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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도시의 폐허 한복판에 심연의 구멍처럼 그 끝이 보이질 않는 어두운 구멍이 뚫려있었다.

    내가 생각할 때, 중앙 연구소에서 탈출한 수많은 오브젝트들을 막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다.

    중앙 연구소에서 풀려나온 생물에게 적대적인 오브젝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빨리 처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지면 붕괴를 통한 간이 격리였다.

    사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급박한 와중에 생각해 낼 수 있는 내 최선의 선택이었다.

    감각을 집중하자, 가슴 속의 불꽃이 꽤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아귀를 싱크홀의 중심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재생 능력을 너무 과하게 썼다.

    주변에 넘치는 공포와 절망 같은 감정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포기하고 도주각을 보지 않았을까?

    사실 싱크홀 완성 직전에는 좀 아슬아슬했다.

    왜 아슬아슬했냐고? 

    마지막 순간에는 주변의 인간이 모두 죽어버려서 비축분만으로 버텨야했으니 말이다.

    까마득한 구멍을 내려다보며, 다시 기어 올라올 오브젝트들을 기다렸다.

    적어도 군인들이 주변에 방벽이라도 만들 시간 정도는 벌어줄 요량이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

    싱크홀 난간에 걸터앉아 발을 까닥이며 기다렸지만,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보니 슬금슬금 군인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나저나, 도대체 왜 안 올라오는 거지? 

    아귀정도면 싱크홀로는 시간을 끄는 정도가 고작일 것 같았는데…

    그전에 날아다니는 오브젝트도 많았잖아…

    지하에 뭐 꿀이라도 발라놨나?

    ***

    회색 붕괴 사건으로 정부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추모행렬? 

    그런 건 오브젝트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30년 전에나 나오던 말이었다.

    오히려 그런 것 대신에 서울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슬퍼하기에는 죽음이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서울에 남은 사람들은 정부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했다.

    송파구를 봉쇄하라, 책임자를 처벌해라.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그 때 시의적절하게 대중들에게 던져진 먹잇감이 있었다.

    한 탐정 사무소에서 발표한 보고서였다.

    중앙 연구소에서 은폐한 수많은 죽음.

    무연고자를 납치해서 활용한 인체 실험.

    실험 중 사망자를 이직처리해서 연구소 내의 산업재해 통계 왜곡.

    서울 광장에서 몇만 명 단위의 사람을 죽인 아귀를 은닉.

    서울 한복판에 존재했던 연구소 자체가 오브젝트라는 사실을 은닉.

    그 외에도 대중들이 알지 못했던 비리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와 국립 오브젝트 관리 협회를 향해 쏟아지는 반발과 분노는 끝이 없어 보였다.

    모든 국립 연구 시설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모든 오브젝트는 사설 연구소에서 연구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정부에서 아무리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중앙 연구소 고발 건으로 일약 스타가 된 남자였지만, 그의 표정은 묘하게 어두웠다.

    그가 앉은 탁자에는 수많은 술병이 뒹굴고 있었고, 남자가 앉은 자리 맞은편에는 한 여자가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책하던 여자를 위로하던 남자였지만, 여자가 뻗어버린 뒤에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조용한 방안에는 라디오 소리만이 작게 틀어져 있었다.

    라디오에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안전과 보신, 그리고 비난과 비판뿐.

    그것이 너무나도 웃겨서, 남자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정말로 미쳐버린 세상이야.’

    남자가 피곤한 눈으로 바라본 거울에는 검은색 나비 한마리가 살짝 비쳤다가 사라졌다.

    남자는 나비가 비쳤던 거울을 보면서 천천히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남자가 잠든 순간 방 안에서는 가스램프의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사건은 해결한 거야? 해결한 거야? 해결한 거야?]

    [해결한 거야.]

    [홈즈때문에 사람이 잔뜩 죽었어.]

    [괜찮아. 명탐정이 가는 길은 붉은 핏물이 멈추지 않는 법이니까.]

    [탐정은 자책하면 안 돼. 자책하면 안 돼. 자책하면 안 돼.]

    [후회하는 탐정은 홈즈답지 않아.]

    [그럼 실패한 거야?]

    [의뢰 실패가 아니니까 괜찮아.]

    [그럼 고쳐서 쓰자.]

    [후배도?]

    [후배도.]

    가스램프에서 연기가 잔뜩 뿜어져 나와 탐정 사무소 전체를 빼곡히 메웠다.

    그리고 뼈를 가는 소리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한밤중 내내 울려 퍼졌다.

    ***

    푸른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새벽녘, 묘하게 개운한 기분과 함께 눈을 떴다.

    눈을 뜨니 탐정 사무소가 엉망진창이었다.

    널브러진 술병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바닥을 흥건하게 물든 핏물과 뼛조각들이 사무실을 마치 살인 현장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게 다 어디서 나온 핏물이지?

    “왓슨, 또 피를 잔뜩 뿌려둔 거야? 이런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렇게 핏물로 난장판이 된 적이 오래전에도 한번, 있었다.

    다만 그 시기의 기억은 안개가 낀 것처럼 모호해서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술은 또 언제 먹은 거지? 후배가 혼자서 먹었나?”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탐정이 투덜거리며 정리하는 것을 왓슨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탐정의 관자놀이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흉터 옆에 새로운 흉터가 생겨 있었다.

    그 묘한 흉터는 잠들어 있는 후배에게도 똑같이 생겨있었다.

    ***

    달빛 하나 없는 깊은 밤, 나는 드디어 세희 연구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희 연구소는 당직실과 경비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지 인적 하나 없이 조용하고 어두웠다.

    평소에 돌아다닐 때 보던 것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세희 연구소의 전경을 둘러보다가, 연구소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돌아온 세희 연구소.

    드디어 돌아온 내 격리실!

    역시 집이 제일 편하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은 오브젝트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였던 것이다.

    싱크홀 안에서 상당히 고생했는지, 고양이는 내 머리 위에서 계속 잠에 취해있었다.

    꽤 격렬하게 움직여서 한 번쯤은 깰법했지만, 나를 만난 뒤로 긴장이 풀렸는지 계속 잠만 자고 있었다.

    파란 도마뱀은 데리고 오긴 했지만, 이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 모르겠냐고? 이미 누가 먹고 있던 것을 때리고 뺏어온 거라 하반신뿐이니까 말이다.

    대충 하루정도면 부활했으니까 곧 부활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부활하든지, 아니면 저 송파구 싱크홀에서 부활하든지 둘 중 한 곳이겠지 뭐.

    제일 의외였던 것은 그 붕괴 속에서 어떤 오브젝트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중앙 연구소에는 얼마나 흉악 오브젝트만 있었던 거야? 

    고양이가 깨지 않게 작은 소리로 TV를 틀자, 뉴스에서는 내 얼굴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번에 일어난 일을 ‘회색 붕괴’ 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회색 사신’이 일으킨 붕괴라서 그렇게 부르는 듯 했다.

    또한 아귀도 손쉽게 물리친 최강의 오브젝트라고 하면서 두려워하기도 했다.

    나처럼 대량 파괴를 일으킬 수 있는 오브젝트를 따로 분류하는 ‘규격 외’ 등급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었다.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이 정도 악명이면 나를 처음 보는 사람도 내 장작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지.

    결국 중앙 연구소를 가서 얻은 건 장작용 악명과 오브젝트 친구 두 명.

    나름 괜찮은 수확이라고 생각하면서 TV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역시 이런 강행군은 피곤했는지 졸음이 몰려왔다.

    그럼, 모두 잘자.

    ***

    사신이 돌아온 연구소에는 다시 활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세희 연구소가 있는 연구 단지는 송파구 외곽에 있었다. 

    그 때문인지 이곳에 위치한 많은 연구소가 위험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떠나는 곳도 있었지만 세희 연구소와 몇몇 다른 연구소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확연히 쓸쓸해 보이는 연구 단지를 돌아보니, 송파구가 폭삭 망해버렸다는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약 10년 전에 파괴된 도봉구에 이어서 서울이 폭삭 줄어든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0년 전에는 이것보다는 좀 더 많은 말들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도봉구에 나타난 오브젝트, 얼음 왕좌.

    그것은 도봉구의 약 10만 명을 하룻밤 사이에 얼음 동상으로 만들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때는 추모도, 애도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슬퍼하고 사회가 침체된 것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기엔 사람들은 너무 많은 슬픔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는 추모보다는 보신과 생존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또 그때는 분노도 있었다.

    도봉구의 얼음 왕좌를 부수겠다고 천명한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많은 사람들이 같이 분노하고 도봉구를 되찾을 방법을 궁리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기엔 사람들은 너무 많은 상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젠 복수보다는 자신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쓸쓸하게 텅텅 비어버린 연구 단지를 돌아보며 나는 다시 연구소장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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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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