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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7

       *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균형감각만으로 촉각 없는 걸음을 내딛고, 행동을 제약하는 통증마저 제거해둔 상황.

         

         청각이 없으니 소음 또한 없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음이 저 존재의, 산하를 찢어 발기는 괴성이었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하겠다. 괴성으로 인한 통증도 사라졌으니.

         

         피부가 저릿저릿하게 울리던 감각도 사라졌다. 존재감으로 인한 압박감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필멸자의 몸으로 불멸자에 맞서는 것은 언제나 이랬다. 부족한 것들을 제거해가며, 불필요한 것들을 포기해가며, 오직 한 발자국 앞으로.

         

         한 걸음 더 앞으로.

         

         이 순간, 불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려 놓은 사람은 한 자루의 비수가 된다. 오직 신의 심장부에 내려 꽂기 위한 비수를.

         

         그 비수를 알고 있다. 이반은 여전히 기억한다. 풍경도, 상황도 달랐으나, 이런 존재를 대적하기 위해 나아갔던 비수들을 알고 있었다.

         

         이젠 없다.

         

         그 사실이 비이성적인 고통을 야기하곤 한다. 통각을 모조리 제거했으니 이는 환상통이다. 그래, 이런 환상통은 이미 오랜 세월 앓아 왔었으므로 익숙하다.

         

         그러니 괜찮다.

         

         이반은 도끼를 들고 다시 한 번 내려 찍었다.

         

         감각 없는 공격이었으므로, 일반적인 검객들이라면 결코 완성하지 못했을 일격이다. 손끝에 걸리는 무게감, 발끝에 걸리는 균형감각. 그런 감각들이 제거된 상황이었으니.

         

         오로지 또렷하게 기억한 그 날의 자세를, 고스란히 모방하는 것.

         

         자신의 무예가 아니었으므로 본능 따윈 필요하지 않다. 오직 이성. 사진을 찍은 듯 온전히 기억하는 타인의 기예를 완벽하게 따라 걷는 것.

         

         팔의 각도는 첫 시작에서 87도. 손목은 보다 뻗어 110도. 검지에서 약지까지 무게의 배분은 1:1:1:2. 방향은 정중선을 따라 완벽하게.

         

         

        -꾸드득.

         

         

         부서진 오른팔이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괜찮다. 들리지 않으니까.

         

         느껴지지 않으니까. 통증은, 지금 모방하는 이 일격에선 필요하지 않은 요인이니까.

         

         

         다시 오른발을 23cm 앞으로. 발끝에 체중을 싣고 뒷꿈치를 살짝 들어 정면으로.

         

         연상하는 자세는, 쏘아지는 화살.

         

         하늘을 향해 쏘아지는, 먹구름을 찢는. 그리하여 마침내, 샛별을 바라는. 저 밤하늘의 어둠 사이로 빛나는 한줄기 빛무리를 향해서.

         

         체중의 분배가 완벽해졌을 때, 찰나를 가로지른 단 한 순간. 마력의 흐름을 일치시켜서.

         

         일격.

         

         

        -콰아아아아앙—!!

         

         

         정면으로 쏘아져 나간 일격이 기둥을 잘라낸다. 부서지는 파편 하나하나가 사람의 몸뚱아리보다 거대하다. 눈과 얼음이 비산하고, 끝내 다시 실루엣이 나타나면—.

         

         

         ‘1%… 정도인가.’

         

         

         저 거체에 비하자면 손톱만큼. 그 정도에 불과한 흉터가 생겨난다. 거대한 나무 형태의 존재가 그를 향해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주위의 눈이 한순간에 비산했다. 몸이 뒤로 두 발자국 밀려났다.

         

         

         ‘포효했나.’

         

         

         청각을 차단했다 하더라도 청력 자체가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다. 인지하는 신경만을 절개했을 뿐, 고막과 감각기관은 그의 인지 밖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아마도 이 정도의 소음을 정면에서 마주했다면 청력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

         

         눈 앞에 한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피눈물이 흘러 시야가 잠시 차단됐다. 빠르게 훔쳐 닦고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온다.’

         

         

         재빨리 바닥을 박차고 몸을 틀었다. 작은 가지 하나가 뻗어 나와 이반이 서 있던 자리를 후려쳤다. 그 주위로 대기가 얼어붙으며 쏟아지는 광경이 보인다.

         

         온갖 주문이 파편처럼 비산했다. 뇌전, 화염, 냉기는 물론이고, 이따금 폭발, 때때로 강력한 염동력까지.

         

         엘프 학파들이 사용하는 모든 종류의 주문이 무분별하게 휘몰아친다. 작은 나뭇가지 하나의 움직임으로부터. 저 가지는, 인간에 비해 세 배는 더 거대했다.

         

         사흘 정도인가? 엘피헤라가 이 공간에서 벗어난지.

         

         초 단위로 시간을 헤아릴 수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이상한 일이다. 설령 이 공간이 일반적인 ‘시공간’을 비틀어낸 칠용장의 왕거라고 하더라도 이상한 일이다.

         

         허기도, 갈증도, 마력탈진도 이젠 없었으니까.

         

         끊임없이 뛰어서 공격을 피해내고, 전신의 마력을 모조리 쏟아내 일격을 꽂아 넣는 데도 에너지의 손실이 없다.

         

         

         ‘아니, 오히려….’

         

         

         싸울수록 더 강한 힘이 돌아오는 느낌.

         

         일격을 꽂아 넣을 때마다 온몸에 활력이 치솟는 느낌. 잠들지 않아도 피로가 느껴지지 않고, 온몸의 부상이 비명을 내질러도 움직임엔 모자람이 없다.

         

         잘 훈련된 요원은 스스로의 육체 성능을 정량적으로 파악하는 법이다. 육체는 가장 확실하게 최저 성능을 보장하는 도구이므로.

         

         그리고 이반은 ‘아주’ 잘 훈련된 요원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육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세상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서, 지금의 전투 지속력은 상정 외의 일이다.

         

         그리고 시각 한켠에서 일렁이며 따라붙는 희끄무레한 잔상도.

         

         며칠에 걸쳐 점점 더 또렷해지더니, 이젠 사람의 실루엣을 띄기 시작한 저 잔상이 못내 거슬려서, 마침내 이반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드디어 나를 봐주는군. 이거 섭섭해.”

         

         

         익숙한 목소리로 잔상이 말을 걸어왔다. 이반은 핏물이 터진 눈을 빠르게 닦아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 상황이다. 저 존재의 괴성이 여전히 산하를 울리고 있을 텐데도, 청각을 차단한 고요함 사이에서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라.

         

         

         “이런, 다시 무시인가?”

         “베올그린.”

         “그래, 우리의 척후. 잘 지냈나?”

         “죽었나?”

         “내가? 아니면 자네가?”

         “말장난은 그만 하지.”

         

         

         이반의 말에 실루엣이 흐느적거렸다. 아마도 웃고 있는 모양이다. 재수 없는 녀석. 이반은 투덜거리며 다시 옆으로 뛰었다.

         

         그가 뛴 자리에 깊은 고랑이 생겼다. 염동력이 지반을 뒤틀어 헤집고 있었다.

         

         점점 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능숙해지고 있다. 저 존재는 갓 태어난 새끼와 같다. 겁에 질려 마구잡이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난동을 부리고 있는 셈이다.

         

         점점 더 예리해지고,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그건 곧, 녀석이 점차 자신의 힘을 깨닫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간을 얼마나 벌었을까.

         

         엘피헤라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나.

         

         엘프들을 규합하는 것까지 성공했을까.

         

         다른 요원들은 무사히 퇴각했을까.

         

         이 정도면 충분할까.

         

         조금 더, 조금만 더 버텨보는 게 낫겠다. 아직 팔도, 다리도 움직이고 있으니까. 다행히도.

         

         저 녀석이 조금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만.

         

         

         “자네는 살아 있네. 죽어가고 있지만. 나도 마찬가지일세. 죽어가고 있는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엘프들은?”

         “12개의 학회 중 5개 학회가 모였네. 나머지 일곱은 힘을 아끼며 군세를 모으고 있지. 이 사태가 끝나는대로 내전이 터질 걸세. 힘을 아낀 학회들이 승리하고, 이제 엘프는 7학회의 추밀원으로 구성되겠지.”

         

         

         이 전투에서 승리해도, 눈 앞의 저 괴수를 처치해도, 마침내 칼리온에 도래한 칠용장을 저지한다 하더라도 승리는 없다.

         

         베올그린의 말에 이반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칠용장과 마왕을 제거하고 토사구팽 당한 용사 파티가 꼭 그런 모습이었으니. 엘프도 결국 인간과 다르지 않잖은가.

         

         

         “자네에겐 사과를 하고 싶었네.”

         “해라.”

         “이런, 이유는 묻지 않나?”

         “관심 없다.”

         

         

         이반의 말에 베올그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죄로는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죄는 이미 지나간 일의 후회에 불과하다. 필요한 것은 재발 방지, 또는 사태 수습. 그 뿐이다.

         

         따라서 이반은 누군가의 사죄에 관심이 없다. 벌어진 일을 처리하는 것에만 신경을 쓸 뿐이다. 지독할만큼 효율적인 사내였다.

         

         

         “내가 자네를 지금 이 자리로 끌어들였네. 사지로. 칠용장의 눈 앞으로. 미안하네. 자네가 겪었을 이 모든 고난은, 결국 내가 초래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네.”

         “해결 방안은?”

         “뭐?”

         “네가 나를 필요로 했다면 나더러 저것을 죽이란 말이 아닌가. 내 힘으로 저것을 처치할 수 없으니, 해결 방안을 말해라.”

         

         

         여전히 사죄엔 관심이 없다.

         

         베올그린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파트리시아의 도움이 있었네. 이 세상 모든 것은 마법으로 재현할 수 있으니, 신성력 또한 그렇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신성력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네. 그러나 마법사란 본디, 가능성이 아니라 활용성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나.”

         “결론.”

         “신성력은 곧 신이 베풀어주는 신의 파편일세. 진짜 신에 비하자면 턱없이 모자라고 사소한 힘이지만, 어쨌건 그 기원이 신에게 있지 않겠나?”

         “결론.”

         

         

         이반의 재촉에 베올그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법으로 신성력을 만들 수 있고, 신성력이 신의 파편이라면, 삼단논법에 의거해 보세나. 마법으로 신을 구현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

         “그래서 신을 만들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반이 턱짓으로 저 먼 거리의 괴수를 가리키자, 베올그린은 고개를 저으며 이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네의 영혼 구조를 뒤틀었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행히 자동저장이 되어있더군요.

    컴퓨터의 수명이 늘었습니다. 안 되어있었다면 컴퓨터를 부수려 했거든요.

    역시 협박은 가장 확실한 협상 수단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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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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