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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5

    네르는 베르그를 뒤따랐다.

     

     

    당장은 모든게 그녀의 바람대로 풀려가고 있었다.

     

    애초에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베르그에게는 조금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환자들은 단계를 나누어 관리를 해야만 했다. 중증환자와 경증환자가 같은 병실에 있어서는 비효율적이기만 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스탁핀에는 휴식을 취할만한 공간이 사라졌고, 그 결과 베르그의 집…아니, 자신의 원래 집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입맞춤을 하지 말라는 것도 진심이었다. 역병이 어떻게 퍼지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왕국 각지에서 부부가 함께 감염되는 상황이 많이 발견된다 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 네르는 베르그와 성녀의 입맞춤을 금지시킬 수 있었다.

     

     

    그녀도 이렇게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그러할 힘을 주고 있었다.

     

    애초에 베르그와 성녀의 입맞춤은 도무지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참으려고 해보아도 그것만큼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네르는 익숙한 길을 걸으며 베르그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발자국 하나하나가 과거의 추억을 되살려 준다.

     

    울컥해 눈물이 날것 같다가도…또 우울해 눈물을 터트릴것만 같다.

     

     

    하지만 그녀는 수많은 감정들을 진정시키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내 저 멀리서부터 자신의 터전이 보였다.

     

     

    베르그와 함께 망가진 것들을 고쳤던 집.

     

    술에 의존중이었던 베르그를 끌어냈던 것도 그녀였다.

     

     

    방에 굴러다니던 술병들도 전부 치우고.

     

    썩어가던 마루도 뜯어 고치고.

     

    쥐가 나오던 지하실도 청소하고.

     

    벽에 새로이 옻칠도, 가구도 구했던 그녀였다.

     

     

    “…”

     

    그 생각에 네르는 가슴이 옥죄인다.

     

     

    저곳은 자신과 베르그의 집이었다.

     

    부부로서 첫발자국을 내디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이토록 허락을 받아야지만 갈 수 있는 곳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집 앞에는 이미 누군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녀복을 벗고, 마치 시골 촌년처럼 수수한 옷을 입은…..시엔이라는 인족.

     

     

    그녀는 뒤따르는 자신과 라안은 보이지 않는지, 베르그를 보며 환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을 통해 사랑이 보인다고 한다면 바로 저 모습일 것이다.

     

     

    베르그의 곁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분위기가 전해져온다.

     

    그녀는 베르그의 모습에 양손을 벌렸다.

     

    그리고는 빨리 안아달라는 듯, 콩콩 뛰며 그를 재촉했다.

     

     

    앞에서 베르그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의 미소가 다른 여인을 향하니 미칠듯한 질투가 피어오른다.

     

    도무지 티를 내서는 안될 그런 감정이었다.

     

     

    저 자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저 행복도 당장 자신이 누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모두 한 번의 커다란 실수로 날아간 현실이었다.

     

     

    “…하아…”

     

    그 모습을 보는 라안도 곁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네르의 고단한 미래를 보고 있는것처럼.

     

     

    베르그가 사뭇 빨라진 발걸음으로 다가가 시엔을 안아주었다.

     

    -와락!

     

    “기다렸어, 벨…”

     

    “응.”

     

    행복하게 그녀를 들어올려 감정을 교류한다.

     

    이마를 가볍게 서로에게 비빈다.

     

    오랜 눈맞춤을 이어간다.

     

     

    “…”

     

    …네르는 자신의 짝이, 저곳에서 시엔을 안고 있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준 유일한 사람이 다른 여인을 사랑해주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제야 이 모습을 처음보는 것이었다.

     

    베르그가 다른 누군가를 저렇게까지 사랑해주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쓰라림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베르그를 깊이 사랑하는만큼 더더욱 아팠다.

     

     

    자꾸만 그 위치에 있는 자신의 모습마저도 상상하게 된다.

     

    …아마, 저 위치에 아직 남아있었더라면…저 시엔이라는 인족처럼 웃고 있었으리라.

     

     

    베르그와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그를 처음부터 받아들였다면. 그가 제안하는 잠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아름답네.”

     

    곁에서 라안이 속삭였다.

     

     

    아마 어떠한 의도도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두 인족이 서로에게 깊이 빠진 모습은 네르가 보기에도 아름다워보였다.

     

    며칠전 그녀가 벌을 내렸던 바드의 노래처럼… 둘의 사랑이야기는 낭만적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부유했던 인족 소녀와, 가난했던 슬럼의 소년. 끝없는 이별 뒤에도 결국 서로를 향한 마음으로 끝내 결합한 둘이었다.

     

    그런 사랑이야기였기에 전 왕국에 그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는 것일 거다.

     

     

    …그리고 그 노래속에서 네르는 장애물이었다.

     

    네르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평생을 미움을 받다, 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해준 사람이 바로 베르그였다.

     

    그녀에게는 가장 소중하고도 달콤한 기간이, 바로 베르그와 함께한 혼인 생활이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기간이…시엔과 베르그의 사랑 이야기 앞에서는 장애물일 뿐이라 말하는 것이다.

     

    평생을 고통 받아왔는데, 사랑을 받은 그 짧은 순간조차 모두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투둑…

     

    “…어?”

     

    순간적으로 네르는 눈에서 흐른 액체에 놀란다.

     

    라안은 담담히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속삭였다.

     

    “눈물 닦아.”

     

    “…”

     

    “…패배자의 눈물보다 추한게 없으니까.”

     

    “……”

     

     

    네르는 그에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재빨리 눈물을 닦아냈다.

     

    이곳에 눈물을 흘리고자 온 게 아니었다.

     

    그 목표를 상기하며 그녀는 마음을 다잡는다.

     

     

    그녀는 다시 베르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게 어떠한 형태라도 큰 상관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베르그는 시엔과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들의 시선이 옮겨왔다.

     

     

    시엔은 복잡한 표정으로 베르그의 팔을 안은채 다가왔다.

     

    베르그 또한 그다지 편해보이지 않았다.

     

     

    ‘…날 볼 땐 미소를 지어줘, 베르그.’

     

    네르는 스스로도 말이 안된다 생각하는 바람을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네 첫 번째 아내였잖아…’

     

     

    네르는 허리춤에 매달았던 작은 호주머니를 꼭 쥐었다.

     

    그 안에는 벗어놓은 베르그와 자신의 반지가 들어가 있었다.

     

     

    “…자리는 내어드릴 수 있어요.”

     

    시엔이 다가오는 순간 답한 말이다.

     

    “…하지만 괜찮으시겠나요?”

     

    그건 마치 경고 같은 말이었다.

     

    시엔이 자신에게 가진 적대심이 적나라하게 엿보인다.

     

    과거 베르그의 전 아내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네르는 시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똑같이 행동했으니.

     

     

    조금 다른게 있다면, 시엔에게서는 나름의 여유가 보였다는 점이었다.

     

    이미 베르그는 자신의 것이니 어느 정도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이것도 일부다처제가 폐지된 영향일까 싶어지는 그녀였다.

     

     

    시엔이 이어 말했다.

     

    “…당신이 계신다고, 제 행동을 바꿀 생각은 없는데.”

     

    “…”

     

    네르가 집에 머물러도 배려는 하지 않겠다는 말.

     

    사이 좋은 모습을 굳이 숨기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네르는 그 경고가 두렵지 않은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경고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시엔은 돌리고 돌려, 거절의 뜻을 밝힌 것이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굳이 제 집에 입성하지 말아달라는 말인 듯 했다.

     

     

    “…괜찮아요.”

     

    하지만 네르는 그 모든 말에도 물러설 수 없었다.

     

    추해지지만 베르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정말 달리 잘 곳도 없는 걸요…?”

     

    그럼에도 굳이 변명을 내세운 건, 마지막 자존심을 세운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베르그와 시엔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그 말에 시엔은 결국 베르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며, 고개를 끄덕인다.

     

     

    베르그도 시엔의 끄덕임에 결국 집의 문을 열었다.

     

    “…”

     

    네르는 어렵게, 그리고 오랜만에 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

    .

     

     

    집은 달라진게 조금도 없었다.

     

    네르가 그토록 꿈꿔왔던 모습 그대로 모든게 머물러 있다.

     

    그녀가 베르그와 함께 고쳤던 마루도.

     

    그녀가 손톱으로 그려넣었던 낙서도.

     

    집에서 나는 특유의 향기도 모두 일정하다.

     

     

    방은 이후로 쉽게 결정이 되었다.

     

     

    라안은 2층에 남는 방을.

     

    네르는 원래 그녀의 방을 쓰기로 결정이 된다.

     

     

    이후로는 해가 내려앉은만큼, 모두가 모여 식사를 이어가게 되었다.

     

     

    귀족에 대한 대접으로는 맞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라이커는 신생가문이었던만큼 평민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

     

     

    네르는 시엔이 식사를 대접하는 동안 그 모든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둘의 사이 좋은 모습을 곁에서 가만히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맛 한 번 봐봐, 벨. 조금 이상한가…?”

     

    “…난 괜찮은데…다들 괜찮아해줄지는…”

     

    “…벨…!”

     

    “아니…난 너무 맛있지. 그냥…솔직하게 말한거야.”

     

    장난기 넘치는 베르그는 계속해서 시엔을 웃게 만들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네르는 자꾸만 시엔의 모습에 제자신을 대입하고 있었다.

     

     

    귀족의 삶에 비하면 엄청난 거리감이 있는 삶이었지만…저 편이 몇 배는 더 행복해보였다.

     

    네르는 ‘라이커’ 라는 성을 받기 위해서라면, ‘블랙우드’ 라는 이름 뒤에 따라오는 모든 이점을 포기할 수 있었다.

     

    베르그는 이내 장난스럽게 시엔의 얼굴을 붙잡고,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네르에게 간신히 그 속삭임이 울려왔다.

     

    “…입맞추고 싶은데, 조금은 참아야겠네.”

     

     

    -쿵.

     

    그 속삭임에 심장이 내려앉는다.

     

    당연한 것일텐데…현실을 마주할때마다 대못이 가슴을 찍는것만 같았다.

     

     

    정말 베르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해주고 있다는게 익숙해지질 않았다.

     

     

    시엔은 그 표현에 아름답게 웃더니, 음식을 들고 네르와 라안에게 다가왔다.

     

     

    “…식사들 하세요. 차린게 많지 않아 죄송해요.”

     

     

    라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네르를 대신해 답했다.

     

    “괜찮아요. 맛있게 먹을게요.”

     

    차갑고 무뚝뚝한 태도였지만, 라안은 귀족으로서 보여야할 예절을 지키고 있었다.

     

     

    네르도 시엔에게 조용히 감사를 전했다.

     

    베르그와 언제나 입을 맞추고 있는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건, 스스로 너무나도 초라해지는 일이었다.

     

    “…잘…먹을게요.”

     

     

    어색한 분위기속에서 식사는 이어졌다.

     

    하지만 베르그와 시엔만큼은 속삭이듯 자꾸만 서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네르는 둘이 자신의 앞에서 애정표현을 참고 있다는게 대놓고 보였다.

     

    행동양식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그들이었지만, 나름의 배려는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네르는 그게 힘들었다.

     

    상상이 자꾸만 꼬리를 물어 커진다.

     

     

    원래라면 둘은 어떻게 생활할까.

     

    매일 같이 단둘이서 식사를 먹는 느낌은 어떨까.

     

    얼마나 더 사랑이 깊어졌을까.

     

    이렇게 식사를 하다…불타올라 몸정을 나눈적도 있지 않을까.

     

     

    생각할수록 어두워지는 생각들.

     

    네르는 그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때, 베르그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네르 자신이 언제나 힘들어할때면, 저렇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반사적으로 네르는 베르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베르그의 시선은 시엔에게 향해있었다.

     

    “…….”

     

     

    정말 많은게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용한 상황속에서, 시엔이 먼저 수저를 내려놓았다.

     

    베르그가 그에 대해 묻는다.

     

    “…더 먹어. 많이 남았는데.”

     

    “배불러, 벨.”

     

    “더 먹어야지. 그래야 건강하지.”

     

    “…그래도…”

     

    “…걱정되니까 더 먹어줘. 평소의 반도 안먹었잖아.”

     

    “…”

     

    “…시엔…?”

     

    “…냄새가 평소랑 좀 달라서.”

     

     

    동시에, 시엔은 제 입을 가렸다.

     

     

    네르는 그 가벼운 말에 어렴풋이 한 절망적인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

     

     

    어쩌면 베르그가 특히나 시엔의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일지도, 시엔이 식사 내내 힘겨워 보였던게 원인일지도 몰랐다.

     

     

    -땡그랑…

     

    그렇게 네르가 놀라 수저를 놓치자, 모두가 굳어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르는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혹시…”

     

     

    그 의혹에 베르그는 네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별 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드르르륵…!!

     

    네르가 그 긍정에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라안도 그녀의 행동에 놀랐지만, 네르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네르는 급히 변명을 찾아야만 했다.

     

    당장만 해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눈물을 흘릴 것 같았으니.

     

    숨어서 찢어지는 마음을 표출할 곳을 찾아야했다.

     

     

    “나…나도 배가 부르네. 베…베르그. 잘 먹었어. 나 잠시 공기 좀 쐬고 올게.”

     

     

    하지만 모두가 네르의 행동의 원인을 이해하고 있던만큼, 그 누구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

     

     

    네르는 숲에 홀로 숨어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베르그에게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과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베르그는 시엔과의 아이를 먼저 만들어버렸다.

     

     

    이혼 이후, 베르그는 착실히 자신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던 거다.

     

     

    따지고보면 그랬다.

     

    베르그는 언제나 아픔에서 일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대원들을 잃어 자책해도, 막다른 상황에 떨어져도, 형제를 잃어도, 격한 훈련으로 쓰러져도…

     

    결국에는 다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이미 자신과의 이혼도 털어낸채, 새로운 가족을 꾸리고 있던 것이다.

     

     

    같은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아직도 베르그를 놓아주지 못해 이렇게 방황하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도 이미 알았다.

     

    베르그와의 모든게 끝났다는 걸.

     

     

    그녀가 그의 소중한 사람들을 커다란 위험에 빠트리려 했을때부터 끝난 것이었다.

     

    “으흑….흑…”

     

    이미 오래전부터 깨달아야만 했던 사실이었지만…여태 부정해왔을 뿐이다.

     

     

    베르그는 가족을 꾸렸다.

     

    같은 인족끼리, 정상적인 혼인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종간 혼인도 아니었으며, 하프를 낳을 일도 없었다.

     

     

    네르는 이제 그에게 방해였다.

     

     

    그가 아름답고 선한 아내를 만나, 귀여운 딸과 아들을 낳아 살아가는 걸…네르는 이제 멀리서부터 바라보아야만 했다.

     

    다시 또 외톨이가 되어, 그를 놓아주는게 옳은 일이었다.

     

     

    하루 종일 보며 느끼기도 했다.

     

     

    베르그는 행복을 찾았다는 걸.

     

    영주로서는 힘겨워하고 있었지만, 곁에 머무는 아내와 끈끈한 유대감을 만들어냈다.

     

     

    애초에 그 차가운 라안조차 아름다운 가족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네르조차 그들이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걸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사실이 네르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다.

     

    그들이 잘 맞는 쌍이라는 건 안다.

     

    베르그가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안다.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네르는 더 이상 그 어떤 기회도 부여받을 일이 없었다.

     

     

    평생을 그러했듯, 또 외톨이처럼 살아갈 날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끝없이 행복한 미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네르는 손수 그 기회를 발로 차버렸다.

     

     

    그 두렵고 무거운 현실이 그녀를 압박한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오게만 한다.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알았다.

     

    이제는 베르그를 놓아주는게 옳다는 걸.

     

    직접마주하고 보니, 더 확실하게 느껴지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미련이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있다.

     

     

    이토록 눈물을 흘리는 상황속에서도, 머리 한켠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지금 베르그가 찾아와주지 않을까?

     

     

    늦은밤, 이 숲으로 산책을 나오면 언제나 찾으러 왔던 베르그였다.

     

    자신을 구속해주고, 걱정해주던 베르그였다.

     

    당장에도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 희망이 말이 안된다는 걸 깨닫는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설령 베르그가 자신을 정말로 걱정한다 할지라도, 아이를 품은 아내를 두고 떠날 베르그가 아니었다.

     

     

    네르는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하고 집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눈물을 진정시키며…감정을 가라앉힌다.

     

     

    하루 종일 보았던 베르그의 모습을 계속해서 머리로 생각한다.

     

     

    정말 행복해보였다.

     

    계속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베르그는 정말 행복해보였다.

     

    그를 사랑한다면, 놓아주는게 옳았다.

     

    더는 그를 괴롭히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걸 축복해주어야만 했다.

     

     

    “…”

     

    네르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정문이 아닌, 한 창문 옆에 그녀는 조심스레 서 있었다.

     

     

    너무나 깊어버린 밤.

     

    네르는 몰래 창을 통해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어둠속에서도 모든걸 밝게 볼 수 있었다.

     

    네르의 눈은 이내 곤히 잠들어 있는 한 인족 부부를 발견했다.

     

     

    베르그는 언제나 그렇듯 상체를 드러낸채 잠들어 있었다.

     

    네르의 규칙을 충실히 들어주어 복면도 두른 상태였다.

     

     

    그의 옆에는 팔에 누운 시엔의 모습이 보였다.

     

    “…”

     

    이렇게 가볍게 보더라도 아름다운 부부였다.

     

    그보다 어울리는 한쌍을 보지 못했을 정도다.

     

     

    “…놓아…줘야 겠지…?”

     

    네르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포기한 말투로 속삭이고 있었다.

     

    .

    .

    .

     

     

    “…하아…하아…”

     

    하지만 네르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방에 몰래 들어선 이후였다.

     

    “…어…?”

     

    거친 호흡을 이어가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상황을 파악했다.

     

     

    뒤에는 문이 조심스레 열려 있었고, 눈 앞에는 베르그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미 네르는 몰래 안방으로 들어온 이후였다.

     

     

    베르그와 시엔은 서로의 온기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네르의 접근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

     

    하지만 정신을 차린 순간, 모든걸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몰래 침입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연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옳은 행동을 선택하기 위해 베르그를 포기해야한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알았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베르그가 행복해보인다고 하더라도, 네르는 그의 사랑을 원했다.

     

    예전처럼 쓰다듬어지고, 귀여움을 받고 싶었다.

     

    입맞춤을 나누고 싶었고, 성관계를 가져보고 싶었다.

     

    그의 아이를 낳아, 행복에 겨운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상황을 파악한 네르는 눈물이 또 흘렀다.

     

    “…미안해…베르그…”

     

    그녀가 속삭인다.

     

    “…미안해…흐윽…”

     

     

    베르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시에 네르의 눈이 번뜩였다.

     

    “…미안해….하지만….”

     

    발정기마다 쌓이고 쌓였던 성욕이 자꾸만 한 남자를 향했다.

     

    눈 앞에서 풍겨오는 그의 향기를 이제 더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베르그의 복면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말한다.

     

     

    “…하지만 네가 날 이렇게 만든거야.”

     

    동시에 그녀는 베르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그의 아내가 바로 옆에 있었지만, 그의 입술을 훔친다.

     

    그에게는 누구와도 입을 맞추지 말라고 해놓고…그녀는 그의 입술을 빼앗았다.

     

     

    하지만 네르는 이게 잘못된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한참 전에 했어야 할 행위를 드디어 한 것일 뿐이다.

     

    첫 번째 아내는 바로 자신이었으니.

     

     

    …자신의 남편을 다시 취한 것 뿐이었다.

     

     

    네르는 가벼운 입맞춤을 끝내고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입술에 느껴진 베르그의 온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하아….하아…”

     

    그걸 끝으로, 네르는 급히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강렬한 죄책감과….그걸 뒤집는 쾌락이 배덕감과 결합되어 그녀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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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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