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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3

       

       

       

       

       

       “아무리 우리가 도와주려고 해도, 레키온 본인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실비아는 옐로베리 주스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혹시 레키온 님이 이미 황녀님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나중에 결혼한다고 하셨으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마 아닐 거예요. 레키온은 애초에 아직 황녀님을 제대로 본 적도 없을 거거든요.”

       

       카란트라 제국의 황녀는 총 세 명.

       

       그리고 그중에서 레키온과 결혼하게 되는 황녀는 1황녀다. 

       

       ‘2황녀랑 3황녀는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서 아직 너무 어리기도 하고.’

       

       나도 그냥 꼬꼬마 애들이라고만 들었지 2황녀와 3황녀의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실제로 공식 석상에 나온 적도 없고. 

       

       ‘1황녀도 사실 게임 내에선 모습을 제대로 드러낸 적이 거의 없지.’

       

       레키온이 황녀와 대면하는 건 마왕군과의 전면전에서 두 번이나 연속으로 대승을 거두고 황제의 치하를 받을 때가 아마 처음일 것이다. 

       

       이후로 황실 기사단장까지 직행하고, 분노한 바할라크의 마물 대군을 무찌른 뒤 결국 최후엔 마왕 자체를 처단하고 엔딩에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구럼 서로 막 조아해서 결혼하는 게 아닌 고네?”

       “그 뒤로 황녀랑 사랑에 빠져서 잘 지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결혼 당시에는 어느 한쪽의 구애에 의한 게 아니라 정치적인 요소가 들어간 게 사실이지.”

       

       엔딩 즈음의 용사 레키온은 마왕, 그리고 드래곤까지도 무찌르면서 인류 최강의 무력을 가진 사람으로 공인을 받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

       

       인류최강병기가 만약 카란트라 제국을 배신하거나, 타 국가에 넘어가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제국에 있어서는 엄청난 타격이자 손실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레키온 님이 인류를 위해 싸우는 정의로운 용사라 그 힘으로 타국을 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용사가 제국에 남아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 자체에서 비롯되는 안정감의 차이는 무시할 수가 없지.”

       

       진짜 만에 하나 용사가 갑자기 정의를 내던져 버리고 타락한다고 하면, 그나마 결혼해서 정을 붙인 제국 쪽이 유리하지 않겠는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니까. 

       

       “그리고 특히나 용사가 황녀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경우, 핏줄에서 오는 구속력이 아주 강력하기 때문에 제국 측에서는 무조건 결혼시키는 게 이득이지.”

       

       게다가 인류 최강의 재능을 타고난 용사의 아이라면, 레키온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엄청난 재능을 타고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제국의 영향력은 더더욱 공고해지니, 황제는 레키온과 황녀를 결혼시키는 것이 무조건 이득인 셈.

       

       “구치만 사랑하지두 않는데 겨론을 한다니, 너무 낭마니 업써…. 쀼우….”

       “하하하. 하지만 저어기 높으신 분들 쪽에서는 되게 흔한 일이야. 정략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내가 살던 시대에서야 가문 간의 정략혼 같은 개념이 사라지긴 했지만, 사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시대만 해도 왕실 기반을 다지기 위한 정략혼이 꽤 흔했다고 하니….

       

       ‘뭐, 그쪽 사정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긴 해.’

       

       하지만 아르는 그게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지 안 그래도 빵빵한 볼따구를 부풀렸다. 

       

       “뿌우. 구래두 아르는 조아하는 사람끼리 겨론하는 게 맞다구 생가캐. 레온이랑 실비아 온니두 서로 조아해서 한 고자나. 마찌?”

       “가, 갑자기 나랑 실비아 씨 얘기가 나온다고?”

       

       아르의 말에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실비아도 홀짝이던 옐로베리 주스를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그러자 우리의 반응에 아르의 눈이 오히려 커졌다.

       

       “아니어써…? 아르는 레온이랑 온니랑 서로 조아하는 줄 아랐는데…. 막 아르가 밤에 쉬야 마려워서 화장실 가따 오면 그 사이에 온니가 레온 안구 있는 것두 밨는데….”

       “…응?”

       “…?!”

       

       아르의 폭탄 발언에 나와 실비아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내, 내가 그랬다고, 아르야?”

       

       실비아의 말에 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응. 레온 안구 볼에 뽀뽀도 해써. 그랬더니 레온이 ‘으음…. 아르야, 그만 핥아….’라고 해써.”

       “…….”

       

       실비아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구래서 아르가 대신 온니랑 레온 사이루 파고들어 가서 다시 레온 안구 자써. 히히.”

       

       아르는 헤헤 웃으며 꼬리로 소파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부끄러워하는 실비아에게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실비아 씨. 꿈결에 그럴 수도 있죠. 꿈이야 원래 뭐 다 기상천외하게 흘러가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자 아르가 또 생각났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마따! 레온은 저번에 아르가 손바닥으루 잠잘 때 볼을 만졌는데 잠꼬대루 ‘실비아 씨…. 말랑하고 부드러워요…. 그리고 크기도….’라구….”

       “으아아악!”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아르의 입을 양손으로 텁, 닫았다. 

       

       그리고 실비아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변명했다. 

       

       “하하하하! 아무래도 꿈에서 실비아 씨가 손으로 제 볼을 만졌나 봐요. 실비아 씨 손이 좀 큰 편이긴 하죠. 하하하!”

       “괜찮아요, 레온 씨. 꿈이 뭐 다 기상천외하게 흘러가는 거 아니겠어요?”

       “…….”

       

       나는 한숨을 쉬며 아르의 입을 놓았다. 

       

       “…근데 왜 대답은 안 해조? 설마 안 조아해서 헤어지구 시픈데 아르 때문에 못 그러는 고야…?”

       

       아르는 나와 실비아 씨가 확답을 하지 않자 괜히 자기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데 붙어 있는 거냐며 시무룩해져 고개를 떨구었다. 

       

       “히잉….”

       

       아르의 슬픈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고.

       

       “삐유우우….”

       

       금세 바닥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아르야…?”

       “아르야!”

       

       나와 실비아는 놀라서 황급히 아르 곁으로 와서 등과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응? 울지 말고.”

       “뿌에에엥!!”

       

       하지만 오랜만에 서러움이 폭발한 아르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재빨리 아르를 달랬다.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지금 막 마왕 세력도 있고 해야 할 일도 많고 해서 그렇지, 나중에 일만 다 끝나면 어? 바로 그냥 결혼해야지. 그쵸, 실비아 씨?”

       “그럼요! 저희 둘 다 마음은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냥 결혼식을 따로 하기가 애매해서 그런 거잖아요. 제 용병 신분 문제도 있고.”

       “맞아요. 나중에 레키온이랑 더 친해지고 전혀 문제될 거 없을 때, 아니 문제가 생겨도 덮어버릴 수 있을 때가 되면 정식으로 신고도 할 거니까 진짜 걱정 안 해도 돼, 아르야.”

       “…훌쩍. 진짜루?”

       

       아르는 우리의 말에 눈을 가렸던 젤리를 살짝 치웠다. 

       

       “그럼, 진짜지.”

       “레온 씨랑 나랑은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기로 이미 약속까지 했으니까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아르야.”

       

       어라?

       평생 함께한다는 약속까지 했었나?

       

       뭔가 점점 일이 커지는 것 같은데.

       

       “크흠. 여튼 그러니까 그만 울렴.”

       “…쀼우. 아라써. 진짜루 조아하는 거는 맞는 고지?”

       “그럼.”

       

       우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아르는 눈물을 완전히 그치고 눈을 접으며 웃었다. 

       

       “헤헤, 다행이댜.”

       

       아무래도 자기 때문에 이혼 못 하는 부모님을 보는 아이의 심정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모양.

       

       이렇게 확실히 안심을 시켜 주었으니 이제 괜찮을 듯싶었다. 

       

       ‘그리고 얼떨결에 나랑 실비아 씨 사이도 확실해졌네.’

       

       지금까지는 사람들 앞에서 부부라고 소개하기도 했고, 볼뽀뽀 사건도 있었지만, 언제 어떻게 결혼할 거고, 확실하게 신고도 하겠다까지 입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레키온 데보라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황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아르가 갑자기 직설적인 질문을 하는 바람에 확인시켜 주려고 둘 다 입밖으로 내뱉게 되었다. 

       

       ‘…설마 아르가 이 상황을 설계하고 물어본 건 아니겠지?’

       

       나는 안심한 채 다시 꿀 든 우유 한 병을 꺼내서 꿀꺽꿀꺽 마시는 아르를 바라보았다. 

       

       ‘에이, 설마.’

       

       만약 그렇다고 하면 아르는 벌써 어디까지 영악해졌단 말인가.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원체 머리가 비상하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아르의 울음이 멎었으니, 우리는 다시 삼천포로 빠졌던 화제를 끌고 올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원작에서의 레키온은…. 정의로운 대신 좀 단순하고 정의 이외의 것들에는 좀 둔감한 면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황녀님이랑 결혼할 때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예법을 공부해서 칼 같이 지키는 데에 더 집중했던 것 같고요.”

       “정의 이외의 것들에 둔감하다라….”

       “데보라 님이 레키온을 정말 좋아한다면, 원작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둘이 나눈 대화에서 분명히 힌트가 있었을 거예요.”

       

       레키온이 데보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면 엔딩에서 그따위 대사를 치진 않았을 테니, 레키온은 전혀 데보라의 마음을 몰랐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제 생각이지만, 레키온은 아마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거예요. 저희는 이제부터 그걸 알아내러 갈 거고요.”

       “하지만 레키온 님이 다음 동행은 황실 쪽에 보낸 감정 결과가 나온 이후에 있을 거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때까지 못 기다리죠. 정보를 풀 겁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직 알렉스조차 밝혀내지 못한, 숨겨져 있는 하무트교 지부의 위치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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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Picked Up a Hatch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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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츨링을 주웠다
Status: Ongoing Author:
But this guy is just too c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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