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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6

       휴게실에 홀로 앉아 강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을 자축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카렌이 들이닥쳤다.

       그녀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그것은 이번 신입생 환영회의 파트너 초대장이었다.

       심지어 초대자 성명에는 마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야 양의 것을 왜 당신이……?”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폭풍처럼 말을 쏟아냈다.

         

       “옆에서 지켜보기 하도 답답해서 말이죠. 마야가 단장님이랑 얼마나 가고 싶어 했는지 아세요? 이번에는 마야에게도 좀 베풀어주세요! 엘라는 그렇게 아끼고 돌면서……. 심지어 잠시 있다간 레이나도 그렇게 챙겨줬다면서요? 그런데 마야에게는 왜 그렇게 차갑게 구세요?”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던진 마지막 한 마디가 유난히 귀에 맴돌았다.

         

       내가 마야에게 차갑게 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녀의 말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마야의 독립적인 성향을 아는 나는 굳이 그녀에게 다른 단원 이상의 관심을 쏟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그녀가 그것을 귀찮게 여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카렌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야가 그것을 그동안 섭섭하게 여겼다는 말이 됐다.

         

       “마야 양이 당신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나요?”

       “아뇨. 걔가 어디 그런 성격이에요? 하지만 말하는 것을 듣다 보면 느낄 수 있어요.”

       “……그런가요?”

         

       지금의 마야가 2년 뒤의 그녀보다 아직 순진하고 아이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통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아서 그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단원 중 단원 퀘스트 발동 횟수도 제일 적었다.

       심지어 최근 합류한 레이나와 가스통에게도 며칠 만에 추월당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증거였다.

         

       마야가 나에게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바랐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서커스단에 합류하는 시점에 딱 한 번 요청했었고, 나는 그걸 거절했다.

       나는 그녀에게 더 가르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그녀는 내게 다시는 같은 요구를 하지 않았고, 단원 퀘스트 역시 뜨지 않았다.

         

       그러나 카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녀는 계속 그것을 마음속으로 바랐던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 17살이었다.

       의지할 어른이 필요한 나이이긴 했다.

       원작에서는 은막 서커스 단장인 ‘은막 아르노’가 그 역할을 해줬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미래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동일시해버리면서, 그녀가 다 자란 어른인 것처럼 대해버렸다.

         

       이건 분명 나의 실수였다.

         

       나는 이제 마야가 엘라보다 얼마나 예쁜지 열변을 토하고 있는 카렌을 바라보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을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다니.

       마야는 학교에 와서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정말 ‘친구’의 자리에 만족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럼 마야 양을 제가 파트너로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정말요? 하지만 카렌 양은 마야 양을 좋아하잖아요.”

         

       내 말에 카렌은 표정을 잠시 굳혔다가 풀었다.

         

       “그, 조, 좋아하죠. 친구니까…….”

         

       나는 당황하는 그녀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던졌다.

         

       “자는 마야 양의 볼에 키스하려 했잖아요?”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카렌 양에게 말을 걸기 1분 정도 전에 강의실에 들어와 있었어요.”

       “아…….”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

       

       “마, 마야한테……얘기할 건가요……?”

       “사정에 따라서 다르겠죠.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카렌 양은 마야 양을 사랑하는 건가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 속에서 자랐다는 것.

       그 때문에 여성에 대한 흥미가 많았다는 것.

       처음 어울린 또래 여자애들에게 과하게 신체적 접촉을 했다가 ‘이상한 애’로 찍혀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

       그래서 여자애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됐는데 무감정한 마야에게서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오늘이 무슨 날인가 했다.

       자살 청소년 상담에 이어 성적 지향에 혼란을 겪는 청소년의 상담을 하다니.

         

       “그런 의도로 마야 양에게 접근한 겁니까? 지금까지 속였군요. 친구를.”

       “그,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 앞에서는 확실히 사람이 비겁해지더라고요…….”

         

       편안하게 얘기를 털어놓던 그녀는 다시 추궁당할 부분에 들어서자 말을 돌리려고 했다.

         

       “초대장. 그래서……안 받아주실 거예요?”

       “카렌 양.”

       “엘라보다 쟤가 더 낫지 않나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곧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단장님 같은 남자를 좋아해요. 여자로서.”

         

       그때, 밖에서 쿵 하고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문을 열고 나가 강의실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무대 구석에 쌓여있던 기자재들이 쓰러지면서 난 소리인 듯했다.

         

       나는 문을 닫고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다.

       카렌은 내가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자꾸 여성적인 것에도 심장이 두근거려요. 제가 뭔가 잘못된 건가요?”

         

       나는 그녀가 해준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검토해보았다.

       내 지식에 비쳐 봤을 때, 그녀는 여자를 좋아한다기보다 성장기에 경험하지 못했던 여성성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가진 것일 확률이 높았다.

         

       내 결론을 들은 카렌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하지만 잘 때 몰래 키스하려 드는 건 아니죠. 만약 아까 당신의 입술이 마야 양의 뺨에 닿았다면, 저는 즉시 당신을 제압했을 겁니다.”

       “윽, 그, 그건 죄, 죄송해요……. 그래도 결국 안 했잖아요…….”

       “그건 잘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고, 곧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이제 마야를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덕분에 마야 양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마야의 초대장은 받아주실 건가요?”

       “마야 양이 직접 건네면요.”

         

       나는 초대장을 카렌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이제 가봐야 할 시간이군요. 단검 투척 실습이 있잖아요.”

       “아, 저는 조금 있다 갈게요. 좀 씻고…….”

         

       그녀의 얼굴은 식은땀과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방을 나왔다.

         

         

       ***

         

         

       오늘은 단검 투척 실습 기초 과정의 평가가 있는 날이었다.

       앞번호부터 차례대로 불려 나가 과제를 치렀고, 아직 평가를 치르지 않은 아이들은 뒤에서 마지막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야는 연습에 참여하지 않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그녀가 워낙 실력이 뛰어나서 연습조차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오해였다.

       마야는 지금 연습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제멋대로 날뛰려는 마력을 가라앉히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파피락스가 다시 그녀를 엄습했다.

         

       그만큼 카렌의 고백이 준 충격은 컸다.

         

       그녀가 사실 단장님을 사모하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접근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었다니?

         

       마야의 마음속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들끓었다.

         

       친구? 친구라고?

         

       그녀의 주변에 있는 자갈들이 흙바닥을 들썩였다.

         

       안돼. 감정에 휩쓸리면.

         

       그녀는 차분히 심호흡하고 명상을 하며 거친 감정을 갈무리했다.

         

       간신히 마력을 안정시켰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마야아아아앙! 오래 기다렸지?”

         

       멀리서 카렌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녀는 짐을 바닥에 풀어놓고는 그녀 바로 옆에 앉았다.

         

       “늦었네.”

         

       마야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메마르고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던 게 이런 거였을까?

         

       “음, 화장실! 화장실 갔다가 오느라…….”

       “……그래?”

         

       카렌은 어쩐지 친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서늘하다고 느꼈다.

       그때, 그녀의 눈에 친구의 손에 들린 작은 꾸러미가 들어왔다.

       <당신의 우정에 선물하세요!>라는 문구가 박힌 과자 상자였다.

         

       그녀는 입을 활짝 벌렸다.

         

       “와, 이거 설마 나 주려고 산 건 아니겠지?”

         

       마야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미소.

       그 뻔뻔스러움에 마야의 안에서 혐오감이 치솟았다.

         

       “카렌.”

       “응응?”

       “꺼져.”

       “……어?”

         

       카렌이 눈을 껌뻑였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마야는 한 번 더 쏘아 붙여주었다.

         

       “꺼지라고.”

       “……어, 어……?”

         

       카렌은 알아차렸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말했던 “저리 가.”나 “붙지 마.”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말이라는 것을.

         

       “가, 갑자기 왜, 왜 그래……?”

         

       마야는 대답 대신 우정 초콜릿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녀가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힘이 그것을 완전히 으스러뜨렸다.

         

       “내 곁에 오지 마.”

         

       차갑게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것이 더 소름 끼쳤다.

       분명 화난 게 맞는데 화난 티를 거의 내지 않았다.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카렌은 불안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호, 혹시 단장님에게 들었어?”

         

       그렇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도 배신감이라는 것을 느껴보도록.

       좋아하는 단장님에게 뒤통수 맞는 기분을 느끼도록.

         

       그러나 그녀는 말하기 직전 생각을 정정했다.

       스승의 명예를 더럽힐 순 없었다.

         

       “아니, 아까 밖에서 엿들었어.”

       “아…….”

         

       카렌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마야가 그것들을 다 들었단 말인가?

       자신이 탈의실에서 그녀의 몸을 보고 두근거렸다거나 자는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전부?

         

       카렌은 어릴 때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뭣도 모르고 동성 친구들의 가슴을 주무르거나 음부를 더듬었다.

       그저 신기해서 그랬다.

       주변의 남자들에게는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이성끼리는 안 돼도 동성끼리는 서로 달린 것들이니까 문제없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실수였다.

       그녀는 친하게 지내던 여자애들에게 경멸당하고 따돌림을 당했다.

         

       그런데 마야에게 들키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한 면에 대해서.

       아까 털어놓은 그녀의 과거 역시 모두 들었을 것이다.

         

       “미, 미안해……. 속여서……. 너는 다른 애들이랑 뭔가 달라서 괜찮을 줄 알았어…….”

         

       그 말에 마야는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애들이랑 달라서 괜찮다?

         

       그건 그녀의 몇 안 되는 역린 중 하나였다.

         

       옛날부터 그녀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표정의 변화가 없으니 어떤 일에도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나 별종 취급을 했다.

         

       몇몇은 그녀의 감정적 한계나 도덕적 경계를 건드리며 시험하는 짓을 하곤 했다.

         

       ‘얘는 다른 애들이랑 달라서 괜찮아.’

         

       지금 카렌이 말하는 것은 딱 그런 인간들의 행태와 같았다.

         

       마야는 있는 힘껏 자신의 감정 모두를 담아 진심으로 말했다.

         

       “너처럼 역겨운 애는 처음이야.”

         

       그녀의 말과 눈빛 모두 이전에 보지 못했던 혐오를 담고 있었다.

       

       카렌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임을 되뇌었다.

         

       내가 상처받으면 안 되는 거야.

       애초에 속이고 접근한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녀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마야. 다시는 불편하게 할 일 없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돌아서서 연습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여자 친구가 생긴 줄 알았는데…….’

         

       카렌의 삼킨 말이 뒤로 흩날리며,

         

       ‘나에게도 정말 친구가 생길까 했는데…….’

         

       마야의 상처에 젖은 말이 입안에서 맴돌며,

       부서진 우정 초콜릿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마야의 도화지 위에 검은 먹물이 번져 나갔다. 더 짙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도로시 님, 200코인 후원! 건강까지 걱정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ㅠㅠ… 병이 커지도록 둔 제 불찰입니다. 다음부터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수신호 11 님, 1000코인 후원! 이렇게 큰 금액을 후원하시고 떠난다니 안타깝습니다! 응원하신 만큼 열심히 완결까지 달려보겠습니다! 후원자님께서 바라시던 일도 잘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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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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