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간다.
어느덧 중간고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날이 쌀쌀해지자 사람들은 내의를 껴입었다. 나 또한 로테가 준 목도리를 자의로 두르고 다녔다.
기온이 내려간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작고의 때가.
“감기 걸리지 말고. 나 없는 동안 잘 있어야 한다?”
“애 아니라니까.”
일리야드 아카데미가 반파된 지 거의 1개월.
카우렐리아에서의 습격 소식으로 인해 교환학생 취소 여부를 고민하던 로테는 큰 마음을 먹고 엘프국으로 향하는 기차에 발을 내디뎠다.
우리는 서로 아쉬워하며 몇 번이고 포옹을 나누었다. 정신이 남자였던 나로서는 머쓱한 인사였다.
“머리 관리 잘하고, 아침마다 이부자리 정리하는 거 잊지 말고, 바쁘다고 밤새우지 말고, 그리고 또…….”
“아, 알았다니까.”
그렇게 로테는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그것이 못내 아쉬워서, 기차가 소실점을 향해 사라질 때까지 멍한 표정으로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크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어요. 영원히 못 보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 그렇겠지.
어쨌거나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예술제 다음에는 두 이벤트가 존재한다.
발명대회, 그리고 소논문 경진대회.
두 대회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쪽 대회에 참가 신청서를 낸 학생들은 대개 다른 쪽에도 출사표를 던진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새로이 발명한다는 건 그에 관련한 특허를 제출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특허 관련된 것이야말로 몇 쪽짜리 소논문으로 쓰기에 적합한 주제였다.
[역시, 소논문 쓰실 건가요?]
“당연하지.”
논문 쓰는 거 너무 좋아. 하나도 안 질려, 늘 새로워.
물론 발명대회에 참가하는 건 이런 감정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야.”
기차역에서 같이 돌아온 버멜이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발명대회 빌미로 뭐 좀 만들어줄 수 있어?”
곧바로 만들 게 생겼다.
**
“헤헤, 끗내준다아…….”
쾅!
술에 취한 프레이를 옆구리에 안은 채 동아리방 문을 발로 찼다.
“대낮부터 얼마나 마셔댄 거야?”
“모올라아앗……!”
혀까지 꼬인 걸 보아하니 이미 글렀다.
은은한 술기운이 물먹인 한지처럼 공기를 적셔나간다. 알딸딸한 알코올 향해 나까지 정신이 몽롱해진다.
술에 약한 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치얼스!”
“치얼스는 개뿔이.”
“나 코 잘래에….”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요, 꼬맹아.”
프레이는 반쯤 감긴 눈으로 계속 칭얼거렸다. 꼬맹이라는 도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 쪼개는 것을 보아하니 제대로 취했다. 이래서야 개박하에 놀아나는 고양이나 다름없었다.
프레이는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는 자세로 팔을 쭉 뻗으며 책상에 엎드렸다. 자칫하면 모자가 어긋나서 여우귀가 보일 수 있는 상태였다.
비록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나는 슬쩍 벗겨지려는 모자를 붙들어서 잘 씌워주었다.
“그래, 오늘은 나 혼자서 한다.”
예술제에 출품한 원자폭탄이 대상을 타 버렸으니 발명대회에는 다른 걸 제출해야 한다.
발명대회로 얻을 수 있는 건 마석. 그렇게 매력적인 보상은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차피 상금을 기대하고 나가는 게 아니다.
지금 나에게는 돈보다 먼저 챙겨야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인망과 명예였다.
작금의 입장을 헤아려볼 때, 이 두 가지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변수를 최대한 줄여두려면 에토스로 포석을 깔아두어야 한다.
발명대회는 인망과 명예를 쌓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전장이다. 우승이든 준우승이든, 만들어낸 것의 특허를 포기하면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층 더 포근해질 것이다.
플레어를 만들었을 때가 그러했고, 모기 방지 스크롤을 만들었을 때도 그러했다. 이미 몇몇 사람에게 나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더 많은 사람이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그래야만 뒤탈이 없다.
로즈마리는 그날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틀림없이 마왕성에 가서 1석이나 아카샤에게 내가 만든 걸 보여주며 자랑하고 있을 터.
그 사이에 끝내야 한다. 나는 비품실로 들어가 남은 물품을 꺼냈다.
그중에는 던전 탐색 실습 때 가져온 펜릴의 창자도 있었다. 말이 창자지, 커다란 솔레노이드에 불과하다.
전기 전도성을 포함하여 이것저것 테스트한 결과 고품질의 물건이었다.
“EMP 발생원으로 쓰기엔 딱이야.”
[펄스 가동기를 만들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버멜의 요구다. 빙의자의 부탁은 들어줄 수 있는 만큼 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일이 술술 풀리지.
어쨌거나 난 미래를 전부 모르고, 이 세상의 공략법을 실타래처럼 줄줄 꿰고 있는 건 녀석이니까. 마왕을 잡을 때까지 우리 둘이 협력하여 움직인다는 계약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
[새 아이템을 작성합니다.]
나는 양장본을 펼치며 도안을 그려냈다. 토카막과 원자폭탄을 거쳐 쌓아 올린 경험 덕분에 작성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재 ‘자유연성’의 숙련도는 78%입니다.]
숙련도로 습득 여부를 판별하는 최상급 지계마도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고된 연습의 성과였다.
아무튼.
[비핵 EMP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코일에 순간적인 대규모 전류를 흘리기]
[2. 큰 전류가 흐르는 코일을 폭파하기(일회용)]
솔레노이드를 감고 전류를 흘린다고 해서 우수한 EMP가 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회로 파괴 역할은 할 수 있다.
버멜이 주문한 건 딱 그 정도였다. 회로가 전부 드러난 마수를 상대로 치명타를 먹일 만한 펄스 발생기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아무래도 겨울방학 때의 이야기겠지.
시간상의 이유로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겨울방학 전후로 보스전이 있다고 한다. 이는 그걸 대비하기 위한 장치이다.
핵물리학도에게 너무한 주문인가 싶었지만, 이 몸의 원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쉬운 일이다.
어차피 시간은 널널하다. 두 달 남짓이다.
그렇게 발명품 초안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덜컥, 하고 문이 열리며 엘프 셋이 부리나케 뛰쳐 들어왔다.
“야, 큰일났어!”
독사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급한 표정이었다. 세 엘프의 안색을 살피던 내 표정이 곧 밋밋하게 변했다.
금안족 특유의 포커페이스가 발동한 건 아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워낙 별거 아니었기 때문이다.
“방금 불의 로스스톤이 박물관에 들어왔어요!”
로드스톤.
대전쟁에서 패배한 마왕의 사념 일부가 갇혀 있는 돌덩어리.
동시에, 과거에 여신에게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1+2 행사로 봉인된 두 사천(四天)의 혼령까지 섞여 있는 흉물이다.
아니, 내 입으로 흉물이라 할 건 못 되지만.
“삿된 기운이 너무 심해. 저긴 못 있겠어.”
“토악질 나올 것 같아요…….”
“잠시 여기 대피해 있을게. 다른 데 갈 곳이 없어서 그래.”
마왕의 기운이 남아있으니 대부분의 정령이 경기를 일으키는 건 당연하다. 그 정령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는 세 엘프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나저나 로드스톤이라니.
이 몸으로도 본 기억이 없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등 뒤로 가지 말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다고 멈추어 설 내가 아니었다.
내가 있는 동아리방은 교내 박물관으로부터 꽤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걸어서 가는 데에만 10분 가까이 걸렸다.
박물관 앞에 도착하니 온갖 쇠사슬과 마력석으로 꽁꽁 싸맨 돌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고는 5m가 조금 넘는다. 내가 만든 원폭보다 살짝 크다.
그 주변으로 이사장이고 학생들이고 죄다 몰려있다. 마왕을 봉인해 놓은 물품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을 테니까.
[예상대로네요. 정령을 사역하는 엘프들은 거의 안 보여요.]
로드스톤은 코치닐처럼 시뻘겋게 빛나고 있었는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메스꺼움이 올라올 정도였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었다. 사기(邪氣)였다.
– 주군께서 원하신다.
나는 반사적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관리 인력이 인챈트 처리한 천으로 로드스톤을 감싸자 그나마 괜찮아졌다.
“방금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로드스톤은 모든 면이 비대칭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계마도사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의도된 것이라고 하네요.”
익숙한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로베스피에르가 학생들에게 로드스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한참 떠들던 이사장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관리 인력을 박물관 내부로 들여보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샐긋 웃으며 다가왔다.
반가움, 동시에 지난함.
두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 교대로 나타난다.
“에테르 양.”
그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저번에 얘기한 건 완성했습니까?”
“네.”
나는 그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물론 약속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 플레어를 소형화하여 그에게 넘기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대가로 나는 수많은 연구자금과 물품, 그리고 2학기 등록금 면제라는 혜택을 선불로 받았다. 남은 채무는 나에게만 있었다.
“혹시 너무 늦었나요?”
“당치도 않습니다.”
“하나 준비해 놓았어요. 여기.”
손을 코트 깊숙한 곳으로 찔러넣었다. 레이저 포인터만한 크기의 은색 원통이 튀어나왔다.
“플레어인가요?”
“그것보다 셀 겁니다.”
이사장은 잇새가 다 보일 정도로 웃었다.
“혹시 더 없습니까?”
“카이뤼삭 교수님 연구실에 설계도면과 시제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분에게 가서 부탁하면 주실 거예요.”
말을 끝마치자마자 로베스피에르는 카이뤼삭의 연구실이 있는 방향으로 부리나케 뛰어가려 했다.
“이사장님.”
“음, 왜 그러죠?”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거사를 치르실 생각이시라면, 겨울방학 이후로 날을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흐음…?”
“학업을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사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이전보다 더 빠른 발걸음으로 뛰어갔다. 나는 이사장의 신형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앞섶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 시선이 박물관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이상하네.”
로드스톤이 도착했는데도 로즈마리는 코빼기도 안 보인다.
틀림없이 뒤에서 뭔가 수작질하고 있을 텐데…….
그리 생각하던 참이었다.
“호외요, 호외!”
“……응?”
약삭빠른 신문부원 하나가 대로변을 뛰어다니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1황자께서 풀려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