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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9

        

         “허면 다음엔 어디로 향하실 예정입니까? 헤이롱? 아니면 상대하시기 편한 엑사테크??”

         

         “……억측은 그만둬.”

         

         “전에 네오 헤이븐을 기반으로 활동하겠다고 선언하셨을 때, 진즉 내심을 헤아리고 라구스를 포섭해 두었어야 하는데… 번거롭게 만들어드려서 죄송합니다. 부족한 제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아샤가 대놓고 영입을 시도하지는 않겠지만, 라구스 안젤루스는 상당히 고지식한 중간 관리자. 경우에 따라서는 중간 보고를 건너뛰고 바로 회장에게 직통 연락을 꽂을지도 모르는 폭탄이기에.

         

         하마터면 최대한 미루고 또 미루고 있는 결단을 성급히 내려야 하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는 만큼.

         

         그래서 아까 급하게나마 목줄을 채운 것이다. 이건 감히 네 까짓 게 자의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니 가만히 닥치고 있으라고.

         

         “하지만 아샤님. 뭐든지 직접 움직이고, 가끔은 은근히~ 눈치를 주시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아랫것들이 능동적으로 제 일을 하게 두는 것도 필요하답니다?”

         

         “…….”

         

         뱀의 꼬드김.

         자기가 이렇게 나선 것도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떠드는 아론의 은근한 목소리에,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찌푸려졌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주관과 사심이 잔뜩 버무려졌지만 객관적인 사실도 언뜻언뜻 튀어나왔기에 더 고민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행적과 마음에 대해서.

         

         정말 여태까지 누군가를 만나는데 순수한 태도로 임했던가?

         그 어떤 음흉한 의도나 기대도 없이?

         입으로는 우연이었다고, 다른 길이 없었다고 신나게 떠든 주제에 내심 중요한 인물을 훗날을 대비한 포석으로서,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만하지는 않았던가?

         

         슈나이더 씨에겐 베푼 것 이상으로 벌써 여러 번 은혜를 입었고.

         전에 만났던 철부지 용병 삼총사는? 필연에 의해서 도와 놓고, 나중에 위키에 이름이 실린 걸 보고서는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겠다며 셈을 했다.

         

         도시 어딘가에 있을 헬레나는? 소중하다고 열변을 토하더니 막상 근처에 와서는 파라다이스의 수배나 나비 효과를 경계해서 연락도 함부로 못하고 있는 신세요.

         파이브 아이즈 이인조야 대놓고 훗날을 위해서 정치적으로 배려해준 게 맞다.

         

         심지어 쇼우는… 진심을 희롱한 셈이 아닌가? ……솔직히 이쪽도 만만치 않게 희롱 당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난다고. 실제로 자신이 매사에 계산적으로 접근한 탓에 저런 누명이 씌워진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꼬리를 물었다.

         

         감정의 침체는 확신의 부진으로. 기세의 정체는 자아의 소실로 이어지는 부의 연쇄이자 늪.

         

         죄라면 죄고 아니라면 아닌 자연스러운 인간의 생리였지만… 그래도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하다고 여겼던 궤적이 실은 목까지 차오른 진흙탕을 외면한 눈가림이었다는 건 가슴팍을 답답하게 만드는 충격이었다.

         

         허나 우습게도….

         

         “……이런.”

         

         아론 또한 스스로가 저 도화선에 불을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결과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서서히 웃음기를 잃고 있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얄팍한 낭설에 근거해서 덤벼든 것도 아닐지니, 자기가 전혀 틀렸을 거라는 상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부리는 게 익숙해 보여서, 또 인간의 감정을 손끝에 올려놓고 굴리는 게 능숙해 보여서.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지변을 일종의 완성된 영도자(Leader)라고 여기고 가볍게 등을 밀어주려고 한 참견이었거늘.

         

         그녀가 아직 완전히 개화하지 못한 꽃망울일 가능성을 멋대로 배제하고 봉오리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억지로 벌린 건 아닌지.

         설익은 과실을 막무가내로 베어 물거나, 덜 숙성된 술의 마개를 무참히 열어버렸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에 그가 혀를 찼다.

         

         성급했다. 그것도 너무나.

         아무리 기재라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토대를 닦고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와중에 돌연 뛰어든 난입자가 ‘과정은 됐으니 어서 결과나 보여달라!’고 소리치면 그게 예술가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리가 만무했다.

         

         그렇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기에 후회이고,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기에 신중히 입을 열라고 하는 법.

         

         이제는 무너진 관계 구도의 수복이나 계약의 재정립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라고 아론이 스스로를 조소하던 찰나.

         

         “…그래, 다행이네. 그럼 어디, 할 말 다 멋대로 떠들었으면 내 얘기도 좀 얌전히 듣지??”

         

         “예………?”

         

         정말 세상 누구보다도 빠른 자기 비판과 자아 성찰을 끝마친 아나스타샤가, 드물게 얼빠진 소리를 흘리는 아론에게 지글거리는 시선을 향해왔다.

         

         유수의 권력자 아론과 일개 해커 아나스타샤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

         그녀는 최초부터 이걸 거래 창구를 개설한 위대한 한 걸음이라고 여겼다. 또는 유사시를 대비한 핫라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어쨌거나 동등한 위치에서, 제시된 물건이나 시중에 대해 등가 교환을 하는 관계를 맺었다고 믿고 있었다. 양식이 없는 비즈니스라고나 할까.

         

         현재 앞에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구는 아론이라면 부탁 한 번에 예치한 집값 12억쯤은 대신 내주거나, 혹은 어디 고지대에 있는 펜트하우스라도 알아서 수배해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가로 요구받는 행위는 대체 무엇일까? 내키지 않는 암살자 노릇? 그것보다 심한 부도덕한 업무?

         지금 이 녀석의 말마따나 비밀 결사 창립이라도 선포하고 장단에 맞춰서 놀아주라고? 그 행위에 내 자의는 얼마나 섞여 있지?

         

         그건 용병 일과는 다르다. 애당초 내가 그냥 뒷골목 해커도 아니고 정식 등록된 용병 해커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미래 주인공 조가 할 일을 미리 경험해보고 게임 시절과 비교해서 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함이었는데.

         

         인형극 같은 장난질이나 한다면 당장 몸은 좀 편해질지 몰라도 거기에 내 진심은 얼마나 담겼을까. 설령 언젠가 실패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가주겠다는 신념은 어디로 사라질까.

         

         무엇보다도!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현실을 마주했으면 됐지.

         시간 좀 지나서 긴장 풀린 상태로 배부르고 등 따시다고, 내가 속물이었네~ 내가 쓰레기였네~ 하는 게 건전한 반성일 수가 있나. 그거야말로 둘도 없는 위선이고 가식이지.

         

         그러니까 천에 하나, 만에 하나로 그런 사춘기 청소년 같은 중2병 조직놀이를 하더라도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경우에나 벌일 것이다.

         

         네 부추김에 올라타는 형태로, 되는대로 흐르는 게 아니라!

         

         쿠당탕!!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뒤로 넘어간 의자가 거실 바닥을 굴렀다.

         위풍당당하게 일어난 것치고 소녀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모순되게도 마주 앉은 아론에게는 고개를 조아려야 할 거인처럼 보였으니.

         

         “야, 아론. 아론 드레이퓨스. 네 취미가 내 뒷조사인지, 인간 관찰인지, 아니면 순수한 재미 연구인지는 몰라도 이번 기회에 똑똑히 알아먹어. 내가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면 저번처럼 정면에서 당당하게 요구를 해! 음습하게 부추기려 들지 말고. 그것마저 못하겠으면 지금이라도 집어치우고 사라지든가.”

         

         탁자 위, 내밀어진 몸으로부터 뻗은 가녀린 손가락이 툭툭 그의 가슴팍을 찔렀으며.

         창백한 빛깔이 감돌던 입술과 피부는 솟구친 열기로 달아오른 혈색이 자리를 대신했다.

         

         더군다나 거기서 그녀는 말을 한 번 끊었다.

         숫제 소리를 지르듯 한 마디 한 마디를 강조해서 끊어 말하느라 숨이 더 차올랐던 게 분명했지만, 덕분에 아론은 얼떨떨한 훈계 속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두 눈동자에 깃든 빛과 어둠의 춤사위를.

         그래, 저 눈이다. 손만 뻗으면 주어질 부귀영화 중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않고, 오직 심연보다도 깊고 어두운… 그야말로 까마득한 미래영겁만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잠룡의 눈.

         

         자신은 저 불길에 홀려서 실체 하나 없는 유혹에 넘어간 채, 이 기약 없는 여정길에 올라탔었다.

         

         “원래의 네가 하베스트 플래닛에 처박혀서 뭘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거기 얌전히 있었으면 절대 못 봤을 재밌는 구경을 잔뜩 시켜줄 테니까, 알아들었으면 조용히 따라와. 이상한 장난질이나 권유로 사람 헷갈리게 만들지 말고!”

         

         “……. 아하핫…!!”

         

         빠져나가는 연기를 손아귀로 붙잡을 수는 없어도, 식어가던 흥미를 단어 몇 개로 다시 끓어오르게 만드는 건 가능하렸다.

         

         숨통을 휘어잡힌 짐승처럼 벌어진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걸까. 아니지 아니야, 무슨 흥미진진한 일을 일으키겠다는 걸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는 확신에 찬 그녀의 호언장담은 아론 드레이퓨스를 만족시키기에 차고도 넘쳤다.

         단순히 총명함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예지의 본질은 자아실현적 예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 웃음에는, 약간의 미숙함을 보인 아나스타샤가 귀여워서 어쩌질 못하겠다는 근질근질한 감상도 뒤섞여 있었다.

         

         개인이 모이면 무리가 되고. 무리가 대장에게 심취하면 그게 곧 집단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섭리라는 걸 그녀는 언제쯤 깨달을까. 이 기색이라면 아마 다른 샛길이 전부 메꿔질 때까지 외면할지도.

         

         ‘그건… 또 그것대로.’

         

         뭐 그것도 나름 재밌는 구경거리가 되리라는 기대감에 그는 입맛을 다셨다.

         스스로의 가슴을 열어서 심장을 꺼내는 기사들, 차마 거절하지도 못하고 받아드는 여왕. 이만한 명화名畫는 구시대 유산을 찾아봐도 드물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었다. 크게 꾸지람을 들은 마당에 더 머물겠다고 댈 핑계도 없었고, 진짜 복귀해야 할 여유밖에 남지 않기도 했고.

         

         여기서는 극진하게 사죄의 예라도 올리면서 물러나는 게 맞겠지.

         

         “…죄송합니다. 이번에 주제넘게 참견해, 아샤 양의 신뢰를 저버리게 된 점은. 추후에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꼭… “응? 무슨 소리야. 댁이 내 신뢰를 언제 저버렸다고.” ……?”

         

         간신히 봉합한 아론의 포커페이스에 또 한 줄기 균열이 발생했다.

         뒤늦은 조롱이라 하기엔 진심이 다분했고, 무례하게 끼어든 이유도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는 투가 강했으니까.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꽤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아론 드레이퓨스가 제 발로 손해볼 만한 상황에 걸어 들어가지는 않을 거 아냐? 그 부분은 항상 믿고 있다고? 그러니까 나도 진지하게 고민했지.”

         

         “…….”

         

         능력적인 부분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애당초 그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을 거라는 당연한 지적에 그는 결국 깊은 곳에서부터 승복했다.

         

         아, 과연 이건 졌다고. 못 이기겠다고.

         

         화난 아이를 달래는 데는 사탕이 필요할지언정, 이런 그녀에게 사과나 보상안을 꺼내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으니.

         재빨리 알량한 돈자랑을 삼켜버린 다음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쾌활하게 ‘조언’을 떠들어댔지만.

         

         “역시, 아샤 양의 카리스마라면 수직적인 지배 구조보다는 충성 경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점조직 형태를 취하는 게 유리한 것 같네요! 아, 그리고 혹시 내부에서 쓸 암호명 같은 걸 부여하실 거라면, 전 부디 서번트(servant; 하인)로 부탁드리겠.”

         

         “당장 나가!!”

         

         그 행태는 예비 집주인의 불호령을 맞아도 응당 쌌다.

         또한 파하하~ 웃으면서 즐겁게 도망친 아론의 빈자리를, 씩씩거리는 주인을 위로하고자 충직한 케어봇이 채웠으나….

         

         – …저 자에게 그런 명예를 내리시느니 차라리 저에게…. –

         

         “아니, 안 한다고!! 안 한다니까!? 야——!!!!”

         

         그렇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나 뭐라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광기를 잠재우는 건 오직 진심.

    연참!? 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제가 더위를 처먹었는지 체력적으로 다 죽어가서 조금 쉬려고 연재분을 당겨왔습니다.
    밀린 꿀밤은 월요일에 맞고, 내일은 오랜만에 밀린 대댓글을 달아드리며 잠깐 쉬겠습니다….

    GC아수라 님의 50코인 후원! 너무 감사드립니다!
    네, 말씀하신 대로 아나스타샤가 무사 귀환에 성공하면 TS 귀환자가 됩니다. 그리고 무려 거기서 인터넷 방송을 시작하고…! (근거없음)

    8/6 06:00, 일부 누락되었던 묘사와 문장이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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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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