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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노스트럼 왕국의 기존 정치체제는 왕을 중심으로 한 전제군주제’였’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왕이 왕국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왕,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행보는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오죽하면 선왕의 유언이 어느 특정 누군가에게 ‘세인트가 모자라 보인다면, 그대가 이 나라를 이끌어주시오’라고 돌려 말했을 정도.

     왕권을 중시하던 대신들은 바로 들고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신하가 노스트럼의 왕이 될 수 있냐고.

     비록 그 피에 노스트럼의 피를 일부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적자가 살아있는데 왕권을 넘겨줄 수 있겠냐고.

     그래서 대신들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왕으로 옹립했다.

     아무리 무능한 왕세자였다고 해도, 옆에서 신하들이 잘 보살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도장? 알아서 해라. 나는 사냥을 나갈 테니.

     신하들이 ‘이대로는 위험하다’라는 걸 직감한 건 즉위한 날로부터 약 3주.

     -대신들이 알아서 하시오. 귀찮게 내게 가져오지 말고. 정 일하고 싶으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탁한 그 인간들이랑 상의하시지?

     술에 취해있었지만 옥좌에 앉은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신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행정체계를 재편했다.

     왕궁 내의 일은 카르멘 왕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왕국의 행정에 관한 일은 사실상 국정 전반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재상’이 모든 대신들을 휘하에 두게 되었다.

     그렇다면 국정을 총괄하는 이, 여차하면 국왕 대신 군권마저도 총동원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모르가니아 대공.

     선왕의 의형제이자 현왕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스승이며, 동시에 왕국의 또 다른 마스터 중 한 명.

     카르멘 왕비의 아버지이기도 하여, 많은 이들이 대공의 재상 즉위 당시 우려를 표했다.

     이러다가 이 나라, 노스트럼이 아니라 모르가니아가 되는 게 아닐까.

     외척이 득세하는 나라는 기본적으로 망조가 드는 나라라고 하던데.

     일부, 충신-이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외쳤다.

     전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군왕의 체통을 지켜주시옵소서.

     대공과 왕비가 어찌 멋대로 왕권을 휘두른단 말입니까.

     그들은 목을 내놓는 심정으로 사냥터를 달리는 왕에게 읍소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왜? 걔들한테 맡기니까 이렇게 편하고 좋은데.

     결국.

     ‘이대로 가면 나라는 망한다.’

     라는 암묵적인 합의로, 대신들은 일단 대공의 아래에 모였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제 일을 왕에게 맡기면 국가가 흔들린다.

     그렇게 대신들은 10년을 버텼다.

     제발, 제발 오늘은 머리를 아프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지브롤터에서 초대장이 왔소.”

     대신들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 * *

     노스트럼 왕도의 행정청.

     과거에는 모르가니아 대공가의 수도 저택이었으나, 이곳은 여러 대신들이 모여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관공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 행정청의 중앙에는 13명이 앉을 수 있는 원탁이 있다.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기에는 귀부인들이 티타임을 나누는 곳이었다.

     이제는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정치의 장이 되었고, 벌써 10년이 지났다.

     병이 난 게 아니라면 항상 재상을 포함한 13명의 대신이 모이고는 하던 자리.

     현재.

     재상인 대공을 제외하면, 참가한 이는 고작 한 명.

     “외무대신.”

     “예, 대공 각하.”

     “자네와 나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머리가 하얗게 센, 아래로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장(老將)은 편지 봉투를 하나 꺼냈다.

     “이걸 받지 못했다는 것이야. 다른 이들은 전부 다 받았고.”

     “…….”

     “지브롤터의 초대장. 마지막으로 파티를 연 게 3년 전이었지?”

     “막내인 레타르가 태어난 뒤 1년이 되는 날이었죠.”

     초췌한 몰골의 외무대신은 코에 걸쳐진 동그란 안경을 손으로 슬쩍 들었다.

     “분명 백작 부인이 산후 몸조리를 끝낸 뒤, 아이를 낳고도 변치 않는 미모를 과시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대와 나는 그 백작부인과 사이가 몹시 나쁘지.”

     “뭐…. 당연한 거 아닙니까? 모르가니아, 우리 가문에 소드 마스터 사위가 들어올 수 있었는데.”

     재상은 당시에 공녀의 아버지로서.

     외무대신은 당시에 공녀의 사촌오빠로서.

     “공녀를 선택하지 않은 변경백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변경백을 빼앗아 간 백작 부인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변경백은 그런 우리를 몹시 싫어하고 말이지. 그녀가 어렸을 때 모욕했다는 이유로.”

     “틀린 말은 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머리가 꽃밭이었습니다.”

     “그랬지. 변경백이 그때의 앙금을 아직도 가지고 있고 말이야.”

     이미 시간이 10년도 넘게 지났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 악감정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이 지금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네. 대신들에게.”

     “누가 보내준 겁니까?”

     “해양(海洋) 대신이. 읽어보게.”

     외무대신은 찜찜한 얼굴로 봉투를 받아, 안에 들어있는 초대장을 펼쳤다.

     “……많이, 변했군요. 성장했다고 해야 하나.”

     “문제는 그게 아닐세. 거기, 아래부터 봐.”

     “…보육원?”

     “그래. 그게 사실 핵심이지. 명목상으로는.”

     대공은 목 아래까지 닿는 수염을 손으로 계속 쓸었다.

     “정말로 보육원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인사를 초대한다고? 말이 안 되지. 그런데 다른 목적을 파악할 수 없어.”

     “백작가에 심어둔 첩자들은….”

     “죽었네. 그래서 더 민감한 상황인데….”

     “걱정하지 마셔요.”

     끼이익.

     원탁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이 문제는 제가 처리할 테니까요.”

     대공과 외무대신은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온 흑발의 여인-카르멘 왕비에 바로 몸을 일으켜 예를 갖췄다.

     “왕비. 어찌 이곳까지.”

     “정보의 부족으로 복잡하게 생각하고 계실 아버지의 흰머리가 더 늘어나지 않게 하려는 딸의 효도라고 생각하세요.”

     카르멘 왕비는 외무대신의 손에 들려있던 초대장을 낚아챘다.

     “보육원이라. 하.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훤히 보이네.”

     “변경백이 한 거라고 생각하시오?”

     “왜 변경백이 나와요?”

     “…그야.”

     대공이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귀족가에서 보육원을 만든다고 하면, 보통은 재능있는 소년소녀를 모아다가 기사를 육성하기 위함이니까.”

     “…그것도 그렇겠네요. 음, 그거까지 감안한 건가.”

     “왕비. 무언가 다른 짐작이?”

     “보육원을 짓겠다는 명목으로 기부금을 받은 다음, 주머니 두둑하게 불리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브롤터가?”

     “네. 지브롤터가.”

     “아니, 왜? 그자들이, 대체 왜?”

     “아버지.”

     딱.

     카르멘 왕비가 손가락을 튕기자, 곧 회의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지브롤터가 딴맘을 품었어요.”

     “…….”

     “농담 아닌데.”

     “왜?”

     “아버님 사위 놈이 백작 부인을 상대로 성희롱을 해서?”

     “음….“

     대공이 깊게 침음성을 흘렸다.

     “변경백의 사랑은 정말이지,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하기 힘들군.”

     “네. 하지만 덕분에 저로서는 더 좋아진 상황이니까, 초대에 응하시죠.”

     “초대장을 받지 못했는데.”

     “저쪽에서 초대장을 못 보낸 거죠. 저한테 보내면 왕가에 보내는 거고, 아버지께 보낸다? 지브롤터에서 모르가니아로?”

     지브롤터는 초대장을 보냄에 있어, 사람을 가리는 패기를 보였다.

     왕가와 모르가니아 공작가를 거른다는 파천황적인 행보를.

     오히려, 보내는 게 이상하겠지.

     “보낼 수 없어서 못 보냈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초대장을 받지 않았는데 파티에 참석하는 건 우리에게 너무 큰 부담이다.”

     “명분은 있답니다. 마침 수송부대가 다 준비되었거든요.”

     “…축하연에 철근을 선물로 보낸다니. 그것참, 굉장한 선물이 되겠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지만, 공무로 방문한 것인데 어떻게 지브롤터에서 면박을 할 수 있으랴.

     “예.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다녀오시죠?”

     “왕비님. 노스트럼의 재상은 하루만 왕도를 비워도 행정업무가 마비되는 바쁜 사람입니다.”

     “어머. 그렇게 예의까지 갖추면서 거절을 하시면 제가 다 무안해지는데요. 아빠?”

     “…….아니. 그래도 안 된다.”

     “칫. 그럼….”

     카르멘 왕비와 대공의 눈이 저절로 가운데 선 이를 향했다.

     “헥스 오라버니. 다녀오세요. 왕명입니다.”

     “재상의 명령이네. 그대가 다녀오게.”

     “…와.”

     가만히 듣고 있던 외무대신, 헥스는 입을 떡 벌리며 굳었다.

     “백작 부인 뺨을 때린 사람보고 지금 변경백 집에 가라는 겁니까?”

     “왕명인데요.”

     “왕비와 대공이 왕명을 운운하다니. 반역입니다.”

     “그래서, 안 갈 거예요?”

     “…….”

     외무대신 헥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 *

     지브롤터 백작령은 생각보다 넓은 편이다.

     협곡과 백작성 사이에는 도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대신 백작성에서 왕도 쪽으로는 많은 것들이 있다.

     사람들도 많이 살고, 도로도 잘 닦여있으며, 상당히 넓은 농경지와 목초지도 펼쳐져 있다.

     즉.

     

     우리가 위치만 정하면 보육원 하나 정도는 쉽게 지을 수 있다는 소리.

     “그레이.”

     직접 말에 올라탄 아버지가 마차의 창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여기가 마지막 후보지다.”

     “좋군요.”

     나는 마차에서 밖으로 나와, 마차의 위에 두 발로 서서 황무지를 쭉 훑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황량하고, 목초지도 아니라서 마음에 듭니다.”

     “그럼 슬슬 말해다오. 왜 보육원인지.”

     현재, 다른 사람은 없다.

     아버지가 내게 진의를 묻기 위해, 아버지께서 직접 마부가 되면서까지 나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

     “아버지. 한 번 맞춰보시겠습니까? 제가 노리는 목적을.”

     “부자 관계가 바뀐 것 같구나. 지금 나보고 네 생각을 맞추라는 것이냐.”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아버지께서 말씀하실 수도 있잖습니까.”

     “그래. 어울려주마.”

     아버지가 말의 고삐를 움켜쥐며 마차를 세웠다.

     “보육원을 세웠을 때, 정치적으로 보면 훗날 보육원을 방문하겠다는 명목으로 다른 귀족과의 만날 자리를 만들 수 있다.”

     “그러합니다.”

     다른 귀족들에게 지브롤터를 방문할 명분 하나를 만든다.

     보육원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한 번 보러오겠다면서, 그 뒤로는 따로 회담을 나눌 수 있겠지.

     “경제적으로 보면 이득이 되는 사업이 되겠지. 보육원을 짓거나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데 들어가는 돈보다 더 많은 기부를 받을 테니.”

     “예. 보육원은 운영하기 나름이지만, 아이들에게 매 끼니 스테이크와 신선한 과일 먹이는 게 아니라면 이는 남는 사업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사람 장사를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보육원의 아이를 잘 키운다면 팔아치울-음.”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었다.

     “정정하겠습니다. 보육원은 하나의 인재양성소가 될 겁니다.”

     “아이들을 키워서 다른 곳으로 팔아치우겠다는 게 아니더냐.”

     “조금 속되게 말하면 그렇죠. 하지만 아버지, 말하는 게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근본은 팔아치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누군가는 욕할 수 있을지언정.

     “재능있는 아이가 자신의 재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낼 뿐입니다. 하하.”

     “중간에서 많은 돈을 받는다면 노예매매나 다름없구나. 왕국에서 노예는 불법인 거, 알고 있지?”

     “돈만 안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돈을 받으면 인신매매지만, 소개를 해준 것에 대한 감사로 선물을 받는 건 인신매매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순간적으로 질렸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너는 제국에서 태어났으면 제국의 재상은 따놓은 당상이었겠구나.”

     “칭찬, 감사드립니다. 하하.”

     “칭찬 아니다.”

     “그만큼 제가 반역자 지브롤터에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잖습니까.”

     “그래. 후. 계속하지.”

     아버지는 허리에 찬 검을 검집째로 들었다.

     “보통 귀족이 운영하는 보육원이라고 하면, 기사 양성소의 면모를 가진다. 너도 이건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겠지.”

     “예. 왕국 사람들의 상식이니까요.”

     “하지만 너는 그걸로 만족할 녀석이 아니다. 기사만 키우려는 게 아니야. 기사는 이미 지브롤터 성에서 충분히 키울 수 있으니.”

     아버지가 검집의 끝을 땅에 겨눴다.

     “너는 병사를 양성할 생각이더냐. 보육원이라는 명목의 사병을.”

     “그런 짓을 했다가는 바로 반역으로 몰릴 겁니다.”

     “병사가 아니라면, 아이들을 공짜로 먹이고 키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글쎄요. 레타르의 친구라거나, 어머니가 또 다른 자식 키우는 재미라거나?”

     “그런 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이유지 않느냐.”

     어이쿠.

     어머니를 걸고넘어지는 걸로 적당히 눈감아 줄 생각이 아닌 모양이다.

     “많은 걸 할 예정입니다. 말로 설명해 드리는 게 입이 아플 만큼.”

     “계속해보거라.”

     “보육원은 ‘시설’입니다. 그리고 이 시설이라는 단어 앞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붙을 수 있죠.”

     정치, 외교, 과학, 종교, 군사, 상업, 기술, 문화, 의학, 예술, 연금술, 마법.

     다양한 방면으로 퍼져나간 재능있는 ‘지브롤터의 아이들’이 훗날, 반역에 동참하며 자신의 분야에서 우리의 칼날이 되리라.

     “아버지. 저는 이 보육원을 낙원과도 같은 곳으로 만들 것입니다.”

     “누구나 이곳에 오기를 바라는.”

     “예. 왕국 전역으로 소문이 퍼지고, 그 소문이 바람을 타고 협곡을 넘어 제국까지 퍼질 수 있게. 그리하여.”

     “너는 제국의 미래를 훔치려고 하는 거구나.”

     “예. 꼭 제국만 그런 건 아니죠. 왕국도 마찬가지고.”

     이곳이야말로, 내가 황제를 상대로 당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는 기반.

     “대륙 전역에서 고아를 모으도록 하죠. 혹시 압니까. 마스터의 재능을 가진 어린아이들이 여기로 흘러들어올지. 막말로.”

     이건, 진심이다.

     “미래의 소드 마스터 한 명만 낚아도 남는 장사가 될 겁니다. 후후후.”

     이왕이면 제국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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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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