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87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배란일에 그렇게나 했는데?”

         

       프란체가 넋이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음… 제 기억상 저번 이후로 일주일 좀 넘게 지났으니 확인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네요.”

         

       달리아는 턱에 손을 짚은 채 입술을 다물었다. 프란체는 여간 충격이 아닌 듯했다.

         

       우리가 쫓기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많은 마당에 저리 허망해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뭔가 억울하긴 하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불이 붙은 프란체가 배란일이라며 강제로 있는 거, 없는 거까지 전부 짜냈다. 마른오징어가 될 뻔했는데 소식이 없다니.

         

       “혹시 우리에게 따로 문제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너도 알다시피, 나와 진은 평범한 관계가 아니잖아? 존재가 엮여있다는 거로 무언가 이상한 게…….”

         

       혹시나, 싶은 마음에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는 프란체. 달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 생기지 않은 건 그냥 운이 없었다고밖에 말씀드릴 길이 없네요.”

         

       기적을 사용한 본인의 입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제야 프란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 관련해서 문제는 없는 거겠지?”

       “네. 안심하셔도 돼요.”

         

       달리아는 문득 눈을 크게 뜨더니 아, 하고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아까 제가 드린 처방 어기시면 안 돼요?”

         

       프란체가 또 불이 붙을까, 걱정이 들었던 모양.

         

       “……나, 나를 뭐로 보는 거니?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단다. 흠흠.”

         

       대답 시간이 약간 지연된 걸 보니 뜨끔한 듯하다.

         

       “그럼 이거로 진료는 끝이에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주억이는 달리아. 용건이 끝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의무실을 나가기 직전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 그런데 달리아. 혹시 여행은 어때?”

         

       달리아는 “여행이요?”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충 일이 정리되면 신혼을 기념해서 여행을 가려 하는데, 너만 괜찮다면 데려가고 싶어서.”

         

       비록 지금은 여신에게 버려져 성녀의 힘을 전부 잃었다곤 하지만, 달리아는 신성 마법의 권위자다.

         

       회복에 관해선 그녀를 따라올 마법사가 없다는 뜻이다.

         

       “좋네요. 저는 여기서 나갈 기회가 얼마 없을 테니까요.”

         

       달리아는 흔쾌히 수락했다. 사실상 저택에 평생 갇혀 지내야 하는 처지인지라, 그녀는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은 건 맞았다.

         

       “그럼 그때 얘기해주지.”

         

       의무실을 나온 나와 프란체는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한껏 시무룩해진 그녀에게 물었다.

         

       “빨리 아이를 가지고 싶어?”

       “…응. 우리의 결실을 보고 싶어서.”

         

       프란체는 입술을 꾹 다물다, 잠시간의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내가 엄마의 역할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돼서 두렵고, 불안하긴 한데. 그래도 빨리 진을 닮은 아이가 가지고 싶어서…….”

         

       기특한 이유지만, 불안 요소가 될 필요까진 없는데.

         

       “프란체.”

       “응?”

         

       그녀의 어깨를 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나는 절대 어디론가 떠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을 거야. 평생 프란체의 곁에 있기로 했잖아?”

         

       싱긋 웃으며 말하자 프란체는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 마.”

       “…알겠어.”

         

       언제쯤 그녀의 불안을 떨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시간으로 해결될 문제다.

         

       “이제 일이 있는 거지?”

       “그렇네. 처리하지 못한 게 좀 있어서.”

         

       쪽. 프란체는 발꿈치를 들곤 내 뺨에 입을 맞춘 뒤 싱긋 웃었다.

         

       “금방 끝내고 올게.”

       “그래.”

         

       나는 손을 흔들며 집무실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프란체도 여행을 기대하고 있던 눈치였다. 어떻게든 일을 끝내고 일정을 잡겠지.

         

       ‘다들 괜찮은지 물어볼까.’

         

         

       * * *

         

         

       내가 먼저 찾아간 곳은 공작가의 연무장.

         

       케일과 라데아가 지내고 있는 기사단이었다.

         

       “공작부군님을 뵙습니다!”

         

       뒷짐을 지고 걷고 있자 곳곳에서 훈련 중인 기사들이 칼 같은 각도로 경례한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하게.”

       “넵!”

         

       케일을 만나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가다, 단장실 옆에서 익숙한 단발머리가 보였다.

         

       “라데아?”

         

       휙. 이름을 듣자 고개를 돌린 라데아는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진 오… 공작부군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아직도 호칭이 익숙하지 않구나.

         

       “케일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너도 들어와.”

       “아, 잠깐…!”

         

       단장실의 문을 열었다. 달칵. 케일은 책상 위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

       “흠흠.”

         

       라데아는 이를 알고 있었는지 시선을 돌린 채 헛기침을 내뱉었다. 워낙 평화로운지라 딱히 화낼 일은 아니었다.

         

       저벅. 저벅. 걸음을 내디뎌 책상 앞에 섰다.

         

       “케일, 일어나라.”

       “…….”

       “케일?”

       “…….”

         

       이후에도 여러 번 불러 봤지만, 전혀 미동이 없었다. 최근 할 게 없다 보니 또 술을 진탕 먹은 거 같은데…….

         

       ‘얘를 깨울 땐 이게 최고지.’

         

       팔을 들어 책상을 내려치려던 찰나, 라데아가 서둘러 달려와 케일을 흔들었다.

         

       “아저씨! 아저씨!”

         

       어찌나 거세게 흔드는지 책상이 들썩였다.

         

       “큽, 크흡? 뭐지?”

         

       드디어 잠에서 깬 케일이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비볐다.

         

       “잠은 다 잤나? 어디 숲속의 공주님도 아니고 잘도 자더군.”

         

       굳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케일은 크흠, 잠긴 목을 고쳤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지?”

       “조만간 해외로 여행 갈 생각이다.”

       “여행?”

       “정말요?!”

         

       별안간 옆에 있던 라데아가 목청을 높였다.

         

       “혹시 라이아도 데려가도 되나요?”

       “물론이지.”

         

       라데아는 방긋 미소지으며 콧김을 내뿜었다. 예전에 사하라 여행이 좋긴 했나 보군.

         

       “아무튼, 케일 너는 갈 건가?”

       “글쎄. 귀찮을 거 같군.”

       “일이라 해도?”

       “일이면 가야겠지.”

         

       케일은 심드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억지로 데려가고 싶진 않은데.

         

       ‘그게 좋겠군.’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가 좋아할 만한 미끼를 던졌다.

         

       “내가 예전에 갔던 곳 중에 자유 도시 판테온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쪽에 술 종류가 다양하더군.”

         

       그리 말하고 슬쩍 눈치를 봤다. 케일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새하얀 빛깔을 띠고 달콤한 맛을 가진 술과 투명하면서 깔끔한 맛을 가진 술. 뜨겁게 데워 먹는 술도 있고, 많은 종류가 있던데…….”

         

       힐끔. 눈동자를 슬쩍 굴려보니 내 말을 경청하고 있는 케일이 보였다. 넘어왔군.

         

       “그런데 갈 생각이 별로 없으면 오지 않아도 된다. 일이라 해도 사실상 휴가와 비슷한 느낌인지라. 라데아는 갈 거지?”

         

       라데아는 “물론이죠!” 하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크흠, 제국의 공작이 나라를 넘어가는데 기사단장이 되어서 안 갈 순 없지. 나도 따라가겠다.”

         

       케일이 고개를 주억이며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모르쇠로 넘어갔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그냥 남아있어라. 여행은 우리끼리 다녀오지.”

         

       어깨를 으쓱이곤 웃으며 라데아를 바라봤다. 여행 갈 생각에 들떴는지 입꼬리가 상시로 올라가 있었다.

         

       “크흠…….”

         

       인제 와서 꼭 가고 싶다고 말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겠지. 나는 픽 웃었다.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할까.

         

       “그래도 명색이 기사단장이니 와줬으면 좋겠군.”

         

       반가운 소식에 케일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때를 기다리고 있지.”

         

       이거로 케일과 라데아는 포섭 완료. 남은 건 카자르와 헬레나다.

         

         

       * * *

         

         

       저택 내부에 있는 카자르의 연구실.

         

       사용인들이 관리해주는 만큼 예전에 살던 집처럼 더럽진 않지만…….

         

       ‘이게 천성인가?’

         

       여전히 사람의 방이 아니었다.

         

       다 쓴 마도구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고, 마력이 다해 빛을 잃은 마석은 적당히 구석에 처박혀 있다.

         

       필요한 정보만 딱 빼 온 책은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아 펼쳐진 채로 책상 위에 늘어져 있었다.

         

       “…카자르.”

       “어, 깜짝이야!”

         

       마력이 흐르는 안경을 쓴 채 연구에 몰두하던 카자르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언제 오셨어요? 소리도 안 났는데.”

       “여러 번 부르고 노크도 했다.”

       “그래요?”

         

       카자르는 마력으로 줄기를 만들더니 구석에 박혀있던 의자 하나를 가져왔다.

         

       “무슨 일이세요?”

       “조만간 여행가려고.”

       “여행이요?”

         

       눈에 쓴 마도구를 벗어 내려놓은 카자르는 미간을 주물렀다.

         

       “갑자기 웬 여행이에요?”

       “신혼이잖아.”

       “그런데 저도 가요?”

       “우리 가는 김에 너네도 휴가 주려고.”

         

       휴가라는 말에 그제야 카자르도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휴가라. 저는 굳이 갈 생각은 없네요. 중요한 연구가 막바지라서요.”

         

       나는 “무슨 연구?”하고 되물었다.

         

       “성별 전환 마법이에요. 원할 때마다 바꿀 수 있도록 개량하고 있거든요.”

         

       흠칫. 성별 전환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몸이 들썩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자르는 신나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술식을 개변하고 마력의 흐름을 고쳐서 부작용을 없애고 있거든요. 단순한 변신 마법에 가까워졌다고 보는 게 좋겠네요.”

         

       무엇 때문에 그 마법을 연구하는 건지. 이걸 그녀에게 묻자, 카자르는 흔쾌히 대답했다.

         

       “달리아 씨요. 여기에만 갇혀있는 게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남자로 변하면 꽃미남이실 거 같아서 흥미가 생기네요.”

         

       후자가 목표고 전자는 그냥 덤인 거 같은데.

         

       “그냥 네 호기심이 아니고?”

       “그것도 맞네요.”

         

       카자르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호기심에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마법사에게 호기심을 빼면 시체와 같긴 한데…….’

         

       그래도 성별 전환 마법을 남에게 쓸 생각으로 연구하고 있다니, 무섭지 않은가.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여행 말인데, 다들 빠짐없이 간다는데 정말 안 갈 거야?”

       “아까도 말했다시피 연구 때문에 시간이 좀 애매해서요. 일정이 어떻게 되는데요?”

       “남은 일 처리가 끝나야 하니 최소한 다음 주는 되어야 하지 싶은데.”

         

       프란체의 일이 많지는 않을 거다. 안건을 확인하고 도장만 찍으면 되니까.

         

       “일주일이라, 그러면 괜찮을 거 같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카자르. 동의를 얻었다.

         

       “다행이군. 그러면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달칵. 카자르의 연구실 문이 열렸다.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헬레나였다.

         

       “공작부군님? 여기 계셨군요.”

       “무슨 일이지?”

       “공작님께서 찾고 계세요.”

         

       프란체가? 나는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무슨 일로?”

       “중요한 안건이 있으시다고…….”

         

       나를 부를 정도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인 거 같은데.

         

       “알겠다. 바로 가지.”

       “네.”

         

       자리에서 일어나 카자르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곤, 헬레나와 같이 집무실로 향했다.

         

       가던 길에 물었다.

         

       “헬레나, 해외여행에 관심 있나?”

       “…해외여행이요?”

       “그래.”

         

       눈썹을 좁히고 턱을 짚은 채 눈을 끔뻑이는 헬레나.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가고야 싶긴 한데, 형편이 안 돼서요. 시간이 없기도 하고요. 하하…….”

         

       헬레나는 긴 생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멋쩍게 웃었다.

         

       “그럼 이번에 같이 가는 게 좋겠군.”

       “네?”

       “모두와 해외로 여행 갈 생각이야.”

         

       그리 말하자 헬레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저도 가요?”

       “그래. 헬레나도 여기서 고생 많았으니까.”

         

       프란체의 첫 아군이나 다름없는 그녀다. 챙겨주지 않으면 섭섭하지.

         

       “그,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는 허리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아니야. 우리가 더 고맙지.”

         

       그러던 사이 집무실에 도착하고. 헬레나와 헤어진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프란체?”

         

       내 부름에 고개를 번쩍 드는 프란체.

         

       “왔구나! 빨리 이리로…!”

         

       무언가 급한 일인지 손짓까지 하며 재촉하는 프란체.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여기 앉아.”

         

       집무실 책상 옆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급한 일 아니었나? 일단 앉았다.

         

       그러자 프란체는 별안간 펜을 내려놓고 내게 안겼다. 목과 쇄골 사이에 고개를 파묻곤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웁…….”

         

       하아, 크게 숨을 내쉰 프란체는 만족스러운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뭔데?”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프란체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기운이 부족해서 불렀어. 안 되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이유였지만, 워낙 무결한 미소인지라 실소가 나왔다.

         

       “딱히 안 될 건 없고.”

         

       허락의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자 프란체는 내 목에 입술을 맞대며 더욱 파고들었다.

         

       “후우, 너무 좋아…….”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 더미를 바라봤다. 영지 관련 일이 꽤 많다. 이래서 내가 도운다고 했던 건데.

         

       “도울까?”

       “절대 안 돼.”

         

       그러나 프란체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냥, 그냥 이러고 있어 주면 돼.”

       “…….”

       “후읍…….”

         

       그날 나는 그녀의 애착 인형처럼 옆에서 목을 내줘야 했다. 곳곳에 붉은 멍과 깨문 자국이 생기는 건 덤이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고대하던 여행이 다가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다음화 보기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