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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9

     사람은 다섯이나, 최종 승자는 한 사람뿐일지니.

     

     승자, 발자크 렘부르 군터.

     이 결정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당황하겠지만, 그 당황한 시선을 내게로 보내는 것이 문제.

     ‘당황스럽겠지.’

     예산을 집행하고 결정하는 건 아카데미 교직원.

     그걸 감사하고 자체적으로 결과를 분석하는 것도 아카데미 교직원.

     그런데 왜 나를 바라볼까?

     그건 이번 현장 체험학습과 관련하여, 왕국만 예산을 출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 왕녀 전하.”

     내가 일어나면서 나리아를 부르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이번 현장 체험학습은 왕국뿐만 아니라, 제국에서도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교육 사업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산 천억.

     그 모든 게 노스트럼의 세금과 아카데미 운영 자금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제국의 황후, 에르윈 아이페리아 테르시안께서 그분의 회사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현장 체험학습을 통해 장학생도 선발할 예정이고, 그 선발에 대한 권한이 그레이 지브롤터 이사장에게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이성적인 방법으로 선정하는 건 어떻습니까?”

     

     네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표정은 제각각이지만, 나를 싫어하던 이도 은근하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을 보는 것처럼 반기는 기색이다.

     “그런 방식으로 정하는 건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면 제가 원하는 사람으로 고르면 되는 겁니까?”

     “……사람이 아니라, 장소를 정하는 겁니다.”

     “자작령이든 백작령이든 어디든 학생들이 잘 배우고 익히면 그만이죠. 누가 준비하든,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최선을 다할 것을 믿습니다.”

     나리아가 대놓고 나와 대립각을 세우며 렘부르 군터 자작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렇지 않습니까, 렘부르 군터 자작?”

     “…소신께 맡겨주신다면, 그 어떤 잡음도 나오지 않게 준비하겠나이다.”

     저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잠시 등골이 서늘했다.

     “지엄하신 노스트럼께서 내려주신 영광.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아.

     느낌 왔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망하거나 책임질 일이 있더라도, 자신에게는 피해가 오지 않게 적당히 꼬리 자를 수 있는 이들을 준비하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그레이 지브롤터 이사장. 혹시 렘부르 군터 자작령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

     객관적으로, 없다.

     “그레이 지브롤터 이사장께서는 혹시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렘부르 군터 자작령이 아닌, 발자크 자작을 꺼리는 겁니까?”

     “…….”

     대답하지 않는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애매모호한 태도.

     

     매국노 그레이로서 크비슬링스를 이끌어나갔다면 분명 여기에서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단언했겠지만-

     ‘아쉽게도 아스타시아가 당신을 꺼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버지나 어머니와의 관계와는 별개로, 아스타시아도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나는 저자를 옹호할 생각도 없다.

     ‘애초에 지금 저 인간은 박쥐라고, 박쥐.’

     원래는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추종자였다.

     저기 나를 향해 ‘좀 더 힘을 내지 않으면 확 죽여버리겠다’라는 강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제로스 발자크 후작과 마찬가지로, 무능왕을 지지하는 인간이었다.

     무능왕에게 결혼한 자기 딸을 바쳐서 출세하려고 한 쓰레기 중의 쓰레기.

     그런 자가 지금 나리아의 편으로 슬그머니 발을 옮기려고 하고 있다.

     그런 자가 그러면서도 은근하게 다른 발은 나-제국 쪽으로 뻗으려고 하고 있다.

     다리가 세 개?

     그건 아니다.

     두 팔은 세인트 지오의 땅에 올린 채, 다리를 좌우로 크게 뻗어 기어이 발끝을 걸쳐놓은 셈이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권력 따라 움직이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간이다.

     노욕은 많아서 권력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며 그 권력을 얻기 위해, 이 회의장까지 기어이 온 자.

     ‘실력은 인정해.’

     어머니를 기어이 아버지로부터 떼어내는 데 성공한 인간이다.

     이곳에 자리 잡은 것도 본인의 능력이고, 듣기 싫어서 한 귀로 흘렸지만 렘부르 군터 자작령으로 가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교수들도 늘어났다.

     그러면.

     ‘슬슬 이 정도 생각에 잠겼으면 되겠지.’

     한동안 다들 내 눈치를 보느라 말을 아꼈지만, 너무 시간을 끌면 그러니까 다시 입을 열도록 할까.

     

     그렇다.

     나는 다른 이들이 발자크 자작에 대한 내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이미 그를 왜 가까이 둬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 복기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내가 발자크 자작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거든.

     ‘외손자는 외할아버지에게 데인 게 없으니까.’

     피.

     혈연.

     대를 뛰어넘은 관계.

     “그레이 이사장.”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이 깊어졌군요.”

     나리아의 재촉에 즉각 사과하며, 한숨을 일부러 크게 내쉬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것이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단, 재단 이사장으로서 내리는 제 판단에까지 개입하실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사장이고, 일단은 나리아 공주께서는 학생이시니.”

     “이해합니다. 장학생을 선발하는 건 이사장님 고유의 권한. 거기까지 따지고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렘부르 군터 자작령은…하.”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린다.

     왠지 모르게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을 것 같아, 일부러 헛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학생들이 무난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뭐…저로서는 다른 곳이었다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좋았겠지만.”

     그럴 리가.

     “나리아 공주께서 다른 것도 아닌 국가의 가사를 가지고 결정을 내린 중대 사항이니,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건 진실을 모르는 자들의 시선.

     ‘내가 정한 거라고.’

     손가락 찍기.

     ‘가사는 나리아가 정했지만.’

     설마 국가로 할 줄은 몰랐다.

     * * *

     교수회의가 끝나고 난 뒤, 강의동 모 강의실.

     “왜 국가로 한 겁니까?”

     나는 나리아와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도청 장치도 없고, 사람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은 거기까지는 아니라서.”

     나리아는 바닥을 발로 두드리며 크게 숨을 골랐다.

     “잠깐 편하게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레이 경?”

     “예. 편하게…너무 편한 거 아니신지.”

     “뭐요.”

     나리아가 강의실 학생용 책상 위에 그대로 누웠다.

     아카데미 제복이 구겨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책상을 침대처럼 누워버리길래, 나는 정장 위를 벗어 그녀의 치마 위를 덮었다.

     “젠장. 아스타시아에게도 이렇게 해준 적이 없는데.”

     “그러면 안 해도 되는데.”

     “이런 거 안 하면 아스타시아에게 나중에 한 소리 듣습니다.”

     “혹시나 오해하면 제가 잘 설명하겠습니다.”

     나리아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아스타시아에게는.”

     “다른 사람들은요?”

     “오해하든지 말든지.”

     “혹시 화났습니까?”

     “그레이 경 당신에게 말고, 그 자리에 있던 쓰레기들에게.”

     나리아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빈정거리듯 말을 이었다.

     “가모스 세빌리야는 자기 역량도 안 되면서 사업 크게 받아낸 다음 안 될 것 같으면 ‘지브롤터 도와다오!’라고 외칠 게 뻔하고.”

     가모스 세빌리야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이 정도 국책사업 규모의 사업을 진행하기에는 보여준 것도 능력도 부족하다.

     “제로스 바르셀 후작은 현장 암살 체험학습장을 만들어 놓고 제국 학생들을 몰래 실종시켜서 죽여버릴 생각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아마 세인트 지오의 명령이겠죠.”

     음해가 어느정도 섞여 있기는 하지만, 세인트 지오가 엮였다면 0.1%의 가능성은 99.9%로 뒤집힌다.

     “세이레네 백작은 그냥 돈에 눈이 먼 거에 더불어서 제국에 알랑방귀 좀 뀌어보려고 천방지축처럼 날뛰고 있고.”

     “바다는 예쁩니다.”

     “그레이 경은 아스타시아랑 같이 바다 구경 가는 게 목적이지, 바다는 구경도 할 생각 없잖습니까.”

     “…….”

     세이레네 백작령.

     음.

     바다랑 가까운 거 말고는 다른 거 없다.

     “그나마 건질 건 팰우드 롤랜드 후작뿐이긴 한데, 그도 정상은 아니고.”

     “세인트 지오를 싫어해서 그렇지, 전형적인 충성병자 아닙니까?”

     “자기 아들을….”

     너무 풀어진 걸까.

     아니면 나는 알 거라고 생각한 걸까.

     

     “…….”

     나리아는 실수했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말을 멈췄다.

     “알고 있습니다. 헤이스팅스 후작이 일전에 세빌리야 남작가의 장례식에 아들을 데려왔을 때, ‘진짜 팰우드’를 봤던 적이 있거든요.”

     “아시는군요.”

     “가까이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갑자기 달라졌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요.”

     “…그레이 경.”

     나리아가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본다.

     “제 사람으로 ‘마킹’한 팰우드 롤랜드는 어느 쪽입니까?”

     “…….”

     “경이 ‘협곡의 황금잔’ 장학생으로 선정한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흑장미와 하얀 그림자…실례. 모르가니아와 제국의 첩보부에서 집중하지 않는 이들이죠.”

     “겉으로 보면, 그저 성적이 뛰어나서 장학금을 받은.”

     

     나는 나리아를 향해 잔을 드는 것처럼 제스쳐를 취했다.

     “제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

     “그것까지 떠먹여 주기를 바라는 겁니까?”

     “아ㅡ앙.”

     “……반역할까요?”

     “지금 왕 세인트 지오.”

     “하.”

     참으로 매국 행위가 마려워지는 순간이었으나, 나는 얌전히 손을 뻗어 나리아의 턱을 닫아버리는 걸로 답변을 대신했다.

     “1년 뒤면 밝혀질 겁니다. 유약해서 헤이스팅스 후작이 겉으로 드러내기 부끄러워서 숨긴 진짜 팰우드인지, 아니면 팰우드로 위장하여 아카데미에 보낸 가짜인지.”

     “말해주시죠.”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팰우드 롤랜드는-”

     “현장 체험학습 갈 때 제가 아스타시아와 같은 조가 되겠습니다. 아스타시아 몫까지 제가 하도록 하죠.”

     “지금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가짜입니다.”

     결코 아스타시아를 따로 빼내는데 협력해주기 때문에 알려주는 건 아니다.

     “뭐, 나쁘지는 않겠군요. 나리아 당신도 슬슬 당신만을 위한 충성병자가 필요한 순간이니.”

     “그런 건 필요 없는데.”

     “농담입니다. 충성병자는 헤이스팅스 후작이지, 그 친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미래에서는 그런 기질을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냥 평범한 학생 A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 경이랑 어딘가 잘 맞을 것 같던데.”

     “…같은 학생이었다면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이성 관계도 서로 터놓고 지낼 수 있는 그런 절친.”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굳이?”

     친했던 건 맞지만.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혁명군의 기사단장으로서 많이 도와준 건 맞지만.

     “제게는 아스타시아가 있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

     “팰우드 롤랜드가 여자였고 아스타시아 같은 존재였으면 바로 달려들었을 거면서.”

     “하지만 아스타시아가 아니죠.”

     “……그럼, 제가 먹겠습니다.”

     나리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도 제 사람이 슬슬 필요한 시점이 온 것 같으니.”

     “이번에 많이 만들어 보세요.”

     “도와줄 겁니까?”

     “예.”

     “어떤 식으로?”

     “글쎄요. 가령….”

     나는 나리아에게 작게 속삭였다.

     “렘부르 군터 자작령에서 준비한 식량이 전부 하품이거나 먹기 곤란한 폐품인데, 그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이 학생들을 위한 식량을 준비했다. 어떻습니까?”

     “만일 깔끔하게 준비한다면요?”

     “나리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리라는 건 가만히 있어도 생기는 것.

     “그리고 설령 나리아의 눈치를 보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여 준비한다고 해도, 결과는 같을 겁니다.”

     “…어떻게 하려고요?”

     “방법은 많지만, 그건 그때를 위한 서프라이즈로 두는 건 어떨까요?”

     “……아아아앙.”

     “알았으니까, 제발 그건 좀 그만.”

     나는 나리아의 턱을 다시 손수 닫아주며 말했다.

     “모르죠. 그날, 갑자기 식량창고에 불이라도 난다거나.”

     “…오.”

     “하늘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식량이 전부 물에 젖고, 곰팡이가 피고 썩어서 먹지 못하게 된다거나.”

     “……오오.”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예상.

     “일반병이나 포로…가 아니죠. 평민 학생들이 배식받을 빵 반죽에 톱밥을 섞어 양을 부풀린다거나.”

     “그레이.”

     “예?”

     “그건 좀 심했습니다.”

     “……그렇죠?”

     스포일러지만, 나리아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설마 발자크 렘부르 군터 자작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당신의 외조부인데?”

     “…….”

     “그레이 경?”

     “…….”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말해줘야겠다.

     “나리아.”

     “예.”

     “인간은 극한 상황이 되면, 칡과 나무줄기도 씹어먹고 끓여먹고 한다고 하더군요.”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잠시 연재 타이밍 나와서 한 편 지금 올립니다

    내일은 정오를 넘길 수 있으니, 예약 타이밍을 보시고 맞춰 보시거나 알람 걸어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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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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