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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9

     

    일주일에 걸친 연무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일정의 마지막 날엔 파티가 열렸다. 각국의 귀빈은 물론이고 대회에서 활약한 전사들이 모두 참가하는 호화로운 자리였다.

     

    나는 아셀라의 주치의라서 참석할 의무는 당연히 있었는데.

     

    “선생님께는 최중요 귀빈으로서 참석해주시길 바란다고 왕국에서 요청이 왔더군요.”

     

    타냐가 전보를 알려줬다.

     

    아무리 그래도 개인적으로 돌아다닐 입장은 아닌데 말이야.

     

    “맘대로 하지그래.”

     

    아셀라에게 물어보니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시연 이후로 계속 이런 태도다. 그날 난 화가 아직도 안 풀렸다.

     

    아셀라가 그리 나오니 헤이케가 좋은 기회라 여기고는 끼어들었다.

     

    “그럼 고트베르크를 빌려가겠다. 왕국과 협상에 그가 있으면 이야기가 편하지. 1왕녀와 직접 의견을 통할 수 있잖는가.”

     

    “그렇습니다.”

     

    “회장에서 만나지, 아셀라.”

     

    아셀라는 헤이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륙에 희망을 보여준 용사님, 그리고 영웅들을 환영하오!

     

    커다란 성을 통째로 쓴 연회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연무회의 주역 하나하나 얼굴을 다 확인할 수 있었다.

     

    “여봐라, 의사. 너도 와서 먹어라.”

     

    발렌이 뷔페에 진열되어있던 닭고기를 버킷째로 들고 와서는 우적우적 씹으며 내게 한 조각 내밀었다.

     

    “식사는 가볍게 하고 왔습니다. 경비대 분들과 즐겨주시지요.”

     

    “음식이 이렇게 넘쳐나는데 밥을 먹고 왔다니, 제정신이냐?”

     

    보통 사교계 자리는 교류가 목적이니 오히려 식사할 시간이 없으니까.

     

    “그런데, 전엔 생식만 하지 않으셨나요?”

     

    내 지적에도 발렌은 길다란 귀를 쫑긋거릴 뿐 입을 멈추지는 않았다.

     

    “네가 날로 먹으면 몸에 안 좋다며.”

     

    “그랬죠.”

     

    훌륭하게 속세에 물든 엘프 경비대였다.

     

    “너 생각보다 실력 훨씬 좋더라. 뭐, 세계수님에게 인정받았을 때부터 별난 놈이라고는 생각했어.”

     

    “하하, 극찬이시군요.”

     

    “덕분에 재밌었다 야. 이제 얘기했던 기간도 됐으니 슬슬 숲으로 돌아가야지.”

     

    발렌이 싱글대며 뷔페에 쌓인 음식을 구경하러 걸음을 옮겼다.

     

    어리숙한 발렌을 속이는 모양새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했다.

    아쉽지만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아직 조금 남았다.

     

     

    [No. 005 : 마왕군 승리 58% → 22%]

     

     

    이번 연무회에서 내가 고른 후보가 두각을 보일 때마다 마왕군에게 패배할 확률이 10퍼센트씩은 줄어들었다.

     

    기존의 용사 파티보다는 훨씬 괜찮은 인재를 밀어 넣었다는 뜻이다.

     

    ‘전위에는 타냐, 궁수에는 발렌, 치유사에는 앰브로시아.’

     

    우선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한 정예 멤버다.

     

    리셰도 나날이 실력이 좋아지고 있고.

     

     

    [No. 006 : 마신강림 26% → 17%]

    [No. 009 : 마계의 늪 4% → 3%]

    [No. 093 : 지옥불 33% → 25%]

    [No. 095 : 연합군 전멸 52% → 28%]

    ……

     

     

    사천왕을 포함해 마왕군에게 패배하는 배드엔딩은 14개 남았다. 특히 마왕에게 지는 엔딩 확률이 떨어지는 걸 보면 이번 연무회에서 얻은 이득이 크다.

     

    ‘사천왕도 사룡과 대악마는 이미 제거했으니까.’

     

    남은 건 리치와 하나 더.

     

    뱀파이어의 왕이라 불리는 놈이 있다.

     

    이쪽 관련은 아무래도 아예 삭제하긴 힘들겠지만, 최대한 한 자리까지는 떨어트려 일어나지 않도록 할 생각이다.

     

    “아니, 디저트가 다 어디 갔지?”

     

    상태창을 잠깐 응시하고 있으니 발렌이 불평했다.

     

    “고트베르크 대표님, 여기 몽블랑 좀 드셔보세요.”

    “에클레르도 있답니다.”

     

    어느새 네리아가 대륙구급으로 온갖 영애들의 구애를 받고 있었다.

     

    다만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제약공장의 대표를 맡기길 잘 했다. 저기까지 내가 관리했으면 머리가 터져나갔겠지.

     

    “주치의님, 주치의님도 드셔보세요.”

     

    네리아의 옆에 영애들의 구애를 받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앰브로시아였다.

     

    “대체 왜 소녀를 어린이용 의자에 앉히는 것인가. 소녀는 간식 먹을 나이가 아니란 말일세!”

     

    입으로는 불평하면서도 네리아와 사이 좋게 스푼을 뜨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도 슬슬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타냐가 알려줬다.

     

    “그 전에 잠깐. 중요한 발표가 있다고 하더라고.”

     

    조금 있으니 상층 발코니에 조명이 집중되고 법국의 교황이 등장했다.

     

    “대륙 최고의 영웅이 한 자리에 모이니 이리도 든든할 데가 없군요. 분명 여신님께서도 이 자리를 축복하시겠지요.”

     

    뻔한 도입부로 이야기를 시작한 교황이었으나 중간에 꺼낸 소재는 평범하진 않았다.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이라면 어느 정도 예상하고 계시겠지요. 본 연무회는 연합군의 굳건함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용사와 함께 싸울 위대한 전사를 찾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말에 귀빈들이 귓속말을 나누었다. 내용을 모르고 있던 전사들도 술렁였다.

     

    “대놓고 본론을 꺼냈군요.”

     

    타냐가 내게 말했다.

     

    “연무회 상위권에는 제국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아. 정치적으로 제국의 편을 들겠다고 선언한 거려나.”

     

    교황이 말을 이었다.

     

    “물론 어느 전사분도 마왕 토벌에 빠져선 안 됩니다만, 역사적으로 용사께 반드시 필요한 영웅이 한 분 계시지요. 바로 성녀입니다.”

     

    목적은 확실했다. 제국과 왕국의 파워게임이 얼추 끝났으니, 성녀의 자리를 픽스해 연합군에서 법국의 위치를 확고하게 가져가겠다는 뜻이다.

     

    “묻겠소만, 교황님.”

     

    이대로는 주도권을 법국에게조차 빼앗기게 생겨서 초조해졌는지 국왕이 끼어들었다.

     

    “성녀는 때가 되면 선택받는 게 아니었소이까? 이 자리에서 고를 순 없잖소.”

     

    교황이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국왕님. 저희가 준비한 면류관도 신앙심과 신성력을 측정할 뿐, 성녀로 선택받으실지는 알 수 없지요.”

     

    “그럼 그 주제를 꺼낸 저의가 무엇이오?”

     

    “실은 계시가 있었습니다.”

     

    사제들이 봉인된 함을 가져왔다.

    또 아티팩트인 모양이다. 이번엔 뭔지 알 것 같았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소?”

     

    “허허, 자세히 알려드리기는 힘듭니다만, 확실하게 성녀의 자격을 판별할 수단이라고만 알려드리겠습니다.”

     

    교황의 발언에 회장이 술렁였다.

    지금 성녀를 손에 넣는 국가는 제국만큼이나 발언권이 강해질 건 뻔하다.

     

    “성녀를 판별한다니, 그런 게 가능한가?”

     

    앰브로시아가 호기심을 보였다.

    내가 대답했다.

     

    “전대 성녀의 물건이겠죠. 베일 같은 거요. 그것도 성녀만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오, 과연 그렇군! 고트베르크 선생, 어떻게 아셨소?”

     

    네리아가 머리에 쓰고 다녔으니까?

     

    “모처럼 대륙의 인재 여러분이 모두 모인 자리입니다. 분명 여신님께서도 이 자리에서 성녀를 강림시켜 대륙의 평화를 보여주시리라는 확신이 듭니다.”

     

    교황이 그렇게 연설을 마무리했다.

     

    자신들은 성녀 후보가 있으니, 도전할 국가가 있으면 얼마든지 데려와 보라는 얘기다.

     

    법국으로서는 당장 후보에게 베일을 씌우지 않아도 되니 다른 국가를 탈락시킬 의도다.

     

    머리 좀 썼네.

     

     

     

    법국의 발표로 새로운 이슈가 부각되었지만 내게는 약속된 자리가 있었다.

     

    국왕과 왕녀를 만나 추후 무역에 대해 기본적인 방향을 정하는 자리다.

     

    일정을 마치고 온 헤이케와 합류해, 타냐의 호위를 받으며 준비된 개인실로 향한다.

     

    반대쪽 문에서 국왕과 페르시야가 약속한 듯 동시에 들어왔다.

     

    “귀하와의 만남을 예찬하오, 국왕 전하. 헤이케 폰 뷔르템펠트 1황녀요.”

     

    “윌리엄스의 국왕이다.”

     

    상대가 왕이지만 사실상 황제를 대신해 자리에 나왔기에 헤이케는 당당하게 악수한 후 자리에 앉았다.

     

    이미 경기장에서 수차례 얼굴을 봤어도 정치적인 자리는 별개다. 헤이케는 초면인 사절을 대하듯 위압감을 어필했다.

     

    “대륙 연합군의 화합을 위해 연무회를 개최한 왕국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오.”

     

    칭찬은 하지만 감사는 하지 않는다. 입장을 명확히 한 헤이케였다.

     

    그 문장에는 내 시연에서 급발진했던 국왕의 행동에 대한 질책이 담겨있었다.

     

    “제국의 든든한 선진기술과 함께 마계와 싸울 수 있어 기쁜 마음이다.”

     

    완전한 패배 선언이다. 국왕에게 더 자존심을 세우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헤이케도 압박을 풀었다.

     

    “마족을 토벌하기 위해선 양질의 무기가 필요하지 않겠소. 드워프 왕국의 제련 솜씨는 대륙 어디에서도 못 따라가기로 유명하오.”

     

    “익히 알고 있다. 자국군을 무장할 수 있다면 큰 힘이 되겠지. 또한…”

     

    국왕이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의료품도 함께.”

     

    헤이케가 차를 마시며 뜸을 들였다.

     

    앞으로 연합군에서도 주도적이기 힘들고, 제국보다 국력도 한 수 아래인 왕국은 경제적으로라도 이점을 챙겨야 하는 입장이다.

     

    극단적으로, 마족과 전쟁을 벌이는데 제국이 왕국을 안 챙겨주고 총알받이로 써버린다든가 하면 그때야말로 끝장이다.

     

    그 목줄은 우리가 쥐고 있다.

     

    대놓고 관세를 깎아달라는 소리였다.

     

    “귀국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오.”

     

    헤이케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다만 본국도 입장이 있소이다. 사전 협의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다고는 하나, 제국에서 가장 실력 좋은 주치의가 피해를 볼 뻔했지.”

     

    “그건 제가 사과드릴게요. 미리 왕실을 설득하지 못한 제 잘못이었어요.”

     

    페르시야가 나섰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고든 왕자님을 치료할 수 있어 더없이 기쁠 뿐입니다.”

     

    “…으음.”

     

    내 대답에 국왕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고통스러워하며 이마를 쓰다듬었다.

     

    어째 사절단이었던 장군과 비슷한 반응이다. 왕국 사람들은 다 욱하고 후회하는 스타일인가.

     

    “국왕 전하, 한 가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발언하라.”

     

    “잠시 지내보니 왕국민에게는 그다지 제국과 갈등을 가진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나 전하와 귀빈들께서는 제국에 반감이 크셨지요. 물론 과거의 전쟁도 이유이겠습니다만, 이 괴리감의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국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짐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왕실은 왕국 각 자치구에서 선발된 대표들이 회의를 구성하여 짐에게 간언을 올리는 방식을 채용한다.”

     

    “과연, 그렇군요.”

     

    이런 점에서는 역시 왕국이 제국보다 꽤 근대화가 되어있었다.

     

    “회의는 대부분 반 제국파다. 짐의 판단은 그 영향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온전한 전하만의 판단은 아니셨다는 의미로군요. 이해했습니다.”

     

    “마침 회의의 대표 한 명도 그대들에게 사죄를 표하고 싶다 하여 밖에 대기시켜놓은 참이다. 거부하지 않으면 들이겠다만.”

     

    사실상 반 제국파의 수장이겠지.

    어떤 소리를 할지 궁금하긴 하다.

     

    “들여보시오.”

     

    헤이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거침없이 대답했다.

     

    국왕이 신호하자 문이 열리고 멀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음?’

     

     

    [No. 073 : 뱀파이어의 밤 63% → 68%]

     

     

    그 순간 한 배드엔딩의 확률이 올라갔다.

     

    “불초, 실례를 무릅쓰고 위대한 제국의 존안께 인사를 드립니다.”

     

    들어온 남자가 우리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수려한 문장과 달리 어딘가 뚝뚝 끊기는 어투였다.

     

    “로건 던세이니 백작입니다.”

     

    고개를 드는 백작.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마족이잖아.’

     

    그것도 평범한 마족이 아니다.

    흡혈귀라 하는 종족이다.

     

    이런 놈이 왕국 상층부에 잠입해 있으니 미래에서 이미 왕국이 멸망해 있었구나.

     

    순식간에 많은 게 이해가 갔다.

     

    “던세이니 백작.”

     

    “예, 고트베르크 주치의님.”

     

    “국왕 전하와 나눌 얘기가 남았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내 요청에 흡혈귀가 눈을 가늘게 찢었다.

     

    “소인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부디 해명할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그의 이야기는 들어보라.”

     

    국왕이 내게 말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주전자를 들고, 찻잔에 차를 따랐다.

     

    “좋습니다. 함께 말씀 나눠보시지요.”

     

    소매를 통해 슬며시 약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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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얜 자리에서 좀 치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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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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