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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8

        

         ‘………아니, 아니. 아니아니아니아니…!!’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별다른 허튼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분열된 자아가 난장판을 벌일 정도로.

         

         이런 경우를 재치 있게 표현하면 보통은 뇌내 회의가 열렸다고들 할 텐데, 지금 내 내면에서 벌어진 건 회의의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폭동에 가까웠다.

         

         가령… 이성을 담당하는 내가 저 머리가 좋다 못해 한바퀴 돌아버린 녀석의 착각을 풀어내야 한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면.

         감성 충만한 나는 그냥 대충 공감해주고 얼른 내보내자고 쓰러졌고….

         옛 남자의 자아는 아론에 관해서는 자기한테 묻지 말라고 선을 긋고 잠수를 탄 데다가.

         냉정 침착의 자의식은 일이 돌아가는 추이를 조금 더 지켜보자며 정치적 중립을 선언.

         연구소 출신 철혈의 아나스타샤는 당장 제로를 시켜서 저놈을 붙잡은 다음에, 기억을 잃을 때까지 능력으로 지져버리자고…… 넌 뭐야 미쳤냐!

         

         “하아….”

         

         답답한 감정으로 달궈진 한숨이 기어이 튀어나갔다.

         ……일단은 명료하게 부정부터 해 두자.

         

         아론과 마지막으로 논담을 두드린 게 몇 달 전이었더라? 슈나이더 씨 댁에서 묵을 때, 하는 일은 잘 풀리고 있냐며 인사치레를 나누긴 한 것 같은데.

         

         하여간 꽤 장시간에 걸쳐 쌓인 오해가 말 한두 마디로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얄팍한 속임수로 속여넘길 상대가 아닌 만큼 이쪽의 스탠스를 확실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 사람을 무슨 막후의 조종자처럼 말하는 건 그만두면 안 될까? 심지어 여기 네오 헤이븐에서 그런 짓거리를 담당하는 놈은 따로 있는데.”

         

         “호오…? 그새 꼬리를 잡히셨을 경우에 내밀 대역(Body double)까지 준비하신 겁니까? 과연 어떤 인물을…… 아니면 거기서 아예 죽음을 가장할 인형을 배양하셨을 가능성도….”

         

         “너, 사람 말을 좀 들어…!”

         

         탁! 하고.

         삿대질을 하려고 치켜들었던 손을 가까스로 제어해, 그냥 내 이마를 두들기는 걸로 참아내는데 성공했다.

         

         이 주어진 지문을 곧이곧대로 못 받아들이는 의심병 환자 같으니라고.

         왜 이눔 시키의 머리는 더럽게 위험한 쪽으로만 팽팽한 속도로 돌아가는 건데!?

         

         안 되겠다. 좋게 좋게 말해봐야 청자인 아론이 내가 계속 말을 돌리고 있다고 여긴다면 이건 영원히 이어질 평행선이나 다름없으니.

         아예 곡해할 여지조차 없도록 명확하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해서 쓸데없는 상상에 날 겹쳐보는 짓을 그만두게 만들어야지.

         

         결심이 서자마자 건너편을 향해 쏠려 있던 몸을 바로 했다.

         상반신은 등받이에 기대 확고한 기준선을 세웠고, 얼굴을 감싸고 있던 두 손은 팔짱을 껴 상대방의 태도에 불만이 있음을 명백히 나타냈다.

         

         “…아론, 그런 이상한 과대평가는 필요 없으니까 집어 치워. 내가 반드시 이뤄야 할 목적이 있다고는 했어도, 언제 권력 놀음 비슷한 흉내나 내겠다고 암시했어? …왔으면 용건이나 말해. 괜히 머리 아프게 하지 말고.”

         

         “……그렇습니까.”

         

         상당히,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중얼거림과 함께 아론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드러났던 눈이 움직인 얼굴 근육에 가려졌겠으나. 그의 경우엔 외려 칼집에서 날붙이가 뽑혀져 나오는 것과 유사하게, 섬뜩한 사백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번들거리는 동공이, 던져진 돌에 파문이 일어난 호수처럼 일렁이는 내심을 비춰줘서 나도 모르게 목이 움츠러들었다.

         

         어설픈 변명은 그걸로 끝이냐는 듯이.

         마치… 내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자신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는 것처럼.

         

         ………그, 잠깐. 미안.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

         

         

         

         ★ ☆ ★ ☆ ★

         

         

         

         방 안에 감도는 공기를 음미하듯 붉은 설육屑肉이 꿈틀거렸다.

         

         자칫 자리에 안 맞게 경박해 보일라, 끄트머리만 살짝 내밀어서 입술을 적시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아론은 세상에 몇 없는 감미를 맛본 것 마냥 차오르는 황홀한 감각을 억눌러야 했다.

         

         ‘역시. 깊은 곳까지 단숨에 발을 디디기엔 아직 일렀던 모양이군요.’

         

         왜냐하면… 앞에 마주앉은 소녀는 그저 몹시 당황한 체를 하고 있었으나.

         함부로 그녀를 압박하려 들 때마다 느껴지는 출처 모를 저릿저릿한 살의는, 저 밤의 베일 같은 외모 아래에 숨겨진 흉포함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아론 자신은 어쨌거나 두 주인을 동시에 모시는 입장이자.

         비록 손을 맞잡을 당시 아나스타샤는 멋없게 그런 시시콜콜한 점까지 따지지는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를 놓고 저울질하는 상태.

         

         흩어진 파편을 그러모아 알아낸 사실이 지나치게 짜릿해서.

         한 순간의 흥분을 참지 못하고 선을 넘다가 개죽음당하는 건 너무 볼품없으니, 다시 차근차근 그녀가 발뺌하지 못하도록 인과를 꼽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물론 그 당사자인 아샤는… 그저 상대가 하도 끈덕지게 능력을 탐내고 자신을 영입하려 하길래, 상식적인 절충안을 제시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둘 중 누구도 섬세하게 명시하지 않은 구두 계약의 형태는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이었기에.

         

         참… 기적적이고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서 그들의 대담은 시작되었다.

         

         “아스트라 익스프레스 A-185호. 해당 차량에서 파이브 아이즈 소속 게릴라들과 접촉하셨었죠?”

         

         “……뭐?”

         

         “부끄럽게도 저는 단순히 쾌적한 여행길이 되시기를 바라고 좌석을 잡아드렸습니다만…. 어처구니없는 강도 사고에 대해 경위 조사를 하다가 눈치챘습니다. 제가 굳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아샤 양은 정확히 거기에, 그 자리에 나타나셨을 거라는 걸요.”

         

         대범하게 정기 열차를 이용해 탈출하던 수배자들을 일부러 따라잡아 놓고도.

         신고해서 포상금을 수령하기는커녕, 막 아론과 동업하기로 했으면서도 그녀는 반동 분자들을 풀어주었다.

         

         어째서? 실은 그런 무리와 유사한 패거리였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도 여러 가설 중에 하나였다.

         아론 드레이퓨스라는 위정자를 낚기 위해 뿌려진 매력적인 맹독. 아나스타샤가 그런 쪽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건 폐기되었던 가정이지만 주의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녀의 행적을 조금 더 면밀하게 취합하면 전혀 다른 면모가 보였으니.

         

         “크레딧 따위에 일절 얽매일 필요가 없으심에도 용병 짓거리를 계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참나,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네. 세상에 돈에 초연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지금 누굴 놀리냐는 것처럼 작은 반발이 있었으나 아론은 부정했다.

         

         아니다. 돈을 돈이 아니라 숫자의 나열로만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예산을 흘려보내고 집행하는 아론이라 할지라도 헛된 소비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게 개인 자산이라면 더더욱.

         

         인간을 미치게 하는 건 결국 재물. 그리고 이 세상은 그 화폐를 전자화해서 보관하는데 선조들 전원이 반강제적으로 동의했다.

         

         그런 모두가 지키고 싶어 마지않는 보물고를 따고 들어갈 만능 열쇠를, 어쩌면 시스템 자체를 파멸시킬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쥐고도 아나스타샤는 가벼이 휘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인맥을 더 중하게 여기면 여겼지.

         사적으로 소비한 액수를 보면 유용하는 뒷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상도 들었지만… 아론은 그런 가정을 지워버렸다.

         

         누구나가 혹할 유혹에 넘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하루 24시간, 평생을 그 감미로운 유혹에 시달리면서도 버틸 수 있는 건. 오직, 그 이상으로 먹먹하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주먹이 쥐어지는 아득한 목표를 품은 광인뿐이리라.

         

         “분명… 마리나 세라노라는 자유 용병이었죠? 꽤 똘똘하게 처신할 줄 아는 여자를 메신저로 쓰시면서까지 저를 불러들이지 않으셨습니까? 겸사겸사 에나마 애송이의 뒤처리도 맡기고. 저는 거기서 아샤 양이 따로 바라는 게 있어서 여정을 이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 그건.”

         

         그제서야, 아론이 나타난 연유를 눈치 챈 아나스타샤가 ‘마리나 이 지지배가…!’ 를 외치며 속으로 한탄했지만 이미 다 늦은 일이다.

         

         경찰 면접장에서의 최초 만남과 길거리 소문을 바탕으로 파라다이스랑 뭔가가 있었다는 걸 추측한 걸까? 아니, 그걸 일러바치러 쪼르르 달려간 건 나중에 만나면 추궁한다 치고. 당장은 아론이다.

         

         에나마 내부 사정은 어떻게 알았냐… 라는 말은 부적합하겠지.

         말하는 투로 보건대 벌써 직접 가서 만나본 것 같았으니까. 다만… 애송이라 칭한 게 쇼우인지, 아니면 이제 막 자리를 잡은 카이쥰인지만 모를 따름.

         

         여기서 그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곳저곳 수상하게 기웃거리고, 에나마에 머물러야만 했던 배경이 어떤 식으로 비춰졌는지를 추측해보기 위해.

         반면 아론은 아샤가 최초부터 네오 헤이븐에 볼일이 있다고 했던 만큼 이곳에서 움직이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지 아샤가 에나마에는 숨어들었다가 빠져나와야 했을 정확한 이유를, 거기에 오늘 자신은 물론 지부장인 라구스마저 꾀어내려고 한 의도를 살피느라 신중했을 뿐.

         

         안타깝게도 동석자가 하필 자신이라 불쌍한 지부장이 기를 못 펴긴 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평가하듯 지켜보던 시선을 보고는 마침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모으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다가올 순간을 위한 검증된 인재를, 휘두를 칼날을, 그리고… 부릴 수족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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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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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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