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거?
두말할 것도 없이 연구 방해다.
다른 건 몰라도, 공부하고 있는데 시비를 거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다.
“크윽!”
쾅!
친위대의 뚝배기를 차례로 깨부수고 나서야 겨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다.
음, 버멜처럼 때리는 맛은 안 나네.
나는 기절한 친위대의 눈을 살폈다. 스태프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초점 없이 흐리멍덩했다.
“초점이 없네. 세뇌라도 당한 건가?”
“그, 그건…. 그냥 기절해서 그렇게 된 걸 거다.”
“…….”
그런가?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찌할 건가?”
알리온이 물었다.
“일단 숨겨야죠.”
나는 1황자를 찾으러 온 친위대 두 명의 발을 붙잡고 질질 끌었다. 비품실에 넣으면 재료를 꺼낼 때 불편하니 버멜과 밀담을 나누었던 좁은 독방에 가둬놓기로 했다.
“…보기와는 달리 힘이 장사로군.”
알리온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물었다.
“대동제 기간에 발명대회에 나간다고 했지? 발명품은 어디까지 완성했나?”
“거의 다요.”
“마수 상대로 써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그럴걸요?”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렇게 뛰어난 기술로 만든 건 아니거든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작동시켰을 때만 치명타를 먹일 수 있을 겁니다.”
공기 중을 이동하면서 펄스가 감쇠될 우려가 있다. 영거리에서 터뜨리지 않는 이상 제 기능을 다하진 못하겠지.
어쩔 수 없었다. 원리만 대충 챙겨서 급조한 물건이었으니까. 이른 시일 내에 만들어 달라고 한 버멜의 부탁만 아니었더라도 고심해서 더 나은 걸 만들 수 있을 터였다.
“발명대회에 참가할 거라면 소논문 경진대회에도 참여하겠군.”
이번엔 클리온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지도교수는 정했나?”
“정했지.”
소논문은 그냥 내도 되는 논문과는 달리 교신저자로 지도교수를 동행해야 한다.
이 점이 거슬렸다. 나는 이미 플레어까지 낸 독립된 연구자인데, 지도교수가 왜 필요하지?
이해는 안 됐지만 까라면 까야지 뭐. 그래도 꽤나 괜찮은 사람을 담당으로 잡을 수 있었다.
클리온이 물었다.
“혹시 우리 담임인가?”
“헤를라인 선생님은 이미 다른 애들이 채갔더라고.”
“그럼 누구인데?”
“카이뤼삭 교수님.”
인성 좋다고 하니까 논문 날먹당할 일도 없겠지.
그분에게는 ‘알아서 잘할 테니 이름만 올려달라’라고 부탁했다. 이러면 나도 연구 자율성을 보장받아서 좋고, 카이뤼삭도 애꿏게 힘 안 들여서 좋다.
“소논문인가 뭔가는 다 썼나?”
“디스커션 제외하면.”
예술제 전에 대부분 완성해 놓았다. 발명품이 어떤지 특허 형식으로 설명하는 거라서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건 고등학교 다닐 때 해 보기도 했다. 그러니 플레어 연구할 때 고생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그나저나 이거 물어볼 시간이 있어?”
내 시선이 창밖으로 내던져졌다. 1황자를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경비병이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도망가야지.”
“무슨 수로?”
“대동제 기간이니만큼 인파가 보통이 아니다. 로브를 싸매고 사람들에게 섞여 달아나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나쁜 작전은 아니었다.
대동제는 1개월 내내 열리는 틸레트 아카데미의 축제. 교내 학생뿐만 아니라 외부인도 들어와서 즐길 수 있다.
특히 지금은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였으니, 노점에서 파는 떡꼬치를 물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붐볐다.
“최대한 평민처럼 차려입고 나가자.”
두 황자는 입고 온 로브 곳곳에 구멍을 냈다. 안 그래도 누더기였던 로브가 거지나 쓰고 다닐 법한 것으로 바뀌었다.
저래서야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이상 들킬 염려도 없겠지.
두 사람이 채비하는 동안, 나는 비품실에서 남은 재료를 긁어모아 플레어를 만들었다. 오랜만에 하는 식각 작업이었지만,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 예비용. 진짜 아닌 것 같으면 쓰십쇼.”
“고맙다.”
알리온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황가 일원이 일개 노예 출신 금안족에게 이 정도로 예를 취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내가 그만큼 명성을 쌓았거나.
아니면 그 정도로 황가가 급박한 상황에 놓인 것이든가.
“웬만하면 잘 숨겨두세요. 지금 플레어는 제작이고 소지고 죄다 불법이니까.”
“누가 그런 법을 만들었던가?”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형님. 블랜튼 공작이죠.”
“……내가 없는 사이에 많은 걸 장악한 모양이로군.”
알리온은 나라가 망하느니 마느니 하면서 구시렁거리다가 클리온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사태가 끝날 때까지 독방에 갇힌 친위대를 잘 살펴 달라는 부탁을 하고선 말이다.
젠장, 짐덩이를 주고 가다니.
그래도 어쩌겠는가. 여기서 마법을 계속 공부하려면 황실이 건재해야 한다.
내가 저 둘에게 플레어를 급조해서 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험이었다.
나는 담배를 물고 창가에 기댔다. 하늘의 색이 굳기 직전의 시멘트 같았다. 무언가 낌새가 안 좋았다.
재빨리 펄스 생성기의 제작을 마무리 지었다. 작업을 서두른 데에는 달리 이유가 없었다. 단지,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많은 일을 해 두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일을 끝마치고는 프레이를 흔들어 깨웠다.
“야, 꼬맹이. 일어나 봐.”
“으응…. 왜…….”
창밖을 흘겨보던 내 눈가에 불안한 감정이 스미었다.
“바깥 상황이 뭔가 이상해. 잠깐 나가보자.”
그때였다.
“1황자가 폐하를 시해하고 도망쳤다─!!”
창밖 너머로 웬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이는 범을 만난 토끼처럼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눈을 멀뚱거리더니, 소리가 재차 나는 방향으로 헐레벌떡 걸어갔다.
창밖을 내다본 프레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뭐야, 저거 다 황궁에서 나온 마도사들 아니야?”
“맞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마치 프레이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바깥의 누군가가 제국 황제의 붕어 소식을 전해왔다. 프레이는 아빠가 산타클로스라는 걸 알게 된 아이처럼 경악성을 내질렀다.
“이, 이건 꿈이야!”
짝! 프레이가 제 뺨을 때렸다.
“꿈 아니야.”
“황제가 죽어? 완전 뜬금없잖아!”
“찌라시일 수도 있지.”
진짜 죽었다면 나라 망할 징조고.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
“그, 그게 좋겠다!”
무슨 일인지 알려면 빙의자부터 찾아야 한다. 그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도 빠른 방법이다.
평소보다 유동인구가 많아서 이동이 지체됐다. 대동제 때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1황자가 풀려나 황제를 독살했다’ 따위의 루머가 떠돌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궁정 기사단을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슨 일이래?”
여기저기서 그런 소리가 빗발쳤다. 부모 손을 잡고 나들이를 나온 몇몇 꼬마들이 어수선한 분위기에 울음을 터뜨렸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불길한 징후라고.
빨리 버멜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교환학생으로 온 엘프가 버멜만 있었으면 몰라, 중앙 광장에 귀쟁이가 하도 많아서 구별이 안 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로멜’이란 이름으로 활동 중인 녀석의 이름을 쉽게 부를 순 없었다. ‘로멜’이라 말하면 로즈마리나 블랜튼이 눈치챌 수 있었고, ‘버멜’이라고 소리쳐도 말짱 도루묵이다.
“김성현 나와!!”
그렇게 몇 번 땍땍거리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한 키 큰 엘프가 인파를 뚫고 나타났다. 그 곁에는 에리카, 메릴다, 제롯도 있었다.
버멜과 나는 서로 처음 만난 것처럼 연기했다.
“지붕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대피해야 할 것 같아.”
“왜?”
“조만간 비가 올지도 모르거든.”
‘대피’라. 단순히 비가 오는데 대피라는 표현을 쓰진 않을 텐데.
“뭐 산성비라도 내리냐?”
“그런 셈이지.”
그때 메릴다와 에리카가 대화를 끊고 들어왔다.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요.”
“우리뿐만이 아니야. 다른 엘프들한테도 물어봤는데, 다들 고위 마수의 조짐이 느껴진다고 말했어.”
속으로 뜨끔했지만 태연한 척 연기했다.
어차피, 이거 나 아닐 거 아니야.
“내가 선생님들을 불러올게.”
버멜은 그리 말하고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만났을 때부터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계속 뛰어다녔던 모양이다.
– 내게도 정령이 있었다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문득 녀석이 병실에서 했던 푸념이 떠올랐다.
정령이 없어서 저렇게 뭐 빠지게 돌아다니는 게 아닐까.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저 녀석은 나보다 이 세상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니까.
– 지붕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대피해야 할 것 같아.
그래, 우선 버멜이 남기고 간 과제부터 처리하자.
“아?”
나는 프레이를 번쩍 들어서 목마를 태웠다. 프레이는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더니 곧 중심을 잡았다.
내가 말했다.
“헤를라인 선생님 좀 찾아봐.”
**
같은 시각, 황궁.
로즈마리는 아카데미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계획을 점검했다. 그녀의 입가에 광기 어린 조소가 걸렸다.
‘완벽해, 너무나도 완벽하단 말이야!’
로즈마리가 킬킬 웃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곳에는 덕트 테이프로 입이 막인 황제, 옐친 필리우트가 있었다.
“읍, 으읍…!”
“포승줄에 꽁꽁 묶인 황제라니, 이거 완전 진풍경인데!”
그의 머리 위로는 바이올린 현이 덧대어져 있었다. 바이올린 현은 로즈마리가 사용하는 스태프다. 아직 죽은 건 아니지만,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아. 모든 점검은 끝났어.’
에테르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로즈마리는 몇 가지 책략을 강구했다.
언니가 플레어를 소형화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로베스피에르 후작에게 넘기겠다는 계약을 했다는 건 심어놓은 스파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언니는 계약을 중요하게 여겨.’
틀림없이 연구자금 대가로 성사시킨 계약이다. 분명 언니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소형화된 플레어를 지급했을 터. 그 정도쯤은 스코프를 켜지 못해도 추론할 수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10년 전부터 자신을 죽이려고 벼르던 인간이었다. 마땅한 수단이 없어 손가락만 빨고 있었을 뿐, 암살용 무기가 생긴 지금이라면 틀림없이 황궁으로 올 것이다.
물론 아카데미에서 선동 중인 블랜튼을 먼저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미 이쪽으로 어그로를 끌 대책까지 마련해 놓은 뒤였다.
“읍, 읍, 읍!”
바로 여기 있는 황제.
1황자가 황제를 죽였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로베스피에르는 반드시 온다.
그간 수많은 인간을 보아온 로즈마리였다. 그가 오는 건 확실하다. 그녀의 감각이 확신에 확신을 더하고 있었다.
‘와라.’
로즈마리가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다음 순간이었다.
콰앙!
“간악한 마수년아, 여신의 철퇴를 받아라!”
그녀의 입가가 입을 찢을 기세로 올라간다.
“이거, 설마 수십 명씩 떼거리로 몰려올 줄이야.”
청명했던 로즈마리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물든다. 로드스톤이 틸레트에 들어온 이상 더는 마수라는 걸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 금안족….”
“네년, 금안족이었나!”
토파즈처럼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모두가 당황하는 사이.
로즈마리는 황제를 치워버린 뒤 바이올린 현을 쳐들며 요격 태세를 갖추었다.
“아무튼, 로즈마리 블랜튼. 넌 여기서 끝이다.”
“십 년간 제국을 농간한 죄, 네년의 수급으로 갚아라!”
로베스피에르는 뜻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수십 명의 마도사들과 함께 로즈마리를 원형으로 둘러쌌다.
척, 척, 척!
레이저 포인터처럼 작은 원통형 스크롤이 그녀의 몸 곳곳에 조준된다. 희끄무레한 실선들이 사지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즈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어댔다.
“꺄하하하! 개빡대가리 새끼들! 감쪽같이 걸렸구나! 안됐지만 그런 걸 조준해 봤자 이미 늦었어…. 이렇게 될 줄 알고 마왕성에서 반응장갑을 두르고 왔거든! 그깟 플레어로는 유격대 총사령관인 이 몸을 막을 수가……!”
그때였다.
“쳐라─!!”
피익! 피익! 피익!
빛살이 허공을 갈라냈다. 쿠쿠쿵! 맹렬한 섬광이 황성 첨탑을 양단한다.
수십 줄기의 번갯불이 내쏘아진다. 그야말로 일섬(一閃)의 연속.
다음 순간, 무형무색의 빛무리가 로즈마리의 시선을 부침개 뒤집듯이 뒤집어 놓았다.
“…아, 아?”
팔다리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반응은 조금 늦었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핏물이 목울대를 적시기 시작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로즈마리가 힘겹게 사고를 이어나갔다.
‘이, 이건…….’
큰일났다.
자신이 맞은 건 플레어 따위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