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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3

       *

         

         

         새파란 얼음에 뒤덮인 후원의 문에 거미줄처럼 실금이 늘어졌다.

         

         도끼를 휘두르기 전에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 한 번이면 박살낼 수 있다. 이반은 천천히 마력을 다스리며 팔을 뻗은 채로 입을 열었다.

         

         

         “드미트리.”

         “예, 선배님.”

         “개문 직후, 1종 상황이 확인된다면 퇴각 후 재집결해라. 본국에 상황을 알린 후 칼리온을 포기해라.”

         “…예, 선배님.”

         

         

         절멸부대가 마족령에서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즉, 1종 상황이란 단 한 가지 경우만을 의미했다.

         

         칠용장과의 직접 조우.

         

         거의 모든 교전 상황에서의 대응 교리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오직 그 상황만큼은 대응법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부대의 전술명령에 언제나 재집결지를 명시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절멸부대가 투입되던 지역은 언제나 적의 최후방, 그리고 종심부였으므로. 운이 억세게 나쁠 경우 칠용장을 실제로 조우할 가능성이 있었다.

         

         칠용장과의 조우 시 최선임자가 잔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것이 부대의 생존성을 유지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가장 유능한 요원이 시간을 버는 동안, 후임들은 퇴로를 따라 도주해야 했다.

         

         누군가는 최전방의 상황을 작전사령부에 전달해야 했으므로. 칠용장의 현 위치와 같은 정보는 최중요 첩보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부대의 최선임자는 이반이었다.

         

         

         “엘피헤라.”

         “예, 예?!”

         “걱정 마라.”

         

         

         마지막으로, 이반은 등에 업힌 엘피헤라를 코트로 덮고, 허리를 단단히 묶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게다.”

         

         

         이반은 도끼를 들었다. 잠시 억류했던 마력이 불타듯 치밀어 신경을 가열했다. 한계까지 강화된 근육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콰아아아앙—!!

         

         

         소음이 너무 컸던 탓에, 엘피헤라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다만, 목덜미에 파고드는 체온이 따듯했다.

         

         

        *

         

         

         눈이 차양처럼 휘몰아쳤다. 시야가 극단적으로 제한되고, 폭풍에 청각이 멎었다.

         

         이반은 얼굴에 달라붙는 눈을 막아내려다 손을 멈추고 재빨리 등 뒤로 손을 돌렸다.

         

         단단히 감싸여 있지만 혹시 몰랐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체온을 유지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으나, 엘피헤라는 지금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재빨리 허리에 묶어둔 끈을 풀고, 작게 옹송그리고 있는 엘피헤라를 품 안에 안았다.

         

         

         “—!!”

         

         

         목소리가 묻혔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폭풍 사이로 소리가 사드라들었다. 이반은 곧 대화를 포기하고 코트자락을 꽉 여몄다. 그 아래에서 잘게 떨리는 몸이 느껴졌다.

         

         

         “—!!!”

         

         

         엘피헤라가 무어라 외쳤다. 차라리 수어를 가르쳤어야 했나. 이반은 독순술을 시도할 수도 없는 상황에 혀를 찼다.

         

         그녀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마력을 흘렸다. 마법사에게 마력이란 일종의 전류와 유사한 작용을 한다. 모든 기계장치에 요구 전압과 전력량이 상이한 것처럼, 타인의 마력을 받아낸다고 무작정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평소라면 시도해선 안 되는 일이다. 자칫하다가 섬세한 마력 회로가 과부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평소라면, 엘피헤라는 외부의 마력을 순식간에 해체해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다. 그러니, 이제 해야 할 일은 믿는 것뿐.

         

         

         “—?! –!!”

         

         

         엘피헤라가 다급하게 외치는 것이 손 아래로 느껴졌다. 목덜미가 울리는 것이 선연했다. 어차피 알아들을 수 없는 노릇인지라, 이반은 엘피헤라의 말을 무시하며 주위를 살폈다.

         

         

         ‘실내가 아니군.’

         

         

         실내에 눈폭풍이 휘몰아칠 일이 없으니 당연한 소리지만, 만년궁의 구조를 고려하자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만년궁의 후원은 거대한 유리돔으로 덮여 있었으니까.

         

         선조들에게 언제나 완벽한 조건을 맞춰주기 위한 노력이다. 습도와 온도를 항상 적절히 유지하고, 일조량을 조절하고, 짐승과 해충을 차단하기 위한.

         

         

         “….”

         

         

         이반은 간신히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넘어온 문이 보이지 않았다.

         

         문도, 건물도 없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눈 덮인 설원이다. 고저차 없이 평탄한. 밤의 어둠 속에서, 새하얀 바닥이 지평선을 그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조금 더 섬세하게 살폈다. 다른 인기척이 있을까 하여.

         

         

         ‘확실하군.’

         

         

         인기척이 없다. 서로 붙어 있던 엘피헤라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요원들 전원이 사라졌다.

         

         환각계열 주문인가? 아니, 그렇다면 엘피헤라가 함께 넘어왔을 리가 없다.

         

         

         ‘왕거다.’

         

         

         이반은 이런 현상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잘게 깨물며 도끼를 들었다. 이젠 더 이상 부정할 수도 없다. 1종 상황이었다. 그것도 갑작스러운 조우가 아닌, 왕거 침입 수준의.

         

         살아서 신이 된 존재들, 필멸자의 영혼으로 불멸성을 얻어낸 강자들의 터전이다. 관념의 화신이 된 존재들의 영역이다.

         

         왕거는 또 하나의 세계와 같았다. 그가 겪었던 모든 왕거들이 그랬다. 단순히 잘 지어진 요새나 던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관념이 뒤틀리는 공간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래, 신의 세계다. 스스로 신이라 부르던 자들의 세상이었으니.

         

         그러니 지금 이곳은.

         

         

        -후우우웅—!!

         

         

         방금까지 발을 딛고 있던 만년궁은 흔적조차 없고, 오직 눈밭과 폭풍만 존재하는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칠용장의 왕거와 같았다.

         

         

         ‘그렇다면 주민이 있을 텐데.’

         

         

         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숭배자들이다. 이반이 신을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스스로 완전할 수 없는 족속들이었던 탓이다.

         

         모든 칠용장은 자신을 위한 숭배자가 존재했다. 한 종족을 대표하는 자들이었으므로, 숭배자는 곧 자신의 종족 전체의 숫자와 같다 하겠다.

         

         그러나 지금 이 공간에 있을 존재는 누구의 숭배를 받아 자라났는가.

         

         이드란힐, 엘프들의 도시. 이곳에서 과연 어떤 마족이 신을 만들어낼 정도로 융성할 수 있단 말인가.

         

         

         “—.”

         

         

         지평선 끝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거친 눈발로 인한 착시인가 싶었으나, 자세히 보니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반은 꿈틀거리는 것들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엘피헤라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걸음을 옮겨야 했다.

         

         곧 움직이는 것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허.”

         

         

         심해 거머리였다. 눈발 위에서 얼어붙은 녀석과, 그 녀석을 파먹고 있는 작달막한 것들로 이루어진 기괴한 덩어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랬나. 바다인가.”

         

         

         이반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저 없는 평탄한 지평선과 그 위에 소복히 쌓인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발끝으로 바닥을 쓸었다. 단단한 지반이 부드럽게 밀렸다. 그 아래로, 시커먼 얼음이 깔려 있었다.

         

         바다가 얼어붙어 있다.

         

         

         “마물을 사역하는 기술과 지성을 강화하는 기술, 영혼을 압착해 신성을 뽑아내는 기술…. 영리하군.”

         

         

         이반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거머리를 바라보았다.

         

         거머리들은 어느새 이반을 향해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것처럼. 아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지성이 있는 것처럼.

         

         

         “마물에게 지성을 강화해 신앙을 심었군. 엘프들의 신이 아니라, 엘프가 만들어낸 사역마들의 신. 신을 사역하려 했느냐.”

         

         

         마물 중 하나가 꿈틀거렸다. 빨판상어처럼 생긴 입이 우물거리다가, 금속이 비틀리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틱, 틱, 틱. 그런 소음들이 하나 하나 겹쳤다. 각각의 개체들이 서로 다른 소리를, 다른 규칙으로 내기 시작했다.

         

         소리들의 집합이다. 관현악단이 연주할 때, 각각의 악기의 특색이 묻히고 하나의 음악으로 승화되는 것처럼. 작은 소음에 불과한 소리들이 모여 음률을 자아내고 있었다.

         

         구더기들이 제각각 내뱉는 단발적인 소리들이 겹쳐서, 단어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영원, 히, 번영, 하리라.

         

         

         그 문장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거머리들은 도취된 것처럼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문득, 발치 아래에서 빛이 반짝였다. 이반은 발로 눈발을 밀어 바닥을 살폈다.

         

         어두운 대해의 빙하. 그 아래에서 빛무리가 아스라히 반짝였다. 은하가 펼쳐진 것처럼 저 멀리에서부터.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자 어렴풋한 윤곽이 보였다.

         

         도시였다. 가라앉은 도시, 아니. 도시’들’이 있었다. 생경한 양식의 유적과 그 사이를 흐르는 마력이 선연했다.

         

         처음 보는 지형이다. 이반은 한번 본 지형을 군용지도의 단위에서 잊지 않으므로, 지금 그가 내려보는 도시는 명백히 낯선 형태를 띄고 있었다.

         

         연합 왕국의 어떤 지역도 저런 형태를 하고 있지 않았다.

         

         도시 위를 떠도는 해류에 그 아래에서 천조각 같은 것 하나가 쓰레기처럼 흩날리며 부유하고 있었다.

         

         

         “42개의 섬…이라.”

         

         

         칼리온의 문장이 그려진 군기가 빙하 아래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영원히, 번,영하리,라.

         

         

         구더기들이 꾸물거리며 뒤엉키기 시작했다. 이반은 엘피헤라를 한쪽에 끼고 도끼를 들었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토닥여주고는 자세를 다잡았다.

         

         구더기가 뒤엉킨 형태는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귀가 뾰족하고, 처음 보는 복식을 하고 있는. 머리칼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 구더기가 삐죽거리며 기이한 형태를 그렸다.

         

         실루엣으로만 보자면 그건, 끝없이 생장하는 나무처럼 보였다.

         

         

         “예레, 예레모프 경.”

         

         

         엘피헤라는 얼어붙은 입술을 달싹이며 가늘게 속삭였다. 그녀는 겁에 질린 눈으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지평선에서 꾸물거리는 것들이 점점 더 몰려들고 있었다. 구더기들이 모여서 실루엣을 이루기 시작했다.

         

         한 개체 한 개체가 곧 나무처럼 선 엘프의 형태를 띄고 있어서.

         

         지평선은 마치 끝없이 펼쳐진 숲처럼 보였다.

         

         

         “절 버리고 가세요. 호, 혼자서 살아 돌아갈 방법을 찾, 찾으실 수 있으, 있으시잖아요.”

         “그래, 찾을 수 있지.”

         

         

         이반은 엘피헤라의 머리를 꾹 눌러서, 코트자락 안에 감추었다.

         

         

         “해본 적 있다.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칠용장의 왕거를 처음 방문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용사 파티의 척후로서, 왕거를 답사하고 생환해 용사를 안내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니, 당대의 파티에게 같은 일을 해주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경험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훈련 받은 요원은 한번 해본 일을 다시 해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야만 한다.

         

         

        *

         

         

         심해 속에 유폐된 엘프들의 옛 영혼들.

         

         그 영혼을 갉아먹으며 퇴적된 마물들.

         

         그 마물들을 사역하고, 지성을 부여하여 하나의 ‘마족’으로 각성시키고.

         

         그 마족들에게 신앙을 만들어 단일 개체로 집약하면.

         

         

         “칠용장 정도를 직접 생산하는 것이 이론상 가능하기야 하지.”

         

         

         베올그린은 조용히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나이트가 움직이자, 맞은편 손이 폰을 밀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신이라 불러야 하겠는가?”

         

         

         베올그린의 물음은 어둠 속을 메아리쳤다.

         

         

         “나는 차라리 이를 그릇이라 부르리라.”

         

         

         그의 손이 나이트를 쥐고 움직였다. 달각, 앞서 나온 폰들이 짓밟혀 구더기처럼 터져 나갔다.

         

         

        *

         

         

         살을 에이는 추위 때문일까, 지독하게 파고드는 이계의 마력 탓일까, 아니면 두려움 때문일까.

         

         만일 손이 떨리는 이유가 두려움 탓이라면, 두려운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엘피헤라는 창백하게 질린 손끝으로 이반의 뺨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콰직.

         

         

         구더기로 이루어진 엘프 하나가 도끼 아래에 짓눌려 터졌다. 구더기들은 빠르게 흩어지며 눈밭 너머로 사그라들었다.

         

         곧 지평선에서 또 다시 한 엘프가 몸을 일으켰다.

         

         

         “예레, 예레모프 경.”

         

         

         얼어붙은 입술을 간신히 떼어내어 말을 걸자, 이반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도끼를 휘둘렀다.

         

         터져나간 구더기의 사체가 눈 위에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해라. 엘피헤라.”

         “저는, 저는….”

         “할 수 있다. 그때까지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무겁고, 진중하고, 흔들림 없는 낮은 음성이다. 조금도 거칠어지지 않은 숨소리, 단단하지만 차갑지 않은. 그래서 안심이 되는.

         

         

         “떨어지지 마라.”

         

         

         엘피헤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해야 할 일.

         

         용사 파티의 마법사가, 마법을 잃은 마법사가, 무력한 채 공포에 질려 헐떡이는 마법사가 해야만 할 일.

         

         마력회로를 헝클어트리는 이계의 마력 아래에서, 용사 파티의 마법사가 해야만 할 일.

         

         

        -철컥.

         

         

         회로의 톱니가 굴렀다. 구성을 어그러트리며 뜨겁게 과부하되어 덜덜 떨리면서도.

         

         극심한 고통에 신경을 전기로 지지는 듯 했으나, 그럼에도.

         

         용사 파티의 마법사가 해야만 할 일.

         

         그리켄코스의 후계자가 해야만 할 일이 있으니까.

         

         

         “옳지.”

         

         

         이반은 낮게 웃으며 엘피헤라의 머리를 한번 꾹 눌러주고는, 달려드는 엘프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 찍었다.

         

         콰직, 진물이 그의 코트자락을 푹 적셨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지각사유 : 잠.

    퇴근하자마자 뻗어서 자다 깨보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주 연재는 토요일까지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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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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