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난 네게도 기회를 줄 거야. 왜 침략했는지부터 너희가 누구인지 전부 나에게 말하는 게 첫 번째 조건이지.]
차원 틈새.
갑자기 나타난 무찬의 선언에 세리아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저놈은 정체가 뭐지?’
먼저 자신의 상황을 정리했다.
세리아스는 한 세력원의 제보로 저층에 발전된 드워프 왕국을 발견했고, 자신을 주축으로 한 원정대를 꾸려 출정했다.
당연히 쉽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포탈 함정에 허무하게 전력을 잃었다. 중간에는 강력한 엘프가 나타났으며, 드워프들을 쫓아가자 마찬가지로 함정에 빠져 이런 공간에 떨어졌다.
어두컴컴한 정적인 공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간.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네가 제일 강하니 대표로 말해 봐.]
보다시피 저 엘프가 나타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찬의 등장에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력한 브레스를 쏘아내고.
공간을 마음대로 다루고.
엘프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다. 아니, 엘프가 드워프를 지키려고 나타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이야….’
[이대로 침묵할 셈인가?]
무찬이 세리아스를 재촉했다.
얼마 남지 않은 부하들까지 쳐다보고 있기에, 더 모른척할 수도 없다. 세리아스는 무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말하라는 건데. 시발아.’
하지만 대답을 안 했던 게 아니다.
사실 세리아스는 격음을 쓸 수 없다.
지배자 대부분은 격을 가졌지만 격과 격음을 쓰지 못하는 자도 많다. 세리아스가 딱 그런 뷰류다. 본신의 힘은 강할지라도, 격을 제대로 컨트롤하진 못했다.
당연히 이런 공기가 없는 곳에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방금처럼 소리 없이 입만 뻐금거릴 뿐.
‘뭘 꼬나보냐. 너 뭐 하는 새끼냐고.’
따라서 욕을 해도 상관없다.
표정만 잘 관리하고 하고 싶은 말과 욕을 가져다 붙이면 알 방법이 없거든.
허나.
[무찬아. 얘. 욕하는 것 같은데?]
‘어라?….’
샤엘라는 그것을 캐치했다.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을 텐데,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는 자신의 의도를 꿰뚫은 것처럼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눈빛이….’
고요하지만, 한없이 깊다.
쳐다보고 있으면, 꿰뚫릴 것 같다.
분명 말을 알아듣진 못했음에도 숨긴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욕했다고?….]
‘아, 아니 그게….’
핑계를 대도 소용없다.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그저 난감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당연하지만, 세리아스는 두사람에게 섣불리 달려들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은 강하다.
격을 사용한 대화부터가 이미 자신을 강자라고 대변하는 수단이나 다름없다. 헌데, 둘은 그걸 태연히 사용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즉, 둘 다 지배자급 이상이다.
가능하면 자극해선 안 된다.
하지만 한편으론 화가 났다.
‘대체 왜 이런!!….’
이런 저층에 격을 가진 자가 두 명이나 나타난 게 억울했다. 심지어 듣지도 못하면서, 욕한 건 귀신처럼 알아차린다.
그럼 어떡해야 하는가.
부하들은 자신의 대응을 바라보고 있다.
대화를 할 수 없지만, 불경하게도 눈빛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게 느껴진다. 자기 부하들이지만, 상황만 맞아 떨어지면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자도 몇몇 있기 때문이다. 신생 세력이라 결속력이 약한 탓이다.
하지만 뭐 할 수도 없다.
격음을 쓸 줄 모르니까.
[이 녀석. 힘은 가장 세 보였는데, 정작 격을 다룰 줄은 모르나 보네.]
무찬도 그것을 눈치챘다.
살짝 난감해하는 눈치.
이에 샤엘라가 대신 나섰다.
[내가 해결해 줄게.]
파아아!~
황금빛이 살짝 퍼졌다.
그러자.
‘갑자기 뭐 하는 거지?’
[뭐긴 뭐야. 통역할 수 있게 된 거지.]
‘허!?….’
텔레파시가 가능해졌다.
접촉한 대상과 텔레파시를 나누던 샤엘라의 능력이다. 원래는 신성이 닿거나 깃든 존재에게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는 능력인지라, 무찬과 세리아스를 잇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오오? 이거 다른 사람도 가능한 거였냐?]
[당연하지. 이제 실컷 대화해봐.]
[그럼… 자, 다시 물을게. 왜 침략했는지와 너희가 누구인지 전부 말해봐. 네 태도에 따라 살릴지 말지 결정될 거다.]
텔레파시 통역.
대화가 가능해지자 무찬은 다시 세리아스에게 물었다. 당연히 그녀가 지휘관인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저항할 방법이 없으므로, 세리아스는 우선 답하기로 했다.
‘…나는 세리아스. 모두 말할 테니 날 여기서 내보내 줬으면 한다.’
[질문에 답부터 해. 왜 침략한 거지?]
[……우리는 아칸벨리에서-]
세리아스는 얘기를 시작했다.
둘을 이길 수 없다.
빠져나갈 방법도 없다.
어차피 이리 죽을 바엔, 잘 따르는 척 대답하고 살길을 모방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진실을 말할 생각은 없다.
세리아스는 세력의 주축인 만큼, 세력을 배반해서 좋을 게 없었다. 이미 아칸벨리를 자기 자산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배신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로.
아칸벨리의 본거지 위치를 숨기고.
세력 규모와 총인원을 크게 부풀리고.
가진 것이 많으니, 풀어주면 아무 조건 없이 보상하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너희도 전쟁하고 싶진 않겠지. 만약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아칸벨리는 총력을 다해 이곳을 침략할 거야.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날 보내줘. 그럼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대부분 거짓말이다.
아칸벨리는 이제 여력이 없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건 이쪽이며, 보내준다면 정보를 팔아먹을 생각이다. 직접 차지하진 못해도 지금은 그게 최선이니까.
당장의 살길을 모색하면 된다.
그럴듯한 변명과 사과, 보상까지. 돌려보내 주지 않더라도 적어도 대화를 위해 이 공간에서는 내보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가 기회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뭐야. 말이 너무 다르잖아.]
꿈틀.
갑작스런 무찬의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이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듯한 느낌.
아니나 다를까.
[무찬. 아까 레이븐이라는 녀석의 말이 훨씬 진정성 있는 것 같네. 내가 느끼기엔 이쪽이 거짓말하는 것 같아.]
[말 안 해도 나도 알아. 거참. 폐기장이나, 여기나 지배자들은 말하는 레퍼토리가 뭐 이리 똑같은 건지 모르겠네.]
두 사람의 대화에서 깨달았다.
둘은 자신을 만나기 전에 이미 레이븐에게 전부 대답을 들은 것이다.
세리아스의 얼굴이 격하게 찌그러졌다.
드워프 왕국을 침략하기 위해 내려온 아칸벨리의 지배자는 전부 흩어진 상황이다. 세리아스는 그것을 놓치고 있었다. 어쩌면 리키아드도 잡혀 전부 불었을지 모른다.
‘날 믿어줘!! 내 말이 진짜야! 레이븐 그놈은-’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어떻게든 둘을 납득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푸훅!!
‘커!!…….’
무언가 심장을 관통했다.
어느새 무찬이 한 손을 뻗고 있었고, 정체불명의 파동이 몸을 간단히 꿰뚫었다.
[미안. 전혀 믿음이 가질 않아서.]
‘이런, 시발…….’
둘은 더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없다. 모든 힘을 끌어올려 남자를 공격했다.
쩍!!
얼음 발판을 만들고 도약.
주변 전체를 얼려버릴 듯 남자에게 돌진하여 양손에 얼음 창을 소환했다. 아무리 중력과 공기가 없는 공간이더라도, 그녀의 힘이라면 어느 정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분명 그럴진대….
[이상한 곳을 공격하는군.]
슉!!
분명 무찬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세리아스는 무찬이 아닌, 옆에 허공을 공격했다. 정확히 조준했는데, 도달하고 보니 이상한 곳이었다.
‘뭔….’
얼핏 무찬의 눈동자가 반짝인 듯했다.
그에 오감이 뒤틀리는 착각이 들었고.
[이번엔 내 차례야.]
꾸득!!
콰드드득!!!
급속도로 변형되는 남자의 한 팔.
고개를 잠깐 돌리면, 어째서인지 거대한 용의 발이 자신을 내리찍고 있었다.
‘어?’
콰드드득!!
‘크아아아아!!!!’
거대한 용의 발이 몸을 쥐어 잡아 압박한다.
매우 강력한 근력에 얼음 보호막을 둘러보려 했지만, 어째 능력도 말을 듣질 않는다.
‘무슨 힘이!!…….’
부서진 몸에 독이 주입된다.
움켜쥔 용의 손에서 용암이 흐른다.
강력한 괴력 이전에 육신이 약해지고 있다.
치이이익!!-
쩌적.
몸속에서 타오르는 듯한 이명.
갑작스런 고통과 공포가 몰려온다.
아무리 몸을 얼음으로 강화해도 곧장 파괴되고 부서지는 게 느껴진다.
이대로면 죽는-
콰직!!!
정적만이 나돌았다.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폭발적인 괴력에 육신이 터졌기 때문이다.
스르륵.
그러면 무찬의 몸에서 줄기가 자라났다.
줄기는 세리아스의 터진 조각을 하나하나 회수해 흡수했다.
[생각보다 약하네. 설마 나한테 지다니. 얼마나 약하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젠 들리지 않는 두사람의 대화.
그것이 세리아스의 최후였다.
‘사, 살려!!-’
‘크아아아!!!’
주변에 있던 아칸벨리 세력원의 운명도 세리아스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무찬의 양분이 되어 사라졌다.
그것으로 전쟁은 막을 내렸다.
*
[맛있냐?]
[꺼억-]
샤엘라의 물음에 트름 시늉을 했다.
녀석의 말대로 꽤 맛있었다. 강자들을 양분으로 흡수하는 건. 아니, 내 힘으로 이들을 처지헸다는 게 더 달콤했다. 이번 싸움은 샤엘라가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
‘솔직히 이리 쉬울 줄은 몰랐지.’
적들이 약한 게 틀림없다.
나는 본래 지배자 하나 이기는 것도 어려워했었으니까.
물론, 내가 강해진 것도 있다.
옛날이라면 벨칸의 예측대로 드워프군과 함께 적을 힘겹게 막아내고 농성하거나, 샤엘라에 도움을 받았을 텐데, 지금은 여러 능력을 다루면서 상황을 유리하게 끌었다.
보다시피 괴력으로 지배자를 터트렸다.
재밌게도 육체를 바꾸고 크기를 키우면 더 높은 효율로 힘을 낼 수 있었다.
[능력을 몇 개나 쓴 거냐.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힘들 같던데.]
샤엘라도 저리 물을 정도.
나는 잠시 내 능력을 점검했다.
끝도 없이 넘쳐나는 에너지.
공간을 감각적으로 다루는 능력,
제어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육신의 힘.
흡수한 생명체의 힘을 끌어내는 능력.
흡수한 생명체를 복제하듯 탈피하는 능력.
시리안이 구상한 양분&마나 회로의 폭발적인 파워 강화. 이외 아직 제대로 다루지 못한 능력도 있을 것이다,
인간체의 형태를 취했으나.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힘들이다.
맘만 먹으면 흡수했던 생명체로 변해 힘을 흉내 낼 수도 있다. 이건 제약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쓸만한 힘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샤엘라. 아칸벨리가 어떤 곳인지 모든 정보가 느껴지기 시작했어.]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기억이 엿보인다.
흡수한 놈들의 기억이.
옛날처럼 강한 사념을 살짝 엿본 것과는 다른 꽤 구체적인 기억이었다.
아칸벨리의 수장이 누군지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