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회의가 끝나고, 나와 맹주님은 곧장 천자를 조견(朝見)하기 위해 떠날 채비를 했다.
이번 임무에는 맹주와 맹주의 호위무사들, 그리고 서련이 함께하기로 했기에 당분간 나와 같이 지낼 수 없게 된 혜령이는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다.
“아저씨를 못 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우울해요…”
“저, 저도 은공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슬픕니다…”
“그렇게 오래 걸릴 일도 아니니 그동안 승마술이나 잘 배워두고 있어.”
내가 직접 가르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나는 아쉬워하는 둘을 남겨두고 짐가방을 맸다. 짐이라고 해봐야 이번에는 갈아입을 옷 정도였기에 짐가방은 평소보다 가벼웠다.
어차피 맹주님이랑 같이 불편한 여행을 하는 건데 노숙을 하게 되어도 알아서 챙겨주겠지. 나도 엄연히 사신 비스무리한 역할로 궁에 가는 거니까.
나도 나름 맹주님 사위가 되었으니 호위도 받을 수 있을 테고.
다만…호위를 받을만한 일이 생길지는 의문이었다.
황제가 머무는 궁은 개봉에 있는 데다, 무림맹과 개봉의 거리는 중원 기준으로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실질 거리는 한반도를 세로로 주파하는 거리 정도지만.
가는 길에 녹림이나 장강수로채가 수작질을 부릴 것 같지도 않고, 되려 몸을 사라지 않을까. 그쪽도 초절정 고수가 하나 있지만 우린 둘이니까.
그런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내 몸은 말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마구간에 이미 도착해있었다.
“아, 자네 왔는가?”
“장노야. 풍운 상태는 어떻습니까?”
“슬슬 답답해하는 것 같으이.”
“잘됐군요.”
오랜만에 바깥바람 좀 쐬자.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것도 미안하고.
“푸히힝!”
“그래그래. 이제 나갈 테니까 그만 핥아.”
혜령이가 기껏 머리 빗어줬는데 침으로 범벅되겠네.
나는 풍운의 콧잔등을 쓰다듬어 주며 슬며시 고삐를 잡고 문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온순해진 풍운은 얌전히 내 인도를 따라 좁디좁은 마구간을 나와 투레질을 했다.
“실컷 달릴 테니까 너무 보채지 마라.”
집합 장소가 맹주전 앞이랬던가.
나는 안장에 가방을 체결시키고 풍운 위에 올라탔다. 풍운은 내가 올라타자 기쁜 듯 울고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지만 참는다는 얼굴.
나는 놈의 갈기를 어루만지며 맹주님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
“아, 자네. 왔구먼.”
“편하게 사위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자네,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군?”
초장부터 너무 세게 질렀나.
나는 맹주의 관자놀이가 툭 불거진 것을 확인하고는 어물쩍 웃으며 그의 옆으로 이동했다. 맹주의 말이 풍운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겁먹은 듯 주춤했지만, 맹주가 고삐를 쥐고 손으로 달래자 금세 얌전해졌다.
잘 길들이셨네.
“오랫동안 키우신 말 같습니다.”
“적풍말인가? 망아지 시절부터 손수 먹이를 줘가며 기르곤 했다네.”
“그렇군요.”
“한 때 적토마 같은 말로 자라기를 빌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더군.”
“종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만족한다네. 솔직히 무림인이 말을 탈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게 공적인 일이 아니었다면 냅다 경공이나 쓰면서 수도로 단숨에 달려갔을 걸세.”
“무림인은 그렇지요.”
“허허, 자네는 무림인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저도 이제 어엿한 무림인이긴 하지만, 아직 몸에 밴 버릇을 고치기가 힘들어서 말입니다.”
“기병이라고 했나? 그럼 말과 친하겠군.”
“그뿐입니까? 저희는 말에게도 보법을 가르칩니다.”
“허어.”
맹주는 내가 농담을 하는 건지 진담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말에게 경공이라니. 이상하게 느껴지겠지.
하지만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소양이었다.
말의 생존율을 높이고 기동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려면 무거운 마갑을 입고도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활약할 수 있는 보법의 유무가 치명적으로 다가왔으니까.
이슬람 왕국들이 성전 초반에 기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린 것도 말에게 가르치는 보법의 탓이 컸다.
보법을 제대로 배운 군마는 곡선 기동이 아니라, 갑작스레 90도로 꺾는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도 소화할 수 있었으니까.
단장은 말째로 덤블링을 하는 미친 곡예까지 보여줬던가.
사실상 잘 훈련된 군마는 기사의 다리나 마찬가지였으니, 가능하면 나도 풍운에게 보법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말한테 오러코어를 만들어 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긴 하지만, 살려면 해야지.
문제는 나도 훈련법을 듣기만 했지 실전에선 해보지 않았다는 건데.
…그래도 이론은 빠삭하니까 실전만 잘하면 되겠지.
지금은 하지 못하는 일은 묻어두고, 나는 맹주님에게 물었다.
“맹주님. 서련 소저는-”
“가가.”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준비를 하다 보니 늦어버렸네요.”
“아니다 딸아. 그럴 수도 있지. 아직 시간이 되지도 않았단다.”
우아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탄 채로 다가온 서련은 평소보다 새하얀 얼굴로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심 화장이라는 건가.
평소에는 가벼운 화장만 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진심인 얼굴.
아버지와 내 앞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공적인 일이라 그런 건지.
어느 쪽이든 지금의 서련은 그 누구도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것은 확실했다.
“어머, 저한테 마음을 뺏기셨나요?”
“조금?”
“허허…”
맹주님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화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곤, 우리를 쳐다보았다.
“사이좋은 게 보기 좋구나. 허허…허…”
“당연한 일이랍니다. 평생을 함께할 낭군님이니까요.”
평소보다 거리가 가까운데.
아예 작정하고 약혼녀 노릇을 하겠다는 건지, 평소보다 부쩍 가까워진 채로 내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은 서련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평소랑은 다르게 요염함이 섞인 웃음.
…조금 무서운데.
반대편에서 나를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맹주님의 따가운 시선이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노려보고 있잖아.
“맹주님. 슬슬 출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흠, 알았네. 이제 출발하겠다!”
“존명!”
맹주의 선언에, 사방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하게도 우리를 둘러싼 호위무사들이 낸 소리였다.
“개봉까지는 족히 나흘 정도면 도착할 걸세.”
“다행이군요.”
“별일은 없겠지만…일이 잘 풀릴지는 모르겠구나.”
“일단 부딪혀보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구나.”
우리는 개봉을 향한 여행을 시작했다.
————————
“노예가 노예를 부린다라…얄궂구나.”
평생 겪어보지 못한 훈련 방식에 반발하는 마인들을 강압적으로 제압하며 훈련시키는 그의 수하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가진 맘루크 기병대의 수장, 파르스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애병을 마른 천으로 닦아냈다.
“새, 새로운 하늘이시여.”
“그런 호칭은 필요 없다. 철목환이라고 했던가?”
“예, 예…그렇습니다.”
한때 마교에서도 위세를 부리던 장로였던 자라고 하기에는 겁을 집어먹은 모습.
겁먹은 개처럼 구는 그의 모습에서 누가 마교의 위상을 엿볼 수나 있을까.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이방인 앞에서, 그들이 신처럼 믿던 천마와 천마신공이 박살 났으니.
그들이 믿던 하늘이 무너져 내렸으니, 남은 것은 망령된 노인뿐.
“전쟁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보, 보급 준비는 끝났습니다.”
“진격로는 정했나?”
“예.”
“재밌겠구나.”
파르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마치 농부가 수확한 작물들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
그는 나른한 미소를 유지한 채로, 샴쉬르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검집에 집어넣었다.
‘중원과의 전쟁이라, 심심하지는 않겠구나.’
전쟁을 위해 태어났으니, 전쟁을 위해 살 뿐.
파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다.
평범한 행위. 하지만 그런 행위에도 장로의 얼굴에 긴장이 달렸다.
“출정은 보름 후가 좋겠군.”
“예? 하지만…”
“대답.”
“예…알겠습니다. 그리 하달하겠습니다.”
장로는 자리를 벗어날 명분이 생겨났다는 사실에 기쁜 듯 발을 놀려 명령 하달을 위해 되돌아갔다.
꽤나 빠른 걸음이었다.
파르스는 장로가 그런 모습을 보이건 말건 품에서 파이프를 꺼내 약초를 넣고 불을 붙였다.
‘이번에는 그 녀석같이 좀 더 재밌는 상대가 있었다면.’
그는 오래전 결판을 내지 못한 아쉬움을 담아 입에서 독한 연기를 뿜어냈다.
사전투표날이었구나…
그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