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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8

    여름은 자연이 생명으로 넘치는 계절이다.

    그러니 숲 속의 생명체들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또 그 날이 다가왔다.

     

    몬스터 웨이브.

     

    이 시기의 몬스터 웨이브는 사실 숲지기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날이다.

     

    더운 날씨는 필연적으로 많은 땀을 유발했으며, 당연스럽게도 많은 땀은 축축함과 불쾌감을 유발했다.

    그런 몸을 이끌고 몬스터를 소탕하며 숲을 누빈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문이나 다름없는 끔찍한 경험이었으니까.

     

    그나마 그 노고를 윗선에서도 알아주는 덕분에 여름철의 추가수당은 굉장히 높다는 점이 숲지기들의 위안이었다.

     

    그러나 아직 제 컨디션을 낼 수 없는 예르나는 숲에 남아있을 수 없었고, 덕분에 루크와 파이리스, 예르나는 숲의 숙소에서 벗어나 집에서 더위를 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예르나의 집에 들어온 것이다.

     

    그동안은 자신의 몸도 평소보다는 살짝 불편하다보니 혼자 생활하는 것 보다는 다이튼의 집에서 디아나와 놀아주며 신세를 지곤 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굉장히 반가웠다.

    신발을 벗고, 짐을 내려놓을 때 까지는.

    그 무더위를 뚫고 도착한 예르나의 집은, 그야말로 최종적으로 토벌전쟁이라는 오랜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그 순간에 비견할 만 했다고 생각했다.

     

    분명 이 시대에 돌아갈 고향은 없는 루크지만, 바로 예르나의 집이 고향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루크는 그 고향에서 한가지 끔찍한 점을 간과하였는데, 바로 냉풍기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숲의 숙소에서는 냉풍기가 순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었던지라 그날 하루만 참으면 되었지만, 예르나의 집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고장이 난 거라면 최소한 고쳐보겠다는 시도라도 하겠지만, 아예 없어서야 지금의 루크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그야 한여름에도 그저 창문을 열어두기만 해도 시원하다고 느끼는 엘프에게, 냉풍기처럼 쓸모없는 마도기기는 아마 없을 터.

     

    그렇기에 현재 예르나의 집은, 루크에겐 말 그대로 찜통이나 다름이 없었다.

    원래 더위에 익숙하지 않은 루크라서 더욱 그런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에 몸이 금세 축축해진다.

    천이 땀에 젖어 질척하게 몸에 달라붙는 감각은 아주 끔찍하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의 감각도 굉장히 불쾌하다.

     

    마법사다운 결벽증이 몸에 배어 있는 루크는, 그 감각을 참기가 아주 힘들었다.

     

    마치 살아있는 채 요리되는 듯한 느낌에 루크는 낮게 신음했다.

     

    “더워…….”

     

    어쩜 이리도 끔찍한 계절이란 말인가.

     

    루크는 이제 세번째인 목욕에, 과거 예르나가 사주었던 어깨와 맨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실내복 차림에서 무언가 더 입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분명 처음 이것을 보았을 때는 딱히 입을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옷이지만…….

    역시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이것은 예르나의 선견지명에 박수를 칠 수 밖에.

     

    뭐, 루크도 당장 시원하면 상관이 없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어깨와 다리 정도는 드러내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

     

    딱히 배꼽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평소에 입던 것을 생각해보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장은 짧은 옷이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평소에 입던 잠옷은 진작에 땀이 배어 벗어버렸으니까.

     

    게다가 예르나에겐 진작에 목욕시중까지 받아본 적이 있으니, 설령 나체라고 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 고작 실내복의 배꼽이 조금 불안하다는 이유로 새삼 부끄러운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다.

     

    어째서 루크가 배꼽만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인가 하면, 바로 5000년 전의 보편적인 정조관념 탓이었다.

     

    배꼽이란 부위가 어떤 부위인가?

     

    바로 탯줄의 흔적이다.

     

    그리고 탯줄은 태어날 아기에게 어미가 영양분을 공급하는, 생명의 탄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는 부위이기도 하며, 그것을 자름으로서 어미와 분리되어 하나의 개체로 인정받는, ‘독립’을 상징하는 부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생명과 탄생’, 그리고 ‘독립과 자주성’이라는 상징을 지닌 배꼽은 루크에게는 또 하나의 생식기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뭐, 지금은 격하게 움직일 생각도, 능력도 없으니 별로 상관은 없겠지.’

    이런 옷을 입고서 팔짝팔짝 뛸 것도 아니고, 아무렴 어떻겠는가.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딱히 배꼽이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루크는 꼬리를 대충 빗고는 냉장고를 열었다.

     

    그 안에선 푸른 정령이 나른하게 흔들거리며 루크를 반겼다.

     

    파이가 나른한 모습인 이유는 물론 더위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정령은 더위를 타지 않으니까.

     

    그저 꽤 오랫동안 정령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한 탓이다.

     

    루크는 차가운 얼음이 띄워진 냉차 하나를 꺼낸 뒤, 꼬리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마음같아선 아예 들어가버리고 싶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저체온증으로 위험해질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냉장고의 내부는 냉기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밀폐형 구조로 되어있으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공기가 새로 공급되지 않는다는 말을 의미했다.

    그러니 직접 들어간다면 당연히 질식의 위험성이 있다.

    아무리 불사성을 지녀 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재생은 마나가 필요하니 또 다른 문제다.

    불필요한 고통을 감수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현재 루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꼬리만 냉장고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수인에게 꼬리는 ‘수인화’라는 특성을 제어하기 위한 기관일 뿐 아니라, 체온을 조절하는 역할도있는 기관으로서, 머리와 더불어 많은 열을 배출하는 부위.

     

    그 말은 즉, 꼬리가 시원해진다면, 결과적으로 온 몸이 시원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살짝 열린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차가운 바람은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차가운 냉차까지 한모금 삼키니,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아……. 이게 천국이로구나.”

     

    천국을 직접 느껴볼 기회는 없었지만,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어쩌면, 불행 속에 행복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런 행복감은 더위라는 감각을 모르던 과거엔 도저히 느껴본 적이 없는 종류였으니까.

     

    고된 노동을 마치고 갖는 이 휴식으로 느끼는 이 행복감이, 그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을 살려왔던 것이리라, 루크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

     

    “어후, 털이 꽤 많네.”

     

    그렇게 루크가 한숨을 쉬며 냉장고에 달라붙어 늘어져있을 때, 예르나는 몸을 테이프 롤러, 속칭 ‘돌돌이’로 문지르며 다른 의미로 한숨을 쉬었다.

    다이튼이 이 ‘돌돌이’를 건네주었는 지 이제 뼈저리게 알 것 같았으니까.

     

    루크의 목욕을 도와준 그 잠깐 사이에, 백금빛 털이 꽤 많이 붙어나온 것이다.

     

    처음엔 혹시 탈모인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그냥 털갈이 시기라서 그렇다는 듯 하다.

     

    그건 다행인 일이었다.

    아직 한참 어린 여자아이가 탈모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그나저나 털갈이라니, 정말 평소엔 생각도 안해본 일이었다.

    그야 수인(그것도 털이 많은 종족의 특성이 발현된 수인)을 제외하면 털갈이는 대부분 하지 않고, 평소에는 그런 걸 일부러 생각하며 신경 쓰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루크는 용과 고양이와 유사한 마수의 키메라.

    약간은 용이고, 약간은 고양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탈피도 하고 털갈이도 하는구나, 뭔가 엄청 성가시네…….

     

    그렇게 생각한 예르나는 잠깐 고개를 돌려 루크를 바라보았다.

     

    루크는 여태껏 행복한 표정으로 늘어져있다가, 꼬리가 너무 차가워졌는지 잠깐 꼬리를 냉장고에서 빼서 빗으로 빗으며 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빗은 이미 온통 루크의 꼬리에서 나온 털로 한가득이었다.

    어떻게 빗을 때마다 빗에 저렇게 털이 범벅이 되는 것인지, 그것도 무슨 마법이 아닌가 싶다.

     

    이내 털을 빗는 것을 멈춘 루크는 빗에 붙은 털들을 떼어서 둥글게 말아 자신의 앞에 떼어놓고는 다시 빗질을 시작한다.

    털이 빗에 꽤 쌓이면 잘 빗겨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내 작은 공 수준으로 뭉쳐진 털뭉치를 들고 일어서더니, 평소 자신이 자주 사용하던 상자에 잘 넣어둔다.

    ‘예르나, 이거 쓰레기 아니니까 버리지 말게! 때가 되면 내가 버릴테니.’라고 하던데, 그걸 보면 아무래도 요즘 자기 털뭉치를 모으는 모양이다.

     

    근데 저 털뭉치 대체 왜 모아두는 것일까? 고양이의 본능? 아니면 나중에 갖고 놀려고?

     

    뭐, 귀여우니 상관없긴 한데…….

     

    그러고보니 저 털, 복슬복슬해서 귀엽긴 하지만 아주 더워보였다.

     

    루크가 안 그래도 많이 더워서 힘들어하는데, 꼬리 털을 좀 밀어주는 편이 좋을까?

    요즘 털 치우기 조금 힘들기도 하고.

    그리고, 보니까 요새 거리를 다녀보면 꼬리털 삭발한 수인들 많이 보이던데, 수인인 숲지기 대원들 대부분도 이미 털을 다 밀었고…….

     

    그래서 물어봤다.

     

    “루크, 네 꼬리 털, 밀까? 덥지않아? 털 치우기도 좀 힘들고…….”

     

    그러자, 루크는 굉장히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건 절대 안되네.”

     

    그 진지한 표정에 예르나는 살짝 놀라서 물었다.

     

    “……그렇게 싫어? 왜?”

     

    “그야…….”

     

    언제 시가르마타가 다시 자신을 노려올지는 아직 모른다.

    자신은 5000년이나 지난 시가르마타가 현재 어느 수준의 마법적 능력을 지녔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루크는 시가르마타의 극히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 권한의 편린만으로도 현실은 깨져버릴 정도였다.

     

    최악의 경우, 바로 지금 조건을 충족시켜 현신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뭐, 정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지만.

    본래 차원이란, 그 균열이 끝나는 순간 차원의 경계를 일시적으로 더욱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든다.

     

    마치 고요하던 호수에서 일순 빠져나간 물이 다시 들이닥치며 거친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시가르마타가 현신이라는 이름의 항해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는 리엔느 숲의 사건에 있었던 에너지의 두배이상.

     

    게다가 그 현신이 거의 억지로 이뤄진 것임을 생각해보면, 두번째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자신은 무슨 짓을 하든 승산은 없다.

    그러면 깔끔하게 포기할 수 밖에.

     

    그래도 일단은 대비를 해야한다.

    현재를 포기하면, 미래는 결코 다가오지 않는 법이니까.

     

    일단 일년은 그 차원의 파도가 시가르마타의 현신을 방해해줄것이지만, 그녀라면 분명 자신을 정비해서 그 시간을 단축할 가능성이 크다.

     

    그랬을 때 자신의 머리카락이 충분히 자란 상태일지도 과연 의문이고.

     

    만약 시가르마타가 이후 다시 자신의 위치로 공간을 찢어온다면, 지금 자신의 짧아진 머리카락만으로는 대가가 충분하지 못 할 수도 있었다.

    최고이자 최선은 바로 동일하거나 더 높은 권한으로 압도하는 것이지만, 계획은 언제나 그렇지 못할 것도 대비를 해야한다.

     

    그땐 자신의 꼬리털이라도 사용해야 한다.

    아니, 고작 털만으로 부족해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니 거래에 올릴만한 판돈은 뭐라도 있는 편이 좋다.

    어쩌면 팔 두개, 다리 두개를 바쳐야 할 순간에, 잘하면 팔 하나, 다리 하나만으로도 거래를 끝낼 수가 있으니.

     

    하지만 살아있는 몸에서 떨어진 소재에 깃든 마법적 의미와 상징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떨어진다.

    하물며 털은 다른 신체나 장기에 비해서 그 감소폭이 굉장히 컸다.

     

    그러니 일부러 미리 털을 잘라내 무방비해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을 예르나에게 했다간, 크게 걱정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시가르마타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라니?

     

    시가르마타는 지금 자신만을, 그러니까 ‘자신이 지닌 파르바티의 나머지부분’을 노리고 있다. 예르나를 비롯해 다른 모든 것들에겐 별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 증거로 시가르마타는 예르나를 딜런트의 ‘거래(제물)’로 손에 넣은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상은 이미 제물로 올라가기 전에 진작에 입은 부상이 전부였으니까.

     

    단지, 차원의 틈을 비집고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 소유하기만 했을 뿐…….

     

    만약 자신이 죽고 시가르마타가 선언한 거래가 완료되었다고 해도 예르나는 거래가 끝나면 멀쩡히 살아돌아올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르나가 시가르마타의 위협에 대해서 알 필요는 없다.

    시가르마타가 ‘세계의 멸망’을 거래로 바란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개인적인 일’이니까.

     

    자신이 벌인 일이니, 온전히 자신이 책임을 다해야한다.

     

    최악이라고 해봤자, 루크 이루시로서의 죽음이 전부다.

     

    루크는 이내 다짐처럼 대답을 내뱉었다.

     

    “내 몸의 털 한 올조차 나의 것이다. 나는 조금도 자신을 줄이고 싶지 않다.”

     

    “그……그렇구나.”

     

    털을 밀기 싫다는 말을 꽤 고급지게 하는구나, 하긴. 그게 바로 루의 매력이지…….

     

    저 단발도 그 괴물에게서 이기기위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했다는 모양이니까.

     

    ‘그래도 그 머리 나름 귀여우니까, 그렇게까지 날카롭지 않아도 될 텐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예르나는 참았다.

     

    루크는 귀엽다는 말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주 잘 아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지금까지 루크가 입은 옷, 잠옷을 제외하고 보면 언제나 상의를 하의에 넣어서입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사실은 다 배꼽 가리려던 거였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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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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