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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9

       *

         

         

         “그래, 저게 칠용장급이라고.”

         

         

         에델플라트는 검을 반바퀴 돌려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사라진 한쪽 눈이 꿈틀거렸다.

         

         태산의 투모르가 앗아간 눈이다. 단신으로 분노의 화신과 맞서 싸워 하루 하고 반나절을 버틴 검객의 상징이다.

         

         

         “어디, 그 수준이 되나 보자고.”

         “마력은?”

         “없지. 가르쳐는 주던데 배울 시간은 없었고. 그런 어려운 마법 이야기는 우리에겐 너무 복잡하니까. 하지만 욘, 우리가 쥔 것은 마력이 아니라 한 자루의 칼이 아니던가?”

         

         

         에델은 맹수처럼 웃었다. 거칠게 나부끼는 머리칼을 뒤로 묶어 넘기며, 그녀는 자신의 뒤에 도열한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모든 엘프들은 땀흘려 움직이는 것을 혐오한다. 무예는 마법의 하위호환이라 여긴다. 무도가들의 명상은 결국 마력연공과 다를 바 없고, 검으로 펼치는 기예는 윈드커터 미만의 잡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총평이다.

         

         검을 아무리 빠르게 휘둘러도 고작 1m 밖의 물체를 베어내는 데에 수 년이 걸린다. 공간을 격하고 참격을 박아 넣는 데에만 그 정도다.

         

         하지만 가장 기초적인 파괴 주문만 익힌다면 그건 두어 달 안에 가능한 기본교과에 불과하다. 칼리온의 환경 아래에서, 엘프들은 마법 외의 다른 기술을 익힐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기어코. 사회의 시선과 종족의 본능을 이겨내고 검을 쥐는 이들이 있다.

         

         엘프 중에서도 가장 미쳐있는 자들. 무예에 미친 무도가들. 검각(劍閣)의 제자들이 그랬다.

         

         마력은 무예에 통달하기 위한 과정일 뿐, 마력 그 자체가 곧 무도가와 일반인을 가름하는 열쇠가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믿으며.

         

         마력 한 줌 없다 한들 검을 들 팔이 없겠는가? 걸음을 내딛을 다리가 없던가?

         

         발이 있으니 바닥을 딛는다.

         

         손이 있으니 검을 쥔다.

         

         그리하여 뻗어 나간 자세는 정중선. 칼끝은 언제나 하늘을 향해서. 곧, 사람의 몸으로 저 높은 수신의 경지에 닿아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

         

         이 길의 끝을 향해서. 어딘가 있을 무예의 이상향을 위해서. 오직 그것만을 위해 검을 들어올린 자들이니.

         

         

         “자아, 형제들. 자매들. 나, 에델플라트 코엔울프. 추밀원의 결투대리인이며, 칼리온의 불패자이며, 검각의 주인이—.”

         

         

         에델플라트의 말에 엘프들이 일제히, 말없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한낱 엘프가. 일개 무부가 묻노니. 무예의 끝에 무엇이 있는가?”

         

         

         에델의 물음에 제자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승의,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가르침이다.

         

         에델은 쾌활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사람이 있노라.”

         

         

         모든 무예란 곧 사람의 손에서 나와 사람의 손에서 끝난다. 그러니, 무예의 끝엔 기술도, 비의도, 어떤 신화적인 업적이나 검술, 또는 경천동지할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자루 검을 쥔 한 사람. 오직 그 뿐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정점에 오른 검사는 한쪽 눈으로 겨울의 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자. 검각의 무도가들아. 오늘 우리는 일개 사람으로 싸워서, 한 사람의 힘으로 정상에 올라, 한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굽어보리라.”

         

         

         그녀의 말에 검각의 모든 엘프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각자 시시덕거리며, 그러나 별다른 잡담 없이 무기를 고쳐 쥐었다.

         

         검이 들린다. 창이 오른다. 채찍과 도끼, 이따금 대검과 기병창들이 보인다.

         

         각기 다른 병장기를, 적어도 수십년. 많게는 수백 년간 단련한 이들이 일제히 움직인다.

         

         이 자리의 엘프들이 무예에 바친 세월을 합한다면 족히 만년에 닿을 수 있으니, 만년의 잠에서 깨어난 나태한 겨울에 비견되지 못할 일 있으랴. 하면서.

         

         

         “에델, 작전은—.”

         “작전은 무슨 작전.”

         

         

         에델은 이반의 저지에 웃으며 대답하곤.

         

         

         “길은 내가 열겠다. 내가 키운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야. 심장을 양보할 테니 네가 찔러라.”

         

         

         무릇 스승이란 제자의 앞길을 열어주는 이들이며,

         제자란 스승이 닦은 길을 이어 다음 세대로 건네는 이들이니.

         

         무예의 길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에델은 깔깔 웃고는 화살처럼 달려가는 엘프들의 흐름에 뛰어들어 만년궁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

         

         

         “선배님. 조 편성은 그대로 둘까요?”

         “그래.”

         “포메이션은요?”

         “단일 대형 괴수 사냥.”

         

         

         이반의 대답에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짓했다. 명령은 즉각적이고, 행동에 지체됨이 없었다.

         

         서른 명의 요원들이 제각기 조를 맡아 흩어졌다. 그들은 곧장 도시의 어둠 사이로 스며들었다.

         

         

         “정면으로 맡으시지요. 본디 가장 경험 많은 요원이 가장 위험한 곳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아니, 그래도 두어 발자국 뒤에 서시고요.”

         “…뭐?”

         

         

         드미트리는 포션병을 엘피헤라에게 던져주고는 남은 요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곧 붕대와 포션 따위의 응급품을 일행에게 건네고 등을 돌렸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선배님보다 제가 현역으로 더 오래 있지 않았겠습니까? 4년 쉬셨잖아.”

         “…드미트리 체르카토프.”

         “중령. 이제 중령입니다. 선배님.”

         

         

         드미트리는 킬킬거렸다.

         

         

         “선배님이 중령 때 저런 놈 하나를 따셨는데 저라고 뭐 못할까요. 이 시대 가장 훌륭한 사내들과 함께 있는데요.”

         “명령을—.”

         “아, 현장사령관은 접니다. 선배님은 지금 보직해임 처분 중이라서요. 역모죄로. 돌아가면 전하께 꼭 사과하시고요. 자, 꼬마들?”

         

         

         드미트리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는 일행에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역할이 원래 척후였어요. 너희들을 상처 없이 칠용장 눈 앞에 모셔다주는 마부랄까. 우리가 제일 잘 하던 일을 하는 거니까, 그러니 표정 풀어야지. 웃어 꼬마들아.”

         

         

         용사 파티는 대답 없이 굳어 있었다. 그제야 그들이 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인지했다는 듯이.

         

         그리고 이반 또한,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킬킬거리는 절멸부대를. 그들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사지를 향해 떠나던 전훈, 그것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지막 요원들을.

         

         이 시대 가장 훌륭한 사내들을.

         

         그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린다. 그들보다 한 걸음 앞서 걸어 이 자리까지 도달한 한 사람을 향해서. 이반은 말없이 군례를 받았다.

         

         

         “먼저 떠난 이들을 애도하지 말라.”

         

         

         절멸부대의 가장 대표적인 군례를.

         

         그러니, 화답해야 했다.

         

         

         “나 또한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서 있으니.”

         

         

         이상입니다. 살아서 보면 이제 내가 사령관인거죠?

         

         드미트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죽장갑 낀 손을 까딱였다. 절멸부대 요원들이 일제히 뒤를 돌았다. 떠나는 이들의 코트가 바람에 흩날리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득한 저 멀리에서 전투의 소음이 지속된다. 비명, 파괴음, 겨울의 폭풍, 지독하게 뒤틀린 마력, 갓 직조된 마법이 인간의 피륙을 찢어 발기는 질척하고, 신선한 파열음.

         

         이반은 말없이 건네받은 포션을 뜯어 팔에 부웠다.

         

         상처가 아문다.

         

         그러나, 흉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희미해지더라도, 결코.

         

         그러니, 흉터가 남았다는 것은 곧 살아남았다는 증거가 되리라. 또 다시, 더 나은 자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짐이 늘어난다. 그러니, 발걸음에 더욱 힘을 주어 딛고, 앞으로.

         

         

         “너희는 이보다 더 오랜 시간 준비했어야 했다.”

         

         

         이반은 씁쓸하게 말했다. 너무 빠르다. 너무 과하다. 이제 갓 대학 첫 수업을 지난 꼬마들에겐 너무 가혹한 전장이다.

         

         용사 파티의 일행들은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집결했었다. 그런 그들조차도 영혼을 깎고 피륙을 쓸리는 고된 전장을 겪으며 희망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마왕을 죽이기 위한 여정은 그런 것이었다. 살아서 신이라 불리운 이들의 왕을 죽이겠다는 것은, 그 정도의 각오와 실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박제된 평화의 시대에서, 지금의 용사 파티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 실력도, 마음가짐도, 의무감도.

         

         하지만 부족함에 한탄할 시간이 없다. 용사 파티가 걸어가는 한 걸음은, 곧 저 위대한 개인들의 피와 죽음을 발자국처럼 찍어내며 이어지는 세월이다.

         

         그러니, 나아가야 한다. 하루의 낭비는 곧 수천 명의 목숨을 낭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포기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오늘이 여정의 마지막 날이 아니며, 오늘과 같은 절망은 매일의 일과에 불과할 것이다.”

         “….”

         “그럼에도 고개를 들어, 병장기를 쥐고, 그 등 뒤에 걸린 생명들을 헤아리며, 샛별을 찾아 고개를 들 수 있겠느냐?”

         

         

         이반의 말에 일행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에 가볍게 수락하는 것은, 생각 없이 살아가는 머저리들의 소치다. 진정한 의무를 깨닫는 순간, 어떤 사람이라도 두려움 없을 수는 없다.

         

         자신에게 민족의 운명이 걸려 있다. 그것을 깨달았을 테니.

         

         그러나, 용사란 가장 강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용맹한 자들을, 어떤 순간에도 일어서 희망의 표상이 되는 자들을 의미했으니.

       

        용사 파티라면 곧 다시 고개를 들어서—.

         

         

         “할게요.”

         

         

         한 엘프 마법사가 여전히 핏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사형이 쓰러지면 그 다음이 저일 텐데요.”

         

         

         흡혈귀가 빙글빙글 웃으며 무기를 움켜쥐고.

         

         

         “뭐어, 제가 크라실로프에 의탁했을 때도 민족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는 거 아세요?”

         

         

         드워프 공주는 주섬주섬, 소매 어딘가에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크기의 화포를 꺼내 들고.

         

         

         “이제 예레모프 경의 마음이 이해가 가네요. 이래서 빌어먹을 이세계구나.”

         

         

         다른 세상의 이방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칼과 지팡이를 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에,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았다. 다시 전장으로 향할 시간이다.

         

         한번도 배운 적 없었을 텐데도, 이들은 그 옛날 용사 파티의 포메이션을 잡았다. 이반을 중심으로 서로를 보조하며 파티를 이루었다.

         

         그러니, 감히 용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서. 그것이 못내 떨떠름했지만, 그럼에도 조금. 뿌듯해서.

         

         이반은 짐짓 부상 입은 상처들을 포션으로 씻어내고 무기를 쥐어, 걸음을 옮겼다.

         

         달리지 않는다. 급히 내달리지 않는다. 그래야 할 시간들은, 그들보다 위대한 개인들이 벌어주고 있었으니.

         

         그러니 가장 완벽하게 준비된 호흡과, 가장 훌륭하게 준비된 자세로. 한 자루의 예리한 비수가 되어.

         

         신의 심장을 향해, 수천 사람의 생명을 한 걸음에 담아서.

         

         한 발자국씩 우직하게, 그러나 흔들림 없이, 그래서 곧은 직선이 되어.

         

         샛별을 향해 걷는다.

         

         

        *

         

         

         코엔울프 이하 검각 총원 육백구십사인 중 육백칠십인.

         드미트리 이하 방첩사령부 구 절멸부대 출신, 대내첩보총괄 제1팀 삼십인 중 이십칠인.

         

         가장 위대한 엘프 검사의 한쪽 팔과.

         가장 오래도록 훈련받은 요원의 두 다리.

         

         그 모든 개인들의 피와 살로 박제한, 평화로운 길을 걸어서.

         

         마침내 용사 파티가 신의 파편들을 지나 무너진 만년궁의 심장부에 도달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용사가 죽인 사람이 몇인지 알고 있나?”
    “…네?”
    “간접적인 사상자를 포함해 한 해에 적어도 삼만 명 정도로 추산이 가능하더군. 용사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마왕군의 시선을 끌기 위해 패배할 것이 뻔한 전장으로 떠밀려 죽은 사람들의 수가.”
    “그 사실을, 그 당시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용사도, 나도, 최전방의 병사들도.”
    “그러나 용사는 그 순간에도 웃었다.”
    “용사란, 가장 강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용맹한 자를….”
    “그래, 어떤 부담에도 무릎 꿇지 않고, 어떤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이를 우리는 용사라 불렀다.”

    Ep05. 샛별 (6)

    *

    “이름은?”
    “오시프 소레노프입니다.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제 3 타격대 출신이고, 직접 뵌 적은 아주 멀리서 한 번 뿐이라서.”
    “이제 기억했다. 오시프.”
    “먼저 떠난 이들을 애도하지 말라.”
    “나 또한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서 있으니.”
    “전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중령님. 국립묘지에 중령님 명패를 분명히 봤었는데….”
    “나 또한, 3번 타격대에 생존자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시대에 가장 훌륭한 사내들 대신 살아남았지요.”
    “우리 모두가 그렇지.”

    EP18. 입학 첫날 상태창이 열렸다. (2)

    *

    지난 틸레스 에피소드에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 중 하나입니다.

    Q :질 베르가 혼자 용을 수십 마리 회쳤는데, 그럼 칠용장은 대체 얼마나 강했나요?

    A : 이만큼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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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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