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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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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없이 떠나면 큰일 날 것 같아 육체를 찾아다니기 전에 미리 떠난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마왕의 침대 옆 작은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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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방부터 뒤져볼 거란 생각에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서랍 안에 넣어뒀는데… 눈치로 봐선 편지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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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건네줬으면 이럴 일도 없었겠지만, 방 안에 감금당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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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쩍 언젠가 이곳을 떠나게 될 거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서늘하게 가라앉았던 눈을 보면 높을 확률로 감금당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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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임을 가둬두기 적합한 투명한 유리병을 방 한쪽에 쌓아두던 마왕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때의 공포를 떠올리자 몸이 작게 흠칫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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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가 엄마에게서 떨어지기 싫어 억세게 옷자락을 붙잡는 것처럼 리안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던 마왕은 자연스럽게 리안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전부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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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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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은 리안이 몸을 움찔 떠는 걸 그녀를 밀어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거라 착각해,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힘이 반쯤 빠진 채 흘러나온 목소리는 애처롭게 끝이 떨려 더욱 절박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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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의 접촉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필사적으로 리안에게 몸을 붙이기 시작했다. 온몸을 틈 없이 맞물리고자 거칠게 달려드는 마왕의 모습에 제스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와 리안과 마왕을 떼어놓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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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잠깐만 제스.”
    “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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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이 한 손을 들어 올려 제스에게 잠시 물러나라는 눈짓하자, 제스가 귀를 축 늘어뜨린 채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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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는 리안의 시야에 들지 않는 곳까지 물러나 매섭게 눈을 번뜩이며 살벌하게 마왕을 노려보았다. 마왕의 목을 물어뜯고 싶어 하는 듯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 사이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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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포한 살기가 제스의 몸속에서 퍼져 나올 듯 넘실거렸지만,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난폭한 살기를 마왕에게 쏟아부어 버리고 싶었지만, 자칫 리안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었기에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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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가 사냥감을 눈앞에 둔 짐승처럼 동공을 확장하고 있을 무렵, 리안은 필사적으로 제 몸에 달라붙어 오는 마왕을 토닥거리며 진정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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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어가던 사람이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달려가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몸을 붙여오는 마왕을 막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허벅지 위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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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그녀의 길쭉한 다리가 허리를 휘감고 두 팔이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상체가 맞물려 말랑하고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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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렌시아는 환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환자..다… 유일한 친구인 슬라임에게 매달리려는 것뿐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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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으로 랩을 하듯 ‘엘렌시아는 환자다.’ 따위의 말을 쏟아내지 않았다면 마왕이 쏟아낸 핏물보다 배로 많은 코피를 쏟아내고 말았을 만큼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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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특정 어느 부위의 압박감이 강해졌다가 약해지기를 반복했다. 리안은 신경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재빨리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끌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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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리 대단한 걸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리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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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죽음, 격이 다른 외신의 존재, 외신들의 괴롭힘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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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운 상황에 찾아온 도움의 손길이 그저 반갑기만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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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 마왕이 억울하게 죽어버린 이유를 찾아냈다거나 부활시킨 것도 아니고. 격이 다른 외신을 몰아낸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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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한 거라고는 나잇값 못하는 외신들에게 꿀밤 먹여주고, 애착 인형이 되어준 것 말고는 딱히 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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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한 게 아닌 일까지 내가 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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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외신들에게 꿀밤을 먹이고 다니던 때엔 아직 슬라임의 몸을 얻지 못해 마왕은 리안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 직접 눈으로 보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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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리안의 도움으로 해결된 건지 알 수 없었을 터였다. 어쩌면 마왕의 맹목적인 집착은 오해로 인해 생긴 감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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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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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쉽사리 결론 내릴 순 없었다. 별거 아닌 작은 도움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 자신이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도움이 마왕에겐 더없이 크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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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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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잡하게 이리저리 굴러가던 생각의 끝은 결국 ‘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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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왜? 무슨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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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는 곧 호기심의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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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 안쪽에 두둥실 떠오른 의문이 목구멍 안쪽에서 튀어나올 듯 거대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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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였다면 울음을 터뜨리는 미녀를 달래줘야 한다는 센서가 윙윙 울렸겠지만, 오늘은 어째선지 호기심만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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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기심’이라는 감정은 심각한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순수한 아이가 무지로 인해 저지르는 잔혹함과 비슷해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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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다른 질문을 머릿속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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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런 상황에 호기심이 치솟는 거지?
    어째서 그런 것들이 궁금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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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에 관한 질문과 달리 이번 질문은 리안 본인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왜?’라는 말만 빙빙 돌던 머릿속에 명확한 답이 번뜩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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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에 대해, 알렌시아에 대해 더 알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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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와 공감의 시작은 ‘앎’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다. 진정으로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선 출처도, 깊이도 알 수 없는 감정의 근본을 알아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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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을 토닥거리던 손을 위로 끌어올려 마왕의 얼굴 쪽으로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타인의 손이 목 쪽으로 가까워지자 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마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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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짝 붉게 짓무른 눈가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진하게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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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린 순간, 세상이 고요해졌다. 이 세상에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무가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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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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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탄성이 마왕의 머릿속에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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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소 대신 물이 가득 찬 세상에 던져진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정신이 그저 아득해 평온한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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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신을 먹어 치우고 성장한 영혼이 고요 속에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말을 섞지 않아도 리안은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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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아버지의 죽음에서 얼마나 절망하고 리안의 존재에 얼마나 환희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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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그녀의 일부가 된 것처럼 모든 감정이 너무나 선명했다. 자신과 그녀의 경계가 사라지고 그녀가 곧 ‘나’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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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그녀가 자신에게 그토록 집착했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리안은 그녀의 감정과 완전히 동화되어, 자신도 모르게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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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옷이 홀딱 벗겨진 채 구석구석 모든 곳이 살펴지는 듯한 시선에 마왕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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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눈동자는 고요했지만 혼란스러웠으며, 화려하고 단정했다. 따스한 감정을 품은 듯 다정했지만 마주해선 안 되는 무언가처럼 기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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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이 이어진 평온이 곧 죽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자 스멀스멀 두려움이 밀려 올라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공포로 파르르 떨리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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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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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이 숨 막힐 정도로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답답할 정도로 꽉 끌어안는 온기에 불안하게 울렁이던 마음이 부모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빠르게 잔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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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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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인지 그의 감정이 제 감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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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건넨 말은 짧은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담긴 감정은 그보다 배는 진했다. 절절하게 느껴지는 감정에 얼어붙어 있던 마왕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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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은 시선을 굴려 리안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내리 깐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그림자를 집어삼킨 듯한 새카만 머리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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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잊지 않기 위해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얼굴인데, 처음 보는 얼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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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에게 리안은 ‘구원자’임과 동시에 ‘희망의 상징’이었다. 리안을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상징’으로 바라봤기에, 절망과 아집에서 벗어나 제대로 리안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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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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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물들고, 검은 눈동자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금색으로 물들었다. 퇴폐미가 흐르던 얼굴이 가면을 갈아 끼우듯 순한 인상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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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오늘 저녁에 한편 더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3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말없이 떠나면 큰일 날 것 같아 육체를 찾아다니기 전에 미리 떠난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마왕의 침대 옆 작은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자신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방부터 뒤져볼 거란 생각에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서랍 안에 넣어뒀는데… 눈치로 봐선 편지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직접 건네줬으면 이럴 일도 없었겠지만, 방 안에 감금당했을 거야…’

슬쩍 언젠가 이곳을 떠나게 될 거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서늘하게 가라앉았던 눈을 보면 높을 확률로 감금당했을 것이다.

슬라임을 가둬두기 적합한 투명한 유리병을 방 한쪽에 쌓아두던 마왕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때의 공포를 떠올리자 몸이 작게 흠칫 떨렸다.

아기가 엄마에게서 떨어지기 싫어 억세게 옷자락을 붙잡는 것처럼 리안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던 마왕은 자연스럽게 리안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전부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가지… 가지 마.”

마왕은 리안이 몸을 움찔 떠는 걸 그녀를 밀어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거라 착각해,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힘이 반쯤 빠진 채 흘러나온 목소리는 애처롭게 끝이 떨려 더욱 절박하게 들렸다.

이 정도의 접촉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필사적으로 리안에게 몸을 붙이기 시작했다. 온몸을 틈 없이 맞물리고자 거칠게 달려드는 마왕의 모습에 제스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와 리안과 마왕을 떼어놓으려 했다.

“잠깐… 잠깐만 제스.”

“끼잉..”

리안이 한 손을 들어 올려 제스에게 잠시 물러나라는 눈짓하자, 제스가 귀를 축 늘어뜨린 채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제스는 리안의 시야에 들지 않는 곳까지 물러나 매섭게 눈을 번뜩이며 살벌하게 마왕을 노려보았다. 마왕의 목을 물어뜯고 싶어 하는 듯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 사이로 드러났다.

흉포한 살기가 제스의 몸속에서 퍼져 나올 듯 넘실거렸지만,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난폭한 살기를 마왕에게 쏟아부어 버리고 싶었지만, 자칫 리안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었기에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제스가 사냥감을 눈앞에 둔 짐승처럼 동공을 확장하고 있을 무렵, 리안은 필사적으로 제 몸에 달라붙어 오는 마왕을 토닥거리며 진정시키고 있었다.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어가던 사람이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달려가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몸을 붙여오는 마왕을 막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러자 그녀의 길쭉한 다리가 허리를 휘감고 두 팔이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상체가 맞물려 말랑하고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엘렌시아는 환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환자..다… 유일한 친구인 슬라임에게 매달리려는 것뿐이니까 -…’

속으로 랩을 하듯 ‘엘렌시아는 환자다.’ 따위의 말을 쏟아내지 않았다면 마왕이 쏟아낸 핏물보다 배로 많은 코피를 쏟아내고 말았을 만큼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마왕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특정 어느 부위의 압박감이 강해졌다가 약해지기를 반복했다. 리안은 신경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재빨리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끌고 왔다.

‘내가 그리 대단한 걸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리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거지?’

이유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죽음, 격이 다른 외신의 존재, 외신들의 괴롭힘 등등.

괴로운 상황에 찾아온 도움의 손길이 그저 반갑기만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전대 마왕이 억울하게 죽어버린 이유를 찾아냈다거나 부활시킨 것도 아니고. 격이 다른 외신을 몰아낸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한 거라고는 나잇값 못하는 외신들에게 꿀밤 먹여주고, 애착 인형이 되어준 것 말고는 딱히 한 게 없었다.

‘내가 한 게 아닌 일까지 내가 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리안이 외신들에게 꿀밤을 먹이고 다니던 때엔 아직 슬라임의 몸을 얻지 못해 마왕은 리안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 직접 눈으로 보진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리안의 도움으로 해결된 건지 알 수 없었을 터였다. 어쩌면 마왕의 맹목적인 집착은 오해로 인해 생긴 감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돼.’

하지만 쉽사리 결론 내릴 순 없었다. 별거 아닌 작은 도움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 자신이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도움이 마왕에겐 더없이 크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모르겠다.’

복잡하게 이리저리 굴러가던 생각의 끝은 결국 ‘미지’였다.

어째서? 왜? 무슨 이유로?

미지는 곧 호기심의 영역이었다.

머리 안쪽에 두둥실 떠오른 의문이 목구멍 안쪽에서 튀어나올 듯 거대해져 갔다.

평소였다면 울음을 터뜨리는 미녀를 달래줘야 한다는 센서가 윙윙 울렸겠지만, 오늘은 어째선지 호기심만 부풀어 올랐다.

‘호기심’이라는 감정은 심각한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순수한 아이가 무지로 인해 저지르는 잔혹함과 비슷해 보일 정도였다.

리안은 다른 질문을 머릿속에 던졌다.

왜 이런 상황에 호기심이 치솟는 거지?

어째서 그런 것들이 궁금한 거지?

마왕에 관한 질문과 달리 이번 질문은 리안 본인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왜?’라는 말만 빙빙 돌던 머릿속에 명확한 답이 번뜩 떠올랐다.

마왕에 대해, 알렌시아에 대해 더 알고 싶으니까.

이해와 공감의 시작은 ‘앎’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다. 진정으로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선 출처도, 깊이도 알 수 없는 감정의 근본을 알아내야 했다.

등을 토닥거리던 손을 위로 끌어올려 마왕의 얼굴 쪽으로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타인의 손이 목 쪽으로 가까워지자 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마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살짝 붉게 짓무른 눈가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진하게 풍겼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린 순간, 세상이 고요해졌다. 이 세상에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무가치해졌다.

‘아아…’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탄성이 마왕의 머릿속에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아득해졌다.

산소 대신 물이 가득 찬 세상에 던져진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정신이 그저 아득해 평온한 것 같기도 했다.

외신을 먹어 치우고 성장한 영혼이 고요 속에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말을 섞지 않아도 리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아버지의 죽음에서 얼마나 절망하고 리안의 존재에 얼마나 환희했는지.

마치 그녀의 일부가 된 것처럼 모든 감정이 너무나 선명했다. 자신과 그녀의 경계가 사라지고 그녀가 곧 ‘나’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그녀가 자신에게 그토록 집착했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리안은 그녀의 감정과 완전히 동화되어, 자신도 모르게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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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홀딱 벗겨진 채 구석구석 모든 곳이 살펴지는 듯한 시선에 마왕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고요했지만 혼란스러웠으며, 화려하고 단정했다. 따스한 감정을 품은 듯 다정했지만 마주해선 안 되는 무언가처럼 기괴하기도 했다.

끝없이 이어진 평온이 곧 죽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자 스멀스멀 두려움이 밀려 올라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공포로 파르르 떨리려는 순간.

“…!”

리안이 숨 막힐 정도로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답답할 정도로 꽉 끌어안는 온기에 불안하게 울렁이던 마음이 부모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빠르게 잔잔해졌다.

“미안해.”

어째서인지 그의 감정이 제 감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리안이 건넨 말은 짧은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담긴 감정은 그보다 배는 진했다. 절절하게 느껴지는 감정에 얼어붙어 있던 마왕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마왕은 시선을 굴려 리안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내리 깐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그림자를 집어삼킨 듯한 새카만 머리카락.

분명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잊지 않기 위해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얼굴인데, 처음 보는 얼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리안은 ‘구원자’임과 동시에 ‘희망의 상징’이었다. 리안을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상징’으로 바라봤기에, 절망과 아집에서 벗어나 제대로 리안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물들고, 검은 눈동자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금색으로 물들었다. 퇴폐미가 흐르던 얼굴이 가면을 갈아 끼우듯 순한 인상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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