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9

       

         

         

         

        “얼마만에 보는 거지? 6년인가?”

         

        “5년.”

         

        “5년! 와… 5년.”

         

         

        그만큼 세월이 오래되었다는 사실에 래빈은 무상함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를 기다리며 정신없이 살아왔더니 벌써 5년.

         

        그래도 자신이 이룬 텃밭에서 린을, 아니 이씨를 맞이하는데 성공했다는 뿌듯함이 더 컸다.

         

         

        “이씨도 정말 많이 달라졌다. 이렇게 근육질에다 다부진 몸이 될 줄은 몰랐어. 목소리도 더 굵어졌고 남은 건 묘하게 순둥순둥한 그 얼굴 뿐이네?”

         

        “그런가? 잘 모르겠어. 하루하루 벌어서 밥 먹는 것만 신경쓰다보니….”

         

        “에이~ 왜 그래, 너 대단한 녀석이 되었으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래빈은 주위에 눈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도적 길드가 정보의 총본산이긴 하지만 린의 정보는 기밀 중의 기밀에 해당했다.

         

        래빈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정보 등급보다는 자신 외에 린을 아는 사람이 생기는 게 싫었다.

         

         

        “여기 계속 서있기도 뭐하니까 내 사무실로 가자고.”

         

        “너 사무실도 있어?”

         

        “이씨 너보다 나은 건 아니지만 이래봬도 도적 길드의 수장이거든?”

         

         

        자랑스레 걸어나가는 래빈의 뒤에서 루시는 린에게 불만스레 물었다.

         

         

        “린, 왜 린을 이씨라고 부르는 거야?”

         

        “쉿.”

         

         

        다급하게 검지를 세운 린은 래빈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엄청 적어.”

         

        “정말?”

         

        “평민 주제에 성이 있다고 하면서 이름은 말을 안 하니까 이씨라고만 부르는 거야.”

         

        “그렇구나.”

         

         

        내친김에 루시는 더 질문했다.

         

         

        “그러면… 린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야?”

         

        “음, 3명?”

         

        “하나는 나고, 두 명은 누구야?”

         

        “어….”

         

         

        이걸 말해줘야 할까.

         

        긁어부스럼일 것 같아 망설이자 루시의 눈썹이 단번에 치켜올라갔다.

         

         

        “설마 여자야?”

         

         

        여자다.

         

        그냥 그렇다고 하면 되는데 괜히 대답하기 꺼려졌다.

         

        어찌할까 난감해하던 린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명은 애초에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고

         

        최초의 한 명은 이미 자신 따위 잊은 지 오래일 거라고.

         

        진짜라면 린에게는 꽤나 아프고 슬픈 일이었다.

         

         

        “여자들이긴 한데.”

         

        “한데?”

         

        “너무 오래전이라 두 사람 모두 까먹었을거야. 내 이름을 궁금해 한 건 루시 밖에 없었거든.”

         

        “그럼 린을 아는 건 나뿐이라는 거네?”

         

        “…그렇지.”

         

        “기뻐.”

         

         

        루시는 맞잡은 린의 손등을 엄지로 쓸어내렸다.

         

         

        “내가 유일하게 린을 아는 사람이야.”

         

         

        루시의 몸이 그에게 밀착한다.

         

        슬며시 머리를 린의 어깨에 기대려는 순간, 쾌활한 도적이 루시를 방해했다.

         

         

        “자! 여기가 내 사무실!”

         

         

        눈을 부라렸지만 어차피 후드에 가려 래빈에게 보일 일은 없었다.

         

        사무실이라고 했지만 책상은 없었다.

         

        간이 침대 하나에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 몇 개가 고작인 조촐한 이 방을 사무실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편히들 앉으셔.”

         

         

        침대에 걸터앉으며 자리를 권하던 래빈은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걸 보고서 살짝 멈췄다.

         

        시선을 눈치 챈 린이 은근슬쩍 손을 풀려했지만 루시는 되려 깍지를 끼며 더 단단히 했다.

         

        당연히 래빈은 그 행동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내 권유를 뿌리치고서 결국은 용사 파티의 짐꾼이 되었다지?”

         

         

        그래서 래빈도 루시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신경을 긁어주기로 했다.

         

        바로 래빈과 린만 아는 옛날 이야기와 루시가 회피하려고 하는 마왕 토벌 시절 이야기를 무기로 삼아서.

         

         

        “그래놓고 용사 파티에서 제대로 된 취급도 못 받고 다닌 거 같던데.”

         

         

        루시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녀는 아직 래빈이 용사 파티 마지막 후보로 거론될만큼 뛰어난 실력자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가면은 뭐였어? 용사랑 파티원들이 네 얼굴도 보기 싫다든?”

         

         

        장난 같이 말한 내용이 실로 정확한 이유라면 래빈은 뭐라 반응할까.

         

         

        “…….”

         

        “…설마 진짜야?”

         

        “글쎄.”

         

        “어처구니가 없네. 구정물골목에서 널 그렇게 대하던 사람은 없었어. 인재 중의 인재였지!”

         

        “그건 아니야, 너무 치켜세우지 마.”

         

        “하긴 인재인가 아닌가는 나중 문제지.”

         

         

        간단히 넘어갈거면 뭐하러 언급한 거야?

         

        린은 이 화제가 불편했다.

         

        루시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좋은 시절이 아니었기에.

         

        그러나 래빈은 으르렁거리며 그 이름을 꺼냈다.

         

         

        “아르실.”

         

         

        생각지 못한 이름에 축 처지던 루시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 때를 비난할 거라면 용사 파티 전체를 상대로 해야 했다.

         

        왜 여기서 성녀만 콕 집어내는지 궁금했다.

         

         

        “그년은 왜 이씨 너를 괴롭히는데 동참했었지?”

         

        “그건….”

         

         

        내가 일부러 숨겼으니까.

         

        하지만 래빈은 린이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내가 아는 이씨라면 남한테 민폐 끼칠 사람이 아닌데. 심지어 이씨는 어릴 때부터 아르실의 오른팔이었잖아. 그런 녀석을 함부로 대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게다가 그년은 원래부터 널…!”

         

        “너무 흥분했어 래빈.”

         

        “흥분 안하게 생겼냐!”

         

        “성녀님에게는 일부러 가면 쓰고 정체를 숨겼어.”

         

        “어째서? 네가 누군지 알리기만 했으면 네가 그런 취급을 받진 않았을 거야.”

         

         

        언젠가 마법사도 그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다.

         

        그렇지만 래빈, 너는 그러면 안되지.

         

        다 알면서.

         

         

        “내가 이씨라는 걸 밝히면 성녀님은 구정물골목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볼 테니까.”

         

        “…그게 다 누구 탓인데!”

         

        “래빈답지 않게 너무 흥분하네. 그 골목을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잖아.”

         

        “그곳을 좋아해서가 아니야. 그 골목에 함께하던 이들을 잃어서 그렇지!”

         

         

        린도 마찬가지다.

         

        아르실도 그렇겠지.

         

        자의로 쓴 가면은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첫 대면 자리에서 성녀에게 누군지 밝히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이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용사 파티 시작부터 성녀의 마음이 꺾여버리면 곤란했다.

         

         

        “모두가 죽었어. 날 따르던 사람들부터 아르실이 떠나고 그년을 따르던 녀석들까지 모두! 너와 나! 둘 밖에 남지 않았지. 그래서 너랑 꼭 같이 가고 싶었다고. 하지만 내 권유를 걷어차고 들어간 파티에서 받는 취급이 그게 뭐야?!”

         

         

        아까의 여유는 어디갔는지 래빈은 입술을 떨며 분노하고 있었다.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금융도시의 은행까지 털었던 대도둑은 고작 어릴 적 악우가 푸대접 좀 받았다고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사실에 린은 뭉클해야할 지 신경쓰지 말라고 해야할 지 망설여졌다.

         

        아무리 린이라고 해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음식을 준비했는데 이씨 빼놓고 지네들끼리 다 처먹고!”

         

         

        움찔

         

        루시는 제대로 서있을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 귀쟁이는 대놓고 경멸하는 표정이나 짓고!”

         

        “마법사는 그냥 너를 인식도 안하고 있고!”

         

        “아르실 그 멍청한 년은 네가 홀로 붕대 감고 있는데 치유 한 번 안해주고 앉았고!”

         

        “방패기사는 은근히 챙겨주는 척하면서 말로 널 내리깐 다음에 음흉한 우월감이나 느끼고!”

         

        “그 용사라는 년은 입만 험해가지고 너한테 할말 못 할말 다 한 다음에 방패기사한테 가서 아양이나 떨고 있었어!”

         

        “그게 동료를 대하는 태도인가? 구정물골목에서는 아무리 못난 애라도 그렇게 대하지 않았어! 그건 무리로 받아들인 자들이 거짓말을 한거나 다름없어. 무리로 받아들이면서 일원으로 대우해주겠다고 한 다짐에 대한 배신이야!”

         

         

        툭, 하고

         

        루시는 린의 손을 놓았다.

         

        저 나열은 용사 파티가 했던 짓 중에서도 일부.

         

        그런데도 하나하나가 가슴을 후벼판다.

         

        얼마나 뻔뻔하고 못난 자신인지 새삼 알게 된 루시는 이대로 어딘가 숨고만 싶었다.

         

        시선을 내리자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붉은 실이 약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저 실을 엮어내며 히히 웃던 자신이 너무나도 가증스러웠다.

         

        라인폴드에게 아양을 떨었다라.

         

        자신을 싫어하는 속내를 숨기고서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고통스럽게 그녀의 다리를 끊어낸 전 약혼자에게 아양을 떨었다.

         

        사실이었다.

         

        그건 루시가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직접 베어 없애고 싶은 과거였다.

         

        곁에 누가 있어도 신경 쓰지 않고 꽁냥대고 싶어했다.

         

        그게 엘프든, 마법사든, 성녀든, 짐꾼이든.

         

        눈두덩이가 뜨거워졌지만 자신은 눈물 흘릴 자격이 없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린이 왜 자신을 밀어내는지.

         

        자기 눈앞에서 그런 짓거리를 했었으니 엉겨 붙어봤자 어색하고 의심만 가겠지.

         

        이상하다.

         

        울 자격이 없는데 뜨거워진 시야는 흐릿하게 일렁였다.

         

        그때,

         

        린이 나섰다.

         

         

        “배신이라… 너와 나처럼 배신을 당해본 사람도 몇 없겠지.”

         

        “그래, 두 국가가 동시에 뒷골목을 없애겠다고….”

         

        “그리고 ‘우리’ 같은 배신을 당해본 사람도 없을 거야.”

         

         

        린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줬을 때, 루시는 무너질 뻔했다.

         

        참아야 한다.

         

        단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돼.

         

        그가 손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평생 감사히 여겨.

         

         

        “우리?”

         

        “그래, 우리.”

         

         

        마침내 린은 루시의 후드를 뒤로 넘겼다.

         

        붉은 머리칼의 롱 포니테일.

         

        고양이 같은 이목구비에 눈물로 젖어버린 눈가.

         

         

        “용사 루시에나…! 무슨 낯짝으로 이씨랑 같이…!”

         

        “그 사람들은 마왕 토벌에 성공하고 바로 루시의 팔다리를 끊어버렸어. 마지막까지 용사의 죽음을 원하길래 내가 데리고 도망쳤다.”

         

         

        일촉즉발.

         

        래빈은 당장에라도 루시에게 달려들 기세였지만 린이 단호하게 그 앞을 막아섰다.

         

         

        “안 봐도 뻔해. 입 하도 험하게 굴린다 싶더니 그것 때문에 용사 파티한테 뒤통수 당한거지?”

         

        “무슨 소리야 래빈.”

         

         

        앞에 나서면서도 린은 루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을 통해 느껴지는 체온이 어찌나 따스한지.

         

         

        “용사 파티는 우리다. 그 녀석들은 제국의 끄나풀이었어. 나와 루시, 이 두사람만 용사 파티라고. 우리가 용사 파티한테 당한 게 아니라, 용사 파티가 제국에게 당한 거다.”

         

        “…너 정말 이씨 맞아?”

         

         

        대화는 처음으로 돌아갔다.

         

         

        “마르고 허약하던 이씨가 몸도 다부져지고 목소리도 굵어지고… 성격도 바뀌었네?”

         

        “성격까진 딱히….”

         

        “아니.”

         

         

        이번에는 래빈이 그의 말을 잘랐다.

         

         

        “지금까지 대화하는 동안, 내가 어떤 주제를 입에 올려도 네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어. 오히려 평온해 보였지.”

         

         

        뚜벅뚜벅 부츠가 마루바닥을 밟는다.

         

        린의 코앞까지 온 래빈은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거야? 어떤 고통이 널 이렇게 무감각하게 만들었지?”

         

         

        루시는 이해하지 못했다.

         

        린은 원래 이랬다.

         

         

        “지금의 넌 인형 같아.”

         

         

        고통스럽게 씹어뱉은 그 말에 린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꽈악-!

         

        그리고 그걸 느낀 루시는 고개를 떨구며 기어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