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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9

       버멜은 비를 맞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피가 섞인 진흙이 계속해서 발목을 붙잡았다.

       ​

       투두두둑! 인챈트를 발라서 생겨난 얇은 막이 빗줄기를 막아낸다. 막에 튕긴 빗물은 증기로 화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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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엘프는 대체 뭐야?”

       “비를 맞고도 왜 멀쩡한데!”

       ​

       토터스의 비에 희생된 자와, 그 유족. 그들이 비를 맞고도 멀쩡한 버멜을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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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마수 아니야……?”

       “그러네! 저거 마수네!”

       “아이고…! 내, 내 아들은 몸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저놈은 대체 왜 멀쩡한 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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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적 박탈감. 유족들이 오열을 내지른다. 안타깝게도 버멜은 모두에게 사실을 해명할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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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렇게 맞고도 멀쩡하다는 건 틀림없이 마수다! 아니면 마수와 결탁한 변절자 녀석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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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측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증기의 비를 뚫고 나아가는 엘프를 본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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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질없는 짓이었다.

       ​

       [어휴, 전부 바보들 아냐? 누가 죽을 걸 알면서도 대놓고 마수가 있는 쪽으로 가냐고!]

       [억측하고는. 이래서 인간들이 싫어.]

       [무엇보다 삿된 기운이 안 느껴지잖아. 그나저나, 저런 행동은 좀 멋진걸.]

       ​

       여신의 직속. 정령은 항상 진실만을 고한다. 불리할 때도 침묵이 고작인 게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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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아이처럼 진솔한 정령들의 반응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제국인도 여신을 믿는다. 여신의 직속인 정령의 말을 인정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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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이놈들아! 너흰 정령이면 빨리 여신님에게 가서 얘기하라고! 여기 사람들 다 죽는데 신께선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

       유족들은 그리 항변하는 게 최선이었다.

       ​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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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들이를 나왔다가 단체로 봉변을 당했다. 오늘 가족이나 연인을 잃은 사람이 수두룩했다. 거기에 누군가의 세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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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이 온전할 수 없었다.

       ​

       무언가, 분을 가라앉힐 존재가 필요했다. 물어뜯을 거리를 찾던 군중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은 뒷줄에서 사람들을 조종하던 누군가의 시선이기도 했다.

       ​

       ‘뜻대로 안 되는군.’

       ​

       현재는 블랜튼 공작의 탈을 쓰고 있는 절멸급 마수.

       ​

       구천지대계 7석, ‘취혼(取魂)’의 오를레이앙.

       ​

       형체 없는 괴물이, 실은 있지도 않은 혀를 쯧쯧 차며 시선을 돌렸다.

       ​

       ‘설마 교환학생 중에 4석 멍청이가 추적하던 엘프가 섞여 있었을 줄이야.’

       ​

       그때 숨통을 끊어놓아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후회하기엔 때가 늦었다.

       ​

       ‘음?’

       ​

       때마침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으니. 여우를 연상케 하는 뾰족한 동물귀였다.

       ​

       프레이는 모자가 벗겨진 채로 토터스의 면상에 날탄을 박아넣었다. 유효타는 먹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해는 되고 있었다.

       ​

       ‘저 녀석이다.’

       ​

       오를레이앙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

       이 이상 선동하면 자기 정체까지 정령에게 들킬 수 있다. 수인족을 차별하는 발언을 하는 건 엄연한 ‘악의’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주변을 띄워주기만 하고 혼란을 틈타 슬쩍 도망갈 생각이었다.

       ​

       ‘…허?’

       ​

       그 계획은 단번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

       툭.

       ​

       떨어진 모자를 누군가가 줍는다. 그녀는 요호족 꼬맹이의 머리 위에 고깔모를 씌워주었다. 오를레이앙의 눈이 심상찮게 변한다.

       ​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가 그를 향한다. 소녀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 하필이면 자신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

       “야, 돌아왔구나!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

       ​

       에테르는 말이 없었다. 대신 싸늘한 눈빛으로 오를레이앙과 반타 토터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

       – 꺼져.

       ​

       오를레이앙은 목덜미가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

       저건 다르다.

       ​

       이전과는 다른 진짜 ‘사천’의 위협이다.

       ​

       ‘거점까지 물러나야 한다.’

       ​

       그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고 재빨리 자택으로 돌아왔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

       지금은 상대하기엔 시기가 이르다. 오를레이앙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건가….”

       ​

       제 상관도 그렇고, 인족 출신들은 이래서 안 된다. 너무 우유부단하다.

       ​

       어쨌건.

       ​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게 옳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강하니까.

       ​

       지금은 남은 것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

       삐걱거리긴 했어도,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 중이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

       오를레이앙은 미리 조작해 둔 공문서를 황궁으로 옮겼다. 1황자파가 마수와 결탁했다는 거짓 보고서였다. 황제의 인감이 찍혀 있으니 이것을 믿지 못할 자는 없었다.

       ​

       일은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오를레이앙이 마지막으로 첨탑으로 향했다.

       ​

       첨탑이 있는 방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탑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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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

       “……전부 죽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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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이 피떡이었다.

       ​

       “흠.”

       ​

       저건 황제인가? 전신이 짓뭉개져 있어서 신원 확인은 불가능하다.

       ​

       “토터스 녀석, 크게도 저질렀군.”

       ​

       오를레이앙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형체를 흐트러뜨렸다. 인간의 모습이 사라지고, 남은 건 검은 점액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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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르처럼 생긴 검은 덩어리.

       ​

       오를레이앙은 꿈틀거리며 아래층으로 낙하했다. 철퍽! 블랜튼 공녀의 방까진 금방이었다.

       ​

       여기도 반쪽이 날아가 있었다. 이 또한 반타 토터스의 짓이었다.

       ​

       그나마 남은 곳에는 익숙한 신형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 체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사체였다.

       ​

       “흐.”

       ​

       귀족 회의에서 보았던, 제국의 수많은 관료들과 군인들.

       ​

       전부 죽었다.

       ​

       “흐흐흐흐.”

       ​

       오를레이앙은 성대만 만들어 실실 웃었다.

       ​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정령에게 들키지 않고서 여기까지 해냈으니 말이다.

       ​

       “이건 뭐, 결과적으로 제 승리군요. 안 그렇습니까?”

       ​

       오를레이앙은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는 한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

       “우리 사랑스러운 공녀님.”

       “…야, 돌아왔냐.”

       ​

       로즈마리는 손을 휘적거렸다. 가까이 좀 와 보라는 손짓이었다.

       ​

       “아직 살아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넌, 내가, 여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니…….”

       “아뇨, 당치도 않습니다.”

       ​

       오를레이앙은 점액질의 신형을 꿀렁거리며 대꾸했다.

       ​

       “그저, 제 손으로 끝장내야 한다는 점이 심기 불편하군요.”

       “……잠깐, 너어, 바, 방금 뭐라고오.”

       “안심하십쇼. 단번에 먹어 치워서 편히 해 드릴 테니…….”

       ​

       로즈마리의 눈가가 힘없이 찌푸려졌다. 로즈마리는 끄으으, 하는 소리를 내며 팔꿈치를 당겼다.

       ​

       ‘이, 이 새끼….’

       ​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사고는 팽팽하게 돌아간다.

       ​

       “설마 배신하려고 나를…….”

       “배신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

       오를레이앙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신뢰를 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마왕님을 부활시키기 위한 비즈니스 파트너였을 뿐이었다.

       ​

       “이 또한 계획의 일부이지요.”

       ​

       로드스톤을 취하고, 에테르를 마왕성으로 들여오겠다는 계획.

       ​

       이 계획은 로즈마리가 죽어야 완성된다.

       ​

       ‘일단’ 에테르의 공분을 사지 않으려면 로즈마리가 큰 타격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

       해서, 이번 사태의 책임을 로즈마리가 아닌 인간에게 있다는 걸 피력하려 했다.

       ​

       사실 로즈마리가 황궁에 이사장의 침입을 허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녀가 플레어를 몇 대 맞아야 언니가 찍소리 못할 테니까.

       ​

       하지만.

       ​

       “여기서 또 모호하게 나갔다가 2석께서 아예 등을 돌려버리시면 곤란합니다.”

       “무얼….”

       “2석처럼 인족의 감정을 가지신 분에게 가장 좋은 호소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소중한 이의 죽음입니다.”

       “너, 너 진짜…….”

       ​

       당황하는 로즈마리를 보며, 오를레이앙은 점액을 넓게 전개했다.

       ​

       “마왕님을 위해서라면 목숨 하나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 아니겠습니까?”

       “…….”

       ​

       로즈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지나치게 억지라고 생각했다.

       ​

       무엇보다, 실제 의도가 뻔히 보였다.

       ​

       ‘작전은 내가 세웠는데, 공은 지가 다 해 먹겠다는 소리잖아.’

       ​

       이번 불의 로드스톤까지 얻으면 거의 모든 봉인석이 모이게 된다. 마왕님의 부활까지 앞으로 한 걸음.

       ​

       어차피 정령들의 멸망은 확정이니, 오를레이앙은 마수가 세상을 지배한 이후를 생각하겠다는 뜻이었다.

       ​

       ‘언니가 제일 싫어하는 짓….’

       ​

       쉽게 말해, 정적 제거였다.

       ​

       “물론 당신이 생각하고 있을 이유도 정답 중 하나는 되겠지요.”

       ​

       오를레이앙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나긋나긋했던 이전과는 달리, 어조가 무겁게 내리깔렸다.

       ​

       “당신은 마왕님이 아닌, 그분의 일개 부하에 불과한 다른 이를 따랐죠. 그녀를 잘 구워삶았으면 좋았을 것을, 쓸데없이 이것저것 벌이다가 시간만 끌었습니다. 때문에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에까지 놓였고 말입니다.”

       “…….”

       “정령의 절멸보다, 그깟 허울뿐인 의자매와의 우애가 중요했습니까?”

       ​

       이젠 말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

       “이래서 인족 출신에겐 일을 맡기면 안 되나 봅니다. 차라리 태생부터 기계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처럼 말이죠. 그렇죠, 타르케닐 왕녀님?”

       ​

       촤아악!

       ​

       검은 해일이 로즈마리를 덮쳐온다.

       ​

       ‘젠장….’

       ​

       죽는다.

       ​

       허탈하다. 정령이나 다른 연놈들도 아니고, 하필이면 하극상으로 끝장날 예정이라니.

       ​

       억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울분이 차올랐다. 다 꺼져가던 메모리가 기름에 불을 붙인 것처럼 콸콸 타오른다.

       ​

       마지막 발악이었다. 로즈마리는 최대한 몸을 가누려 했다. 스태프, 스태프가 어디에 있더라?

       ​

       “윽….”

       ​

       큰일이다. 백야를 너무 맞았다. 사지가, 오장육부가 말을 안 듣는다. 정신이 필로폰을 맞은 것처럼 핑핑 돌아갔다.

       ​

       ‘시발…….’

       ​

       간절하다. 아직 살고 싶었다.지금이라면 정령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다.

       ​

       “마지막으로 유언을 할 시간 정도는 드리겠습니다. 어디 말해 보십시오.”

       ​

       타르 덩어리에 완전히 덮쳐지기 직전, 로즈마리는 모든 게 부질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며 뇌까렸다.

       ​

       “…그냥 뒈져 버려.”

       “대의를 위해 떳떳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그래야 마왕군의 4석이시지요.”

       ​

       어느 쪽이든 오를레이앙은 의도를 곡해할 생각이었다.

       ​

       나중에 에테르를 만나고서도 유언을 조작할 심산이었다. 왜냐,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

       촤아아악!

       ​

       로즈마리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자포자기였다. 지금 와서 언니에게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

       다 끝났다고, 그리 생각했다.

       ​

       팅! 핑그르르.

       ​

       동전 튕기는 듯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

       ‘나, 죽은 건가? 별 환청이 다 들리네.’

       ​

       ​그런데.

       ​

       한참이 지나도 몸이 무거운 그대로였다.

       ​

       1분? 5분? 목숨을 마무리 짓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

       ​

       로즈마리는 슬며시 눈을 떴다.

       ​

       사락, 하고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왔다. 새하얀 깃털이었다.

       ​

       동시에, 비 내리던 곳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황성이 있는 부분만 이런 현상이 있었다.

       ​

       “어, 어억…. 억…….”

       ​

       하늘에 구멍이 뚫리며 환한 빛이 들어온다.

       ​

       “이, 이게 무슨…….”

       ​

       오를레이앙의 몸에는 황금으로 만든 듯한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는 기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흔들었다. 반쯤 액체로 된 신형이라 빠져나올 수 있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다.

       ​

       로즈마리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로즈마리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

       사락.

       ​

       새하얀 머리칼을 지닌 여인이 내려왔다.

       ​

       은은함을 풍기는 금빛 눈동자. 거기에 소금처럼 반짝이는 하얀 머리카락.

       ​

       에테르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그녀는 아니었다. 또한 작은 언니인 아카샤도 아니었다.

       ​

       체구가 다르고, 복장이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다.

       ​

       로즈마리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

       “누, 누구……?”

       ​

       그 물음에, 여인의 입꼬리가 샐긋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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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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