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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남작과 만나고, 요 며칠간 마리아는 은근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

        같이 밥도 먹고, 종종 티타임을 같이 가지긴 했지만, 전처럼 은근히 날 압박하며 스믈스믈 날 휘감는 듯한 그런 분위기는 잘 내지 못했다. 오히려 눈이 마주치면 휙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지.

        ​

        하지만, 덕분에 한 가지 얻은 건은 있었다.

        ​

        “마리아, 잠깐 나갔다 올게!”

        ​

        “네, 다녀오세요.”

        ​

        전에는 내가 뭐만 하려 하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요즘은 어지간하면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내가 꼭 마리아의 허락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황궁이고, 내가 집주인 집에 얹혀사는데 나가서 언제 올지 정도는 말해줘야지 싶어 그냥 답해줬었다.

        ​

        이제는 그런 것도 다 사라진 거고.

        ​

        “대주교님 계십니까?”

        ​

        “아, 안에 계십니다.”

        ​

        몇 번 얼굴 봤다고 낯이 익었는지, 사제분께서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셨다. 예배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바오로 대주교가 찾아왔다.

        ​

        “시작부터 거하게 계획을 말아먹으신 분 아닙니까. 이리 보니 반갑군요.”

        ​

        “첫 만남부터 친구들 불러 떳떳하지 못하게 받은 술에 꼴아계시던 대주교님도 며칠 만에 다시 보니 안색이 좋아지셨네.”

        ​

        하하하.

        ​

        허허허.

        ​

        정겹게 인사를 주고받고,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서, 성인식 때는 어디로 가신 겁니까? 그때 저를 만나서 친분을 과시하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

        “황후 폐하께서 부르셔서 자리를 비웠었지.”

        ​

        “황후께서요.”

        ​

        대주교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

        “그것참, 귀찮은 일에 엮이게 되시겠군요.”

        ​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

        “혹시 황후에 대해 아는 거 있어?”

        ​

        그는 이걸 말해도 될까 고민하는지 잠시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내가 아직 그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상기시키며 내 머리를 툭툭 두드리자 그는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

        “아마 짐작하시겠지만, 제가 약간의, 음, 편의를 제공해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

        “편의?”

        ​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제가 설마 인맥 하나 없겠습니까.”

        ​

        “아.”

        ​

        하긴, 권력에 가까운 사람들을 안다는 건 그 자체로 하나의 재산이지. 일이 잘 안 풀릴 때 슬쩍 우회해서 찔러주면 그것만으로도 갑자기 만사가 형통하는 일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했다.

        ​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으니 뭐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

        “그리고 일단 한 번 그렇게 도움을 드리고 나면, 그것 자체가 요인이 되어 종종 그분들께 교구 운영에 도움을 받곤 하지요.”

        ​

        “미사용 술이 그렇게 들어왔었나 보네.”

        ​

        “…….”

        ​

        그는 잠시 딴청을 피웠다.

        ​

        거참, 투명한 사람이다. 그간 해온 일들을 어떻게 숨긴 건지 모르겠네.

        ​

        “아무튼, 원래는 이걸로 고아원이나 급식소를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돈을 다 채우고, 부식과 선물도 꽉꽉 눌러 담고도 남음이 있었단 말입니다.”

        ​

        “…잠깐, 그럼 성당이 이렇게 화려한 건 원래 그런 거라고?”

        ​

        대주교는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 바라보듯 쳐다봤다.

        ​

        “황급십자교단은 그런 거 안 받아도 돈 많습니다. 애초에 이 성당을 짓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얼만데, 겨우 저 한 사람이 돈 좀 받는다고 이 건물의 화려함이 더해지겠습니까?”

        ​

        “어, 그런가?”

        ​

        아니, 그보다 이 말에 더 궁금해졌다.

        ​

        “성당 짓는 데 얼마가 들었는데?”

        ​

        그는 내 귓가에 작게 귓속말했다.

        ​

        “—-―.”

        ​

        “이런 미친.”

        ​

        이 돈이면, 제국 동쪽의 왕국들은 그냥 돈으로 후려쳐서 경제식민지로 만들 수도 있을 정도잖아.

        ​

        어지간한 국가의 연 단위 예산과 맞먹는 수준의 금액에 쇼크를 먹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으니 대주교가 정신 차리라며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

        “아무튼, 중요한 건 고아원과 급식소를 운영하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지요.”

        ​

        “아, 그랬지.”

        ​

        그는 고아원과 급식소를 논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

        “아무튼, 원래 이곳 팔츠성 안에서 이런저런 일 처리를 중개해주며 보답으로 받던 헌금이 요 몇 년간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

        “그게 황후와 관련이 있다는 거야?”

        ​

        “정확히는 황후의 파벌이죠.”

        ​

        그는 종이 한 장을 가져와 만년필을 꺼내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

        “이 원은 팔츠성을, 곳곳에 찍힌 점은 관료 조직을 의미합니다. 실제로는 전부 황궁 근처에 모여있다지만, 대충 알아들으시겠지요?”

        ​

        “내가 쌈박질로 유명하다고 머리가 나쁜 건 아니거든?”

        ​

        “크흠.”

        ​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원 안에 사각형을 하나 그렸다. 그리고 대성당이라는 글자를 써넣고, 몇몇 점에 선을 그어 이었다.

        ​

        “아무튼, 저는 각 부처의 장차관, 혹은 그 아랫급이어도 하여튼 실권이 있는 사람들과 대부분 안면을 트고 있습니다.”

        ​

        “원래 종교인들이 친화력 없으면 못 살아남긴 하지.”

        ​

        “그렇게 쌓은 인맥으로 이런저런 일 처리를 도우며 근근이 헌금을 받고 있었지요. 그런데.”

        ​

        그는 대성당 위에 작은 원을 또 하나 그렸다. 그게 뭘 말하는지는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

        “황후가 관료와 중앙귀족들로 이뤄진 파벌을 데리고 전면에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

        그는 모든 점을 황궁을 향해 이으며 비난조로 불만을 토로했다.

        ​

        “원래 팔츠에서는 여러 사람이 알음알음 저마다의 방식으로 서로 돕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공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

        “흠.”

        ​

        “…아무튼, 그렇습니다.”

        ​

        내가 말없이 빤히 그를 바라보자 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

        “그런데, 황후 파벌이 그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자신들에게 줄을 서는 이들의 용무만을 통과시켜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황제 폐하께서 친람하시는 일에는 감히 그런 짓을 벌이지 못하지만, 이 나라가 폐하의 명령만으로 돌아가는 나라는 아니지 않습니까.”

        ​

        그러니까, 황제가 손대지 못하는 영역을 자신들이 틀어쥐고 멋대로 국정을 주무르고 있다는 건가. 과연, 황제가 자신의 정부 출신임에도 숙청을 입에 담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

        ​

        “이제는 정말 하찮은 일들이 아닌 이상에야 저를 통한다 하더라도 일을 진행시킬 수가 없으니, 자연스레 헌금과 기부금이 확 줄어들더군요. 덕분에 고아원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과 특식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

        마지막에 아름답게 포장했지만, 결국 청탁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뇌물이 줄었다는 뜻이었다.

        ​

        “하, 이거 참.”

        ​

        선제후를 회유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지금 당장 황제가 쓰러진다 하면 황후 태생의 황자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러면 이야기가 또 달랐다.

        ​

        비록 어머니의 휘광을 빌리긴 했더라도, 아무튼 수도를 완전히 틀어쥐고 있는 것도 능력의 일종이라고 볼 필요가 있었다.

        ​

        유일한 변수는 아직 어려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황자 본인이 터무니없이 무능한 것 정도지만, 그것도 다른 후보가 없다면 또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이러니 암살 시도가 끊이질 않던 건가.

        ​

        “다만, 겨우 이 정도였다면 제가 굳이 황후를 귀찮은 사람이라고 묘사하지 않았겠지요.”

        ​

        “응?”

        ​

        바오로 대주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었다.

        ​

        “황후는 저조차 자신의 파벌에 끌어들이려고 하더군요. 자신을 지지하면 자신도 황금십자교의 편의를 봐주겠다면서요.”

        ​

        “…뭐라고 답했지?”

        ​

        바오로 대주교는, 황궁을 상징하는 원에 X자를 그렸다.

        ​

        “당연히, 거절했지요.”

        ​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진절머리냈다.

        ​

        “왜? 그렇게 하면 적어도 헌금은 넉넉하게 받을 텐데.”

        ​

        “세상에, 빌헬름 경,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지요.”

        ​

        그는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

        “추기경에 서임 받지는 못했지만, 저도 나름 교세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팔츠 교구의 대주교입니다. 제 위에는 오직 교황 성하와 주님 외엔 존재할 수 없습니다.”

        ​

        돈 받고 청탁은 잘만 하던 양반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이러니지만, 아무튼 말이야 옳은 말이었다.

        ​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은근히 뒤가 구린 면이 있다고는 하지만(그리고 그게 교리상으로 좀 큰 문제긴 했지만), 적어도 그가 인간적으로 엄청나게 타락한 사람이냐고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

        술을 좀 많이 좋아하고 그걸 위해 뇌물을 받긴 하지만, 적어도 신앙인으로서의 일 또한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

        종교인이 엘리트 중 엘리트로 손꼽히는 시대에 대주교가 될 정도면 이 정도 신념은 있어야 할 거다.

        ​

        그리고, 그의 말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

        “좋아, 안 그래도 도움을 청하러 왔는데, 마침 딱 사람을 잘 찾아온 것 같네.”

        ​

        “…도움이요?”

        ​

        갑자기 대주교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조금 전 황후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

        “아무래도 수도에서 떠나는 계획은 좀 미뤄두고, 다른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

        “우선 말씀은 들어보고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장담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반드시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

        “황후 파벌을 쳐내고 싶지 않아?”

        ​

        “그, 그건 황실과 척지겠다는-!”

        ​

        “폐하께서 내게 제안하신 일이야.”

        ​

        “전 옛날부터 세속의 탐관오리들이 날뛰는 꼴이 보기 싫었습니다.”

        ​

        그는 아주 빠르게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

        -―

        ​

        다음날, 나는 뷔르템부르크 후작저로 향했다.

        ​

        전날 미리 연락을 보내두었기에 곧장 욤과 만날 수 있었다.

        ​

        “후작께서는 아직도 안 돌아오셨나 보네?”

        ​

        “음, 아무래도 이번에 확실해 해결해두고 오실 일이 있다고 하신 지라, 좀 걸릴 것 같습니다.”

        ​

        “흠, 그래?”

        ​

        그럼 곤란한데.

        ​

        내가 이렇게 찾아와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이곳뿐이란 말이지.

        ​

        “혹시, 뭔가 필요한 거라도 있는 겁니까? 돈이라면 곧 상인 길드를 통해 입금될 예정입니다만.”

        ​

        “아니, 그거랑은 관련 없는 이야기긴 한데.”

        ​

        욤에게 이걸 말해도 될까 고민했다.

        ​

        타고타고 올라가다 보면 황후에게 연결될 만큼 큰일이었다. 그만큼 상대의 조직이 크기도 했고. 그런데 괜히 아무에게나 말을 꺼냈다가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었다.

        ​

        하지만, 무턱대고 시간을 끌어도 좋을 게 없다는 것 역시 분명했다.

        ​

        신중한 것도 좋지만, 반대로 보안에 너무 치중해 시간을 끌어도 꼬리가 밟힐 확률이 늘어났다. 적당히 치고 나가야 할 때는 치고 나가 줄 필요가 있었다.

        ​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가 이 일과 관련이 있는지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

        “욤.”

        ​

        “네.”

        ​

        “혹시 후작 각하의 지시에 따라 다른 가문이나 관료들과 협상을 진행해본 적 있어?”

        ​

        “예? 예. 한 3년 전부터 실무를 경험해보라며 이런저런 협상이나 거래를 직접 주도한 적이 있긴 합니다.”

        ​

        이러면, 확실했다.

        ​

        욤 본인은 모를지 몰라도,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 일에 관련되어 있었다. 나는 질문에 앞서 자세를 바로했다.

        ​

        “그럼, 혹시 이 사람들을 만나본 적 있어?”

        ​

        앉은 자리에서 냅킨 위에 이름 몇 개를 적어 건넸다. 그는 냅킨을 받아들고 이름을 살폈다.

        ​

        “전부 일을 하면서 한 번씩 만나본 적 있는 사람들이군요. 다만, 이 이상은 가문의 일이라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가장 바라던 대답이었다.

        ​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해.”

        ​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

        정말로, 이거면 충분했다.

        ​

        애초에 내가 뷔르템부르크 후작가를 찾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

        ‘뷔르템부르크 후작가라. 제게 가장 많이 기부금을 내신 분들이지요. 특히 요 몇 년 사이에 기부금이 엄청 늘어나고 있었는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후작가는, 바오로 대주교 청탁 서비스를 가장 많이 이용하던 가문이었다. 특히 점점 그 횟수가 증가하던 추세였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아예 관계가 끊어졌다고 대주교가 직접 증언했다.

        ​

        하지만, 그 수요가 어디 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요는 분명 황후 파벌에게로 향했을 터.

        ​

        막연히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알고만 있는 것과 명확하게 조사를 시작할 기준점이 있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

        ‘제가 듣기로, 후작께서 종종 울름 남작과 어울리신다고 하더군요.’

        ​

        그리고, 마침 그와 엮인 이들로 울름 남작이 껴있기까지 하다면 더더욱.

        ​

        “좋은 참고가 됐어.”

        ​

        “…벌써 일어나십니까?”

        ​

        “아쉽게도 요즘 좀 바빠서.”

        ​

        떨떠름해 하는 욤과 악수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물론, 뷔르템부르크 후작가가 적이라는 건 아니었다. 바오로 대주교는 물론이고, 마리아도 이곳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강한 곳이라고 할 뿐 황후 파벌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

        뷔르템부르크 후작가는 백도어였다. 엄청나게 크고 복잡하게 얽힌 개미굴의 중심으로 바로 파고들 수 있는.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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