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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7

        

         심상치 않은 경고를 들은 리처드 씨가 퇴장한 후, 세 사람만 남은 자리에 사람 하나쯤 기절한 것 같은 정적이 맴돌았다.

         

         나는 이 인간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아는 체를 한 건가 불안감에 몸을 굳히느라.

         라구스 씨는 갑자기 그가 끼어들은 연유를 따라잡기가 어려워서.

         아론은… 지 혼자 신났네 아주 그냥. 아으.

         

         시선을 받는 걸 태생적으로 즐기거나, 뭔가 분위기 만들고 행사를 주도하는데 말초적 쾌감을 느끼는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쩜 저렇게 사람 마음을 휘저어 놓는 행위를 싱글벙글하면서 저지를 수가 있을까.

         

         …뭐, 왜 또 날 보면서 웃는데. 뭔지는 몰라도 하지 마라, 겁나 무서우니까. ……제발.

         

         “잠깐, ……실장님? 그게 무슨, 혹시 아는… 분이십니까?”

         

         이쪽을 한차례 흘긋거린 라구스 씨가 일부 단어 선택에 애를 먹으면서도 몸을 돌려 앉았다.

         

         아마 겉으로는 막연히 말을 흐리고 있어도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까까지도 지부장 권한을 앞세워서라도 답보 상태를 해소해야 하나, 아니면 계속 무의미한 질문이나 툭툭 던져야 하나. 답답한 기색이 만연한 채로 있던 게 보였는데.

         

         나와 아론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라든가, 자신과 여태 주거니 받거니 하던 여자는 그럼 어떤 의도로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라든가.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든 조미료가 팍팍 추가되자, 자칫 하극상을 벌이느니 차라리 내 신원이 분명해지기 전엔 교류를 미뤄야 한다는 합리적 결론에 도달한 것처럼 느껴졌다.

         

         저 악질 임원의 수작질을 직감하고, 어떻게든 피해를 덜 보고자 노력하는 찡한 모습에 괜스레 지켜보는 내가 다 공감되었다.

         

         아, 안심하시죠. 얼굴도 모르는 제가 아론이나 비슷한 그런 고위 인사일 리가 없잖아요?

         나도 얘 머리속에 들은 건 전혀 짐작도 안 가요. 그냥 같이 놀림당할 동지가 있어서 다행이네~ 하고 쳐다봤을 뿐입니다. 예.

         

         “알다마다요! 그녀는 파라다이스의 소중한 외부 고문(Consultant)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정예 자원이십니다? 그것도 요즘 모시기 힘들다는 사이버 공학 분야와 침투 공작의 귀재이시니… 외려 제가 더 신경을 써서 모셨어야 하는데, 이거 부끄럽네요.”

         

         “……그렇습니까?”

         

         ‘와… 시나리오 만드는 건 완전 도가 텄네, 도가 텄어.’

         

         방 안에 있는 사람 중 최소 66%에 달하는 인원이 속으로 자기를 씹느라 바쁜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어깨에 손을 얹는 걸로 자연스럽게 지부장의 시선을 돌렸으니.

         

         “아하하….”

         

         꼼짝없이 살피는 눈에 노출된 난 억지로라도 웃어 보였다. 무릎 위에 놓여있던 손도 들어서 어색하게 꼼지락거렸고.

         참… 간신히 퇴직한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간악한 말 몇 마디에 또 취직-가짜-을 당한 걸 보면 이 동네 근로 계약은 정말 글러먹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할 때는 99%의 진실에 1%의 가식만을 섞는 게 비법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론 이 놈은 배합비가 정반대에 가까웠다. 도대체 저 화려한 언변 어디에 팩트가 있냐고요. 허풍과 기만이라면 가득해도.

         

         더군다나 외부 고문은… 참나.

         

         그간 쇼우 옆에서 메가코프 내부 사정을 곁눈질하면서 느낀 바가 있는데, 그건 바로 내 한계는 딱 용병 정도라는 것이다.

         

         전부 전산상으로 이루어지는 업무라면 가까스로 맞출 수 있을지 몰라도, 머리도 몸도 어지러운 속도로 굴러가는 최전방 사무직의 템포를 따라가기엔…… 씁, 아마 내가 체력적으로 못 버티지 않을까?

         

         ‘에이…… 설마 내가 별말없이 가만히 맞춰주고 있다고. 진짜로 슬쩍 끼워 넣을 셈은 아니겠지…?’

         

         아무튼 ‘한 식구’라는 임시 조치 겸 울타리로 갈등을 봉합한 건 썩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여전히 이 인간들이 세트로 튀어나온 이유는 몰라도, 나야 사실 굿이나 보고 집이나 사면 그만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둘 다 그만 떠들고 망할 계약서에 싸인이나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방금 갱신받은 인사 기록부에도 저기 아나스타샤님과 일치하는 분은 안 보입니다만… 아니, 아론 실장님. 아무러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직원이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것도…….”

         

         “어디, 공식 명부에 등재되지 않은 사람이 한둘입니까? 물론 그 중에서도 아나스타샤 양은 아주 특별한 분이라 원래는 지부장님 선에-따위에게– 노출이 되면 안 됐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아하핫!!”

         

         “…….”

         

         냉방이 특별히 과하게 작동하는 것도 아니거늘.

         실내 기온이 뚝 떨어진 것처럼 체감돼서 나도 모르게 팔뚝을 살살 쓸어내렸다.

         

         말에 좀 가시가 돋아나고, 그래도 나란히 붙어 앉아있던 둘의 거리가 수직으로 벌어지는 게 환각 마냥 보여서 아찔하기는 한데… 괜찮겠지?

         

         마치 나라는 이물처럼. 네오 헤이븐 프라임에 돌연 추가된 아론 드레이퓨스라는 사람을 다른 기존 캐릭터들만큼 잘 안다고 말하면 그건 분명 거짓이겠으나.

         

         여러차례 마찰을 빚고 실랑이를 벌이면서 겪어본 바로 그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전략가가 틀림없다. 그야… 장렬한 협박성 멘트나 그걸 뒤잇는 감미로운 회유를 거리낌 없이 휘두르는 독한 면모가 강하긴 하지만!

         

         그러니 기껏해야 사적으로 운용하기 쉬운 유능한 해커 한 명 챙겨주겠답시고 멀쩡한 지부장을 갈아버리거나… 헤이븐 위키에서 라구스라는 인물의 항목이 사라질만한 처사를 저지르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어쨌거나 같은 파라다이스 소속 간부들이니까.

         

         ……그렇지? 무조건 그렇다고 말해.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처럼 서로 노려보지 말고!

         

         내가 속으로 벌벌 떨면서 빌거나 말거나, 관계자 회의를 빙자한 그들의 신경전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말입니다… 당장 인과가 의심스럽다고 본인의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을 엉뚱한 곳에 물으려 드시면 굉장히 곤란합니다?? 머저리 말단 하나 공사하라고 일일이 지시할 정도로 제가 한가하진 않거든요.”

         

         “큭…!!”

         

         깨문 입술에 붉은 액체가 방울졌다.

         ‘애당초 손을 쓴 게 저라면 감히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지도 않았을 테고요~’ 라며 흥얼거리는 뒷말은 제대로 들었어도 돌려줄 말이 없었다.

         

         다른 오싹한, 되는대로 발을 들이밀었다가는 코가 꿰일 것 같은 단어들에 반응하기는 더 힘들었고.

         

         ……아니, 너는 왜 가만히 있던 남의 집을 욕하냐. 차라리 날 욕해! 아직 이삿짐도 못 풀었는데 진짜 너무하네. 야!!

         

         ‘이씨…!’

         

         자세한 내막도 모르는 언쟁에 함부로 구조선을 내기는 어렵지만, 가만있다가 뜬금없이 지적질을 당한 당사자로서 째려보는 정도는 괜찮으리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열심히 아론에게 눈총을 주었으니.

         

         내 소심한 반항이나 투덜거리던 내심이 결실을 맺은 것일까?

         

         기적처럼, 누구 하나가 기어이 부러져야-만약 그런다면 주로 압도적 을의 입장인 라구스 씨가 되었겠지만- 끝날 것 같던 언쟁은.

         

         왠지는 몰라도 내 신호를 적극 수용해준 아론이 지옥 같은 괴롭힘을 마무리하고, 피해자가 처우를 수용하는 걸로 끝을 맺었다.

         

         슬그머니 머리를 기울인 아론이 라구스의 귓가에 중얼거린 말은 아무리 귀를 바짝 세워도 들리지 않아서 결국 제로에게 전달까지 부탁했고.

         

         “너무 깊이 알려 드는 걸 티 내고 다니진 마세요, 라구스. 옛 친구로서 드리는 조언입니다? …똑바로 알아들었으면 이만 나가서 기다리시지요. 자세한 사안은 나중에 전달할 터이니.”

         

         “……송구합니다. 지부장 라구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어느새 생글거리는 얼굴로 돌아온 아론에게 한 번, 그리고 넘쳐흐르는 매너로 나한테까지 목례를 해 보인 그도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렇게 다소 살벌하기는 해도 무사히 해소된 위기 상황에 안심한 것도 잠시.

         이러면 나랑 제로. 거기에 아론밖에 방에 안 남았는데, 과연 이게 더 나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나…? 하는 암울한 감상이 솔솔 피어올랐다.

         

         역시 무슨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거냐고 내가 먼저 물어보는 게 맞겠지?

         ‘누추한 곳이라 미안하네요~’ 라며 있는 힘껏 비꼬아주고 싶어도 이놈은 진짜 그리 느껴서 꺼낸 말일 테니까 전혀 소용없겠고.

         

         게다가 또 얼마나 귀찮은 일거리를 들고 왔을지도 상상해보니까, 음….

         설마 그때 드로이드 부품 좀 멋대로 긁었다고 추노하러 왔을 리도 없으니…… 아오 이 더러운 자본가 녀석,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다니!

         

         “…뭐, 그래서.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듣고 있으니까.”

         

         “흐흐흠…♪”

         

         고민 끝에 입밖으로 나온 건 결국 꽤 단도직입적이고 야박한 물음이었다.

         

         배경적인 차이가 있기는 해도 아론과 나 두 개인 간엔 비즈니스적으로 동등한 입장이라는 요소도 분명 존재했기에, 마냥 내가 숙여줄 필요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정립된 관계를 망쳐서도 안 되는 거고.

         

         쫄지 마라, 나.

         이럴수록 세게 나가야 바가지를 안 쓰는 거야. 이미 허가서를 대납해준 탓에 약간 지고 들어가는 상황이기는 해도 당당하기만 하면….

         

         “도청은…… 딱히 걱정 안 해도 괜찮겠군요. 어련히 알아서 정리해 두셨겠죠.”

         

         “어.”

         

         그건 내가 뭐 연예인도 아닐뿐더러 여기가 적진 한복판도 아니니, 안전 강박을 넘어 피해 망상 같아서 전혀 신경 안 썼는데.

         

         저기 제로? 혹시 체크했어?

         아, 파라다이스 병력을 보자마자 한 바퀴 돌면서 실내는 점검했다고? …네가 최고야. 응.

         

         “……당연하지!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기는.”

         

         “하핫!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대범하게, 이런 곳에서 내밀한 회동을 여실 줄은 몰랐던 터라 그런지 옛날처럼… 조금 두근거리는군요.”

         

         단번에 무너질 뻔한 철벽 태도를 겨우 수습했다. 덤으로 휘청이려는 등골에도 힘을 빡 줘서 바로잡았고.

         

         그런데 비밀 회동은 무슨 소리일까, 너가 찾아왔지 내가 불렀냐?

         거 말도 참 이상하게 하네.

         

         “그럼 어디… 아샤 양이 그리시는 그림과, 구상하고 계신 비밀 결사(Cabal)의 명칭이라도 몰래 엿들을 수 있을까요? 아! 거기서 제가 담당한 직책만 알려주셔도 영광이긴 합니다만.”

         

         “…? 아니, 므……뭐?”

         

         경련하는 입꼬리와 눈가를 급하게 제어해봐도, 자기도 그쯤은 유추할 수 있다는 것처럼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론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웃음을 더욱 진하게 하며 손을 깍지 껴 보였을 뿐.

         

         그… 시발. 확신하건대 아무래도 이 괴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겸사겸사 미래를 대비한다고 포섭을 시도할 때, 내가 엄청 큰 실수를 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저 괜한 견제를 피하고자 물밑에서 원작 등장인물들 좀 만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고….

         

         하여간 내 행적을 뒤에서 얼마나 조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진짜로 얼마 안 남은 프롤로그와 주인공이라는 존재를 대비해서 재정과 무력, 양방면의 기반을 마련하려고 공들인 걸 저런 식으로 심각하게 왜곡할 수가 있을……까?

         

         

         ……………어럽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 아론이 계속 떠드는데, 간단한 대꾸조차 없이 새침하게 눈빛만으로 흘려 넘긴 무시무시한 사람’

    논리 탐정 아론의 추리쇼(아님)은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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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그치만 택시비를 챙겨주셔도 진짜 힘들 것… 같은데… 어흑마이깟.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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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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