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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8

       페델리안 제국의 서쪽 끝.

       

       마차를 타고 오랜 시간 동안 이동한 끝에, 푸르름의 도시라 불리오는 알토리아 항구에 도착했다.

       

       대륙을 횡단해서 자유 도시 판테온으로 향해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여행 기간이 너무 늘어나기도 하고 피로가 쌓여 바다로 이동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비릿한 냄새네.”

       

       마차에서 내린 프란체가 도끼눈을 뜬 채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녀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꾸으윽, 바다가 근처니까요!”

       

       카자르가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다들 어디갔니? 왜 우리밖에 없어?”

       

       고개를 슬쩍 두리번거리던 프란체가 물었다.

       

       “케일 씨랑 라데아는 말을 맡기러 갔고요. 달리아 씨는 헬레나랑 라이아를 데리고 상점가로 갔어요.”

       

       도착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돌아다니고 있다.

       

       “…길을 잃지는 않겠지?”

       “그러지 않을까요? 달리아 씨니까요.”

       

       그 말에 프란체도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네. 알아서 할 수 있겠지.”

       

       달리아가 그룹의 리더라면 중간에 이상한 길로 빠지진 않을 거다. 똑부러진 헬레나도 같이 있고.

       

       호위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게 좀 걸리지만, 이상한 놈들을 만나도 달리아가 처리하겠지.

       

       그녀가 있으니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프란체 코퍼레이션에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오다니, 우리 회사는 인재가 많다.

       

       “출항은 언제니?”

       “내일 새벽이야.”

       “그럼 시간이 꽤 남는구나.”

       

       지금은 해가 번쩍거리는 점심 때. 초저녁까지는 알토리아 항구를 자유롭게 관광할 수 있다.

       

       “어떡할래? 피곤하면 숙소 잡아서 쉬어도 되는데.”

       

       프란체에게 묻자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힘들구나. 숙소 잡아서 쉬자.”

       

       처음 마차에 탑승했을 때만 해도 내게 꼭 붙어서 연신 키스 공세를 퍼붓던 프란체였지만, 장시간 이동은 익숙지 않은지라 중간부터는 잠만 청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숙소부터 잡자. 카자르? 모두에게 연락을 줄 수 있어?”

       “네. 연락용 마도 통신구를 나눠줬으니 괜찮을 거예요.”

       

       나는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틀거리는 프란체를 부축한 채 주변 숙소를 둘러봤다.

       

       ‘적당한 곳은 안 돼.’

       

       노숙과 아영도 해본 나는 몰라도 프란체에게 어중간한 숙소를 잡아줄 순 없다. 꼼꼼히 보고 골라야지.

       

       “이동하자.”

       

       걸음을 옮겨 여관이 모인 길목에 들어섰다. 이곳이 항구인 만큼 일반적인 여관보단 선원들을 위한 술집 여관이 많았다.

       

       ‘곤란하네.’

       

       우리 쪽 일행에는 미인이 많다. 편협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술에 취하면 보통 눈에 뵈는 게 없는지라 귀찮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적당한 곳으로 가면 안 되니?”

       

       문득 프란체가 물었다. 표정에서 불쾌함이 솟구치고 있다.

       

       “그래도 프란체가 머물 곳인데 이상한 곳은 안 되잖아.”

       

       내가 노숙하거나 야영하는 건 참아도 프란체가 허름한 시설에서 자는 건 못 참는다.

       

       “…나는 딱히 상관없는데?”

       “아니, 절대 안 돼.”

       

       단호하게 자르자 프란체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어, 저기 어때요?”

       

       조용히 주변을 살피던 카자르가 손가락을 뻗어 가리켰다. 여관의 이름은 그랑시아. 다른 곳과 다르게 깔끔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지어졌나 보네.’

       

       저런 외관이면 내부도 깔끔하겠지. 저기로 정했다.

       

       “저기로 가자. 카자르? 다들 불러줘.”

       “네.”

       

       카자르가 통신 마도구를 통해 모두에게 연락을 보내고, 우리는 그랑시아라는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예상대로 외관과 같이 내부도 깔끔했다. 다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

       “…….”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모였다.

       

       황도 사교계에서도 절세미인이라 불리는 프란체와 카자르다. 저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게 이상하지.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괜한 일이 생기기 전, 먼저 손을 써두자는 생각으로 오러를 통해 살기를 방출했다.

       

       일순 그랑시아 여관 내부의 공기가 가라앉으며 스산한 기운이 올라왔다.

       

       “크, 크헉!”

       “어, 허흑!”

       “수, 술이나 먹으세!”

       

       시선을 보내던 선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흉흉한 살기에 피부가 따끔거리는지, 다들 팔뚝이나 목덜미를 문질렀다.

       

       “…뭐했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갑자기 기운이 이상해졌는데.”

       

       프란체는 감각이 둔해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카자르는 바로 기운의 변화를 알아챘다.

       

       “됐고. 접수하고 올 테니 공작님 잘 지키고 있어.”

       

       나는 그리 말하고 계산대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주인장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방 있나?”

       “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 지금 다섯 개가 남습니다…!”

       

       그러면 충분하겠군.

       

       “방 종류는?”

       

       여관 주인은 오소소 몸을 떨며 남은 방의 소개를 해주었다.

       

       “더, 더블룸 하나, 싱글룸 둘, 트윈룸 하나, 스위트룸 하나입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몇 층이지?”

       “…전부 3층입니다.”

       “다른 방은 있나?”

       “말씀드린 방만 있습니다…….”

       

       다른 녀석들이랑 엮일 일은 없겠군. 나는 돈주머니를 접수대 위에 올려두었다.

       

       “3층 전부를 빌리지. 식사 포함 숙박비다. 남은 건 팁으로 가져.”

       

       주인장은 조심스레 주머니 안을 확인했다. 새파랗게 질렸던 안색이 환하게 빛났다.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습니다!”

       

       이래서 돈이 좋다니까.

       

       

       * * *

       

       

       적당히 방 배치가 끝났다.

       

       2인용 침대인 더블룸은 라데아 자매.

       

       1인용 침대가 둘인 트윈룸에는 카자르와 달리아.

       

       침대가 하나뿐인 싱글룸에는 각각 케일과 헬레나가 들어갔다.

       

       가장 공간이 넓은 스위트룸은 나와 프란체가 차지했다. 그에 따라 모두들 스위트룸에 모였다.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니?”

       “뭐가?”

       “꽤 위협적으로 나온 거 같던데.”

       

       이 아가씨가 뭘 모르네.

       

       “이런 곳에선 기선 제압이 중요해. 괜히 얕보였다간 귀찮은 일에 휘말릴 테니까.”

       

       여기는 제국 끝자락에 있는 항구 도시. 여타 암흑가와 달리 치안이 나쁜 건 아니지만, 어둠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공작부군의 말대로다. 내가 용병 생활을 할 때도 주제를 모르는 것들은 어디에나 항상 많았다. 하물며 이곳은 술집이 딸려있으니 더 그렇겠지.”

       

       케일이 내 말에 거들었다. 역시, 야생과도 같은 용병 생활을 해온지라 생태계를 잘 알고 있다.

       

       “너희가 그렇다면야…….”

       

       프란체는 우리의 단호한 의견에 납득하곤 고개를 주억였다. 나는 모두에게 말했다.

       

       “내일 일찍 나가야 하니 초저녁까지만 자유시간이야. 다들 원하는 대로 해도 좋지만 통신 마도구는 무조건 챙기고, 최소 둘 씩 같이 움직여.”

       

       다들 강자의 영역에 발을 디딘 자들이라 내가 과보호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지만, 단체 여행인지라 어쩔 수 없다.

       

       모두 내 말의 본뜻을 이해했는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케일 아저씨! 저희랑 돌아다녀요!”

       “…내가 왜?”

       “아저씨가 보호자 해주셔야죠.”

       “너도 소드 마스터잖나.”

       

       라데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아저씨 혼자 돌아다닐까 봐 배려해서 말씀드린 건데.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쯧쯧.”

       

       그에 케일이 “뭣?!”하면서 몸을 들썩였다.

       

       “아무튼, 빨리 나가요.”

       

       라데아 자매와 케일이 자리를 비우고.

       

       “카자르 씨, 바다를 같이 구경해도 될까요?”

       “그래요. 항구에 왔으니 바다를 봐야죠.”

       “헬레나도 가자. 바다 보고 싶어 했잖아?”

       “앗, 네!”

       

       카자르, 달리아, 헬레나도 항구의 바다를 구경하러 나갔다.

       

       방금까지 시끌벅적했던 스위트룸에 정적이 찾아왔다.

       

       “…드디어 둘만 남았네?”

       

       프란체가 씩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어느샌가 치맛자락을 옆으로 젖힌 채 요염하게 맨다리를 드러내고 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면서, 대놓고 유혹하는 거다.

       

       “이동하느라 그간 못했잖아…? 그러니까…….”

       

       사실 쉬자고 했던 게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나. 나는 픽 웃으며 외투를 벗었다.

       

       “조금만 할 거야.”

       “으응…….”

       

       나는 셔츠의 단추를 풀며 침대에 걸터앉은 프란체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풀썩, 뒤로 누우며 내 목덜미를 휘감아 당겼다.

       

       

       * * *

       

       

       해가 뜨기 시작하는 새벽.

       

       곧 출항 시간인지라 모두 짐을 챙긴 채 항구로 나왔다.

       

       다들 잠이 들깬 상태여서 비몽사몽하고 있던 도중, 달리아가 유심히 내 얼굴을 지켜보더니 눈을 얕게 뜨며 쏘아붙였다.

       

       “어제 다섯 번 넘게 했죠?”

       “…….”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닌데.”

       “…….”

       “어쩐지. 침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만.”

       

       의원이라 그런지 권장 횟수를 아득히 넘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그런데 어떡하나. 며칠간 이동하느라 그녀도, 나도 참아왔는걸.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닌 건 정기가 빨려서도 있지만, 몸을 못 일으키는 프란체에게 힘을 나눠줘서 그런 거다.

       

       “…어제만 특별한 거였어.”

       “매번 그렇게 넘어갈 생각이시죠?”

       “…….”

       “하아, 정기는 정말 중요하다니깐.”

       

       달리아는 고개를 내젓더니 짐을 챙겨 헬레나와 같이 승선했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케일과 라데아 자매는 어느샌가 이미 올라가서 선상에 서 있었다.

       

       “크, 크흠. 저희도 올라가죠…?”

       

       묘하게 눈치를 보던 카자르가 조용히 말했다. 내 목에 깨문 자국과 붉은 멍이 대놓고 드러나서 민망한 듯했다.

       

       “…그러지.”

       

       나는 프란체가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꼭 잡은 채 승선했다.

       

       깔끔하면서 매끄러운 목재. 표가 비싼 만큼 유람선의 내부는 입구부터 상당히 고풍스러웠다.

       

       “밖에서 본 크기로 예상은 했지만, 엄청 넓구나. 분위기도 좋고.”

       

       프란체의 말대로였다. 유람선이라고 해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만,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음, 괜찮네요.”

       

       고개를 주억인 카자르가 심오한 눈빛으로 곳곳을 바라봤다.

       

       “돈 많은 귀족이 유람선에 타는 이유를 알 거 같아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대부호가 된 느낌이에요.”

       

       그냥 단순히 여행 목적이 아닐까, 했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저리 흥미 가득한 눈으로 보는데 분위기를 깰 순 없지.

       

       “배정된 방으로 가죠. 카자르도 짐 풀고 와. 다들 최상층 갑판에서 모이자.”

       

       카자르는 네, 하고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배정된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하여 필요한 짐을 다 풀고. 갑판으로 올라오자 유람선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울려 퍼졌다.

       

       -우우웅!!

       

       웅장한 고동에 순간적으로 프란체가 미간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배가 출발했다.

       

       파도를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유람선 위에서 선선하면서 상쾌한 바닷바람을 맞이했다.

       

       다들 표정이 괜찮은 거로 보아 멀미는 하지 않는 듯했다.

       

       “평화롭구나. 공기도 좋고.”

       “그러게. 마음이 편해지네.”

       

       프란체가 싱긋 웃으며 내 손을 꼭 부여잡았다. 이어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그녀의 매끈한 피부가 손등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이 배는 바로 자유 도시 판테온으로 향하는 거니?”

       

       시선을 올려다보며 묻는 프란체. 나는 옅게 웃곤 대답했다.

       

       “아니, 중간에 아이론 왕국에 들를 거야.”

       “아이론 왕국?”

       “뱃사람들도 쉬어야지.”

       “아하, 그렇네.”

       

       프란체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유람선의 항로는 페델리안 제국에서 출발해 아이론 왕국에 잠시 들렀다가 자유 도시 판테온까지.

       

       참고로 이 항로는 조선소를 운영하는 귀족이 신혼인 우리가 여행 간다는 소식을 듣고 준비해준 것이다.

       

       배를 통째로 빌려준다던 걸 부담스럽다고 거절했더니, 울면서 받아달라길래 항로만 만들어주는 거로 합의했다.

       

       ‘데카르트에 잘 보여야하긴 하지.’

       

       그게 지금 제국의 실세. 데카르트 공작가의 위치다.

       

       “후음…….”

       

       갑판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이하며 드넓은 수평선을 구경하던 사이, 프란체가 내 품에 파고들었다.

       

       목에 입술을 맞추며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있는 걸 보니 또 내 체취를 맡는 듯했다.

       

       프란체는 이대로 즐기시게 두고.

       

       ‘다들 어디에 있지?’

       

       둘러보니 다 같이 모여서 카자르의 마법으로 줄기를 만들어 물고기를 건지고, 놓아주기를 반복하며 놀고 있었다.

       

       “오, 이 생선은 더럽게 크군.”

       “등푸른생선이네요. 건강에 좋아요.”

       “그럼 먹어야지.”

       “…여기서요?”

       

       이상한 놀이지만, 케일이 가장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여행이 이어지나 싶었건만…….

       

       “긴급 상황입니다! 갑판에 계신 분들은 내부로 들어와 주십시오! 전방에 해적선입니다!”

       

       이상한 것들이 등장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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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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