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멜은 비를 맞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피가 섞인 진흙이 계속해서 발목을 붙잡았다.
투두두둑! 인챈트를 발라서 생겨난 얇은 막이 빗줄기를 막아낸다. 막에 튕긴 빗물은 증기로 화해 사라졌다.
“저 엘프는 대체 뭐야?”
“비를 맞고도 왜 멀쩡한데!”
토터스의 비에 희생된 자와, 그 유족. 그들이 비를 맞고도 멀쩡한 버멜을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혹시 마수 아니야……?”
“그러네! 저거 마수네!”
“아이고…! 내, 내 아들은 몸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저놈은 대체 왜 멀쩡한 긴데…!”
상대적 박탈감. 유족들이 오열을 내지른다. 안타깝게도 버멜은 모두에게 사실을 해명할 시간이 없었다.
“저렇게 맞고도 멀쩡하다는 건 틀림없이 마수다! 아니면 마수와 결탁한 변절자 녀석이거나!”
추측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증기의 비를 뚫고 나아가는 엘프를 본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휴, 전부 바보들 아냐? 누가 죽을 걸 알면서도 대놓고 마수가 있는 쪽으로 가냐고!]
[억측하고는. 이래서 인간들이 싫어.]
[무엇보다 삿된 기운이 안 느껴지잖아. 그나저나, 저런 행동은 좀 멋진걸.]
여신의 직속. 정령은 항상 진실만을 고한다. 불리할 때도 침묵이 고작인 게 그들이다.
어린아이처럼 진솔한 정령들의 반응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제국인도 여신을 믿는다. 여신의 직속인 정령의 말을 인정해야만 했다.
“야 이놈들아! 너흰 정령이면 빨리 여신님에게 가서 얘기하라고! 여기 사람들 다 죽는데 신께선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유족들은 그리 항변하는 게 최선이었다.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나들이를 나왔다가 단체로 봉변을 당했다. 오늘 가족이나 연인을 잃은 사람이 수두룩했다. 거기에 누군가의 세뇌까지.
정신이 온전할 수 없었다.
무언가, 분을 가라앉힐 존재가 필요했다. 물어뜯을 거리를 찾던 군중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은 뒷줄에서 사람들을 조종하던 누군가의 시선이기도 했다.
‘뜻대로 안 되는군.’
현재는 블랜튼 공작의 탈을 쓰고 있는 절멸급 마수.
구천지대계 7석, ‘취혼(取魂)’의 오를레이앙.
형체 없는 괴물이, 실은 있지도 않은 혀를 쯧쯧 차며 시선을 돌렸다.
‘설마 교환학생 중에 4석 멍청이가 추적하던 엘프가 섞여 있었을 줄이야.’
그때 숨통을 끊어놓아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후회하기엔 때가 늦었다.
‘음?’
때마침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으니. 여우를 연상케 하는 뾰족한 동물귀였다.
프레이는 모자가 벗겨진 채로 토터스의 면상에 날탄을 박아넣었다. 유효타는 먹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해는 되고 있었다.
‘저 녀석이다.’
오를레이앙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 이상 선동하면 자기 정체까지 정령에게 들킬 수 있다. 수인족을 차별하는 발언을 하는 건 엄연한 ‘악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변을 띄워주기만 하고 혼란을 틈타 슬쩍 도망갈 생각이었다.
‘…허?’
그 계획은 단번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툭.
떨어진 모자를 누군가가 줍는다. 그녀는 요호족 꼬맹이의 머리 위에 고깔모를 씌워주었다. 오를레이앙의 눈이 심상찮게 변한다.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가 그를 향한다. 소녀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 하필이면 자신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야, 돌아왔구나!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
에테르는 말이 없었다. 대신 싸늘한 눈빛으로 오를레이앙과 반타 토터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 꺼져.
오를레이앙은 목덜미가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저건 다르다.
이전과는 다른 진짜 ‘사천’의 위협이다.
‘거점까지 물러나야 한다.’
그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고 재빨리 자택으로 돌아왔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지금은 상대하기엔 시기가 이르다. 오를레이앙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건가….”
제 상관도 그렇고, 인족 출신들은 이래서 안 된다. 너무 우유부단하다.
어쨌건.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게 옳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강하니까.
지금은 남은 것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삐걱거리긴 했어도,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 중이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오를레이앙은 미리 조작해 둔 공문서를 황궁으로 옮겼다. 1황자파가 마수와 결탁했다는 거짓 보고서였다. 황제의 인감이 찍혀 있으니 이것을 믿지 못할 자는 없었다.
일은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오를레이앙이 마지막으로 첨탑으로 향했다.
첨탑이 있는 방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탑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부 죽었군.”
사방이 피떡이었다.
“흠.”
저건 황제인가? 전신이 짓뭉개져 있어서 신원 확인은 불가능하다.
“토터스 녀석, 크게도 저질렀군.”
오를레이앙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형체를 흐트러뜨렸다. 인간의 모습이 사라지고, 남은 건 검은 점액질뿐이었다.
타르처럼 생긴 검은 덩어리.
오를레이앙은 꿈틀거리며 아래층으로 낙하했다. 철퍽! 블랜튼 공녀의 방까진 금방이었다.
여기도 반쪽이 날아가 있었다. 이 또한 반타 토터스의 짓이었다.
그나마 남은 곳에는 익숙한 신형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 체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사체였다.
“흐.”
귀족 회의에서 보았던, 제국의 수많은 관료들과 군인들.
전부 죽었다.
“흐흐흐흐.”
오를레이앙은 성대만 만들어 실실 웃었다.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정령에게 들키지 않고서 여기까지 해냈으니 말이다.
“이건 뭐, 결과적으로 제 승리군요. 안 그렇습니까?”
오를레이앙은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는 한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우리 사랑스러운 공녀님.”
“…야, 돌아왔냐.”
로즈마리는 손을 휘적거렸다. 가까이 좀 와 보라는 손짓이었다.
“아직 살아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넌, 내가, 여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니…….”
“아뇨, 당치도 않습니다.”
오를레이앙은 점액질의 신형을 꿀렁거리며 대꾸했다.
“그저, 제 손으로 끝장내야 한다는 점이 심기 불편하군요.”
“……잠깐, 너어, 바, 방금 뭐라고오.”
“안심하십쇼. 단번에 먹어 치워서 편히 해 드릴 테니…….”
로즈마리의 눈가가 힘없이 찌푸려졌다. 로즈마리는 끄으으, 하는 소리를 내며 팔꿈치를 당겼다.
‘이, 이 새끼….’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사고는 팽팽하게 돌아간다.
“설마 배신하려고 나를…….”
“배신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오를레이앙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신뢰를 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마왕님을 부활시키기 위한 비즈니스 파트너였을 뿐이었다.
“이 또한 계획의 일부이지요.”
로드스톤을 취하고, 에테르를 마왕성으로 들여오겠다는 계획.
이 계획은 로즈마리가 죽어야 완성된다.
‘일단’ 에테르의 공분을 사지 않으려면 로즈마리가 큰 타격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서, 이번 사태의 책임을 로즈마리가 아닌 인간에게 있다는 걸 피력하려 했다.
사실 로즈마리가 황궁에 이사장의 침입을 허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녀가 플레어를 몇 대 맞아야 언니가 찍소리 못할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또 모호하게 나갔다가 2석께서 아예 등을 돌려버리시면 곤란합니다.”
“무얼….”
“2석처럼 인족의 감정을 가지신 분에게 가장 좋은 호소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소중한 이의 죽음입니다.”
“너, 너 진짜…….”
당황하는 로즈마리를 보며, 오를레이앙은 점액을 넓게 전개했다.
“마왕님을 위해서라면 목숨 하나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 아니겠습니까?”
“…….”
로즈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지나치게 억지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실제 의도가 뻔히 보였다.
‘작전은 내가 세웠는데, 공은 지가 다 해 먹겠다는 소리잖아.’
이번 불의 로드스톤까지 얻으면 거의 모든 봉인석이 모이게 된다. 마왕님의 부활까지 앞으로 한 걸음.
어차피 정령들의 멸망은 확정이니, 오를레이앙은 마수가 세상을 지배한 이후를 생각하겠다는 뜻이었다.
‘언니가 제일 싫어하는 짓….’
쉽게 말해, 정적 제거였다.
“물론 당신이 생각하고 있을 이유도 정답 중 하나는 되겠지요.”
오를레이앙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나긋나긋했던 이전과는 달리, 어조가 무겁게 내리깔렸다.
“당신은 마왕님이 아닌, 그분의 일개 부하에 불과한 다른 이를 따랐죠. 그녀를 잘 구워삶았으면 좋았을 것을, 쓸데없이 이것저것 벌이다가 시간만 끌었습니다. 때문에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에까지 놓였고 말입니다.”
“…….”
“정령의 절멸보다, 그깟 허울뿐인 의자매와의 우애가 중요했습니까?”
이젠 말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래서 인족 출신에겐 일을 맡기면 안 되나 봅니다. 차라리 태생부터 기계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처럼 말이죠. 그렇죠, 타르케닐 왕녀님?”
촤아악!
검은 해일이 로즈마리를 덮쳐온다.
‘젠장….’
죽는다.
허탈하다. 정령이나 다른 연놈들도 아니고, 하필이면 하극상으로 끝장날 예정이라니.
억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울분이 차올랐다. 다 꺼져가던 메모리가 기름에 불을 붙인 것처럼 콸콸 타오른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로즈마리는 최대한 몸을 가누려 했다. 스태프, 스태프가 어디에 있더라?
“윽….”
큰일이다. 백야를 너무 맞았다. 사지가, 오장육부가 말을 안 듣는다. 정신이 필로폰을 맞은 것처럼 핑핑 돌아갔다.
‘시발…….’
간절하다. 아직 살고 싶었다.지금이라면 정령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유언을 할 시간 정도는 드리겠습니다. 어디 말해 보십시오.”
타르 덩어리에 완전히 덮쳐지기 직전, 로즈마리는 모든 게 부질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며 뇌까렸다.
“…그냥 뒈져 버려.”
“대의를 위해 떳떳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그래야 마왕군의 4석이시지요.”
어느 쪽이든 오를레이앙은 의도를 곡해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에테르를 만나고서도 유언을 조작할 심산이었다. 왜냐,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촤아아악!
로즈마리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자포자기였다. 지금 와서 언니에게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다 끝났다고, 그리 생각했다.
팅! 핑그르르.
동전 튕기는 듯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나, 죽은 건가? 별 환청이 다 들리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몸이 무거운 그대로였다.
1분? 5분? 목숨을 마무리 짓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
로즈마리는 슬며시 눈을 떴다.
사락, 하고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왔다. 새하얀 깃털이었다.
동시에, 비 내리던 곳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황성이 있는 부분만 이런 현상이 있었다.
“어, 어억…. 억…….”
하늘에 구멍이 뚫리며 환한 빛이 들어온다.
“이, 이게 무슨…….”
오를레이앙의 몸에는 황금으로 만든 듯한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는 기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흔들었다. 반쯤 액체로 된 신형이라 빠져나올 수 있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다.
로즈마리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로즈마리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락.
새하얀 머리칼을 지닌 여인이 내려왔다.
은은함을 풍기는 금빛 눈동자. 거기에 소금처럼 반짝이는 하얀 머리카락.
에테르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그녀는 아니었다. 또한 작은 언니인 아카샤도 아니었다.
체구가 다르고, 복장이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다.
로즈마리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누, 누구……?”
그 물음에, 여인의 입꼬리가 샐긋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