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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5

       *

         

         

         이반은 아무 말 없이 엘피헤라를 내려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을 피해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이반의 가슴을 콩, 쳤다.

         

         

         “뭐, 뭘 봐요!”

         “책임소재가 내게 있는지에 대해 고민 중이었다.”

         “진, 진짜 미친 사람인가봐!! 그, 그럼 책임 안, 안, 안 지려고 했어요?!”

         “보통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나 싶어서.”

         “나, 나는 첫, 첫키스였거든요! 다, 당신이 가져간 거라고!”

         “나라고 다르진 않은데.”

         “…!!”

         

         

         엘피헤라의 귀가 미친듯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발끝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한 차례 깨물었다.

         

         

         “그, 그럼… 어… 음. 어… 하, 한번 더 할래요? 그, 그냥 확인 삼아서?”

         “지금 그런 대화를 할 때가 아니지.”

         

         

         이반은 엘피헤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복잡한 문제였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사실 지금으로서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가 아닌가.

         

         이반은 턱짓으로 지평선을 가리켰다.

         

         

         “으음… 시체가 없네요…?”

         “그리고 저걸 봐라.”

         “저거…? 뭐요? 산?”

         “시선을 조금 더 높게.”

         

         

         주위엔 체액만 이리저리 흩어져 사흘 간의 전투를 증명할 뿐, 정작 시체라고 할만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구더기와 거머리 따위로 이루어졌던 엘프 형상의 마물들은 이미 시야에서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반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들리자, 지평선에 희미한 풍광으로 우뚝 솟아 있는 눈 덮인 산맥 뿐—.

         

         

         “시선을…? 엑—.”

         “그래. 저거.”

         

         

         산의 능선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어두운 밤하늘 아래로 희미한 윤곽이 드러났다.

         

         그건, 꼭 마치.

         

         

         “나무…?”

         “네 선조들을 죽이는 동안에도 점점 거대해지더군. 다 자란 모양인지 성장이 멈췄다.”

         “그럼, 그, 그럼 저게…?”

         “그래.”

         

         

         이반은 더듬거리는 엘피헤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대의 칠용장이다.”

         

         

         엘피헤라는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구름을 찢으며 자라난 거대한 나무가, 텅 빈 가지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이반이 죽인 구더기들이 모조리 몰려가 들러 붙은. 마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나무… 왜 하필 나무일까.

         

         그녀는 반사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저것은 마일스톤을 뒤틀어 창조한 존재다. 아니, 뒤틀린 마일스톤이 자의식을 갖추며 활동을 시작한. 마일스톤 그 자체다.

         

         엘프가 창조한 그들만의 신이, 마물이라는 숭배자를 만나 형상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저것의 방향성은 옛 엘프들의 문화를 모방했다.

         

         죽어 숲이 된 엘프들의 영혼을 포식하며 생장한 저것의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세계수….”

         

         

         엘피헤라는 탄식했다.

         

         만년간 칼리온이 유예한 겨울, 만년간 칼리온에 퇴적된 세월. 그것이 악의를 지니며 칼리온을 굽어보는 이 순간.

         

         마력을 되찾은 엘피헤라가 거대한 나뭇가지 위로 시선을 올렸다.

         

         짙은 구름을 찢어발기며 자라난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붉은 별들이 번뜩이는 하늘이다. 천문학파 수장의 딸로서, 그녀 또한 천문을 읽는 것에 소양이 있었으므로.

         

         하늘 가득 펼쳐진, 악의 가득한 은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만년의 겨울(Senas-gaimrú)….”

         

         

         눈에 닿는 모든 하늘이 흉(凶)하다. 그 하늘을 후광처럼 등에 업고 그녀를 내려보는 영혼 또한 흉했다.

         

         그 압도적인 천기 아래에서, 엘피헤라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저것이 살아있는 이상, 엘프에게 미래란 없다.

         

         엘프의 일원으로서 생존본능의 영역에서 깨닫고 마는 것이다.

         

         너희 족속을 잡아먹고, 영원히 번영하리라. 엘프에 의해 창조된, 엘프의 영혼을 갉아 먹으며 자라난 신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으으… 아….”

         

         

         엘피헤라의 눈에서 핏물이 흘렀다. 그녀는 쿨럭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녀의 머리칼 위에 손이 얹어졌다.

         

         따듯하다. 엘피헤라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자, 이반이 그녀의 눈 앞을 가리고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꼿꼿하게,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고개를 숙이지 마라. 엘피헤라. 적어도 너는, 신을 마주해도 절망해선 안 되는 자리에 있다.”

         “예, 예레모프 경.”

         “그러니 정면을 보아라. 그 시절, 네 선배들은 저런 것들을 상대하며 살아갔다.”

         

         

         이반은 엘피헤라를 슬쩍 밀었다. 당대 용사 파티의 선배 된 입장에서, 그리고 당대의 척후가 된 입장에서. 그는 언제나 앞길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었다.

         

         피로하다. 당연한 일이다. 사흘을 내리 싸웠다. 그것도 회피기동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방어에 치중하며.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다면 허기와 갈증 같은 생명반응이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싸워도, 지칠지언정 체력이 고갈되진 않았다.

         

         이 세계의 힘인가? 저, 아직 의식 없이 성장만 반복하는 기괴한 칠용장의 권능인가?

         

         본디 훌륭한 요원이라면, 해결할 수 없는 의문에 매몰되지 않는 법이다. 이반은 현실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차라리 해결법을 찾기로 했다.

         

         

         “이따금 절망이 하늘을 가리고 있노라면.”

         

         

         한쪽 발은 뒤로 뻗어 균형을 맞추고. 다른 발은 정면, 대지를 딛고.

         

         으드득, 신경을 끊어내는 저릿한 감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제거한다. 그로인해 강화되는 것은 온전히 시간감각.

         

         공간이 도해된다. 시간이 분절한다. 초와 초, 그 사이의 간극을 격하며, 하늘에서 나리는 눈송이가 대기 중에 박제된 듯 느릿하게 멈췄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느껴지지 않는다. 마력의 흐름마저 숨을 삼켰다. 저 존재의 악의마저도,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세상에 쏟아지는 악의조차도 마찬가지로.

         

         오직 고요함. 그것만이 진실되게 남아 있으니.

         

         일그러진 겨울, 만년 만에 해방된 유폐되어 있던 겨울이, 고요 속에서 정지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도끼가 유영한다.

         

         

        -키이잉….

         

         

         도끼자루를 쥔 손엔 감각이 없다. 괴사 직전까지 몰린 오른팔, 힘이 부족할 경우를 대비해 왼손으로 지탱하며 뒤로.

         

         기억하는 자세는 하나다.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최강의 일격.

         

         절망 속에서 희망을 위해 뻗어 나갔던, 그 순간의 궤적을.

         

         용사 파티는 절망할 수 없다. 절망해선 안 된다. 그들의 의무는 인류의 희망이었으므로. 그들에겐 포기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니 절망이 하늘을 뒤덮고 인류를 삼키던 그 시절에, 용사 파티는 차라리—

         

         

         “구름을 베었다.”

         

         

         막시밀리앙의, 하늘 가르기.

         

        -콰직.

         

         

         섬전과 함께, 시간이 흐른다.

         

         하늘이 붉게 빛났다. 구름이 찢겨 나간다. 엘피헤라의 눈엔 여전히 흉한 천기 뿐이었으나, 그럼에도 일어서 무릎 꿇지 않으며,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

         

         

        -콰지지지지직!!!

         

         

         다시 한 번의 일격이 인지의 틈 사이를 파고들어 구름을 찢고, 하늘을 할퀴어—

         

         

        -콰아아아앙—!!!

         

         

         구름을 꿰뚫고 선 나뭇가지가 낙하했다.

         

         

         “저, 저걸… 베었다고요…?”

         

         

         엘피헤라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을 받고서도, 이반은 아무 말 없이 선 자세로 잔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강대한 일격에도 흔들림 없이, 그저 평범한 일을 일상적으로 마쳤다는 태도로 서서.

         

         그래, 그랬지.

         

         이 시대에, 우리 아버지들을 제외한다면. 그러니까, 용사와 그 일행들을 제외한다면.

         

         지금 그녀의 눈 앞에 선 사내는, 유일하게 칠용장을 죽이고 살아 돌아왔었더란다.

         

         

         “마법을 쓸 수 있겠나.”

         “네, 네, 예레모프 경. 쓸 수 있어요.”

         “이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겠나.”

         “탈출이요…? 아, 네네. 가능,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그들을 이 공간에 던져 넣은 것은 ‘저것’의 권능이었지만, 그 권능의 일부를 조작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이론상 탈출을 시도할 수는 있겠다.

         

         다행이군.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을 하달 하겠다.”

         “작전이요…. 네, 네.”

         “최종 목표는 ‘저것’의 구축. 당면 과제는 생존과 탈출. 차후 과제는 엘프 병력을 규합한 후 ‘네 방식’을 보급. 이후 엘프 병력의 전력화다.”

         

         

         이반은 엘피헤라를 바라보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대전략은 엘프의 구원. 최소조건은 칼리온에 차기 정권을 수립.”

         “그, 그걸 왜….”

         

         

         그걸 왜 지금 이 순간에 말하고 있단 말인가. 엘피헤라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지금 하는 말 모두, 함께 나가면 그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반은 여전히 엘피헤라를 바라보지 않았다.

         

         

         “누군가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준비가 끝나기 전에, 저것이 이 공간을 벗어나면 곤란하니까.”

         “…네?”

         

         

         차라리 잘못 들었길 바라며 물었으나, 이반은 여전히 묵묵히 서 있었다.

         

         

         “가라.”

         “예레모프 경, 하지만!!”

         “해본 적 있다. 가라.”

         

         

         이반은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힘없이 늘어진 오른팔을 대충 묶어 몸에 고정시키고, 절룩거리는 다리로 앞으로 걸었다.

         

         엘피헤라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팔을 뻗었다가, 곧 다시 팔을 내리고 말았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고, 그녀가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서로가,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처리해야만 하니까.

         

         그러니, 그의 판단을 존중한다면, 그의 판단대로 행동해야만 하니까.

         

         

        -파지직!!

         

         

         마력이 그녀의 손에 휘감겼다.

         

         

        *

         

         

         나이트에 짓밟힌 폰이 구더기처럼 터져나가 퀸의 주위를 감쌌다.

         

         퀸이 나이트를 바라보고 있다. 다음 한 수에 나이트가 죽는다. 판이 무너진다.

         

         저 멀리, 백색 폰들이 모여들고 있지만 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이다.

         

         게임판 너머의 어둠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웃는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베올그린은 잠시 기물을 만지작거리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포기하는 건가?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텅빈 어둠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어떤 ‘의지’의 물음에, 베올그린은 고개를 저었다.

         

         

         “다음 수를 착수해야지.”

         

        -다음 수가 남았나?

         

         “아무렴.”

         

         

         베올그린은 만지던 기물을 내려놓았다. 전혀 다른 방향, 전혀 걸맞지 않은 착수다.

         

         비숍이 서있었다. 킹을 향해서.

         

         

        -이건 규칙에 어긋나는데.

         

         “이제부터 이게 우리의 규칙일세.”

         

        -감히 네가 규칙을 강제하겠다고?

         

         “필멸의 세상에서 놀고 싶다면, 필멸자들의 규칙을 따라야지.”

         

         

         베올그린은 어둠 속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신은 본디 자신의 신도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는다. 그 변덕에 따라, 때때로 손을 뻗어줄 뿐.

         

         그렇다면 뻗은 손을 붙잡아, 끌어내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릇이 완성되었다면, 그 위에 담아 채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베올그린은 붙잡힌 손을 단단히 움켜쥐고. 힘껏 끌어당겨서—.

         

         

         “신들의 세상은 신들에게로. 사람의 세상은 사람에게로.”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티끌은 티끌로.

         

         

         “그러니 사람의 세상에 선다면, 신은 더 이상 신이라 불릴 수 없을 걸세.”

         

         

         신화 시대를 거쳐 문명의 시대가 시작되며, 지상을 거닐던 신들은 자취를 감췄다.

         

         먼 옛날, 한 종교가 있어 신들을 사냥했다고 전해진다. 방법도, 역사도 남아있지 않지만. 머나먼 과거의 유적들은 여전히 지반 아래에 도사리고 있으니.

         

         지상에 떨어진 신은 필멸자의 규칙을 따른다. 그리고 필멸자에게 부여된 유일한 규칙은 ‘필멸성’이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티끌은 티끌로.

         

         신의 세상은 신에게로. 사람의 세상은 사람에게로.

         

         

         “신들의 변덕이 더 이상 지상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을걸세.”

         

         

         붙잡힌 손을 끌어 당기며.

         

         

         “마침내, 세상은 비로소 자유롭겠지.”

         

         

         이것이, 하늘 위의 신을 죽일 유일한 방법이다.

         

         

        *

         

         

         “오로라…?”

         

         

         항해하던 엘프들은, 거친 폭풍 위로 펼쳐진 새파란 장막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이드란힐의 창공 위로, 거대한 오로라가 펼쳐지고 있었다.

         

         극광 아래에서, 얼어붙은 바다 위에서, 이드란힐 전역을 뒤덮는 거대한 나무의 실루엣이 일렁였다.

         

       

       

         

        Ep 28. 만년의 겨울, 세나스게오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정답은 다크소울식 작명이었습니다!

    xx의 xx, yy

    엘든링 너무 재밋서..

    *
    정리하자면.

    엘프 학회들 : 마일스톤을 조작해 학회의 비전을 완성하려 시도함.

    알렉산드르 : 그걸 탈취해 칠용장을 직접 생산하려 시도함.

    베올그린 : 만들어진 칠용장을 탈취해, 신을 빙의시켜 제거하려 시도함.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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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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