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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4

       *

         

         

        -인,간?

         

         

         엘프 형상의 구더기가 웅얼거렸다. 이반은 찔러 들어오는 창을 꺾어내며 도끼를 휘둘렀다. 콰직, 웅얼거리던 엘프의 머리가 터졌다.

         

         형태가 어떻든 이 녀석의 약점은 머리가 아니다. 수많은 마물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하지만, 머리를 잃은 형체가 이내 흩어지며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키이잉—!!

         

         

         그 변화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사선 감지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반은 재빨리 고개를 틀어 뺨을 스치는 화살을 피했다.

         

         정면을 바라보자, 의복을 차려입은 엘프가 시위에 화살을 먹이고 있었다. 화살도, 활도, 복식도 모두 마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뺨이 화끈했다. 분명히 피한다고 피했는데, 그 사이에 화살촉이 아가리를 벌려 그의 뺨 언저리를 물어 뜯었다.

         

         

         “점점 더 정교해지는군.”

         “네?”

         “저 녀석들.”

         

         

         이반은 짧게 대답하고는 도끼를 후려쳤다. 다가오던 엘프 하나가 다시 박살나며 흩어졌다.

         

         조금씩 숨이 차올랐다. 얼마나 싸웠는지, 어떻게 싸웠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마저도 뒤틀려 있는 탓이다.

         

         

         “인,간이 성소에, 왜?”

         “죽,여라. 하등,한—.”

         

         

         엘프들은 멍하니 웅얼거리며 다가왔다. 마구잡이로 덤벼오던 녀석들이 슬슬 ‘기술’을 섞고 있었다. 구더기로 이루어진 병장기를 움켜쥐고서.

         

         

        -카아앙—!!

         

         

         공격이 막힌 것은 처음이다. 이반은 도끼를 막아선 창대가 이빨 달린 아가리를 쩍 벌려 도끼날을 으적거리는 꼴을 지켜보며 빠르게 몸을 틀었다.

         

         콰직, 도끼날이 창대를 으스러트리고, 창을 쥔 엘프를 터트렸다. 질척한 체액이 코트 자락에 쏟아졌다.

         

         이성이 생기고 있다. 이 녀석들에게서, 처음 보는 기술과 기교가 드러나고 있었다.

         

         

         “엘피헤라.”

         “네, 예레모프 경.”

         “저 의복, 알고 있나?”

         “자, 잠시만요. 너무 빨라서. 잠시, 잠시만.”

         

         

         엘피헤라는 코트자락에서 고개를 빼꼼 꺼내고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꿈틀거리는 형체들에 질린 얼굴을 하더니, 차츰 침착하게 눈을 좁혔다.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엄청 오래된 전통 의복이네요. 역시 저것들… 으음. 아니, 여기는 선조들의 숲이 맞는 모양이에요.”

         

         

         엘피헤라의 눈에서 분노가 일렁였다.

         

         

         “이 숲을 더럽히고, 마물의 군체에 선조들의 영혼을 심었어요. 아마도 이 자리에 있던 선조들께서는….”

         

         

         나무가 된 선조들을 죽이고 그 영혼을 뽑아내어 마물 무리에 심었다. 이성이 생기기 시작한 마물들은 게걸스럽게 선조들의 영혼을 씹어먹어 제 살점을 불리고 있었다.

         

         

         “저것들은 네 선조가 아니다. 엘피헤라.”

         “알고 있어요. 마물이 그분들을 삼키고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하지만, 그래도… 이건.”

         

         

         엘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모욕이 될 것이다.

         

         이반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자는 죽어 있어야만 한다. 망자를 다시 걷게 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모욕은 존재하지 않으니.

         

         엘프들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선조들의 숲이었다. 이들은 그 옛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숭고한 전통을 가장 끔찍한 형태로 모욕하고 있었다.

         

         마족을 증오하던 엘프들의 심장부에 칠용장을 만들어내어.

         

         

         “가능성은 보이나?”

         “마법이요? 으음… 제, 제가 무능한 건 아닌데. 진짜에요. 제가 이래봬도 천문학파 역대 최고의 수재 소리를 듣고 그랬거든요.”

         “알고 있다.”

         

         

         네 아비가 네 자랑을 얼마나 하던지.

         

         이반은 더듬거리는 엘피헤라의 머리를 다시 코드자락 안에 넣고는 숨을 골랐다.

         

         

         “천천히 해라.”

         

         

         부족한 것이 시간이라면, 벌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반은 혹한 속에서 서서히 감각이 마모되는 손끝으로, 도끼자루를 단단히 붙잡으며 말을 마쳤다.

         

         엘피헤라는 코트자락 안에서 조그맣게 끄덕이고는, 그의 소매를 꾹 움켜 쥐었다.

         

         

         “한 시간… 아니, 두 시간만 벌어 주세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끝내 볼게요.”

         “음.”

         

         

         엘피헤라는 두꺼운 코트의 틈 사이로 보이는 이반을 살짝 올려보았다.

         

         마물의 체액에 푹 젖어서 번들거리는 피부는, 혹한 속에서 얼어붙어 쩍 갈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마력의 대부분을 그녀에게 돌려 최소한의 체온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그 자신은 점차 얼어 붙어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음에도, 그녀에게 흘러 들어오는 마력엔 흔들림 하나 없이.

         

         적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엘피헤라는 떨리는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시간이 지날수록 놈들도 더 익숙해지고 있는 것일까. 엘프로 의태한 마물의 군집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 한 개체 한 개체가 이제 기술을 사용한다. 창을 찔러대고, 화살을 쏘아대고, 이따금 검을 들고 검격을 나눈다.

         

         이반은 양떼 사이의 사자처럼 놈들 모두를 도륙내고 있었으나, 놈들의 숫자엔 끝이 없었다. 처음엔 열댓 마리, 그 뒤엔 스물에서 서른 언저리로 보이던 놈들이 이제 일백은 족히 넘어 보였다.

         

         시간이 없다. 산술적으로 늘어나는 무한한 적들을 상대로 이반과 그녀 자신의 목숨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법을 회복하는 것.’

         

         

         다행히 이 공간엔 마력이 가득하다. 당장 사용할 수 없는 종류의 마력이지만, 어쨌건 잠재된 연료는 충분하단 소리겠다.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몸의 체질을 바꿔서라도. 이 마력에 최적화 할 수 있는 마법식을 도출해내야 한다.

         

         이론의 영역은 그녀의 전문분야라 하겠다. 엘피헤라는 눈을 꾹 감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앞에 이반이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명상을 시작하면서도, 그녀는 붙잡은 이반의 소매를 놓치 못했다.

         

         

        *

         

         

         하늘에서 공중전함이 추락하고, 마법을 잃은 엘프들이 어둠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혼란 속에서, 가장 적은 피해와 가장 빠른 대처를 보인 곳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베렌덴, 검각이 지배하는 섬.

         

         애초부터 마법학회가 아닌 지역이다. 원래도 마법공학과 거리가 멀던 땅이다. 거기에, 이곳의 지배자는 척안의 아델플라트였다.

         

         칠용장과 맞서 아군의 퇴각 시간을 벌고도 살아 돌아온 전설적인 검사였다. 마력이 한줌 사라졌다 한들, 감히 그녀와 검각을 무시하고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드란힐까지 일반항해로 오는 것은 진짜 오랜만인데.”

         

         

         아델은 폭풍 치는 갑판 위에서 닻줄을 붙잡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성벽처럼 일렁이는 파도를 가르며, 검각의 전함들이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초인의 영역에 진입한 엘프, 그것도 그 기나긴 삶을 오직 검술에만 매진한 엘프 총 7백여 명이 탑승한 11척의 전함이 칼리온 내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

         

         

         “당장 출항이 어렵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정해라, 보기 흉하구나.”

         

         

         아이슬리프는 빽빽 고함치는 딸과 그 일행을 바라보며 피로한 눈가를 꾹 눌렀다.

         

         

         “지금 출항할 여력이 있는 섬이 어디 있겠느냐. 항구 설비 유지조차 허덕이는데.”

         “해상 항해는요!”

         “그걸 할 줄 아는 것들은 대부분 인간들이다.”

         

         

         공중전함의 운용이라면 모르되, 해상 항해라고 한다면 대부분 선원을 인간으로 쓴다. 인건비가 말도 안되게 값싼데다 선상반란의 위험이 없었으니.

         

         중요한 화물은 공중으로 운송한다. 대부분의 무역은 공중전함에 의탁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해상 항해란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배를 끌고 칼리온으로 찾는 경우를 의미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선주를 엘프로 쓸 뿐, 실제 항행은 인간들을 부리곤 했다. 인간은 머릿수가 고블린 만큼 많은 족속들이었으니.

         

         그러므로, 공중전함을 포함한 운송체계가 모두 정지한 이 시점에서, 해상 항해를 할 수 있는 엘프들은 배에 탑승하길 거부하고 있었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인간들에게 포위되고 싶은 게냐? 너무 위험하지 않겠느냐.”

         “이익…!!”

         

         

         마법을 쓸 수 없는 엘프 마법사는 다시 말해, 돈을 많이 들고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섬에서야 권위로 찍어 누를 수 있다지만, 심지어 지금의 사태가 영원하지도 않을 테니 감히 항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바다에선 알게 뭐란 말인가. 그 작달막한 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사고로 위장하고 도망쳐버리면 어떻게 제어할 수 있겠는가.

         

         

         “그럼 이대로 지켜보기만 하시겠다고요? 진심이세요?”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우선 섬을 지키고….”

         “실례지만 한 말씀 올려도 좋겠습니까, 의장님?”

         

         

         아이슬리프는 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사내에게 눈을 돌렸다. 파혼했던 딸의 약혼자, 이스트벨펜 가문의 장자였다.

         

         이스트벨펜이라면 유서 깊은 고위 가문이었다.

         

         오스왈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슬리프에게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의 소란은 일시적일 겁니다. 의장님께서도 아실테지요. 이 사태는 마일스톤의 오작동으로 일어난 재난입니다.”

         “그래, 내 제자들이 지금도 마일스톤에 달라붙어 진땀을 빼고 있다더군. 그래서?”

         “사태의 원인이 확실하며, 사태의 여파가 일시적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엘프 답게 처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오, 엘프 답게라?”

         “해결책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서서 먼 산하를 내려보는 위대한 종족이 아닙니까.”

         

         

         아이슬리프는 이 당돌한 청년의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사태가 끝난 뒤의 일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자네가 하는 말에 자네는 책임을 질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네. 알고 있나?”

         “제 아버지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하여도 저와 의견이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오스왈드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른침을 한번 삼킨 뒤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왕 폐하를 폐위해야 합니다.”

         “이유는?”

         “마일스톤 사태의 원인은 각 가문이 마일스톤을 유용했던 탓입니다. 마일스톤의 관리권한은 왕가에 있으며, 왕실은 율법으로 가문을 봉문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니 책임을 돌리자?”

         “예, 관리 권한이 있다는 이야기는 곧, 관리 부실의 책임 또한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지금 하는 까닭은?”

         “충분히 사려깊은 추밀의원들이라면 지금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소란에 당황한 것일 뿐, 시간 문제입니다.”

         

         

         오스왈드는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아이슬리프를 마주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따라서 가장 먼저 이드란힐에 도달하는 가문이 다음 정부의 상징이 될 겁니다. 여왕을 폐위하고 새 임금을 보위하여 사태를 안정시킨 공로 또한 쟁취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지금 출항해야 한다?”

         “이미 늦었을 수도 있습니다. 의장님. 마법이 사라진 상황에서, 상식적으로 가장 먼저 움직일 수 있는 가문이 어디겠습니까.”

         “…검각이지. 에델플라트 코엔울프의.”

         “예.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챈 가문들은 지금 몸이 달았을 겁니다. 서로 연락이 끊긴 이 시점에서—.”

         

         

         아이슬리프는 짙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만일 추밀원 의회가 다시 열리게 된다면 이드란힐에서 열릴 것이고, 원격으로나마 참가하지도 못한 의원들은 다음 의제의 논의에서 제외될 것이다?”

         “예,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라도 이드란힐로 향해야 할 겁니다.”

         “타당하군. 하하하!!”

         

         

         아이슬리프는 박장대소하며 오스왈드의 등을 두드렸다.

         

         

         “이스트벨펜 가주가 아들을 잘 뒀어. 과연, 어릴 적부터 재기 넘치던 녀석이었지. 내 잠시 잊고 있었네.”

         “과찬이십니다.”

         “사태가 끝난 뒤의 공은 내 따로 계산함세.”

         

         

         아이슬리프는 오스왈드를 치하하고 자리를 떠났다. 느긋하게 방한 대책을 준비하던 엘프들이 제각각 인원을 모집하고 항해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러스트피츠 씨. 진심이에요?”

         “뭐가요?”

         “여왕을 폐위하고 다음 정권을 손에 쥐고… 사태 해결은 하등한 것들의 일이라고 한다거나… 그런, 그, 음. 엘프 같은…? 엘프다운 말이요.”

         

         

         루시아의 눈엔 경악이 어려 있었다. 오스왈드는 그녀가 본 모든 엘프들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로 겸손한 축에 속했기 때문이다.

         

         어떨 때 보면 그냥 엘프 몸을 하고 있는 인간 같을 정도로. 장난기가 좀 있어도 예의 바르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새로운 일면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너무나 엘프다운 정치력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지금까지 일행 모두를 속이고 있었단 말이니까.

         

         그녀의 말에 오스왈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생각을 좀 해봤거든요.”

         “생각이요.”

         “예, 다들 장점이 하나씩 있으시잖아요. 루시아 양은 엔리케 님의 제자고, 룬디스 양은 손재주가 뛰어나고, 엘피헤라 양은 또래 중에 최고죠. 이자벨 양이나 에시디스 양, 오스칼 씨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인재들이고요.”

         “으음… 네, 그런데요?”

         “유진, 그러니까 예니게브는 신의 말씀을 직접 듣고, 유리 양은 천민에 배움이 없어도 기사학부 수석이죠. 아마 검술로는 이자벨 양이나 오스칼 씨도 이기지 못할 겁니다.”

         

         

         모두가 한 가지 이상 도드라지는 재능을 보이고 있다. 서로의 역할을 보완해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위치에서.

         

         그리고 이반은, 그런 일행을 역할에 따라 편성해 파티를 꾸린다. 그런 상황에서 오스왈드, 그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겠는가.

         

         마법은 마인드 소서리 하나에만 치중되어 있다. 전투에 특별히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정작 정보 확보는 차라리 유진의 상태창이나 이반의 ‘포션’이 더 유용했다.

         

         거기에 마법이 사라진 지금 시점에선 어떤가. 엘피헤라는 마법해석에 뛰어났으므로, 이 사태에서 이반과 직접 행동할 수 있었다. 반면 그는?

         

         

         ‘지금 나는 짐이야.’

         

         

         마법을 쓸 줄도 모르고,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문화나 역사에 익숙한 것도 아니며,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두각을 보일 수 없는 그는, 자신의 쓸모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야만 한다.

         

         그가 지닌 차별성은 ‘엘프’라는 것. 그리고 [악역영애가 집착하는 천재 마법사]라는 창작물에 빙의했다는 점.

         

         즉, [악역영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세계의 [악역영애]는 에블린 러스트피츠, 추밀원장의 금지옥엽이다. 그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이상, 그의 역할은 오직 이것 뿐이다.

         

         정치적인 지원.

         

         용사와 그 일행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도록, 그 배후에서.

         

         어떤 경우에도 배신하지 않을 확고한 세력이 되어, 가능한 모든 지원을 투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

         

         그것이 그가 찾은 파티원으로서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데뷔전에 해당한다.

         

         엘프들을 규합하는 것은 대의나 명분, 권위가 아니라 모략과 이윤, 그리고 정치력이었으므로.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이런 겁니다. 별로 보기 좋진 않죠?”

         

         

         오스왈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

         

         

         머릿속에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것만 같다. 엘피헤라는 핏물을 쿨럭이며 마구잡이로 날뛰는 마력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있었다.

         

         마력회로를 개선했다. 아니, 차라리 개악했다고 봐도 좋았다. 엘프의 우월한 마력식에서 벗어나, 마물의 방식을 모방하고 있는 셈이니.

         

         효율이 바닥을 치고 누수되는 마력이 온몸을 헤집는다. 뇌가 뜨겁게 익어가는 기분이다. 외과수술에 가까운 정교함과, 고문에 가까운 고통을 동시에 감내해야 했다.

         

         집중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엘피헤라는 실낱 같은 마력 한 줄기를 뜻대로 움직이는 것에 성공했다.

         

         

         “예레모프 경!! 성공했어요!! 성—”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 공간에선 시간감각마저 뒤틀리고 있었으므로, 엘피헤라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명상에 전념하고 있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가 눈가에 맺힌 핏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을 때.

         

         

         “예레모프… 경…?”

         

         

         반쯤 파먹힌 이반이 그녀를 내려보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대체 얼마나…?”

         “사흘 13시간 21분.”

         

         

         이반은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오른팔은 근육 이곳저곳이 뜯겨나가 흉하게 덜렁거렸고, 등과 가슴엔 찢기고, 베이고, 꿰뚫린 상처가 가득했다.

         

         겉옷은 어디에 갔는지 누더기가 되어 남은 셔츠 사이로 맨살이 보였다. 핏물이 얼어붙어 떨어져나간 자리엔 오래된 모자이크처럼 달라붙은 오랜 흉터들이 빼곡했다.

         

         그 위로 새 상처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말했잖나. 부족한 것이 시간이라면—.”

         

         

         그걸 벌어주는 건 어렵지 않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결국 이런, 몸을 쓰는 일일 뿐이었으니까.

         

         이반은 마력탈진으로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가쁘게 들어 대답했다.

         

         뜯어 먹힌 것처럼 너덜거리는 오른편과 달리, 그의 왼편.

         

         그러니까, 엘피헤라가 붙들고 있던 왼손 소매부터, 팔뚝까지.

         

         엘피헤라가 있는 그 위치를 중심으로, 어떤 부상도 상처도 없던지라.

         

         

         “나, 나… 나아…. 흑. 흐윽….”

         “울지 마라.”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그녀를 지키려 몸의 절반을 움직이지 않아야 했으므로.

         그녀가 동사할까 끊임 없이 마력을 전해줘야 했으므로.

         그리고, 그녀의 집중을 깨트릴까 디딘 발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없었다면 사흘, 아니 그 이상의 시간도 부상 없이 견딜 수 있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으므로.

         

         엘피헤라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이반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흐느꼈다.

         

         

         “자의식 과잉이로군.”

         

         

         이반은 묵묵히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고, 흐느끼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아직 멀쩡한, 체액 한 방울 튀지 않은 소매로 그녀의 눈가를 대충 찍어 닦고는.

         

         

         “네 조상들은 제법이더구나.”

         

         

         그러니까, 지키느라 다친 것이 아니라. 그냥 상대가 강했다고.

         

         그렇게 대답하고는.

         

         

         “엘프 치고는.”

         

         

         농담 섞인 말투로 옅게 웃었다.

         

         엘피헤라는 저도 모르게 이반의 목덜미에 팔을 휘감고 말았다.

         

         마력탈진으로 잠시 균형을 잃은 이반이 살짝 무릎을 굽히자, 까치발을 들어 시선을 맞추고는.

         

         

        -스륵.

         

         

         서로의 코끝에, 서로의 숨결이 섞였다.

         

         

         “나가면 책임져요. 그 얼굴로 그런 말 하는 건 반칙이잖아.”

         

         

         잠시 후, 고개를 떼어낸 엘피헤라는 울먹이며 속삭였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2화 분량을 때려 박았으니 지각 용서해주기.
    (참고) 이반은 김선우 시절을 통틀어 첫키스였다.
    *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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