니.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병약메스가키미소녀가 된 건가.

   

   참교육 하려고 그러면 죽을 것 같아서 못 건드릴 것 같은 네이밍인데.

   

   <여아야. 괜찮으냐?>

   

   머릿속에 떠오른 실없는 생각에 키득거리고 있으려니 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이 정도로 죽겠어요? 얼빠여우도 며칠 지나면 멀쩡해질거라 했으니 괜찮겠죠.

   

   내 무덤덤한 답변을 들은 할배는 한참 동안 침묵을 하다가 나지막히 목소리를 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번 일은 너무 위험하다. 주신께서 무엇을 바라보신 건지는 모르겠다마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포기하는 게 옳을 듯 하구나.>

   

   놀라운 일이었다. 할배의 입에서 포기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할배는 나와 달리 개허접 무능 주신을 신앙하는 사람이다. 신께서 무언가를 명하셨다면 뜻이 있으리라 여기는 성직자다.

   

   그런 그가 무능하고 무력한 벌레 주신의 계시를 어기자고 먼저 말을 꺼내다니.

   

   그 계시보다도 나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내린 거구나 할배?

   

   하하. 절대 포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면 꼰대 할배는 어디로 간 건지.

   

   ‘싫어요.’

   <…여아야?>

   ‘전 포기할 생각 없어요.’

   

   일단 여러모로 빡이 쳐서 허접 주신의 욕을 하긴 했는데 그거랑 이건 달라.

   

   난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실패했을 때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이거. 게임에 없던 새로운 컨텐츠잖아.

   

   게임 속 카리아는 언제나 죽은 상태로 등장했어.

   

   심지어 치트를 써서 입학하자마자 카리아를 만나러 가도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그녀는 살아 있어.

   

   악신에게 조종당하고 있긴 하지만 그 뿐.

   

   그녀의 영혼은 여전히 육신에 남아 있다고.

   

   이해가 돼?

   

   카리아를 구할 수 있단 소리야.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보스.

   

   시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공략방식.

   

   그로써 만날 수 있는 알새틴의 이야기로만 추측해야 했던 새로운 NPC.

   

   그녀의 존재로 인해 생겨날 또 다른 컨텐츠들.

   

   지금 이걸 포기하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개좆망겜을 1만시간을 넘게 했던 내가 이걸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대가 어찌 악신의 하수인을 상대하겠단 소리냐! 겪어보지 않았나! 녀석이 마음만 먹으면 그대는 단칼에 죽게 될 터!>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할배. 죽음의 위협을 눈앞에서 넘겼던 게 저입니다.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그 녀석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럼 어쩌겠단 것이냐! 대적할 수 없는 적을 상대로 네가 뭘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왜 제가 그 녀석을 상대해야 하죠?’

   <허?>

   

   간단한 이야기에요. 할배.

   

   상대방이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라면 이 쪽도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불러내면 그만이잖아요?

   

   마침 전 제멋대로 사용할 수 있는 괴물을 하나 알고 있거든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서랍 하나에 넣어두었던 수정구를 꺼내 화장대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나서 그 곳에 마력을 흘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 위에 흐릿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루시? 루시?! 루시이이이!>

   “파파♡”

   <그래! 루시! 파파다! 괜찮으냐?!>

   “어떤 노처녀 아줌마가 나 괴롭혀♡ 혼내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가 우리 딸을 때렸어!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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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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