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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3

       조례가 끝나고 오전 강의가 시작되었지만,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은 없었다.

       다들 토요일에 있을 신입생 환영회에 대한 정보를 탐색하고 의견을 교환하느라 바빴다.

         

       테이블 위로 쪽지들이 날아다녔고 옆 사람이랑 비밀스러운 속닥거림이 오갔다. 종종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웃음이나 감탄사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문예과 교수인 고골은 그러거나 말거나 평상시대로 수업을 계속해 나갔다.

       적어도 평소보다 조는 사람은 줄어서 다행이라며 자조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이론 강의는 원래 제대로 듣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

         

       엘리트 양성소라는 평을 듣긴 하지만, 레카체프는 어디까지나 곡예사 학교였다.

         

       이곳 학생들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는 인종들이었다.

       지루한 교과서 나부랭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당연히 인기가 없었다.

         

       특히 고골 교수는 교수진 중 유일하게 곡예를 익히지 않은 극작가 출신이라 학생들과 더욱 접점이 없었다.

         

       그나마 고학년이 되면 극본을 써보길 희망하는 애들이 나왔기에, 고골은 그 아이들만 진정한 제자라 생각하고 버텨나가는 생활을 몇 년째 반복 중이었다.

         

       그렇게 천대(?)당하던 그는 1학년 수업에도 학생다운 학생이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근처에 앉아 있는 동년배들에 비해 체구가 작은 은빛 머리의 여학생은 주변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가만히 책과 노트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청강생인데도 불구하고 배움 그 자체에 뜻을 둔 기특한 친구였다. 그녀가 한두 달 뒤면 떠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카렌은 잠시도 책에서 눈을 안 떼는 마야를 보며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넌 이런 날에도 대단하네. 수업이 머리에 들어오니?”

         

       그녀는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주변에서는 다들 환영회에 데려갈 파트너를 누구로 할지, 초청 무대에는 누가 설지 떠들어대고 있는데 자신의 유일한 친구는 공부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몇 번이나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는 상대의 모습에 카렌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무심한 그녀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달라붙으면 귀찮은 파리를 쫓는 것처럼 형식적인 대응은 해주곤 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녀는 단 한 번도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

         

       자세히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카렌은 곧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자고 있었잖아.”

         

       마야는 책과 노트에 시선을 파묻고 있던 게 아니었다.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가 어깨를 툭 치자 그제야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카렌을 바라봤다.

         

       “왜 깨워.”

       “아니, 자는 건 처음 봐서……. 어제 무슨 일 있었어?”

         

       그녀의 질문에 마야는 하품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밤새 단검 투척연습을 했어.”

       “밤새? 음, 잠깐? 너 그저께도 그랬다고 안 했어?”

       “맞아.”

       “미친! 이틀 밤을 새웠단 말이야?”

         

       그녀가 큰 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그녀보다 더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나흘 밤낮도 잠 한숨 안 자고 책을 읽은 적도 있어.”

       “책하고 같냐. 몸 움직이는 건 더 힘들지!”

         

       그때, 고골 교수가 판서를 끝내고 다시 교과서를 읽기 시작했다.

       마야는 펜을 들고 그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포인트를 자기 방식으로 정리해 노트에 적는 작업에 착수했다.

         

       카렌은 그녀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무슨 공부가 되니? 얘기나 좀 하자. 응? 얘기하자, 얘기잉. 마야야아앙, 마야야아앙.”

         

       그녀가 말끝을 늘이며 질척질척하게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마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펜을 손에서 놓았다.

         

       “무슨 얘기?”

       “파트너 초대권 말이야. 누구한테 줄지는 정했어?”

       “……너는?”

       “나는 우리 오빠 녀석이나 줘야지. 자꾸 나한테 파이렌 교수가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단 말이야. 구질구질한 노총각 자식. 여자 염탐이나 시키고. 직접 와서 만나보라고 해야지. 너는 누구 줄 건데?”

         

       마야는 잠시 멈칫했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정했어.”

         

       카렌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 년이 사람을 바보로 아나.

         

       “흠흠, 내가 맞춰볼까? 너희 단장님 맞지?”

         

       마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돌아봤다.

         

       “어떻게 알았어?”

         

       귀엽다, 귀여워.

       카렌은 그녀의 새하얀 볼을 잡아당기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어떻게 알긴! 네가 맨날 하는 소리가 그거잖아! 우리 단장님은 어쩌고, 우리 단장님이 저쩌고, 단장님, 단장님, 단장님 이러는데.”

         

       마야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렇게나 자신이 단장님 얘기를 많이 했던가?

         

       “너희 단장님 나도 예전에 본 적 있어. 너랑 그날 만나기 직전에 말이야. 금발에 무지 잘생긴 오빠 맞지?”

       “오빠?”

         

       그녀의 단어 선택에 마야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카레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홉스랑 나랑 20살 넘게 차이 나니까 그 정도 나이는 오빠지 뭐. 어쨌든 응원할게. 네가 훨씬 아깝긴 하지만 그 정도 마스크면 준수하지. 10살 차이라도 애인으로 삼을 만해”

       “애인 아닌데…….”

         

       마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항상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하는 그녀만 봐왔던 카렌은 그런 모습이 신선해 보이는지 웃음을 흘렸다.

         

       “파트너로 삼을 거 아냐?”

       “단장님이 거절할 수도 있잖아.”

       “뭐? 그 오빠 여자 취향이 어떤데?”

         

       어떻게 하다가 그녀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지 모르겠지만, 마야는 이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궁리하고 있었다.

         

       단장님의 여자 취향.

       마야는 단장님과 잤던 여자들을 떠올렸다.

         

       베르그송 자작과 레이나.

       둘 다 자신감 넘치고 도도하고 빈틈없는 스타일이었다.

         

       “활동적인……잘 꾸미고 완벽한 귀족 같은 여자…….”

       “……끄응. 너는 아니네.”

         

       카렌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활동적이라는 말은 마야와 백만 광년 정도 동떨어진 말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저런 외모와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게 사기기는 하지만…….

         

       “괜찮아. 그딴 거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네가 나은 게 있어.”

       “……공부?”

         

       그녀의 대답에 카렌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냐. 등신아. 너 예쁘잖아.”

       “예쁘다고?”

         

       마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말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추라는 건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잖아. 단장님 눈에는 내가 못생기고 추해 보일 수 있어.”

         

       카렌은 입을 쩍 벌렸다.

       얘가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친구의 말이 너무나 괘씸해서 카렌은 전 세계 소녀들을 대표해 마야를 응징하기로 했다.

         

       “이게 누굴 놀리나! 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재수 없다고 욕먹는다. 너는 누가 봐도 예쁘다고! 이년, 이년!”

         

       카렌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장난스레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마야는 그녀에게 안겨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녀는 카렌이 말한 것을 조심스럽게 곱씹었다.

         

       “누가 봐도 라면……. 단장님에게도 내가 예쁘게 보일까?”

         

       정말 이런 재수 없는 질문을 하는 애를 내가 친구로 뒀을 줄이야.

       카렌은 기가 막혔지만 솔직하게 답했다.

         

       “물론이지! 내가 보증해! 20대 후반의 아재잖아. 사지 멀쩡한 남자라면, 10살이나 어린 애한테 초대장을 받으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출 거야!”

         

       마야는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자신에게 파트너로 초청받고 기뻐하는 단장님의 모습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마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또래와의 고민 상담이었다.

       학술 토론도 아닌 일에 다른 사람과 이렇게 긴 얘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별 내용도 없는 시답지 않은 대화였지만 큰 힘이 됐다.

         

       엘라와 대화를 나눠도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엉? 마야가 지금 감사의 인사를 한 거야? 다시 말해 줄래? 제대로 못 들었어!”

       “…….”

         

       마야는 다시 펜을 들고 필기를 시작했다.

       고골 교수가 그녀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마야아앙~한 번 더 말해 줘!”

       “떨어져.”

         

       마야가 조금 짜증스러운 감정을 담아 말했다.

         

       두 사람은 오전 수업을 끝내고 바로 점심을 먹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대강의실로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마야가 맨 앞에 앉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고 바로 와서일까.

       자리에 앉는 동시에 이틀 철야를 한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마야는 눈을 조금씩 깜빡이다가 강의실 의자에 앉은 채 잠들고 말았다.

         

       카렌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마야아아앙~ 윽, 내가 들어도 소름 돋네, 시발. 이거 아저씨들이 들었으면 발작했다. 100%.”

         

       마야와 함께 있을 때 간드러진 말투는 사실 평소 카렌이 쓰는 것이 아니었다.

         

       서커스단 내에서 그녀는 욕도 막 섞어 가며 거친 말투를 썼다.

       행동 역시 아무 데서나 다리를 쩍쩍 벌리거나 배를 내밀고 긁거나 40대 아저씨처럼 굴었다.

         

       그녀라고 ‘여자’로서의 생활에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생활의 90%를 함께 보내는 단원들 앞에서 갑자기 혼자 여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그들에게 못 할 짓이었다.

         

       ‘내가 너무 꼴리게 굴면, 화장실 안이 밤꽃 냄새로 진동하겠지. 누나가 더 너희를 위해 가슴을 안 키우고 있는 거다!’

         

       이런 저질스러운 농담을 막 던지는 것도 그런 불편함을 덜 느끼게 하기 위한 그녀의 배려였다.

         

       홉스는 그게 안타까워 보이는지 아예 다른 길도 있으니 언제든 떠나도 좋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곡예사로 살고 싶었다.

       파파엘 서커스도, 그 안에 있는 동료들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일부를 차지하는 떨칠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여자를 두려워하게 되고 말았다.

       그것도 또래 여자애들을.

         

       그저 여자인 친구 한 명만.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마야를 바라봤다.

       속마음을 알기 힘들기에 오히려 편한 그녀였다.

         

       그녀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까?

         

       마야의 손에서 손가방이 툭 떨어졌다.

       자느라 손에서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하여간 옆에서 누가 안 도와주면 일상생활이 진짜 엉망이라니까.

         

       작게 투덜거리며 그녀의 가방을 챙기는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마야 양의 친구인가요?”

         

       소리는 교단 위에서 들려왔다.

       그곳에는 검은 정장에 검은 망토를 두른 20대 후반의 금발 남자가 서 있었다.

         

       마야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잘생긴 오빠!”

       “네?”

       “아, 아니, 워, 원더스타인 단장님 맞으시죠?”

       “네. 보니까 당신은 카렌 양이군요?”

       “저, 저를 아시나요?”

       “물론이죠. 마야 양이 얘기해줬는걸요.”

         

       그의 말에 카렌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마야가요? 무슨 얘기를 했는데요?”

       “머리카락이 붉은색이라고.”

       “…….”

       “몸매를 보고 남자애인 줄 알았다고.”

       “…….”

         

       이 계집애가.

         

       카렌은 마야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원더스타인 앞이라서 참았다.

         

       “마야를 깨울까요?”

       “아뇨. 그대로 두세요. 많이 피곤한 모양이군요.”

         

       점심시간이 끝나가면서 학생들이 서서히 대강의실로 몰려들었다.

       카렌은 마야를 대신해 그녀의 간식을 받아오기 위해 강의실 입구에 줄을 섰다.

         

       그녀는 받아온 음료수를 마야의 뺨에 댔다.

       차가운 기운에 그녀가 눈을 비비며 떴다.

         

       “……몇 시야?”

       “시간 됐어. 단장님은 이미 도착했고.”

         

       그때, 강의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일군의 학생들을 이끌고 하얀색 정장과 치마를 입은 파란색 머리의 여학생이 단정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현재 최고학년 수석인 클라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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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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