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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3

   EP.183

     

   “그건 안 됩니다.”

     

   성좌의 심장에 칼을 꽂으라는 나의 말에 엔리코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에게는 성좌의 마력이 필요합니다. 성좌가 사망한다면 이 세상을 유지하고 있는 마력이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밤을 밝히는 빛이 사라진다.

     

   저장해 둔 마력이 있었기에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질 일은 없겠지만 무한에 가까웠던 자원이 확연한 유한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엔리코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을 거야.”

     

   나는 엔리코를 바라보며 짙은 마력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희미하고도 작은 마력을 관찰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불안정한 육체. 화신의 격으로 자신의 성좌를 봉인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마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은 양도 꽤 되고 부족하다면 충분해질 때까지 모으면 될 일입니다.”

   “너도 지금 네 몸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버틸 수 있습니다.”

     

   나의 부정적인 반응에 그가 한층 더 절실함을 담아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계속해서 시련과 싸우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세상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는 말하지 않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렇게 똑똑한 녀석이 고집을 피울 만큼 이 세상을 유지하는 성좌의 마력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내가 말했지 성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탑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 겨우 성좌 하나랑 12층의 포탈을 가지고 탑의 규칙을 벗어나겠다고?”

   “그건 모르는 일이 아닙……”

   “아니, 너는 그때까지 못 버텨.”

     

   물론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적적인 방법이 또 존재할지도 몰랐다. 나 또한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우물 안 개구리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하지만 그저 낙천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엔리코에게 시간이 부족했다.

     

   나의 말에 엔리코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진다.

     

   문을 향했다가 마력제어기를 향했다가 다시 나를 향하는 시선. 흔들리는 눈빛과 꽉 다물어진 입을 보니 그가 지금 얼마나 큰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은 탑이 만든 규칙 안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을 찾는 거야. 그리고 나는 그것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고.”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다 방법이 있지.”

     

   사실 엔리코에게 성좌의 심장에 칼을 꽂으라는 말을 하는 순간부터 떠오른 하나의 물건이 있었다.

     

   과거 튜토리얼을 클리어하며 얻었던 특이한 물건. 도대체 어디에 언제 사용해야 할지 고민이 많던 물건이었는데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

     

   척.

     

   “이게 뭡니까?”

     

   내가 그의 눈앞에 꺼내 든 것은 동그란 알약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듯 표면이 올록볼록한 붉은색 주머니였다.

     

   “대답하기 전에 질문 하나 하자. 성좌의 봉인을 풀면 다시 봉인하는 게 가능해?”

   “가능합니다. 물론 과거의 힘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는 지금이니까 가능한 것이지만요.”

     

   그의 대답에 나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예전에 얻었던 건데 이게 도움이 될 거야.”

     

   주머니에서 나온 검은색의 알약 세 개. 그리고 내가 이 물건을 손에 넣었던 당시에 알약의 정보는 이러했다.

     

   —

   [망각의 단]

   종류 : 소모품

   랭크 : A+

   설명 : 복용자의 인과를 조작하는 단약이다. 삼키는 즉시 한 가지 효과가 무작위로 발생한다.

   효과

   – 기억을 24시간 전으로 되돌린다.

   – 상태를 24시간 전으로 되돌린다.

   – ???

   —

     

   복용자의 인과를 조작하는 단약. 나의 계획은 엔리코가 성좌의 심장을 찌른 이후 망각의 단을 성좌에게 먹이는 것이었다.

     

   엔리코가 성좌의 심장을 찌르고 격을 높인다.

   그리고 나는 망각의 단을 먹여 성좌를 살리고 다시 봉인시킨다.

     

   하지만 이 설명을 그대로 적용하자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칠 입장은 되지 못했다.

     

   ‘50% 확률로 세상의 존망을 거는 도박이라니 그냥 미친 짓이지.’

     

   만약 내가 망각의 단을 먹였는데 기억을 잃는 효과가 적용된다면?

   그리고 당황한 내가 한 알을 더 먹이고 오늘따라 재수가 없어서 또 기억을 잃는 효과가 반복 적용된다면?

     

   기회는 3번뿐이다. 그리고 정말 재수가 없다면 망각의 단만 세 알을 다 잃고 성좌가 된 엔리코에게 다시 한 번 노려질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저 물음표 세 개의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라는 말.

     

   —

   효과

   – 기억을 24시간 전으로 되돌린다.

   – 상태를 24시간 전으로 되돌린다.

   – 기억과 상태를 1시간 전으로 되돌린다.

   (단, 성좌는 무조건 3번째 조건이 발동됩니다.)

   —

     

   성좌가 된 이후에 생겨난 새로운 효과였다.

     

   성좌는 기억을 잃고 동시에 시간을 역행한다. 모든 사람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동안 혼자만 1시간의 과거를 거닐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성좌라는 존재가 인과의 뒤틀림을 이겨낼 수 있는 격을 지니고 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좌에게만 적용되는 룰이라는 것과 지금 이 약을 복용할 존재가 성좌라는 사실이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식 밖의 물건입니까?”

     

   현재 세상을 유지할 확실한 가능성을 발견한 것인지 망각의 단을 멍하니 보고 있던 엔리코의 얼굴에 실낱같은 희망이 피어났다.

     

   그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굳게 닫혀 있던 봉인된 문으로 다가간다.

     

   “쓰읍…… 후.”

     

   짧은 심호흡. 세상에 일어날 운명이 걸린 기적이 거대한 철문이 열리며 시작됐다.

     

   쿠구구구……

     

   안쪽으로 열린 문에서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의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그 농도가 얼마나 짙은 것인지 육안으로 마력의 흐름이 보일 지경. 바람 한 점 없는 건물의 내부에서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피부까지 따끔거린다.

     

   “으그극……!”

     

   하지만 성좌인 내가 이정도인데 화신인 엔리코는 죽을 맛일 터.

     

   벌써부터 하얗게 질리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지금까지 세상의 유지니 뭐니 떠들기만 했지 자신이 이 마력의 파도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신기하군.’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에 마력으로 펼쳐진 빛이 내부의 모든 곳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무리의 중심에 있는 무언가.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군.’

     

   이탈리아 출신의 남자라기에 당연히 전형적인 백인이 잠들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지금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번쩍거리는 사람 형상의 빛 덩어리일 뿐,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무언가였다.

     

   저벅… 저벅…

     

   공중에 한 뼘 정도 떠올라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빛 덩어리를 향해 엔리코가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을 떼는데 두어 번의 휘청거림이 있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그것 또한 그가 겪어야 할 시련 중 일부였다.

     

   마력에 의한 충격인지 엔리코의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눈이 붉게 충혈되고 억지로 움직이는 팔과 다리는 사시나무 떨듯 제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불만을 터트리지 않았다.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하는 성격. 왠지 과거의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 괜히 더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스릉. 땡그랑.

     

   그의 품에서 나온 작은 단도. 그 칼집이 떨어지며 작은 소음을 만들어냈지만 그것 또한 마력의 공명에 의해 삽시간에 묻혀 버렸다.

     

   엔리코의 시선이 자신의 주인이었던 빛 덩어리를 향한다. 가까이서 보니 이제야 구분이 되기 시작하는 이목구비.

     

   “죄송합니다. 염치없지만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는 그의 성좌에게 사과했다. 대부의 마지막이 비록 처참한 폭군이라 했을지라도 과거의 그는 자신과 누나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었기에.

     

   엔리코의 단도가 높게 들린다. 그리고 서서히 떨어져 그의 심장에 닿는 그 순간.

     

   타타탓!

     

   나는 망각의 단을 먹이기 위해 성좌에게 접근했다.

     

   쿠화아아악!!!

     

   “크……으윽!”

     

   터져 나오는 격의 폭풍을 직격으로 맞은 엔리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입으로 서서히 흘러나오는 피.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입술을 깨문 것인지 각혈을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그는 탑의 알림을 받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회광반조인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느껴졌다.

   엄청난 마력의 폭발직후 빛을 잃어가기 시작한 성좌와 화신의 격으로 성좌를 죽여 격이 급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한 엔리코.

     

   하지만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이 성좌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파팟!

     

   나는 나와 같은 세계에서 온 이탈리아 출신의 성좌의 입에 망각의 단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혹시나 약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입을 막았고 마력을 주입해 망각의 단을 그의 목구멍 속으로 통과시켰다.

     

   순식간에 흩어지던 마력이 거짓말처럼 모여들기 시작한다. 엔리코 또한 성공적으로 격을 받아들인 것인지 조금씩 호흡이 안정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이게 되네.”

     

   호언장담을 했지만 솔직히 긴가민가했다. 실패를 염두에 두고 계획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확률 싸움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성좌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어했던 엔리코가 어느 순간부터 가만히 그의 성좌를 지켜보고 있었다.

     

   코와 입에서 나왔던 피로 인해 옷이 너저분해졌지만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렇게 이어진 짧은 묵념. 짧은 애도가 끝난 직후 엔리코의 입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이어진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털썩.

     

     

   엔리코의 무릎이 꿇어졌다.

     

   마치 중세의 기사가 충성을 맹세하듯 그의 시선이 바닥을 향하고 있다.

   땅을 향해 내질러진 왼손과 심장이 있을 가슴을 향해 얹어진 오른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어마어마한 예의범절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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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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