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83

    “선생님!”

     

    대기실 복도에서 아셀라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으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리셰가 뒷짐을 지고는 생글생글대며 내게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인상적인 시연이었어요, 용사님.”

     

    “히히, 좀 괜찮았어요?”

     

    리셰는 경기장에서 보여준 절도 있는 모습이 다른 사람이었다는 양 평범한 시골 소녀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마물 상대도 익숙하시네요.”

     

    “익숙하긴요. 무서워 죽겠어요.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은걸요. 칼에 베이면 얼마나 아픈데요, 으으…”

     

    하긴 남의 상처를 보는 것도 괴롭지.

    아무리 그래도 마물인데. 공감력이 풍부하네.

     

    “월광궁 기사님들이랑 못 나간 건 조금 아쉬웠어요.”

     

    “큰물에서 노셔야죠. 이제 대륙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계시니까요.”

     

    “그건… 그렇죠. 제가 앞에서 싸워야, 다른 분들이 안심할 수 있는 거죠.”

     

    리셰가 바닥을 내려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되시나요?”

     

    “조금은요. 하지만 다른 분들께 도움이 되어서 기쁘기도 해요.”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리셰.

     

    “저는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하려고 해요.”

     

     

    [No. 010 : 성검 파괴 12%]

    [No. 014 : 공명 해제 8%]

     

     

    지난 몇 달 동안 리셰는 훌륭하게 성장했다. 판에 박은 정석적인 용사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성검이라는 변수 때문에 내가 서포트하긴 했어도 리셰가 본래 가진 가능성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

     

    “하하, 제가 뭘 했다고요.”

     

    “엄청 도움받은걸요. 선생님이 꼬박꼬박 약제도 지어주시고, 상처도 봐주시고, 잘못도 용서해주셨고… 무엇보다.”

     

    리셰가 강조해 말했다.

     

    “저는 선생님을 동경해서 제도로 오기로 마음먹었었거든요.”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긴 하네.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역사에서 리셰는 자작령에 3년쯤 더 갇혀있었다.

     

    지금처럼 기사들과 교류하고, 소드마스터에게 검을 배우고, 대중 앞에 직접 나설 경험도 없었다.

     

    그리고 실패한 경험을 반복한 끝에 샤를이 된다.

     

    스타트 지점부터 굉장히 다르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저도 만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헤헷. 아, 선생님도 연무회에 제국 치유사 대표로 나가시나요?”

     

    “아, 저는 출전하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그건 좀 아쉽네요. 선생님의 시연을 보면 분명 다들 깜짝 놀랄 게 분명한데요.”

     

    리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일부터 열리는 본 연무회도 차분히 관람해 보시죠. 용사님과 함께 싸울 전사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제 동료요. 네, 기대되네요. 황녀님의 마법도 대단했죠. 날씨를 바꾸신 건가요?”

     

    “정확히는 기상조작을 기반으로 한 6위계 공간조작이 아닐까 합니다만, 저도 마법에는 큰 조예가 있지 않아서요.”

     

    “와아, 6위계….”

     

    리셰가 깜짝 놀라며 입을 헤 벌렸다. 그리고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마법인지는 알고 있지? 다들 축제인 줄 알더라. 기가 막혀서.”

     

    나는 투덜대는 그녀에게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샤를. 검 휘두르는 장면 잘 봤어요.”

     

    “알아봤구나?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샤를이 매혹적인 눈웃음을 흘리며 성큼 한 걸음 다가와서는 내 턱을 손끝으로 슥 훑고 지나갔다.

     

    “라스, 너를 위해서 진심으로 충고하는 말인데.”

     

    “새겨듣지요.”

     

    “황제 아셀라가 눈이 돌아가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그게 네 목숨을 부지할 유일한 방법이야.”

     

    그야 내가 샤를보다 잘 안다.

     

    그렇다고 지금의 아셀라가 황제와 다른 사람이라는 말을 샤를이 받아들일 리도 없으니 적당히 넘기기로 했다.

     

    뭐, 느낌이야 조금 남아있지만.

     

    그 정도는 지금은 귀엽지.

     

     

     

    ***

     

     

     

    연무회 2일차엔 각국 대표 검사들의 무투전이 펼쳐졌다.

     

    연합군에 참가한 20여 개 나라의 실력자가 모두 나오는 자리다.

     

    정치적인 사정을 고려해서 완전히 정상급까지 나오진 않았지만 내로라하는 인물은 모두 모였다.

     

    소국의 친위대장이나 S급 모험가, 재야의 은둔고수 등.

     

    토너먼트 형식의 대회이기에, 높은 성적을 거두고 강렬한 활약으로 인상을 보인 인물일수록 추후 용사파티의 멤버로 배정되거나, 연합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확률이 높다.

     

    그만큼 연합군에서 발언권도 강해지니 많은 국가가 필사적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자만이 경기장에 남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가 펼쳐진다.

     

    관중은 평생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진귀한 장면에 더욱 열광했다.

     

    타냐는 무던하게 결승 토너먼트 8강까지 진출했는데, 자랑스럽게 월광궁과 고트베르크 후작가의 깃발을 지면에 꼽고는 경기장 위로 걸어 올라갔다.

     

    “이번 상대는 제국 아가씨인가. 드레스는 준비 안 했는데, 큰일이야.”

     

    농담을 흘리며 장검을 붕붕 돌리는 그녀의 상대는 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라르크. 미래에서 파티의 전위를 맡았던 검사다. 지금은 현역 S급 모험가다.

     

    “소문은 들었다, 아가씨. 최연소 소드마스터라지. 그 실력을 가지고 권력의 개 노릇이나 하다니, 그릇이 뻔하군.”

     

    라르크가 타냐를 도발하며 검날을 뒤로 빼는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도신 길이를 착각하게 만들어 상대가 방심하고 들어오는 틈을 노릴 셈이다.

     

    타냐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대답했다.

     

    “오러는 쓰지 않겠소.”

     

    “무슨 자신감이지?”

     

    “변명을 듣기 싫을 뿐이오.”

     

    시합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풍압을 일으키며 돌진하는 타냐.

     

    라르크는 도발이 먹혔다 여기고 음흉한 미소와 함께 검격을 내지른다.

     

    “힉!”

     

    내 옆에서 함께 관람하던 클로에의 입에서 깜짝 놀란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것도 잠시, 섬광보다도 빠른 타냐의 검기가 라르크의 궤적을 제압한다.

     

    어떠한 기교나 경지의 차이도 없이, 심리전과 힘만으로도 압도적으로 누를 수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듯.

     

    2격, 3격의 합에서 불꽃이 튀고, 라르크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기도 잠깐.

     

    방어태로 전환할 틈도 없이 타냐의 검이 라르크의 목으로 들어갔다.

     

    ―콰앙!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며 관성에 의한 돌풍이 몰아치고.

     

    “…괴물인가.”

     

    라르크가 패배를 인정하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와아!”

     

    클로에가 감탄하며 짝짝, 박수를 쳤다.

     

    그러기도 잠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쾅, 의자 팔걸이를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다름 아닌 왕국의 국왕이었다.

     

    왕국 대표인 검사가 제국 출신에게 손도 못 쓰고 당했으니 자존심이 긁혔나.

     

    그가 슬쩍 황제의 눈치를 본다. 황제가 시선을 모른 척 내게 던지듯 말을 걸었다.

     

    “주치의 의사 고트베르크.”

     

    “소인을 부르셨나이까, 폐하.”

     

    “음, 짐이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저 적발의 검사는 그대의 호위기사라 하였던가.”

     

    타냐가 누군지는 잘 알면서.

    국왕의 속을 긁을 의도다.

     

    “틀림없습니다.”

     

    “좋은 호위기사를 두었군.”

     

    “황공하옵니다.”

     

    나는 황제에게 꾸벅 인사했다.

     

    국왕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 더 열 받아하는 걸 여기서도 알 수 있었다.

     

    전국을 뒤져 찾아낸 S급 모험가가 고작 일개 주치의의 호위기사에게 지다니, 상당한 굴욕이겠지.

     

    “저분이 선생님의 호위기사… 대단하네요.”

     

    페르시야 1왕녀를 포함한 왕족들의 시선이 내게 머무르는 걸 알 수 있었다.

     

    “주치의.”

     

    그리되니 아셀라도 나를 부르기에 그녀에게 다가가 고개를 가까이했다.

     

    바쁘구만.

     

    “부르셨습니까.”

     

    “용건이 없는 건 알지?”

     

    “잘 알죠.”

     

    “손이나 보여봐.”

     

    그녀가 왼손을 남들에게 잘 보이도록 슬쩍 올리기에, 가볍게 진단을 보는 척 겹쳐 잡았다.

     

    우리의 약혼반지가 같은 색으로 반짝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자리로 돌아가렴.”

     

    “분부대로 합지요.”

     

    아셀라는 내 손바닥 가운데를 손톱으로 슬쩍 긁고는 악마처럼 키득댔다.

     

     

     

    결국 타냐는 검사 무투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연하게도 적수가 어디에도 없었다.

     

    알고는 있었어도 새삼 대단하네.

     

     

    3일차에는 궁수 무투전이 열렸다.

     

    “타락한 엘프놈들! 부끄럽지도 않냐? 세계수님이 천벌을 내릴 거다!”

     

    발렌은 모험가 출신 엘프 궁수들을 보자마자 화살을 마구잡이로 퍼부었다.

     

    그중에는 몰디나라는 이름의 본래 용사파티가 될 멤버도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타락했다고 그래! 벌써 몇백 년 전 일인데!”

     

    “몇백 년밖에 안 됐는데 그 꼬라지는 뭐냐!”

     

    “시간 감각도 없는 숲쟁이가!”

     

    엘프끼리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다니며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저 레벨쯤 되니 화살이 아니라 대성벽용 보구의 위력이다.

     

    다행히 관중석에는 배리어 마법이 걸려있어 피해가 미치는 일은 없었다.

     

    “이상하군. 우리가 어쩌다 여기까지 참가하게 됐지.”

     

    “일단 쏴! 배신자에게 죽음을!”

     

    경비대의 파멜름이 도중에 위화감을 눈치챘지만 다행히 발렌은 아직도 내게 속은 걸 모르고 있었다.

     

    “내가 나이트엘프따위에 질 줄 알아? 용사파티에 들어가서 한탕 챙기고 말 거라고!”

     

    몰디나가 기력으로 다리를 강화해 높은 탑 지형으로 순식간에 뛰어 올라갔다.

    고각에서 몸을 숨긴 채 지면을 폭격하자 발렌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비겁한 놈들. 잔기술만 늘어서는!”

     

    발렌이 몸을 숨기고 사격각을 잡아보지만 시야가 안 나오는 모양이다.

     

    원거리에서 싸움은 아래에서 위 지형을 절대 이길 수 없지.

     

    “어이―”

     

    내가 손을 흔들어 신호를 줬다.

     

    발렌이 나를 확인하고는 비로소 생각이 났는지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포션의 뚜껑을 엄지로 튕겼다.

     

    꼴깍꼴깍 포션을 마시는 발렌.

     

    “몸이 이상해!”

     

    기분이 좋지 않은지 그녀가 기다란 귀를 축 늘어뜨리며 지면을 박찼다.

     

    하늘로 붕 날아오르는 발렌.

     

    전에 만들었던 [체공 포션]이다. 짧은 시간 공중부양을 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이럴 때 써먹을 수 있을 줄 알았지.

     

    상대보다 고각을 잡자 숨은 몸이 낱낱이 드러난다. 쏘아낸 화살은 그녀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게 발렌도 우수한 성적을 거둬서 용사파티의 후보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4일째의 보병 단체전도 끝나고, 5일째.

     

    치유사 시연회의 날이 찾아왔다.

     

     

    나는 새벽부터 팀과 함께 오늘 진행할 수술의 시뮬레이션 연습을 진행했다.

     

    집도의는 나. 보조는 평소처럼 클로에다.

     

    “메스.”

     

    내게 필요한 블레이드를 바로 넘겨주는 클로에.

     

    “메스가키.”

     

    “허접~ 이런 쉬운 수술 하나 못 하는 거야? 집도의 바꿔줄까?”

     

    “그건 뭡니까.”

     

    우리를 지켜본 휴고가 인상을 찌푸렸다.

    클로에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저도 몰라요… 이렇게 하라고 선생님이 시켰어요….”

     

    “내가 언제?”

     

    “안 시키셨다는데요.”

     

    “으윽… 흑흑…”

     

    “농담이야. 다들 너무 긴장했어. 공개 수술이라도 평소와 똑같잖아?”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요….”

     

    나는 클로에의 입에 사탕을 물려주며 등을 두들기고는 팀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환자만 본다. 다른 건 잊어버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굳76 독자님 100코인 후원과 정주행 감사해요!!@!
    후원과 함께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셔도 된답니다… 바로 삭제하셔도 볼 수 있어요!
    다음화 보기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