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86

     

     사람은 변한다.

     나는 그 가능성을 누아르에게서 보았다.

     “누아르가 너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

     “결혼하고 싶다고 하던데, 혹시 못 들었나?”

     “…그.”

     이사장실로 호출된 웬즈데이는 불편한 기색을 대놓고 감추지 못했다.

     “이런. 혹시 짝사랑인 건가?”

     “…….”

     “아니군, 아니야.”

     반응을 보니 알겠다.

     “보통 남자가 현실을 생각하고 여자가 감성을 따른다고 막 누가 그러던데, 여기는 그 반대군.”

     “오히려 평균적으로 여자가 더 현실을 따지는 거 아닙니까?”

     “왕국과 제국은 달라. 아무리 왕국에서 7년 동안 지냈다고 하더라도, 왕국과 제국 사람 사이에 흐르는 피의 차이라고 할까.”

     웬즈데이 또한 누아르를 향해 호감이 없는 건 아니다.

     “누아르를 사랑하나?”

     “저기요, 이사장님.”

     “나 지금 진지해. 엄청. 내가 괜히 자네를 만나기 위해 몰래 기숙사 창문으로 비룡을 이끌고 온 게 아니야.”

     “하….”

     누아르는 깊이 잠들었다. 

     이전에 있었던 소동 때문에 한창 긴장했겠지만, 새벽 3시 43분이면 어지간한 사람은 깊게 잠들어서 좀처럼 큰 소리가 아니면 일어나지 못한다.

     더군다나 니드호그와 내가 소리조차 내지 않고, 사일런스마법과 그 영향력까지 차단하면서 접촉했다.

     사실상 황제가 아니라면 그 어떤 감지에도 걸리지 않을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누아르랑 어디까지 갔지? 키스 초과로는 가지 않았겠지?”

     “키스 이상이 아니라 초과라는 건 키스까지는 괜찮다는 겁니까?”

     “그래. 키스는 지브롤터의 저주에 해당 사항이 없으니까.”

     “아스타시아 황녀님과 키스하셨군요.”

     “그래. 아, 이건 보고할 필요 없네. 이미 알고 있을테니.”

     웬즈데이는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마도 저 ‘보고’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겠지.

     “누아르 지브롤터의 부인이 될 사람이 제국 출신이고, 심지어 제국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게 들킬까봐 걱정되는 거지?”

     “…….”

     “그리고 그게 누아르의 삶이라거나 나의 계획에 방해가 될까봐 걱정이 되겠군. 이해한다. 더군다나….”

     “지브롤터의 수호자가 될 누아르 도련님께, 제국인인 제가 짝이 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웬즈데이는 여러모로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제국인-유학생은 아니지만 백발에서 유추한 출신-이라는 점 하나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왔는데, 아예 결혼까지 해버린다?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하나 묻도록 하지. 그런 문제가 해결된다면, 누아르와 결혼할 생각은 있나?”

     “외람되고 건방진 말씀입니다만.”

     “해도 돼. 얼마든지.”

     “…약간, 삶의 목표 같은 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요.”

     웬즈데이는 쑥쓰럽다는 듯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누아르 도련님이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그다지 좋은 성격이라곤 말할 수 없었잖습니까?”

     “정확하게 보고 있었군.”

     “이사장님이 도련님이셨던 시절에 내리셨던 명령에 따라 누아르 도련님을 옆에서 보좌하며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인간을…크흠. 이 소년을 ‘사람답게’ 만든다면 도련님께서도 만족할 것이며, 그렇게 하면 제국으로 돌아갔을 때 크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웬즈데이는 자신이 살아남고 자리를 잡기 위한 최적의 경로를 선택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이, 지금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금만 욕심을 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어째서?”

     “일단은 이사장님께서 제국의 부마가 될 가능성이 크기도 하고, 무엇보다 꼭 누아르 도련님을 비롯한 다른 여동생 분들도 지브롤터의 수호자가 꼭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역시나.

     “경룡대회 날, 아버지께서 반역 선언을 한 게 네 결정에 큰 도움이 되었나보군.”

     “…지브롤터령 전체가 제국에 넘어간다면, 그 때는 그런 눈치를 볼 필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며, 자신에게 가장 득이 되는 방향으로 판단하고 상황이 이어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과연. 그래서 네가 책임을 지기로 한 거냐? 누아르를 인간답게 만드는 걸 인생의 목표로 잡고, 마침 그 길이 성공으로 가는 길과 합치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지금도 어느정도는 그렇습니다.”

     “중간에 뭔가 마음의 변화라도 있었나?”

     “…저희끼리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누아르 도련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주셔요.”

     “물론.”

     나는 일부러 입에 지퍼를 채우는 제스쳐까지 하며 의지를 보였다.

     “누아르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으마. 애초에 누아르는 내가 지금 너를 이렇게 새벽에 불러냈다는 것도 모를테니.”

     “…….”

     “누아르에게 ‘누아르가 웬즈데이랑 결혼하고 싶다’라고 말한 건 비밀이다. 알겠지?”

     “저도 나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밝혀지는 거 아닙니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지만, 밝혀지기 전까지는 비밀로 함구하고 있으마.”

     “…알겠습니다. 그냥 말씀드리는 게 저도 속이 후련하겠군요.”

     웬즈데이가 한 번 호흡을 가다듬은 뒤,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별 거 아니었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아마 잊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다치는 바람에 누아르 도련님이 길길이 날뛰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한다.”

     내가 가볍게 뺨을 두드리자, 웬즈데이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예. 그 때, 도련님께서 ‘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죠.”

     “반했나?”

     “반했다기보다는, 음, 그냥, 어느 순간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계기는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

     “그냥.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 애써 모른척해오기는 했지만….”

     

     우량매물 누아르를 만들어준 건 사실상 웬즈데이의 몫이 크지만, 정작 그 웬즈데이가 누아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될 줄이야.

     “유모가 되어달라고 붙여놓았는데, 유모가 아니라 누아르 자식의 생모가 되게 생겼군.”

     “송구합니다.”

     “송구할 것 까지야. 전ㅡ혀 마음 쓸 거 없네.”

     진심으로 하는 소리다.

     “오히려 본심을 숨긴 채 조건이라거나, 얼굴이라거나, 야망이라거나 그런 말만 했다면 실망했을 거야. 그런 게 분명 그럴싸하기는 하지만, 그 마음의 뿌리는 아니거든.”

     “…….”

     “나쁜 녀석은 아니야. 자라는 환경이 개판이었다면 모를까, 자기가 원하는대로 되기만 하면 헤벌레 웃으며 만족하는 녀석이지.”

     미래에서는 그게 술과 여자로 가득 찼지만, 그런 가정환경은 이제 없다.

     “그래도 주변에 여자는 계속 꼬일 거다. 이건 지브롤터 남자의 짝이 되는 여인의 숙명.”

     “그건, 이미 작년부터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150명 더 늘었지. 그들 전부가 누아르를 노리지는 않지만.”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 정도는 되겠죠. 그 또한 괜찮습니다. 나인즈…자매들 또한 와서 도움을 주고 있으니. 그리고.”

     웬즈데이가 피식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나인즈 중에서도 누아르 도련님을 노리는 불여우가 누군지도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

     역시, 제국 첩보부.

     “그런가. 그렇다면, 너는 누아르 주변에 이상한 여자가 꼬이지 않도록 지금처럼, 지금보다도 그쪽으로만 집중하도록 해라.”

     “명령이니 기꺼이 따르겠습니다만, 혹시나 불필요한 오해를 산다면….”

     “그런 오해는 ‘따위’로 만들어버리게 하면 그만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브롤터는 말이야, 사랑 앞에서는 눈 돌아가는 족속들이지.”

     “저기, 도련님.”

     “아버지는 사랑 때문에 공작가와의 약혼도 냅다 파혼해버렸어.”

     “아니, 그.”

     “동생이 사랑 좀 해보겠다는데, 형이 정치적인 이유로 그걸 못하게 막아서야 되겠나.”

     

     형으로서도.

     지브롤터로서도.

     남자로서도.

     ‘이건 기회야.’

     그리고 매국노 그레이로서도,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아드실라 알베르트 웬즈데이.”

     “……어?”

     “명령이다. 누아르 지브롤터가 다른 이들에게 눈 돌리지 못하게, 꽉 붙잡고 있도록.”

     “어…?”

     “뭐.”

     웬즈데이가, 갑자기 눈물을 뚝 흘렸다.

     “그, 그게…. 그, 죄, 죄송….”

     “왕국의 남자라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아주는 게 예의. 하지만 나의 손수건은 오직 아스타시아를 위한 것.”

     나는 창문을 열었다.

     “가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마.”

     “…실례하겠습니다.”

     얼굴을 숙인 웬즈데이는 그대로 창문 밖으로 향했고, 니드호그는 웬즈데이를 데리고 새벽의 밤하늘을 날았다.

     “후우우….”

     밤공기가 차가우면서도 맑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좀 더, 열심히 해야겠군.”

     동생이 사랑 좀 해보겠다는데, 형이 되어서 어찌 방해를 할 수 있겠는가.

     “공주님.”

     “…나와도 될까요?”

     책상 아래, 하얀 머리가 빼꼼 튀어나왔다.

     “저기, 오늘 이야기는….”

     “저는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아스타시아에게 내 입으로 직접.

     “혹시 공주님께서 바라지 않으신다면, 저도 생각을 접겠습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저도 응원하고 싶어졌으니까. 그러면 이건…겹사돈이라고 해야 하나…?”

     “어머니가 다르니 완벽하게 겹사돈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그게 문제가 되지 않게 할 방법은 지금부터 생각을 좀 해봐야겠죠.”

     방법은 많고, 선택의 문제다.

     “‘장소’를 선정하러 가야겠습니다. 공주님. 내일 당장…아니지, 오늘 당장 떠나도록 하죠.”

     “어디로요?”

     “누아르에게 어떻게 비벼볼 생각조차 못하게, 충성병자들을 전부 나락으로 보낼 장소로.”

     누아르 지브롤터의 짝이 왕국 여자여야만 한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들이 없어지도록, 조금 계획을 당길 필요가 생겼다.

     “해가 뜨는대로 준비하여, 윈체스터 대공부터 찾아가도록 하죠. 지금부터는 비리 싸움이니까.”

     

     * * *

     아침.

     “또 뭘로 내 머리를 아프게 하려는 건가, 자네.”

     “제가 찾아오는 게 뭐 항상 문제만 들고 오는 겁니까? 섭섭하게.”

     “표정이 그렇잖아, 표정이.”

     집무실 응접용 소파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윈체스터 대공이 나의 방문에 대놓고 질색하며 손을 휘저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는가. 비룡 기승 문제라면 안전사고는 다 대비가 되었고, 훈련은 아카데미 내부 트랙을 이용하기로 했다네.”

     “그건 감사드립니다. 제가 논의드리고자 하는 건 이번 학기, ‘현장체험학습’에 대해서 논의드리고자 합니다.”

     “……올 것이 왔군.”

     윈체스터 대공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자네의 부탁이라고 해도, 지브롤터 협곡은 안 돼. 눈 가리고 아웅하듯 리프트 자작령도 안 되고, 협곡 너머 제국은 더더욱 안 될 말이지.”

     현장체험학습.

     “1학기 말이라 준비 기간이 좀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다음 교수회의에서는 최소한 장소 정도는 세 곳 확정이 되어야 해. 후보로든 뭐든.”

     말이 좀 이래서 그렇지, 약 1주일 동안 아카데미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는 야외 캠프 활동이다.

     “분명 교수들끼리 서로 이견이 있을테니 난리가 나겠지. 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저기 세인트 파벌이 뭐라고 하든 일단 강행을….”

     “그들의 뜻대로 하시죠.”

     “뭐?”

     “적진 한가운데라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저와 아스타시아, 누아르를 비롯한 아카데미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 현지 체험학습을 할 장소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지지하는 자들의 영지여도.”

     장소. 충성병자의 영지.

     “오히려 제가 추천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만.”

     “…더 골치아플 것 같은데. 어딘가?”

     “마침, 기적적으로 접점이 있는 곳이 하나 있죠.”

     나는 지도의 한 점을 가리켰다.

     “…한 번에 몰아서 다 치워버리려고?”

     “하하. 누가 들으면 이 기회에 정적을 숙청해버리겠다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잖나.”

     “예.”

     충성병자들과 매국노 크비슬링스들이 함께하는 환장의 하모니를 이루는 장소.

     “렘부르 자작령.”

     지브롤터에 있어 최악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곳.

     “렘부르 영지의 앞 글자를 빌려, 프로젝트 하나를 제안 드리는 바입니다.”

     나는 미리 준비한 사업, 아니 교육계획서를 윈체스터 대공에게 내밀었다.

     “이름하야.”

     렘버리 프로젝트.

     “왕국 전통의 극한 체험 교육, 렘부르 자작령에 전부 위임하도록 하는 겁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024년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매국명가는 현재 페이스(1일2편)을 유지한다면

    3월 31을 즈음에 완결날 것 같습니다

    딱 절반 왔네요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