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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4

     

    치유사 시연회의 날.

     

    팀원들은 일찍이 간이 수술실 준비를 위해 대기실과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나는 우선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귀빈석 뒤편에 호위기사와 함께 위치했다.

     

    물론, 이 분의 눈치를 보기 위해서였다.

     

    “라스, 혹시라도 연무회에 나갈 생각은 안 하고 있지?”

     

    아셀라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가며 물었다.

     

    “그럼요. 황녀님께서 엄명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설마 제가 중요한 임무도 내팽개치고 명령을 어기려고요.”

     

    순순히 대답하니 마음에 들었는지 아셀라가 샐쭉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톡톡 두드렸다. 새장 속의 애완용 새를 관찰하는 기분인가 보다.

     

    “그래. 지금처럼만 잘 말 듣고 있어.”

     

    “아무렴요.”

     

    아셀라가 유혹하듯 금발을 살랑대고는 자리에 착석했다.

     

    멋대로 명령을 어겨서야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지.

     

    내 의지가 아닌 것처럼 가능한 자연스럽게 자리를 떠야 한다.

     

    다 방법이 있다.

     

     

    잠시 후, 귀빈석의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황제가 들어온 것이었다.

     

    마련된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위엄을 뽐내는 황제.

     

    나는 그의 눈에 띌 수 있도록 슬쩍 몸을 내밀었다.

     

    그래도 시선이 안 오길래 슬쩍 신성력을 피어 올려 앰브로시아에게 튕겨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황제도 마침내 무거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곧 앰브로시아가 내게 콩콩 다가와서는 황명을 전했다.

     

    “폐하께서 뵙자고 하시네.”

     

    계획대로다.

    내가 황제의 앞으로 걸어가니 아셀라의 얼굴에 불안함이 번졌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고트베르크. 자네는 연무회에 참가하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흠. 그래도 충분하겠는가?”

     

    과대평가해주는 건 고맙네.

     

    “본 무대에 오를 의사와 치유사는 모든 주치의의 합의로 결정되었습니다. 제국 내의원의 실력을 아낌없이 보여줄 예정입니다.”

     

    “자신 있나 보군.”

     

    “사실 의학의 설명 정도는 직접 하고 싶습니다만, 주치의로서 임무가 있기에.”

     

    황제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국가 위신이 걸린 자리다. 황궁의 임무는 잠시 뒤로 하라. 설명이 필요하다면 직접 하여라.”

     

    잠시나마 아셀라의 곁에서 떨어질 명분을 얻었다.

     

    “받들겠습니다. 아, 말씀이 나온 김에 괜찮다면 어의님의 협력도 잠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소녀가 필요한가?”

     

    앰브로시아가 언급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자매님만큼 커다란 신성력과 강대한 신성 주문을 가진 분은 저희 내의원에 또 없으니 말이지요. 지난번 같은 작업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30분 정도면 됩니다.”

     

    수술 후 치유작업엔 고위계 치유 주문을 쓸 수 있는 앰브로시아만 한 인재가 없다.

     

    황제가 손가락을 튕겼다.

     

    “앰브로시아, 그대도 다녀와라.”

     

    “받들겠사옵니다. 고트베르크, 소녀가 필요할 때 말해주게.”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오니 아셀라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래서, 뭘 한다고?”

     

    “아, 오늘 수술에 대해 관중에게 설명만 하고 올라오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의학을 이해하기 힘들 테니까요.”

     

    “너, 뭐 다른 꿍꿍이 있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발표만 하고 바로 다시 돌아올게요.”

     

    “아니기만 해 봐.”

     

    아셀라가 매섭게 나를 쏘아붙이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나도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아.

    집도를 하려면 필요하니까.

     

     

     

    타국의 치유주문 시연은 물론 나쁘지 않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왕국, 지저국, 수왕국, 성령국, 어디도 평범한 수준에 그쳤다.

     

    이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국가는 역시 법국이다. 여신교를 국교로 가지는 종교 국가로 대륙 전역에 사제를 파견한다.

     

    ―법국이 자랑하는 사제들을 소개하겠소!

     

    통치자인 교황이 직접 무대에 올라 분위기를 띄웠는데, 고위계 축복을 무더기로 시전해 관중에 뿌리는 물량공세를 보여줬다.

     

    축복은 받으면 체력이나 근력, 마력이 일시적으로 증가하니 일단 기분이 좋아진다.

     

    산소포화도가 높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비타민을 과다섭취하는 느낌이랄까.

     

    대중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는데, 법국은 거기에 한 술을 더 떴다.

     

    사제들이 무대 뒤에서 봉인된 함을 가져온다. 교황이 그것을 열고 안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레 보여주었다.

     

    “저게 뭐지?”

    “고귀하군…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돼.”

    “풀잎… 면류관인가?”

     

    성자의 면류관. 초월급 아티팩트였다.

     

    ‘아마 신성력을 15퍼센트 펌핑해주는 효과였지.’

     

    교황조차 그 물건을 만질 수 없어 투명한 관에 넣은 채로 대중이 볼 수 있게 높이 들어 올렸다.

    신앙심이 완벽한 이가 아니면 쓰는 건 고사하고 만질 수조차 없다.

     

    “저 아티팩트를 가져온 의도는 뻔하군.”

     

    시연회를 관람하던 헤이케가 말했다.

     

    “어차피 용사는 우리 국가에 있으니 두 번째 파츠라도 손에 넣겠다는 소린가? 하하, 마음이 급했나 본데.”

     

    게오르크가 비웃었지만 제국으로서는 경계해야 할 상황이긴 했다.

     

    저걸 쓸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은 성녀로 선택받을 확률이 높고, 그게 법국에 있다면 연합군에서 주도권을 제국과 양분하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무대 뒤에서 법국 소속 여성이 한 명 걸어 나왔다. 쓴 모자 종류를 보니 추기경이었다.

     

    청아한 백발을 가진 걸 보니 상당한 신성력을 보유한 듯했다.

    복장까지 그야말로 틀에 박힌 성녀를 노리고 연출한 느낌이랄까.

     

    여성이 면류관에 손을 가져가니 관중이 조용해지며 긴장감이 높아진다.

     

    천천히 면류관을 집어 머리에 쓰는 여성.

     

    막대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자 객석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상당한 인재로군.”

    “이건 조금 위험하겠어.”

     

    타국의 귀빈들이 수군거렸다. 황제도 경계하는 표정을 보였다.

     

    저 아티팩트를 쓸 정도면 대륙에서 제일 갈 정도의 신앙심과 신성력을 지녔음은 틀림 없었다.

     

    하지만 우리 콩콩이도 어디 가서 꿀릴 스펙은 아니지.

     

    “자매님, 준비되셨는지요.”

     

    “아, 고트베르크 선생. 기다리고 있었소.”

     

    “저만한 시연을 보았으니 꽤 긴장되시겠습니다.”

     

    “소녀가 말이오? 후후, 그림자가 져서 잘 보이지도 않더만. 소녀가 면류관을 썼으면 더 새하얗게 빛나지 않았겠소.”

     

    앰브로시아는 한점 꿀리지 않는 기색으로 평평한 몸을 쭉 뻗었다.

     

     

     

    무대 뒤에서는 출전을 위한 제국 치유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다음, 출발하게나! 절대로 법국에 져서는 안 돼!”

     

    알베리치가 파벌 치유사들을 닦달하며 내보냈다. 월광궁의 순서는 목휘궁 다음이다.

     

    “고트베르크 선생님!”

     

    페르시야 1왕녀였다.

    그녀가 여태 긴장해 있다가 나를 보고 겨우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찾아와 주셨군요. 못 뵈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집도의 없이 수술을 할 순 없잖아요?”

     

    “선생님께서 직접 하시는 게 맞군요? 저는 황녀님 때문에 못 오실 줄 알았어요.”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왕녀를 안심시킨 후 대기실에서 미리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3왕자를 만났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상당히 긴장한 기색이었다.

     

    “왕자님, 오늘 왕자님의 치료를 맡을 제국의 고트베르크 의사입니다.”

     

    꾸벅 나를 향해 인사하는 3왕자, 고든.

    예의가 바른 아이였다.

     

    “걱정하지 마시고 잠깐 푹 주무시면 됩니다. 눈을 뜨셨을 땐 너무 놀라지 마세요.”

     

    “…왜요?”

     

    내가 그의 다리에 손을 얹었다.

    감각이 없는지 왕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시 여기에 느낌이 돌아올 테니까요.”

     

    왕자가 미소와 함께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진난만한 아이다.

     

    공개 수술이 된 건 조금 미안하지만, 그에게는 일생이 걸린 중요한 수술이다.

     

    지금부터는 진중하게 임한다.

     

     

    나는 팀원들을 모아 영상을 띄워놓고 마지막으로 체크에 들어갔다.

     

    “환자의 상태는 척수 손상에 의한 하반신 마비. 요신경 3번이 끊어진 채로 치유주문을 받은 경력이 있어. 운동신경섬유가 재생되지 못한 채로 치유되어서 패스가 막힌 상태. 잔여 감각신경에 의한 환상통 증상도 있음. 다들 여러 번 확인했지?”

     

    전원이 대답한다.

     

    “수술은 간단해. 절개해서 끊어진 신경에 바이패스를 연결하고 닫는다. 끝.”

     

    “봉합 후 치유는 자매님께서 맡아주시는군요. 든든하겠습니다.”

     

    휴고가 치켜세워주자 앰브로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죽은 신경 시냅스를 대체해줄 물질은 이거야. 취급 주의해.”

     

    내가 품에서 병을 내려놓았다. 오늘 수술의 핵심이 될 [원격조종 포션]이다.

     

    가까운 거리의 노출된 물건을 생각으로 움직이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강화]를 통해 반영구적으로 지속시간을 늘렸다.

     

    이걸 끊어진 신경 끝에 각각 발라, 갈 곳을 잃고 있는 뇌의 신호가 다시 하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한다.

     

    약간의 딜레이는 생기겠지만, 실험 결과 재활 치료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라 판단했다.

     

    “그럼 오늘 수술 개요를 발표하고 오겠어. 수술실 준비해둬.”

     

    나는 팀원들에게 마지막 단계를 부탁하고 빛을 향해 걸어나갔다.

     

     

    알베리치 파벌의 시연이 끝난다. 그와 교대하며 무대에 서니 박수가 멎으며 시선이 내게 주목됐다.

     

    스크린에도 얼굴이 나오네.

     

    공연을 시작하는 마술사처럼 크게 허리를 숙이니 백의가 펄럭인다.

     

    “제국 내의원에서 대륙 여러분께 인사 드립니다. 월광궁의 현명한 주인,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3황녀 전하의 주치의, 라스 고트베르크입니다.”

     

    딱, 손가락을 튕기니 스크린에 자료가 표시됐다. 사람의 신체 형상이다.

     

    “오늘 여러분께 보여드리려 물론 신성력도, 치유주문도 준비했습니다만, 조금은 생소한 것도 있습니다. 혹시 의학 들어보신 분? 의술이라도. 아, 거기. 좋아요.”

     

    ―약 잘 먹고 있수다!

     

    관중석에서 누가 외쳤다.

     

    “거기 왕국민 아니십니까? 제가 선생님은 처음 보는데요. 좋습니다. 나중에 사탕 받아가세요.”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어간다.

     

    “치유주문, 축복. 물론 우리에게 없어선 안 될 것이죠. 하지만 때로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 해야 건강할 수 있을지. 몸속이 어떻게 되어있길래 아픈지.”

     

    ―그야 궁금하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흥미를 보이는 군중들.

     

    신호해서 화면을 바꾼다.

    등에 위치한 척추의 투시도가 표시됐다.

    군중이 그 모습을 보고는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 술렁였다.

     

    “뱀이 아닙니다. 앞사람 등을 만져보세요. 신기하게 이렇게 생긴 게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지죠?”

     

    내 말에 수긍하는 군중들.

    나는 준비해두었던 양동이를 들어 바닥에 촥 뿌렸다.

     

    “쉽게 말해 이건 물길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머리에서 온몸으로 뿌려대죠. 그런데, 당연히도.”

     

    내가 흐르는 물 위에 모래주머니를 하나 턱 올려놓았다.

     

    “뭐가 막아버리면 물이 흐르지 못하죠. 생각이 몸으로 전해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등허리를 다치면 다리가 움직이지 않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내 주장을 신기해하며 받아들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건 다리를 다쳐서가 아닌가 의문을 품는 이도 있었다.

     

    ―제국의 주치의여!

     

    쩌렁쩌렁한 목소리.

    황제였다.

     

    ―그대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핵심을 꿰뚫는 좋은 질문이었다.

     

    나는 손뼉을 쳐 시선을 집중시켰다.

     

    “여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환자가 한 분 계십니다.”

     

    드르륵!

    도르래가 구르고 무대의 막이 오른다.

     

    뒤에 가려 있던 간이 수술실과 함께, 3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분은!

    ―왕국의 왕자님 아닌가!

    ―설마 저분의 다리를 고치겠다고?

     

    나는 선언했다.

     

    “여러분께 제국의 내의원을 보여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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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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